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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마릴린 먼로와 플레이보이

앨프레드 킨제이의 <인간 남성의 성행동>, 즉 킨제이 보고서는 1948년 출간 두 달 만에 20만부 이상 팔렸다.

일리노이대 재학생이던 22살 청년 휴 헤프너에게도 충격적이었다. 청도교적인 가정에서 자랐고, 여자친구와도 임신이 두려워 실제 성교를 번번이 포기해야 했던 ‘불타는 청춘’이 아니었던가.

그는 “킨제이는 성에 대해 우리가 위선자라는 것, 그것으로 많은 상처를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고 회고했다. 졸업후 고교 동창생과의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았던 헤프너는 포르노 파티나 외도 같은 성적인 모험주의로 끓어오르는 열망을 풀었다.

그것만으로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다. 헤프너는 자신의 열정과 상상력을 표현할 매체를 창간하기로 결심한다. 주제는 ‘섹스’였다. 이름도 ‘스태그파티(stagparty·남자만을 위한 파티)’라 했다.

어머니의 1000달러와 친척과 친구들의 십시일반을 합해 8000달러의 창간자금을 모았다. 헤프너는 섹시스타 메릴린 먼로가 1949년 달력 제작용으로 누드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카고의 존 봄가스 달력회사를 끈질기게 설득해 600달러를 주고 판권을 샀다. 막판에 ‘스태그’라는 기존잡지가 제호의 저작권을 걸고 소송을 걸자 고심 끝에 ‘플레이보이’로 바꿨다. 언제 망할 지 몰랐기에 ‘발행 호수’도 쓰지 않았다.
1953년 11월 창간호(사진)가 나오자 헤프너는 가판대 앞을 서성거렸다. 판매원이 한눈을 팔면 플레이보이지를 눈에 잘 띄는 자리에 옮겨놓았다. 그러나 기우였다. 창간호 5만4000부가 날개돋힌듯 팔려나갔다.

나이 불문, ‘18~80세 남성들’을 겨냥한 게 주효했다.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본다’는 비판에 시달렸다. 1983년 미국의 종교지는 헤프너를 히틀러·유다와 함께 지옥행 열차를 탈 사람으로 꼽기도 했다.

헤프너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플레이보이>는 1950년대를 풍미한 억압과 순응주의에 맞서 누드사진을 싣는 단순한 방법으로 ‘혁명의 종’을 울렸다”고 주장했다.

이제 이런 논쟁도 전설로 남을 뿐이다. <플레이보이>가 여성누드 사진을 싣지 않기로 했다니까 56년 만의 퇴장이다. 마지막 모델은 패멀라 앤더슨(48)이다. 그런데 그 이유가 못내 씁쓸하다. 더 야한 인터넷 성인물이 넘쳐나는데 누가 <플레이보이>의 누드사진을 감상하겠냐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