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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아무도 눈치 못챈 세종의 '숨겨진 업적’…그걸 지켜낸 조선의 민초들

“지금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충주에만 있으니 염려스럽습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의 업적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훈민정음 창제와 해시계·물시계·측우기 등 과학기술 장려, 대마도 정벌과 4군6진 개척, 그리고 <농사직설> 편찬 등 손으로 꼽을 수 없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다.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책을 보관할 사고(史庫)를 확충한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사고는 내사고(서울 춘추관)와 외사고(충북 충주) 등 2곳 뿐이었다. 이중 <태조실록>과 <정종실록>, <태종실록> 등이 보관된 곳은 외사고인 충주사고 뿐이었다. 그러니 내내 불안했다. 민가와 섞여있는 사고에 불이라도 나면 끝장이었다. 급기야 1439년(세종 21년) 사헌부가 상소문을 올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사고에서 실록을, 경기전에서 태조 어진을 빼내어 내장산으로 옮기는 모습을 그린 실록 이안도. |전주역사박물관 소장

 

■세종의 숨은 업적
“고려의 사적(史籍)을 포함해서 전해지는 역사책이 적습니다. 여러 곳에 보관하지 못했고, 여러차례 전란을 겪어 잃어버렸습니다. 역사책의 저장에 신경써야 합니다.…지금 사고는 충주에만 있는데, 여염과 섞여있어 염려스럽습니다. 바라건대 각도에 나누어 간직하고 해마다 포쇄(햇볕에 말림)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소서.”
사헌부가 인용한 이가 만고의 역사가 사마천이었다. 사헌부 상소는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한 뒤 ‘명산에 간직하고 인쇄본은 서울에 둔다’고 했다”면서 “실록과 고려의 사적 및 경서, 제자서. 경제조장서 등을 반드시 각지에 보관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이때 사헌부가 ‘사고의 확대 설치’를 포함해서 9가지 계책을 세종에게 올렸는데, 그 중에 딱 한가지, ‘사고’ 건만 가납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세종은 “사고를 확대 설치하는 것만 처리한 뒤에 과인에게 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사헌부의 건의와 세종의 가납으로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 등 2곳에 새롭게 사고가 설치됐다. 시정의 기록을 담당하는 춘추관은 <태조실록> <공정왕(정종)실록> <태종실록>을 4본씩 만들어 한양 궁궐의 춘추관 실록각과 충주·전주·성주사고에 각 1본씩 간직하도록 했다. 
이것이 정확히 153년 뒤 ‘신의 한수’가 될 줄 아무도 몰랐으리라.

 

■세종대왕의 ‘신의 한수’  
사실 사고가 신설된 전주는 특히 의미심장한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초상화)을 모신 경기전에 있었다.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태조의 어진을 무려 6곳의 어용전(임금의 어진을 모신 곳)을 세웠다.
전주 경기전을 포함해서 서울 문소전, 영흥 준원전, 평양 영숭전, 개성 목청전, 경주 집경전, 전주 경기전 등이었다. 한결같이 태조 이성계와 깊은 관련이 있던 곳이었다. 전주 이씨의 본관인 전주는 말할 것도 없겠다. 영흥은 이성계가 태어난 곳이고, 평양·경주·개성은 옛 왕조의 도읍지였다. 특히 개성 목청전터는 태조가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이 있었던 곳이다.

실록과 어진을 처음 파란시킨 내장산 용굴암.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제공

이 대목에서도 북치고 장구치는 세종의 역할이 도드라진다. 원래 세종은 태조의 어진을 모신 곳 중 임금이 친히 태조의 제사를 지내는 개성 목청전과 영흥 준원전 등을 제외한 나머지 진전(眞殿·임금의 어진을 모신 곳)을 모두 혁파할 마음을 갖고 있었다.
왜냐. ‘선왕의 영전을 각 지방에 설치하는 것이 예법이 아니’라고 했던 부왕(태종)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세종실록>) 하지만 선왕이 설치한 건물을 쉽게 혁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세종을 결국 제도와 건축을 정비한 선에서 마무리한다.
1442년(세종 24년) 세종은 비로소 태조의 어진을 모신 6곳에 각각의 이름을 짓고는 전각을 지키는 관리를 2명씩 배치했다. 말하자면 ‘능지기’와 같은 역할의 ‘전지기’를 둔 것이다. 말하자면 능참봉(陵參奉)과 비슷한 처지의 전참봉(殿參奉)이었다. 그런데 세종이 설치한 전지기, 즉 전참봉이 훗날 혁혁한 공을 세울 줄이야.
이 역시 사고의 확대설치에 버금가는 ‘세종 본인도 몰랐을’ 업적일 것이다. 과연 무슨 사연이 있기에 세종의 ‘숨은 업적’ 운운하는 것인가.

 

■실록과 어진을 숨겨라!
일단 <이재난고>와 <혼정편록>, <국조보감> 등을 중심으로 자초지종을 풀어보자. 때는 바야흐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선조 25년) 4월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전국토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이때 전주 경기전을 지키던 참봉 오희길(1556~1623)은 전라감사 이광, 전주부윤 권수 등과 함께 경기전 안에 모셔둔 태조 이성계의 어진과 전주사고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의 피신대책을 논의했다. 오희길은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오희길은 일찍이 정여립을 스승으로 모시며 수학했다. 그런데 정여립이 이이와 성혼을 배척하는 말을 하자 분기탱천했다. 오희길은 ‘절교’를 선언하는 글을 정여립에게 보내고는 발길을 끊었다. 당시 정여립을 따르던 무리는 그런 오희길을 보고, ‘이상한 자 다보겠네. 뭐라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정여립의 난 이후 오희길이 보낸 ‘절교 편지’가 공개되었다. 이 글을 읽어본 선조는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기사(奇士·기이한 선비)다. 벼슬을 하사하겠다”고 칭찬했다. 덕분에 오희길은 경기전 참봉에 제수된 것이다. 그가 경기전 참봉이 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4월16일이었다.
각설하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어진과 실록 등 사고 책의 피신대책을 의논하던 오희길 등은 고심을 거듭했다.
처음에는 그냥 사고의 마루 밑을 파고 실록 등을 묻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방어사 곽영의 한마디 때문에 포기했다.
“경상도 금산현에서 사로잡힌 왜적 두 놈한테서 (성주사고에서 약탈한) 실록 두 장이 나왔다고 한다.”
결국 단 한가지 깊은 산중으로 옮기는 방법 뿐이었다.
사실 오희길의 직분은 태조의 어진을 지키는 ‘경기전’의 진전관이었다. 그러니까 실록을 지키는 일은 오희길의 소관이 아니었다.
“나는 진전관(眞殿官)이니 어진이라면 죽을 각오로 짊어지고 피란할 것입니다. 실록은 사실 내 직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 보관된 실록이 화를 입은게 분명합니다. 마땅히 깊은 산 속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실록을 받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지킨다면 (나에게 벼슬을 내린)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노구를 이끌고 달려온 무명 선비들
실록을 숨길 피란처로 부안 변산과 정읍 내장산을 유력후보로 꼽았는데, 결국 심산유곡인 ‘내장산’을 낙점했다.
실록 피란처를 정하는데는 무인(武人) 김홍무, 수복(경기전의 청소를 담당한 하급직) 한춘 등이 수고했고, 전라도 도사 최철견과 삼례찰방 윤길, 또다른 경기전 참봉 유인도 고생했다.

용굴암으로 올라가는 계단. 왜적을 피해 이렇게 험준한 곳을 찾아 실록과 어진을 피란시켰다. |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제공

그러나 상황은 급박해졌다. 임진왜란 발발 2개월 후인 1592년 6월 왜군이 전주로 통하는 관문인 금산을 점령하고 웅치·이치(전북 완주)에서 접전을 벌였다. 전주는 풍전등화의 신세에 놓였다. 전라감사 이광은 “학행과 지려(智慮)가 뛰어난 유사(儒士) 두 명을 선발해서 태조 어진과 실록을 피란시켜야겠다”고 조바심을 냈다.
유사의 선발은 오희길이 주선했다고 한다. 이때 열일 제쳐두고 달려온 이들이 있으니 전북 태인의 선비인 안의(1529~1596))와 손홍록(1537~1610)이었다. 당시 안의의 나이는 64살이었고, 손홍록은 56살이었다. 두 사람 다 노구를 무릅쓰고 ‘실록과 태조 어진’을 지키러 온 것이다.
6월 하순 두 사람은 경기전 참봉인 오희길과 유인, 그리고 김홍무, 한춘 등과 함께 먼저 실록을 담은 궤짝에서 보자기로 쌓아 옮겼다.
각종 제기(祭器)와 <고려사>, 실록 등의 관리일지인 <형지안> 등까지 50여 바리나 실어날랐다. 책 수로 따지면 실록 830책, <고려사> 등 기타전적이 538책 분량이었다. 7월9일에는 태조의 어진을 정성스럽게 옮겼다. 가동 30여명을 인솔하고 전주로 달려온 안의·손홍록은 실록과 어진의 이안(移安)을 위해 사재를 털어야 했다. 실록과 어진은 처음에는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가 더욱 험절한 곳을 찾아 은적암을 거쳐 비래암으로 다시 이안했다.
내장산 용굴암과 은적암, 비래암은 피신처로서는 제격인 곳들이었다. 용굴암은 지금도 철제계단을 타고 가파른 벽을 올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천험(天險)의 장소이다.
은적암과 비래암의 정확한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은적암의 경우 얼마나 험한지 사다리로 길을 이었다 끊었다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마도 내장산에서도 가장 험준한 골짜기인 금선폭포가 있는 곳이 아닐까 추정된다. 비래암은 용굴암 가는 길에서 오른편으로 길을 틀어 올라가면 암자터 한 곳이 보이는데, 바로 그곳이 비래암터가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안의·손홍록은 내장산으로 옮긴 실록과 어진을  370일동안이나 교대로 숙직을 하며 지켜냈다. 그 두 분 덕택에 조선과 고려의 역사가 살아남았다.  두 사람의 숙직일지가  ‘수직상체일기’로 남아있다.|정읍시 제공

 

■370일간 숙직으로 실록을 지켜낸 무명의 선비들
천신만고 끝에 천험한 곳에 실록과 어진을 모신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황윤석(1729~1791)의 <이재유고>를 보면 숨겨둔 실록과 어진을 밤낮없이 지킨 사람들을 자세하게 거론한다.
“무사 김홍무와 유사 안의·손홍록 등 3명과 내장산 영은사 주지인 승려 희묵, 그리고 근처 마을에서 정재인(呈才人·사당패) 100여 명이 밤낮으로 암자를 떠나지 않고 지켜냈다. 경기전 참봉인 오희길과 유인은 이웃 절에서 돌아가며 지켰다.”
이 가운데 안의와 손홍록의 분투가 특히 눈물겹다. 두 사람은 1592년 6월22일부터 1593년 7월9일까지 무려 1년 18일간 하루도 빠지지않고 숙직을 하면서 내장산에 숨긴 실록과 어진을 지켜냈다. 실록·어진의 이안과 숙직 과정을 기록한 일기형식의 고문서가 바로 안의의 후손이 대대로 소장해온 <임계기사>이다. 이 <임계기사>에 수록된 ‘수직상체일기’를 보면 안의와 손홍록 두 사람이 함께 숙직한 일수는 53일, 안의 혼자 숙직한 일수는 174일, 손홍록 혼자 숙직한 일수는 143일이었다.

계산해보면 안의가 숙직한 날은 총 227일, 손홍록이 숙직한 날은 총 196일이었다. 예컨대 숙직 첫날인 6월23일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용굴암에서 (실록과 어진을) 지키기 시작했다.(在龍窟庵因留始直) 참봉 오희길과 유인은 모두 내려갔다. 안의·손홍록이 함께 숙직했다.(同直安孫)’ 
다음날인 24일부터 7월4일까지는 손홍록이 귀가하고(歸家孫) 안의만 혼자 지켰고(獨直安) 5일에는 손홍록이 안의와 교대한 뒤 11일까지 지킨다. 이렇게 두사람이 교대로 용굴암에서 보초를 서는 동안 참봉 오희길과 유인, 구정려, 좌랑 신흠, 이도길 등이 이따끔씩 찾아와 숙직을 도왔다.
‘수직상체일기’를 보고 있노라면 아무런 대가없이, 아니 사재를 털어가며 실록과 어진을 옮기고. 그것을 하루도 빠짐없이 숙직하며 지켜낸 안의·손홍록의 분투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다.

 

■사재를 털어 실록과 어진을 모시다
두 사람의 실록 및 어진 수호는 내장산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전주의 역사를 기록한 <완산지>과 ‘수직상체일기’에 저간의 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계사년(1593년) 6월 왜적의 세력이 더욱 거세지고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자) ‘태조 어진과 실록을’ 내장산에서 행재소(전란중 임금이 임시로 머물렀던 곳)로 옮겨 오라는 왕명이 있었다. 그리하여 손홍록·안의와 수복 한춘 등은 태조 어진(과 실록)을 모시고….”

태조 어진과 실록을 모셔둔 전주 경기전.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낱 지방의 무명선비였던 두사람이 사재를 털어 어진과 실록을 옮길 말과 식량을 마련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임무를 완수하자 당시 정읍현감이던 유탁과, 충청도 검찰사 겸 이조판서인 이산보(1539~1594)는 한목소리로 안의와 손홍록의 공적을 선조에게 보고했다.
“태인의 유학 안의와 손홍록은 변란 초기 내장산에서 진전과 (실록을) 모셨는데 정정토록 수직(守直)했습니다. 지금 또 자비로 양식과 말을 준비해서 천리길을 호종하여 행재소에 함께 도착했습니다. 그들의 충의가 가상합니다.”
선조는 두 사람에게 별제(別提·장부를 관리하던 정·종 6품의 직책)로 임명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벼슬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며 끝내 고사했다. 대신 ‘나라를 위한 6가지 중흥책’을 감히 선조 임금에게 올렸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인데 조선 8도 중 전라도를 제외한 나머지 7개 도의 백성들이 굶어죽거나 떠돌고 있습니다. 모든 나라의 재정과 군수물자 명나라 군대의 군량미 등을 모두 전라도에서 조달하고 있습니다. 전라도 백성들도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니….”
무능한 임금과 조정 때문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전라도 백성까지도 ‘탈탈 털리게 되었으니 큰 일 났다’고 입바른 소리를 한 뒤 표표히 사라진 것이다.
실록과 어진은 강화도와 평안도 안주를 거쳐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갔다. 이때가 1597년 9월이었으니 실록과 어진은 무려 5년간 전란을 피해 이리저리 옮겨다닌 것이다. 노구를 이끌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어진과 실록의 수직과 이안을 책임진 안의는 결국 병을 얻어 67살의 나이에 숨졌다.(1596년)
손홍록은 무사 김홍무, 수복 한춘·박야금·김순복 등과 함께 실록과 어진의 이안 임무를 끝까지 완수했다.

 

경기전에 모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인 태조 어진.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업주인 태조의 어진을 지키려고 전전긍긍했다. 어진이 전주에 없었다면 실록 또한 온전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사초책을 불태운 못난 사관들
여기서 비교해보자.
임금의 사랑을 듬뿍 받고 호의호식했던 조선의 사관들은 어찌 했던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줄행랑쳤다.
임금을 따르던 명공대신들도 ‘필시 나라가 망할 것’이라 여겨 뿔뿔이 흩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통탄스러운 일이 벌어졌으니 바로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해야 할 사관들(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이 사초책을 불태우고 도망쳤다.(<선조실록> 1592년 6월1일)
그 결과는 끔찍했다. 선조의 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1592년 3월)의 역사를 잃어버린 것이다. 훗날 사대부의 일기와 민간의 야사를 모두 긁어모아 천신만고 끝에 <선조실록>을 편찬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선조실록>은 가장 엉성하고 형편없는 실록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전란이 일어나자 자기만 살겠다고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던져놓고 도망간 사관 4인방은 승승장구하던 조선의 엘리트 관료였다.
하지만 조선의 역사를 지킨 이들이 누구인가. 이름없는 선비와 하급관리, 혹은 지방 관아의 청소일꾼과, 지방무대를 전전한 무명연예인인 사당패 같은 일반백성과 천민들이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잊혀진 영웅들
그러나 이들의 활약상은 정사인 <선조실록> 등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다. <선조실록> 자체가 부실했지만 그보다는 전란이라는 혼란기가 아닌가. 고관대작의 활약상이 아닌 하급관리나 일반백성, 천민들의 이름 따위를 기억해서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헷갈렸을 수도 있다.  
1594년(선조 27년) 5월 26일 <선조실록>을 보라. 판돈녕부사 정곤수가 “경기전 등에 봉안된 어진을 다른 곳으로 옮긴 참봉 두사람 중 한사람만 상을 받았으니 공평치 않다”고 선조에게 아뢴다. 그러자 선조는 “내가 그 내막을 자세히 알지 못하니 담당 관청에서 살피라”고 답한다.
실록과 어진의 피란과 관련한 실록기사가 정사에 등장한 것은 1592년(선조 25년) 7월1일자 <선조수정실록>이다.
“왜병이 전주에 침입했다가 퇴각했다. 전주 경기전에 봉안한 태조 어진을 묘향산에 이안하였다. 당시 전주가 위급해지자 경기전 참봉이 어용을 받들고 바닷길을 통해 의주에 도달하니, 임금이 행궁에서 곡하며 제사지내고 산사에 이안했다.”
<선조수정실록>은 광해군대에 편찬한 <선조실록>이 엉망이라는 판단아래 후대에 재편찬한 것이다. 이때 전란 중에 어진 등을 묘향산에 옮긴 것을 아주 소략하게 정리했음이 틀림없다.

 

■후손들의 눈물겨운 호소
실록을 지킨, 어진을 수호한 무명영웅들의 이름은 그렇게 잊혀졌다.
그 후 170여 년이 지난 1765년(영조 41년) 안의와 손홍록의 후손인 손대익과 안처명이 김원행(1702~1772)을 찾아왔다. 김원행의 <미호집>이 이 상황을 자세하게 썼다.
“손대익과 안처명이 조상인 안의와 손홍록의 사적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 호소했다. ‘두 분은 실록과 어진을 피란시키고 이산보의 추천으로 6품직을 하사받았습니다. 또 쌀 300석을 임금이 임시로 머문 행궁과 의병장들에게 기탁했고, 가문의 장정을 뽑아 의병에 자원입대토록 했습니다 그러나 170년간이나 두 분의 공적은 알려지지 않았고 이제는 완전히 사라질 판입니다.”
후손들의 눈물겨운 호소가 이어진다. 김원행을 찾아온 이유는 딱 한가지였다. 두 분(안의·손홍록)의 공적을 객관적으로 기록해달라는 것이었다.

충청도 검찰사 겸 이조판서인 이산보가 안의·손홍록 선생의 공적을 조정에 알린 내용. 안의·손홍록 선생이 사재를 털어 실록과 어진의 피란을 주도하고 숙직을 서서 지켜냈다고 썼다. 

“보잘것없는 불초 후손들은 두렵습니다. 제발 공(김원행)의 말씀을 빌려 비명(銘)을 남기고 싶습니다.”
김원행은 일기와 상소, 격문 등 안의·손홍록의 사적을 살펴보고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두 공(안의·손홍록)의 여러 글을 살펴보고 미처 듣고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상세히 알게 되었다. 자손으로서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었다. 나의 보잘것없는 문필로 그런 글에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다면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김원행은 “비록 병이 든 노쇠한 몸이지만 두 분의 사적이 근거가 있다는 것을 이 보잘 것없는 문필로 남기고자 한다”고 기록했다. 
안의·손홍록 등 두 후손이 김원행에게 보여준 사적이 바로 실록과 어진의 숙직·피란 과정을 기록한 <임계기사>와 ‘수직상체일기’ 등일 것이다.

 

■살아남은 실록 덕분에 역사를 지켰다
이름없는 민초들이 천신만고 끝에 지켜낸 전주사고 실록은 임진왜란·정유재란 후 평안도 영변부의 객사를 거쳐 강화도(1603년)로 옮겨졌다.
조정은 살아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을 바탕으로 다시 각 왕대의 실록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1606년 새롭게 인쇄된 3부와 교정 인쇄본 1부, 그리고 이 4부의 저본이 된 전주본 등 5부의 실록이 마련됐다. 이 5부의 실록은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 마니산(훗날 강화 정족산으로 이안), 경북 봉화의 태백산, 평북 영변의 묘향산(훗날 무주 적상산으로 이안), 강화 평창의 오대산 사고에 보관했다. 임진왜란 때 살아남은 전주본은 마니산에 보관됐다가 강화 전등산 인근인 정족산으로 옮겼다.
이후에도 조선왕조실록의 팔자는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를 빼닮았는지 기구했다.
춘추관 사고본은 1624년 이괄의 난 때 소실되었다. 묘향산 사고본은 인조 때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전북 무주 적상산에 사고를 설치해 옮겼다. 이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전쟁 전후로 행방이 묘연했는데, 훗날 북한군이 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지금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소장돼있다.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그만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되고 말았다. 그 중 화를 면한 일부가 2006년 환수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실록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서울대 규장각에 있는 실록은 정족산본(전주사고본) 1187책과, 일본에서 일부 환수된 오대산본 74책, 기타 97책 등 총 1358책이다. 국가기록원 부산 서고에는 태백산본 847책이 있고, 북한의 인민대학습당에 적상산본 1667권 823책이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적상산본 3책이 있다.

안의 손홍록 선생의 사적이 담긴 <임계기사>의 겉표지.

 

■조선역사는 공백으로 남을 뻔 했다
돌이켜 보면 모골이 송연하다. 세종대왕의 숨겨진 업적 중 첫번째는 전주와 성주 등에 사고(史庫)를 확충한 것이라 했다. 임진왜란 와중에 다른 3곳의 실록은 모두 불탔지만 전주사고의 실록은 화를 모면했다. 이 어찌 세종대왕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두번째 숨겨진 업적은 선왕의 어진을 지방에 두는 것은 예법이 아니라는 부왕(태종)의 말을 끝내 듣지않고 전주(경기전)에 태조의 어진을 보관한 것이었다. 사실 조선의 임금 입장에서 보면 실록보다는 창업주 태조 이성계의 어진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태조 어진을 모신 경기전의 참봉 오희길은 “어진을 지키는 것이 내 직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록이 바로 그곳에 있었기에 태조 어진을 숨기는 김에 덤으로 실록까지 피신시키게 된 것이다. 만약 전주에 태조의 어진이 없었다면 전주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마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듯 세종대왕의 업적이 천고에 빛날지언정 조선은 물론이고 고려의 역사까지 지켜낸 민초들의 공을 가릴 수 없다.

경기전 안에 설치된 실록각. 세종의 명에 따라 기존의 춘추관(서울), 충주 사고 외에 성주와 전주에도 사고를 마련했다. 임진왜란 때 3곳에 보관된 실록은 모조리 불에 탔지만 전주사고본만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왜냐. 4대 사고(史庫) 중 임진왜란 직전까지 남아있던 춘추관과 성주사고, 충주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됐다. 실록 등을 모두 피란한 전주사고마저도 정유재란 때인 1597년 소실되었다. 만약 임란 초기에 전주사고의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어찌되었을까.
태조 이성계부터(1392년) 명종 때까지(1567년)의 175년의 조선역사는 공백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뿐인가. 조선의 건국 상황은 물론 만고의 성군인 세종의 치세도 그저 전설로 남았을 것이다. 그 뿐인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같은 고려의 역사마저도 사라졌을 것이다.
세종의 숨겨진 업적이 ‘사고의 확충’이라면 그러한 세종의 업적을 지켜주고, 조선의 역사를 살려놓은 이들은 바로 세종대왕이 그토록 ‘불쌍히 여긴’ 백성들이다.
어진과 실록의 피란에 관계한 전라감사 이광과, 전주부윤 권수, 전라도 도사(都事·7품) 최철견, 삼례찰방(6품) 윤길 등도 한몫 해냈다.
그러나 역시 이름없이, 빛도 없이 실록과 어진을 온몸으로 지켜낸 이들은 따로 있다. 포의의 선비 안의와 손홍록, 무사 김홍무와 수복(경기전 심부름꾼) 한춘·박야금·김순복, 승려 희묵, 전참봉(殿參奉·9품) 오희길과 유인, 구정려, 그리고 100여 명의 정재인(呈才人·사당패)들…. 
이 대목에서 안의·손홍록 두 분의 사적을 듣고 ‘이것은 믿을만한 사실’이라고 기록한 김원행의 한마디가 심금을 울린다.
“이 보잘 것 없는 문필로 두 공(안의·손홍록)의 이름을 기록할 수 있다면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는가.”
부끄럽지만 필자가 품고 싶은 옛 선현의 말씀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동희, ‘전주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의 보존과 임진왜란’, <조선왕실과 전주> 도록, 국립전주박물관, 2010
         ‘전주사고와 무주 적상산 사고’, 지역학전문인력양성 자료, 2006
이용찬,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의 초기피난과정-안의 선생의 수직상체일기를 중심으로’, <정읍학> 창간호, 2014
정읍시, <임계기사>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지정 자료. 2011
김기태, ‘조선 사고(史庫)의 역사적 변천에 관한 연구’, <기전문화연구> 제29·30호, 기전문화연구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