‘깨달음(證道)의 뜻을 밝힌다는 뜻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라는 책이 있다.
문헌상 금속활자로 간행된 최초의 책으로 얼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발문을 보면 고려 무인정권의 실세인 최이(?~1249)가 “이 책이 제대로 유통되지 않으니 주자본(鑄字本·금속활자본)으로 판각한다. 기해년(1239년)”이라고 기록했다. 

2015년 11월 남북한 공동발굴단이 개성 만월대에서 찾아낸 고려 금속활자. 만월대 서부건축군 최남단 지역 신봉문터 서쪽 255m 지점에서 출토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책의 목판본만 전해지고 있다. <고금상정예문>이라는 책도 있었다. 나라의 제도와 법규를 정할 때 참고했던 책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1234~1241년 사이)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 28부를 금속활자로 찍었다”고 했다.

그러나 <고금상정예문>은 그저 기록만 존재할 뿐이다. 현전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은 1377년(공민왕 13)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한 <직지심체요절>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1239년)나 <고금상정예문>(1234~1241), 또는 <직지심체요절>(1377년)을 만든 고려인이 누구든 서양에서 처음 금속활자를 발명했다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1397~1468)의 할아버지뻘이었음을 알 수 있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때가 1447년이었으니 말이다.

기존에 딱 2점 뿐이던 고려시대 공인 금속활자. 남한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활자(왼쪽)는 ‘복’자 이고, 북한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갖고 있는 ‘전’자 활자. 남한의 ‘복’자는 1913년 일본인 수집가 아카보시로부터 덕수궁 구 왕궁박물관이 사들인 것이다. 북한의 ‘전‘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 회경전 서쪽 300m 지점에서 수집됐다고 한다.

그러나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로 금속활자를 대량보급한 것과 달리 최초발명국이던 고려의 금속활자는 그 존재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후퇴하고 말았다.
왜 서양에서는 금속활자 선풍이 불었을까.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은 고려였지만 활판인쇄로 실용화한 것은 구텐베르크였다. 구텐베르크 이전의 유럽에서는 수도사가 한 자 한 자 필사해서 10~15일에 겨우 한권의 성경을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구텐베르크가 혜성같이 나타나 같은 책을 수십권. 수백권을 찍어댄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를 찍어낸 지 불과 50여 년 만에 유럽 전역 350개 도시에 1000개 이상의 인쇄소가 생겼다.

그 50년동안 대략 3만종 900만부의 서적이 출간됐으니 그야말로 마법같은 일이었다. 유럽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으로 책이 대량 보급되었고, 종교개혁과 과학혁명, 문예부흥시대가 이어졌다.

개성 만월대 서북지구. 지난 2016년 1월 북한의 4차핵실험과 2월 개성공단 무기한 가동 중단 등으로 2년 9개월간 재개하지 못한 남북한 공동발굴단은 오는 9월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제8차 공동조사 사업을 펼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러나 금속활자의 최초발명국인 고려와 그 뒤를 이은 조선에서 서적은 대중용이 아니었다. 왕실과 사대부 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처럼 몇 부 찍어서 4~5대 사고(史庫)에 보관하는데 그쳤다. 그러니 지식의 확대재생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인 문제도 있었다. 영어 알파벳은 26자로 모든 글자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동양의 공식글자였던 한자는 5만자가 넘는다. 이렇게 많은 글자를 활자로 구현하기는 매우 힘들다. 
고려·조선에서 활자인쇄가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보니 남아있는 금속활자의 수도 거의 없다.
몇 년 전 <남명천화상송증도가>를 찍어냈다는 이른바 ‘증도가자’가 100여점 나왔으나 진위확인 중이다. 그것을 제외하면 그동안 남북한이 각 1점씩 보관해왔다.
남측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복’자와 북측 조선중앙역사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 ‘전’자이다.
‘복’자는 1913년 10월7일 덕수궁 구 왕궁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 아카보시(赤星佐七)로부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2원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아카보시는 개성의 어느 무덤에서 발굴한 것을 사들였다고 한다.
‘전’자는 1956년 개성 만월대 회경전 서쪽 300m 지점에서 수집됐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2015년 11월 남북한 학자들의 개성 만월대 공동조사 때 또 한 점이 발굴됐다.
서부 건축군 최남단 지역의 신봉문터 서쪽 255m 지점에서 금속활자 1점을 찾아낸 것이다. 가로 1.36㎝, 세로 1.3㎝, 높이 0.6㎝에 불과한 활자였기에 육안으로 발견하기 어려웠다. 발굴단이 물채질로 겨우 찾아낸 유물이었다.
이는 남북한이 힘을 합해 이뤄낸 획기적인 발굴성과였다. 이 금속활자는 ‘아름다울 단(전·혹은 아름다운 전)’자 였다. 글자의 뜻 그대로 남북한이 발굴해낸 그야말로 ‘한결같이 아름다운 금속활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출토경위조차 불분명한 기존의 2점과 달리 발굴지가 명확한 금속활자가 아니던가.

고려 태조 왕건의 어진을 봉안한 곳으로 알려진 건물터.

이것은 2007년부터 2015년까지 7차례에 걸쳐 총 400일 동안 남북한 학자들이 건물터 40여동과 유물 1만6500여점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2016년 새해벽두부터 북한의 4차 핵실험과 개성공단 가동 무기한 연기 등 남북관계가 급냉하면서 만월대 공동발굴조사 사업 역시 무기한 중단됐다.

그 사이 만월대를 단독발굴하던 북한 조사단이 금속활자 4점을 추가로 발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찾아낸 글자는 물흐르는 모양의 ‘칙’과 지게미 ‘조’, 이름 ‘명’, 눈밝을 ‘명’자였다.
남북한 학자들이 공동발굴로 찾아낼 수 있었던 고려시대 금속활자 발굴을 놓친 셈이 된 것이다. 실물을 확인할 수 없었던 남한학자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로부터 2년 9개월의 공백기가 흘렀다. 판문점 선언으로 이제 긴 잠에 빠져있던 남북 문화 교류의 기지개를 켤 때가 되었나보다. 최근 남측 역사학자, 문화재청·통일부 관계자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 관게자들이 모여 개성 만월대 공동발굴조사를 재개할 것을 합의했으니 말이다.   
27일부터 12월 27일까지 3개월간 실시되는 이 공동발굴의 고갱이는 역시 고려 금속활자의 확인이다. 남북한이 공동으로 찾아낸 1점과, 북한 단독으로 발굴한 4점의 출토위치가 비슷하다고 한다. 활자의 생김새나 크기, 재질 등이 모두 같다고도 한다. 이곳이 활자를 만들던 이른바 고려시대 ‘주자소’가 아닐까.
만월대 지역은 고려 망국 이후 약 700년 동안 별다른 인위적인 훼손없이 보존되어온 곳이다. 따라서 금속활자를 주조한 이른바 ‘주자소’를 찾아낸다면 ‘고려=금속활자 발명국’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획기적인 발굴성과를 이루는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