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전성기에 경주엔 무려 39곳의 호화저택이 있었다. 이른바 금테두른 저택, 즉 금입택(金入宅)이다.

그 금입택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김유신의 재매정(財買井)이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은 39금입택 명단을 정리하면서 ‘재매정’ 기사에 ‘이곳은 김유신공의 조종(祖宗·종가)’라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재매정’은 집 안에 있는 우물을 근거로 붙인 이름임이 틀림없다.

39개 금입택 중에서 물과 관련된 집이름은 지상택(池上宅), 천택(泉宅), 수망택(水望宅), 곡수택(曲水宅), 정상택(井上宅), 지택(池宅), 정하택(井下宅) 등 여러 곳이다. 특히 우물과 관련된 이름만 3곳(재매정·정상택·정하택)이나 된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의 우물과 관련해서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김유신 가문의 종가터인 재매정택터. 김유신 가문은 부와 명예를 차지한 신라 최고의 명문가였다.|문화재청   

■김유신 가문의 우물맛
때는 바야흐로 백제 의자왕의 공세가 절정을 이루던 645년의 일이다.

김유신 장군은 매리포성(거창)을 공격한 백제군을 무찌르고 개선했다. 그러나 선덕여왕에게 승전보를 알린 뒤 집에 돌아기기도 전에 다시 백제군이 반격했다는 급보를 접한다.

김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한채 병기를 손질하고는 다시 출정길에 나섰다.

“집안(재매정) 사람들이 모두 문밖에서 장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김유신 장군은 대문을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50보를 더 간다음 말을 멈추고는 부하를 시켜 집에서 마실 물을 길어오게 했다. 장군은 그 물을 마신 뒤 ‘우리 집 물은 여전히 예전 맛 그대로구나!’하면서 감탄했다.

“이 모습을 지켜본 군사들이 각오를 다졌다. ‘대장군께서도 집에 들르지도 않고 출전하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군사들이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러워 할 것인가.’”(<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이것이 바로 김유신 장군의 멸사봉공(滅私奉公),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일화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우물 이름을 ‘재매(財買)’라 하고, 그것도 모자라 종가의 택호(宅號)로 삼았을까.

‘재매(財買)’란 글자 그대로 ‘돈으로 샀다’는 의미다. ‘재매정’이라면 ‘돈 주고 사먹어야 할 정도의 맛좋은 우물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재매정’을 종택의 이름으로 삼은 뜻도 분명해진다.

김유신 장군의 우물을 ‘재물을 부르는 보물이나 수호신’ 쯤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짙다.

김유신 장군이 백제군과의 전투에 앞서 맛보고 지나갔다는 재매정택의 우물. 멸사봉공, 선공후사의 상징으로 일컬어졌다.

■재벌 부럽지않은 김유신 가문의 재산
삼한통일의 으뜸공신인 김유신 가문은 엄청난 명예와 부를 쌓았다.

김유신의 증조부가 누구인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김구해이다. 김구해는 532년 금관가야의 나라창고에 있던 보물을 가지고 신라에 항복했다.

이때 신라 법흥왕은 항복한 김구해에게 상등(上等)의 벼슬을 내리고 본국(금관가야) 땅을 식읍으로 내렸다. 자신이 다스리던 금관가야 영토에서 세금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다. 게다가 김유신은 백제·고구려와의 통일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여러차례 포상을 받았다.

예컨대 662년(문무왕 2년) 고구려와의 임진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공로로 본피궁(경주 인왕동 일대로 추정)의 재화와 땅, 노복을 하사받았다.

이때 문무왕의 동생이 김인문과 경주 시내의 노른자 땅을 반반씩 나눴다니 얼마나 엄청난 재산축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1년 뒤인 663년(문무왕 3년) 백제부흥운동을 제압한 공로로 밭 500결(230만평)을 받았다. 백제·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인 668~669년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상급을 받았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계급은 각간이었다. 그런데 김유신은 백제 멸망의 공으로 각간보다 높은 대각간의 지위를 얻었고, 고구려 멸망 직후엔 그보다 더 높은 태대각간의 벼슬을 얻었다.

기존의 17등급 위계보다 두 단계나 더 높은 ‘특특’의 지위를 준 것이다. 문무왕은 통일 후 전국의 말 목장 174곳을 왕실(22곳)과 국가기관(10곳), 개인 등으로 골고루 나눠주었다.

그런데 태대각간 김유신은 개인으로서는 가장 많은 6곳을 받았다.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 조차 5곳에 불과했으니 김유신에 대한 논공행상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받은 상급은 당연히 세습됐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한 김유신이 죽자(673년) 국가차원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문무왕은 조의금으로 비단 1000필과 조 2000섬을 냈다. 또 군악대에서 북치고 피리부는 사람 100명을 보내주었다. 담당부서에 명을 내려 비석을 세우도록 했고 공적과 명예를 기록했다. 김유신의 무덤을 지킬 백성들을 지정했다.

김유신 종가인 재매정택 터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갑옷.|경주시청 제공

■왕족도 질투한 세습재벌 가문
김유신 가문을 향한 신라왕실의 대접은 대를 이어가며 계속됐다.

부인 지소는 남편이 죽은 지(673년) 39년 뒤인 712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된다. 성덕왕은 그런 지소에게 ‘부인의 작호’를 내린 뒤 “해마다 조 1000석을 내린다”는 명을 내린다.

“지금 나라 안팎이 평안하고 임금과 신하가 베개를 높이 베고 근심이 없는 것은 태대각간(김유신)의 덕분입니다. 생각컨대 부인은 그 집안을 잘 다스렸으며 경계하고 훈계함이 서로 어우러져 숨은 공이 많았습니다. 과인은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여 일찍이 하루라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습니다. 해마다 조 1000섬씩 드리겠습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김유신 후손들을 향한 대접도 끔찍했다.
성덕왕(재위 702~737)은 당시 김유신의 손자들인 김윤중·윤문 형제를 총애하고 있었다. 임금의 친족까지 시기 질투했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김유신의 손자 윤중은 성덕왕 때 대아찬(17관등 중 5등)이 되었다. 여러 번 임금의 은혜와 보살핌을 받자 왕의 친척들이 자못 질투했다.”(<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느 한가윗날 성덕왕이 월성의 언덕에 올라 주변 경치를 살펴보며 측근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술기운이 퍼질 무렵 성덕왕은 “김윤중은 이리 가까이 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한 신하가 지적질을 해댔다.

“전하! 왕실의 친인척도 있고, 부를 사람도 많은데 어찌 멀리 앉아 있는 신하(김윤중)를 부르려 하십니까.”

그러나 성덕왕은 단칼에 일축했다.

“지금 과인이 여러분과 무사태평 술자리를 즐기는 것은 다 김윤중의 할아버지(김유신) 덕분이 아닙니까. 과인이 여러분의 간언을 듣고 김유신의 공로를 잊는다면 의리가 아닐 것이오. 그 자손들을 잘 대우하는 게 의리일 것입니다. 윤중은 이리 가까이 오너라.”

그 뿐이 아니었다. 성덕왕은 요즘의 고급 승용차에 해당하는 말 한필을 하사했다. 다른 신하들은 김유신 가문의 손자가 지나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시기 질투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733년(성덕왕 32년) 발해의 침략을 받은 당나라가 신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때 김윤중과 그 아우 윤문은 성덕왕의 명을 받고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여 발해를 쳤다.

■재매정택의 명예를 지킨 노블레스 오블리주
김유신 가문은 이렇듯 왕족조차 시기질투한 신라 최대의 세습재벌이 됐다. 그러나 부와 명예를 누릴만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김유신의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김유신 가문의 명예를 지킨 이는 바로 지소부인이었다.

지소부인이 누구인가. 김유신이 비록 남편이지만, 외삼촌이기도 하다.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가 김춘추(태종무열왕)과 결혼해서 낳은 세째딸이 바로 지소부인이니 말이다.

그러니 지소부인은 문무왕(태종무열왕의 장남)의 누이이기도 하다.

그런 지소부인이었으니 예사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남편이 죽었지만 신라왕가의 딸이자 김유신 가문의 종부로서 ‘충효’의 중심을 꽉 잡는다.

신라 역사를 논할 때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충’의 사례가 바로 지소부인으로부터 나온다. 

김유신 묘.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했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지만 더 엄청난 난관에 봉착했다. 당나라가 한반도 접수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신라는 당나라와의 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672년(문무왕 12년) 고구려 부흥세력과 말갈을 끌어들인 당나라군은 신라군과 접전을 벌였다. 이때 김유신과 지소부인의 둘째 아들인 원술이 등장한다.

원술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려 했다. 그러나 원술의 참모인 담릉은 “후일을 도모하는게 낫다”면서 끝끝내 원술의 출전을 막았다.

신라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했다. 문무왕이 패전의 책임을 논하자 김유신은 “내 아들은 왕명을 욕되게 했으며, 가훈도 저버린 비겁쟁이”라면서 “목을 베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무왕은 “원술에게만 혹형을 내릴 수 없다”면서 사면령을 내렸다. 원술은 부끄럽고도 두려워 감히 아버지를 뵙지 못하고 시골로 달아나 숨었다.

원술은 아버지가 죽은 뒤(673년) 비로소 어머니 지소부인을 찾아왔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원술은 이미 돌아가신 남편에게서 아들 취급을 받지 못했다.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원술은 가슴을 치고 길길이 날뛰면서 통곡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태백산에서 은거한 원술은 675년 매소성(경기 연천 전곡의 대전리 산성으로 추정) 전투에 참전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신라는 이 매소성 대첩으로 당나라를 완전히 몰아냈다. 원술은 아버지의 공로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래도 당나라의 한반도 침략 야욕을 꺾는데 일조했다. 그러나 원술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부모에게 받아들이지 못한 한 때문에 초야에 묻혀 평생을 살았다.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효’보다 ‘충’의 가치를 더 북돋은 지소 부인의 이야기는 당대 신라 사회에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을 것이다.

■원술의 피눈물로 지킨 명문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을 보면 지소부인을 ‘김씨 종가의 재매부인’으로 지칭하는 듯한 내용이 등장한다.   

“김씨 종가의 재매부인(財買夫人)이 죽자 청연(靑淵)의 골짜기에 묻고 재매곡(財買谷)이라 하였다. 매년 봄철에는 그 종가의 남자와 여자들이 재매곡의 남쪽 시냇가에 모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하였다.”

재매부인, 즉 지소부인은 김유신 사후의 가문, 즉 ‘재매정택’의 부와 명예를 지켰던 여인일 가능성이 짙다.

재매정택으로 대표되는 신라의 ‘금입택’은 그저 돈만 좇는 돈귀신이 아니라 공동체의 명예와 가치를 지키는 명문가 노릇도 했을 것이다.

만약 재매정이 문자 그대로 ‘재물을 부르는 우물’로 사용했다면 그저 돈만 좇은 신라판 재벌가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재매정 우물엔 공동체의 가치를 오롯이 지키는 진정한 명문가의 정신이 녹아있다.

최근 재매정터에서 발견된 갑옷이 비록 김유신 장군의 것이 아니라도 반가운 이유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주보돈, '신라 금입택과 재매정택', <신라문화> 제46집, 동국대신라문화연구소, 2015

이기봉, <고대도시 경주의 탄생>, 푸른역사. 2007

이기동, '신라 금입택고', <진단학보> 제45호, 진단학회, 1978

이은석, '신라왕경의 도시계획', <나라문화재연구소 학보> 제66책, 2003 

경주시청, 보도자료 '김유신 장군 고택 재매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비늘갑옷 출토', 2017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