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5년 8월 문무왕은 당나라 칙사 유인원과 웅진도독 부여융과 취리산에서 회맹했다.”
<삼국사기>가 기록한 ‘취리산 회맹’ 기사의 시작이다. 기사가 전하는 취리산 회맹의 전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무도한) 백제를 평정했다. 그러나 당나라 소정방이 군사를 돌려 귀국하자 남은 백제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다. 당 고종은 당나라에 끌려간 부여융(백제 의자왕의 아들)에게 “귀국해서 백제의 남은 무리를 다스리며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라”는 명을 내렸다.

이미 4개월전 신라 문무왕에게 계림도독의 관작을 내린 당 고종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다. 결국 665년 8월 당나라를 대표한 유인원의 주도아래 계림도독(문무왕)과 웅진도독(부여융)의 회맹이 이뤄진 것이다.

신라 문무왕, 백제 부여융이 당나라 고종을 대신한 유인원의  주도아래 회맹을 맺은 것으로 추정되는 공주 연미산 항공사진. 그러나 아직까지 정설은 아니다. |공주대박물관 제공  

■탐라와 왜국 사신까지 증인이 된 조약
회맹(會盟)이 무엇인가.

제후의 우두머리가 다른 제후들을 불러 모이게 한 뒤 제물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을 뜻한다.

3자는 흰 말을 잡아 맹세했다. 먼저 하늘과 땅의 신, 강과 골짜기 신에게까지 제사를 지낸 뒤 그 피를 마셨다. 조약문은 당나라 유인궤가 작성했다. 조약문은 먼저 고구려와 손잡고 신라를 괴롭힌 백제를 당나라 황제가 평정했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다음 내용은 좀 심상치 않다.
“백제의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조상의 제사를 잇게 하고 그 옛 땅을 지키게 하려 한다.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고 길이 이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나라의 영원한 번국(제후국)이 되어 복종하라.”
당나라는 한술 더 떴다. 철판에 황금 글씨로 조약문을 새겨넣어 각 나라의 종묘에 대대로 보관하도록 했다. 이것을 ‘금서철권(金書鐵券)’이라 한다.

또 제물의 피를 마신 뒤 제단의 북쪽 땅에 희생과 예물을 묻도록 했다. 회맹을 마친 후에는 신라와 백제 사신은 물론 탐라와 왜의 사신들을 대동하고 중국 본토로 건너가 태산에서 제사를 지냈다. 탐라와 왜의 사신이 ‘취리산 회맹’의 증인을 서게 된 것이다.

 

■요리조리 회맹을 피했던 문무왕의 속셈은
참 이상한 생각이 든다. 665년이면 백제 멸망(660년) 이후 5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새삼스럽지 않은가. 왜 패전국의 대표가 그것도 패전한 지 5년이나 지난 뒤에 승전국의 대표와 동등한 위치에서 1대1 맹약을 맺는다는 것일까.
당나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했던 신라는 이런 말도 안되는 푸대접을 왜 감당해야 했을까. 
사실 당나라는 ‘취리산 회맹’ 1년 6개월 전인 664년(문무왕 4년) 2월에도 신라(문무왕)와 백제(부여융)의 맹약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 신라 문무왕은 각간(17관등 1등) 김인문을 파견했다. 웅령(공주 공산?)에서 펼쳐진 이때의 맹약을 ‘웅령회맹’이라 한다.
문무왕은 훗날(671년) 당나라 총관 설인귀의 협박편지에 답신을 보내면서 당나라가 이미 ‘멸망한’ 백제와의 회맹을 강요한 것에 불만을 쏟아낸다.
“당 황제가 하도 강경하게 간사한 백제와 ‘맹약을 맺으라’ 하기에 웅령에 사람을 보내 제단을 쌓아 서로 맹세했다. 이것은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으나….”
요컨대 문무왕은 본인이 가지않은 이 웅령회맹을 신라의 대신(김인문)과 백제의 부여융의 회담으로 격을 낮추고자 했다. 그러자 당나라는 문무왕의 의도를 간파하고 ‘잔꾀부리지 말고 빨리 정식으로 회맹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1년 6개월뒤에 정식으로 맺은 취리산 회맹(655년)의 배경에는 이런 복잡한 속사정이 담겨 있었다.

취리산 회맹 후보지로 꼽히는 연미산 근접 촬영 사진. 이곳에서는 170㎝ 가량의 석축이 확인됐다. |공주대박물관 제공

 

■신라와 당나라의 밀약, 이면합의
백제정벌을 위한 나·당 연합군이 결성된 것은 648년(신라 진덕여왕 2년)이었다.

백제는 642년(의자왕 2년) 미후성과 대야성 등 신라 서쪽의 40여개 성을 함락시켰다. 존망의 위기에 빠진 신라가 김춘추(훗날 태종무열왕)를 당나라로 급파해서 연합군을 제의했다. 당나라 태종(재위 626~649)은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이 때 당나라와 신라가 모종의 밀약을 맺었다.
648년의 <삼국사기> ‘문무왕조’에는 밀약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국가간 이면합의 같은 민감한 사안을 공식기록으로는 남겨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는 백제·고구려의 서슬이 퍼렇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 밀약은 23년 뒤인 671년 신라와 당나라 관계에 금이 가면서 극적으로 공개된다. 문무왕은 당나라 총관 설인귀의 협박편지에 밀약 내용을 서슴없이 까발린다.
“648년 당시 황제(당 태종)은 신라사신(김춘추)를 만나 ‘신라가 백제·고구려의 사이에서 핍박을 받고 있음을 가엽게 여겨 군대를 보낸다.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겠다’고 했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준다는 약속이 아닌가. 실로 엄청난 밀약, 혹은 이면합의였다.

연미산에서 확인된 석축. 취리산 회맹을 맺은 제단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진덕여왕이 왜 태평송을 당고종에게 바쳤을까 
신라는 ‘당나라의 은혜’에 감읍했다. 650년(진덕여왕 4년) 여왕이 직접 짠 비단에 당나라 황제(고종)를 위한 ‘태평송’을 새겨넣었다. 임금의 특사로 파견된 이는 김법민(훗날 문무왕)이었다. 진덕여왕이 지은 태평송은 당나라를 향한 아첨과 충성으로 가득차 있다.
‘대당(大唐)…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명을 어기는 자 외방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삼황오제 덕을 이루니 이 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우리 당나라의 명을 어기는 외방 오랑캐’가 누구인가. 백제와 고구려가 아닐까. 기막힌 충성맹세다. 당 고종은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태평시를 바친 김법민에게 태부경(재화·저장·무역을 관장)의 벼슬까지 하사했다. 신라로서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백제를 칠수만 있다면 간이라도 빼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는 처음부터 신라를 침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나라의 속셈은 달랐다. 백제땅을 신라에 내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아니 백제를 멸한 이후 내친 김에 신라까지 집어 삼키려 했다.
그 징후는 660년 7월9일 신라의 김유신·김문영이 백제 계백과의 건곤일척 싸움을 끝내고 당나라 군영에 도착했을 때 감지되고 있었다.
당나라 소정방은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며 김문영의 목을 베려 했다. 김유신이 앙앙불락했다.
“아무 죄없이 치욕 당할 수는 없다. (저 무례한) 당나라군과 먼저 결전을 벌인 다음 백제와 맞서 싸우리라.”(<삼국사기> ‘열전·김유신’)
김유신이 도끼를 들고 군문에 서자 머리털이 바싹 섰고, 보검이 허리춤 칼집에서 절로 튀어나왔다. 김유신의 서슬에 놀란 당나라 장수 동보량이 소정방을 만류했다.
“장군, 심상치 않습니다. 신라군이 변란을 일으킬 것 같습니다.”
기가 죽은 소정방이 김문영을 풀어주었다.

 

연미산에서 확인된 인화문 토기

■‘백제군 군복으로 위장해서 당나라군을 칩시다!’
그 뿐이 아니었다.
“당나라군은 백제 멸망 직후 사비(부여)의 언덕에 진영을 설치해 신라를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 문무왕이 군신들을 불러 대책을 물었다.”(<삼국사기> ‘열전·김유신’)
시쳇말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연 것이다. 온갖 강경책이 개진된 중에 다미공이 계책 하나를 제안했다.
“우리 군사들에게 백제군의 옷을 입힙시다. 당나라군이 백제군으로 착각해서 공격하면 (백제군복을 입은) 우리가 당나라군을 무찌를 수 있습니다.”
김유신 등도 “개(신라)는 주인(당나라)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이다. 바로 지금이 물어야 할 때다”라고 문무왕을 재촉한다. 이 소식을 염탐한 소정방은 소스라치게 놀라 신라침공계획을 포기했다. 소정방은 결국 660년(태종 무열왕 7년) 9월3일 백제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 신료 93명, 병졸 2만명을 압송하여 귀국한다. 대신 백제땅은 유인궤 등에게 맡겨 다스리도록 했다.
당 고종은 귀국한 소정방에게 ‘내친 김에 신라를 정복하지 않은 이유가 뭐냐’고 물었다. 소정방의 답변이 매우 인상적이다.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신하는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아버지나 형을 섬기듯 하니, 비록 작지만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처음부터 백제땅을 신라에게 준다는 따위의 이면합의, 즉 밀약을 지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백제땅을 평정한 뒤에는 내친김에 신라마저 도모하고 숙원인 고구려까지 삼킬 야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문무왕의 비명. 문무왕은 당나라와 한편으로는 복종하는 체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공세를 취하는 양면작전을 펴서 결국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쫓아냈다. 

 

■고구려와 백제 부흥군에 막힌 당나라의 야욕
당나라의 야심은 시작부터 암초에 부딪힌다. 당나라는 백제 의자왕에게 항복을 받아낸 후 여세를 몰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리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661년(고구려 보장왕 20년, 신라 문무왕 원년) 8월 소정방이 나선 패강(대동강) 전투와 662년 2월 방효태가 출전한 사수(청천강)전투에서 패함으로써 기세가 꺾였다. 이후 당나라는 4년 여 동안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 당나라로서는 일단 백제 땅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뒤(백제땅)가 튼튼해야 큰 일(고구려 정벌)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백제부흥군의 기세도 상상을 초월했다. 백제는 무왕의 조카인 복신이 승려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의자왕의 아들이면서 왜국에 인질로 잡혀있던 부여풍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백제는 의자왕의 중앙정부가 항복했지만 기본적으로 중앙집권이 아닌 지방분권을 추구했던 나라였다.
근거지에서 암중모색하던 지방세력은 복신과 도침이 부흥군을 조직하자 대거 합세하기 시작했다. 30살의 장군 흑치상지도 합류했다.

특히 백제의 서방을 관할하던 임존성(충남 예산 대흥면~광시면)을 확보하자 10일도 되지 않아 3만명이 모였다.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임존성을 지켜내자 주변의 200여개 성이 호응했다. 사비성에 주둔하던 나·당 연합군은 부흥군에 의해 고립되는 등 곤욕을 치렀다.

 

■신라-당나라, 백제-왜의 국제전 결과는
당나라는 진퇴양난에 빠진다.

실제로 662년 7월 당시 당나라군이 장악한 백제의 고토는 웅진성 정도였다.
당 고종은 유인궤에게 “백제의 당나라군은 신라 문무왕에게 의탁하든지, 그냥 귀국하던지 마음대로 하라”(<자치통감>)는 명을 내린다. 견디다못한 고종이 백제 땅의 직접 통치를 포기할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웅진도독 유인궤는 결사반대했다.
“당나라가 백제땅에 주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고구려를 정벌하기에 앞서 그 심복(백제)을 제압하기 위함이 아닙니까.”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서라도 백제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유인궤의 호소였다. 당나라의 철군계획은 취소되었다.
나당 연합군은 신라에서 웅진도독부로 통하는 보급로를 가로막고 있던 백제부흥군을 격파하면서 가까스로 활로를 찾았다. 663년 6월 백제부흥군을 혼란에 빠뜨린 사건이 터진다. 허울좋은 ‘바지임금’이던 백제의 풍왕이 부흥군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복신을 살해한 것이다. 
663년 8월27일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가 한편이 되고, 백제부흥군과 왜국이 또 한편이 되어 벌인 건곤일척의 국제전이 백강에서 펼쳐진다.

나당연합군은 백제부흥군-왜국 연합군의 전선 400척을 궤멸시키는 등 4차례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백제부흥군의 풍왕은 고구려로 달아났고, 부흥군의 최대거점인 주류성은 함락됐다.

마지막 남은 보루였던 임존성은 한때는 부흥군의 뛰어난 장수였던 흑치상지의 배신으로 무너졌다.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은 3년3개월만에 공식적으로는 막을 내린다.

부여융의 묘지탁본. 백제멸망후 웅진도독이 되어 돌아온 의자왕의 맏아들인 무여융은 웅진도독의 자격으로 취리산 회맹을 맺았지만 신라 문무왕의 기세에 눌려 곧바로 당나라로 돌아갔다. 

 

■홀연히 귀국한 부여융의 정체는
그런데 당나라가 백강전투를 위해 파견한 증원군 속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의자왕이 맏아들이자 패망한 백제의 태자인 부여융(615~682)이었다. 당나라는 왜 부여융을 데려왔을까.
먼저 당나라가 4개월 전인 663년 4월 신라를 계림도독부라 칭하고, 문무왕을 계림도독의 벼슬을 내린 것을 주목해야 한다. 문무왕으로서는 치욕적인 직책이었지만 대놓고 반발할 수 없었다.

문무왕을 계림도독에 임명한 당나라의 속셈은 포로로 잡아간 부여융을 귀국시킴으로써 노골화했다.
사실 당나라가 660년 항복한 의자왕과 왕자들을 모두 압송한 이유가 있었다.

애초부터 당나라인을 웅진도독으로 내세워 백제고토를 직접통치한다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직접통치 전략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 유민들을 더욱 자극하여 부흥운동에 불을 지피는 역효과를 냈다.
혼이 난 당나라는 이런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신라왕에게는 계림도독을, 부여융에게는 웅진도독 자리를 주어 간접지배의 형태를 갖추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당나라의 기미(羈미)정책이다.

기미는 말의 굴레를 뜻하는 기(羈)와 쇠고삐를 뜻하는 미(미)를 합친 말이다. 요컨대 ‘고삐를 느슨하게 잡되 끈은 끊지 않는다’는 정책이다.
원래 당나라는 이민족을 지배할 때 어김없이 이 기미책을 썼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 종국에 가서는 고구려까지 집어삼키려던 당나라의 욕심이 과해 기미책이 아닌 직접지배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의 직접지배 야욕은 신라·고구려·백제의 만만치 않은 힘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던 것이다.

 

자존심에 스크래치난 문무왕  
당나라는 결국 신라를 계림도독부, 백제를 웅진도독부로 나눠 현지 수령(문무왕과 부여융)이 다스리는 ‘기미정책’으로 회귀한 것이다.
당나라가 당초의 밀약(이면합의)대로 백제의 옛 땅을 신라에 내줄 생각이 전혀 없음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것이 바로 664년의 웅령 회맹과 665년의 취리산 회맹의 배경이다.
신라 문무왕은 웅령회맹 때 갖가지 핑계를 대며 임금 본인이 아닌 김인문 등을 보냄으로써 사적인 서약임을 내비쳤다. 그러나 ‘(문무왕이 직접 나오라는) 황제의 칙령’을 거스를 수 없어 울며 겨자먹기로 취리산 회맹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입장바꿔 생각해보라. 신라 문무왕이 얼마나 열 받았겠는가. 부여융은 신라 문무왕과 1대1로 회맹을 맺었지만 문무왕의 서슬에 눌려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구당서> ‘열전·백제조’는 “부여융은 신라를 두려워하여 취리산 회맹을 맺은 그 해(665년) 당나라로 돌아갔다(隆懼新羅 尋歸京師)”고 기록했다.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임존성. 흑치상지의 배신으로 함락되었다. 

 

■적진을 뚫고 당군에 보급품을 전달했으나…
신라가 느끼는 배신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불구대천의 원수인 백제를 평정했다는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다.
661년 6월 태종무열왕이 죽어 국상을 치르고 있는데,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았다.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신라가 좀 도와주어야겠다”고 재촉하는 명령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백제부흥군의 반격에 고전하던 신라였다. 여기에 당나라의 고구려 정벌에 ‘도우미’로 나서야 하는 2중고를 겪었다. 당나라의 요구는 한도 끝도 없었다.
661년(문무왕 원년) 10월 당 고종은 문무왕에게 “평양으로 군량미를 보내라”는 명했다. 평양이라면 적진(고구려)을 뚫어야 하는 험난한 길이 아닌가.

문무왕을 비롯한 신라조정은 “적진을 뚫고 군량을 나르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난감해 했다. 하지만 당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때 김유신(595~673)이 66세 노구를 이끌고 “나라의 일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겠다”고 나섰다. 노장이 앞장서자 김인문, 김양도 등 8명의 장수가 줄줄이 손을 들었다. 이들은 수레 2000여대에 쌀 4000섬과 조 2만2000섬을 싣고 평양으로 출발했다. 신라가 자랑하는 장수 9명이 위험을 무릅쓰고 총출동한, 그야말로 국가의 운명을 건 보급품 수송작전이었다. 그것도 신라군이 아닌 당나라군을 위한….

 

■당군은 호의호식, 신라백성은 초근목피
천신만고 끝에 평양에 도착한 김유신 등은 신라 전역에서 탈탈 털어 조달한 군량미를 당나라군에 전달했다. 그러나 ‘허무개그’였다. 군량을 얻은 소정방이 “군사들이 피곤하다”면서 전투를 그치고 귀국해버린 것이다.(<삼국사기> ‘열전·김유신’)
도리가 없었다. 신라 역시 군사를 돌렸다. 귀국길은 더욱 악전고투였다. 김유신은 고구려 추격군에게 대승을 거뒀지만 피해도 엄청났다. 훗날 문무왕은 신라가 당해야 했던 고초를 신랄하게 고발한다.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먹지 못했는데, 당나라군은 양식이 남아 돌았다. 신라는 계절마다 장기주둔한 당나라 군사의 옷을 만들어주었다. 1만명의 당나라군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을 먹고 입었다. 당나라군의 가죽과 뼈는 비록 중국사람이지만 피와 살은 신라가 길러준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그러나 당나라는 신라를 깔아뭉갰다. 668년 고구려 정벌을 끝내고 당나라로 개선한 대총관 이적(594~669)은 “신라에는 공을 세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떠벌였다. 

 

취리산의 또다른 후보지. 현재 취리산 혹은 치미로 일컬어진다. 공주 생명과학고교 뒷편에 있는 해발 52m의 야산이다.|공주대박물관 제공

■“당나라 이제는 용서할 수 없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9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후에는 신라에게 ‘백제땅은 내준다’는 648년의 신라-당나라간 이면합의가 완전히 깨졌다.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체하면서 한편으로는 백제땅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고구려 부흥운동까지 은밀히 지원한다.
669년(문무왕 9년) 당나라 고종이 노발대발하자 신라가 김흠순과 김양도를 사죄사절단으로 보냈다. 그런데 670년 귀국한 김흠순이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가 그린 땅의 경계지도를 가져왔는데, 경악할만한 내용이었다.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백제인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문무왕은 “신라가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사직을 끊겠다”는 설인귀의 협박편지(671년)에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백제 땅을 주었다 빼앗은 것은 당나라다. 신라 백성들은 희망을 잃었다. 돌아가는 사정을 보니 100년 후에는 신라가 백제에게 먹힐 것이라는 이야기가 시중에 나돈다.”
문무왕의 피를 토하는 ‘토사구팽’ 외침이 계속된다.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신라가) 혹독한 부림을 당하더니 들에 짐승(백제·고구려)이 없어지자 요리사(당나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구나.”
문무왕은 양국관계가 이 지경이 된 모든 책임은 당나라에 있으며, 앞으로 계속 신라를 핍박하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또다른 후보지인 취리산(치미) 토광묘에서 확인된 유구와 유물들. 

 

■마침내 쫓겨난 당나라군
신라는 대놓고 백제 고토와 고토에 주둔하고 있던 당나라군을 공략했다.
671년 6월 장군 죽지가 석성(부여)에서 당나라군 5300명을 참수하고 백제 장수 2명과 당나라 고급장교 6명을 생포했다.
이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신라는 675년(문무왕 15년) 9월 매소성 전투에서 군마 3만여필을 획득하는 대첩을 거두었다. 676년 11월 기벌포(충남 서천 장항) 해전을 전후로 벌인 22번의 전투에서도 모두 승리했다. 이로써 나당전쟁은 신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난다.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한 당나라는 한반도 경영의 야욕을 완전히 버리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648년 진덕여왕 때 맺은 신라-당나라 밀약을 깨고, 웅령 회맹(664년)과 취리산 회맹(665년)으로 한반도를 지배하려 했던 당나라의 야욕은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취리산은 치욕의 장소가 아니다
당나라 칙사의 주재 아래 신라와, 이미 항복한 백제가 맹약을 맺었던 취리산으로 돌아가보자. 당나라의 강요, 그것도 신라와 백제가 아니라 계림도독(신라 문무왕)와 웅진도독(백제 부여융)의 지위에서 맺은 조약이어서 그런가.
치욕의 장소인 탓에 문무왕 이후 누구도 돌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취리산이 어디인지 정설이 아직 없다.
후보지는 두 곳으로 압축된다. 현재 취리산 혹은 치미로 알려진 공주 생명과학고교 뒷편의 산(해발 52.4m)이 첫번째 후보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공산성에서 북서쪽으로 약 1㎞ 내외의 거리에 자리잡고 있는 연미산(해발 239m)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특히 연미산 정상부에서는 제단일 가능성이 있는 높이 170㎝ 가량의 석단이 조사됐다. 의도적인 불다짐의 흔적도 있다. 혹시 회맹단이 아닐까.
취리산 회맹을 두고 외세의 강요로 맺은 조약이라고 폄훼할 필요는 없다.
따지고보면 백제는 660년 항복했다지만 663년 백강전투 때까지 3년3개월을 더 버텼다. 이런 끈질긴 저항이 결국 취리산 회맹의 결과를 이끈 것이다. 백강 전투 이후에도 백제 유민의 독립 열망은 식지 않았다.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유민들은 최소한 671년까지 저항을 이어간다. 역사서를 읽으면 과연 백제가 대체 언제 망한 것이냐는 의문이 새삼스레 든다.

의자왕이 항복한 660년일까. 백강전투에서 부흥군-왜국 연합군이 궤멸당한 663년일까. 아니 취리산 회맹을 맺은 때까지(665년)인가, 혹은 끝까지 저항한 671년일까. 참으로 끈질긴 독립투쟁이었다.
신라 문무왕도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이미 멸망한 백제와, 그것도 계림도독의 입장에서 조약을 맺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굴욕적인 역사를 디딤돌 삼아 와신상담하여 결국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지 않았던가. 취리산 회맹은 결코 문무왕에게도 ‘흑역사’는 아니었다. 최후의 승리자였으니 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이현숙, ‘취리산 유적의 고고학적 검토’, <선사와 고대> 31권 31호. 한국고대학회, 2009
정운룡, ‘취리산 회맹 전후 신라의 대백제 인식’, <선사와 고대> 31권 31호, 한국고대학회, 2009
양종국, ‘웅진도독 부여륭과 신라 문무왕의 회맹지 검토-현재의 취리산과 연미산을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31권 31호, 한국고대학회, 2009
이한상·신영호, ‘취미산 석단과 취리산 축단’, <공주대박물관기요> 창간호, 국립공주박물관 2001
이기동, <백제의 역사>, 백제문화개발연구원 역사문고 24, 주류성, 2006
이행수. ‘신라 문무왕과 삼국통일’, 목포대 석사논문, 2008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