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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마오쩌둥 밴플리트 이회영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지난달 22일 북한에서 중국인 관광객 32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장은 사망자 시신과 부상자를 후송하는 전용 열차에 올라 침통한 표정으로 전송하며 “속죄한다”고 했다. 이를 두고 사망자 중에 뭔가 중요한 인물이 포함된게 아니냐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 특히 중국인 관광객들의 행적이 관심을 끌었다. 교통사고가 한국전쟁에서 숨진 마오쩌둥(毛澤東)의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묻혀있는 평안남도 회창군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 사망자 묘역’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화교권 매체는 “사망자 가운데 마오쩌둥 주석의 차남인 마오안칭(毛岸靑)의 외아들, 즉 마오쩌둥의 손자인 마오신위(毛新宇)가 포함돼 있다”고 보도했다.
마오 주석의 유일한 적손인 마오신위는 2010년 40세의 나이에 중국 최연소 군 장성으로 승진해 중국 군사과학원 전략연구부 부부장 등을 지낸 인물이다.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지만 곧 가짜뉴스로 판명됐다. 당사자인 마오신위가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궁금증은 남는다. 마오 주석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장남 마오안잉은 왜 한반도 북한 땅에 묻혔을까.


■한나라 유방과 소하의 일화

기원전 202년 항우와의 건곤일척 싸움에서 승리한 한나라 고조 유방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은 소하를 개국공신의 으뜸으로 올려놓았다.
소하가 누구인가. 유방이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및 초나라와 힘겨운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소하는 후방인 파촉에 남아 병참기지를 다진 인물이었다. 그런 소하가 공신 중의 우두머리에 오르자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섰다.
“갑옷 입고 창칼을 들어 100차례 이상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후방에서)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은 소하에게 더 많은 상을 내리시다니요?”
그러자 유방은 ‘사냥꾼과 사냥개의 비유’로 이들의 아우성을 일축한다.

1952년 3월19일, 아들 지미가 밴플리트 장군의 60회 생일을 축하하고 있다. 이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사냥에서 짐승이나 토끼를 쫓아가 죽이는 것은 사냥개이다. 그러나 사냥개의 줄을 놓아 짐승이 있는 짐승이 있는 곳을 지시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대들은 단지 짐승을 잡아올 수 있을 뿐이니 공로는 마치 사냥개와 같다. 하지만 소하는 개의 줄을 놓아 목표물을 잡아오게 하였으니 공로는 사냥꾼과 같다.”
후방에서 세금을 거두고 지역을 안정시키고, 잇단 전투로 결손된 병력을 보충해준 소하의 공로를 지칭한 것이다. 그래도 술렁이던 장수들에게 유방은 결정타를 먹인다.
“그대들은 단지 혼자 혹은 많아야 두 세 명이 나를 따랐지만, 소하는 전 가문의 수십명이 모두 나를 따라 참전했다. 이런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그제서야 장수들은 입을 닫고 말았다. 이 무슨 소리인가. 소하는 전쟁이 일어나자 자녀·형제 뿐 아니라 전 가문의 젊은 남자들을 군대에 보냈다.
한고조 유방은 소하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높이 산 것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아들이니까….”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1950년 10월 유엔군이 물밀듯 밀고 올라오자 중국은 고민 끝에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를 외치고 개입을 결정한다. 중국의 개입 명분은 ‘순망즉치한(脣亡則齒寒) 호파즉당위(戶破則堂危)’ 즉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고, 바깥문이 망가지면 안채가 위태롭기 때문에 나선다’는 것이었다. 이때 마오쩌둥 주석의 맏아들 마오안잉(毛岸英)도 참전 지원서를 낸다.

마오 주석은 즉각 허락했다. 중국 공산당 내부에서는 "그럴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마오 가문의 결정을 뒤집지 못했다.

마오 주석은 “안잉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다. 죽음이 무서워 참전을 피한다면 어느 누가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겠느냐”고 했다.
사실 마오 주석에게 안잉은 각별한 아들이었다.

안잉은 두번째 부인이자 혁명동지였던 양카이후이(楊開慧) 사이에서 낳은 맏이였다.

마오쩌둥은 일생을 통틀어 네번 결혼했다. 첫번째는 15살의 나이에 부모의 강권에 못이겨 결혼한 뤄(羅)가문의 딸(애정없는 결혼)이었다. 두번째가 바로 양카이후이였으며, 세번째가 허쯔전(賀子貞), 네번째가 그 유명한 4인방의 한사람인 장칭이었다.

마오쩌둥의 혁명동지이자 두번째 부인인 양카이후이와 두 아들(마오안잉과 마오안칭). 이 가운데 장남인 안잉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미군의 소이탄 폭격에 희생됐다.

 

그 중 양카이후이와의 사랑은 너무도 비극적이었다. 양카이후이의 아버지는 마오쩌둥의 스승인 양창지(楊昌濟)였다. 양창지는 젊은 마오쩌둥이 혁명지도자로 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오쩌둥은 역시 공산당에 입당한 양카후이와 사랑을 나누었으며, 맏아들 안잉(1922~1950)과 둘째아들 안칭(岸靑·1923~2007)을 낳는다.

그러나 양카이후이는 1930년 10월 홍군의 창사(長沙)공격이 실패로 돌아간 직후 국민당 군벌인 허젠(河鍵)에게 잡히고 만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쩌둥과 헤어지겠다는 성명서를 내라”는 허젠 측의 집요한 요구를 완강히 거부한다. 양카이후이는 결국 “남편의 혁명이 속히 성공하기 바란다”는 말만 남기고 어린 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총살 당하고 만다.

그랬으니 마오쩌둥에게 안잉과 안칭은 비명에 간 혁명동지이자 가장 사랑했던 부인의 자식들이었다.

특히 자신을 쏙 빼닮은 맏아들을 향한 사랑은 각별했다. 1937년 소련 유학을 떠난 뒤 국공전쟁이 한창이던 1946년 공산당의 거점이었던 옌안(延安)으로 돌아온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에서 소련 군장을 다 떼어버리고 오래된 면옷을 입힌 뒤 “일반병사와 똑같은 식사를 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러면서 “노동대학에서 공부하라”면서 농촌으로 보냈다.
“넌 시골사람들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함께 노동하라. 황무지를 개간해서 수확을 거두게 되면 돌아오너라. 그러면 옌안대학에 다시 들어가라. 괜찮지?”
안잉은 시골에서 노새를 끌고 인분 주기, 쟁기 갈기, 당파기, 파종하기 등 농삿일을 배웠다.

그 해 하반기 농사일을 다 끝내고 옌안에 돌아온 안잉을 본 마오 주석은 웃음을 참지못했다.

수건을 머리에 쓰고, 땀이 밴 회색빛 농민복에 까무잡잡하게 그을린 팔과 새까많게 탄 얼굴 등 영락없는 산시성(陝西省) 촌농부가 된 아들이 기특했기 때문이었다.

피망울로 굳어진 손을 꼭 잡으며 아버지가 한마디 했다.
“장하다! 흰 뚱보가 검은 뚱보가 됐구나! 이것이 바로 노동대학을 졸업했다는 졸업증이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제임스(지미)의 실종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

마오쩌둥· 마오안잉 부자의 즐거운 한때.

■미군의 소이탄 세례에... 
그로부터 불과 4년 뒤 그런 아들을 또다시 전쟁터(한국전쟁)로 내보낸 것이었다. 당시 안잉은 베이징 기계 총공장의 총지부 부서기를 맡고 있었다. 게다가 결혼한지 1년 밖에 안된 신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펑더화이(彭德懷) 지원군(중국군)사령관에 인계하면서 “전쟁에 직접 참전할 수 있도록 조치하라”고 부탁했다. 안잉도 보병지휘관으로 직접 전선에서 싸우겠다며 보병지휘관의 직함을 원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안잉을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배속시켰다. 주석의 아들을 차마 전선에 내보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려 그것이 마오안잉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화가 됐다.
1950년 11월 25일 미 B-26폭격기가 소이탄 세례를 퍼부었다. 펑더화이 사령관의 막사에 있었던 안잉은 순식간에 숯덩이 시신으로 발견됐다. 설이 난무한다.

계란복음밥을 요리하다가 피어난 연기 때문에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중요한 서류정리를 하다가, 혹은 밤샘작업 후에 곯아 떨어지는 바람에 화를 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중국 지도부는 차마 안잉의 죽음을 마오쩌둥 주석에게 알리지 못했다. 두 달 여 뒤 죄책감에 사로 잡혀있던 팽더화이가 전황을 보고하러 베이징엔 온 김에 마오 주석에게 용서를 구했다.
“안잉을 보호하지 못한 것은 제 탓입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 마오안잉은 미군의 소이탄 폭격세례에 전사하고 만다.

 

■“그 놈은 마오쩌둥 아들이니까...”
사실 마오 주석은 이 때 처음 아들의 죽음을 알고 큰 충격에 빠졌다.
"무표정하게 눈을 껌뻑껍뻑하더니 시선을 테이블 위의 담배케이스로 옮겼다. 담배를 집으려 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마오쩌둥의 눈가는 어느 덧 물기가 촉촉해졌다."
두번째 담배를 피우고 난 마오쩌둥은 가슴이 터지도록 큰 한숨을 쉬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놈은 마오쩌둥의 아들이니까….”
장남의 시신 송환문제가 논의되자 마오주석은 딱 잘라 말했다.
“중국 인민의 의리를 말해주는 표본입니다. 그냥 조선반도(한반도)에 두십시요.”
그리고는 이렇게 공식발표했다.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희생없이는 승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보통사람들 중에도 자기 자식이 혁명을 위해 피를 뿌리고 희생된 이가 아주 많습니다.”
아버지를 빼닮아 총명하고 재기발랄했던 28살 청년은 이렇게 이국의 전쟁터에서 목숨을 바쳤다. 신중국을 건설한 주석의 맏아들인데도…. 

만약 안잉이 살아있었다면 마오 주석의 후계자가 되어 중국을 다스릴 수도 있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러고보면 마오안잉의 죽음은 중국과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은 셈이 된다.

 

■밴플리트 장군 아들의 실종

1952년 4월4일 오전 10시30분이었다. 제임스 에베레스트 제5공군 사령관(1892~1992)이 밴플리트 미8군사령관을 찾았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떨리는 목소리로 알려주기를….
“지미(밴플리트의 아들)가 새벽 야간임무수행을 나갔는데, 아직 귀환하지 않았다는군요.”
미귀환이라? 그렇다면 실종이라는 얘기인가? 무슨 소리인가.

4월4일 새벽 1시5분, 미 공군 중위인 지미는 승무원인 존 맥칼리스터 중위, 랄프 펠프스 일병 등과 함께 출격했다. 암호명은 ‘핀테일 26’. B-26 폭격기로 압록강 남쪽 50마일 지점에 있는 순천을 ‘정찰폭격’하라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군의 주보급로를 분쇄하는 이른바 ‘교살작전’, 즉 ‘적의 목을 졸라 숨통을 끊는’ 작전의 일환이었다. 한마디로 융단폭격으로 철도와 도로를 철저히 파괴하는 작전이었다. 지미의 출격은 4번째였지만 적지 영공에 단독으로 투입되는 비행임무로는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비행기는 기지로 귀환하지 않았다. 제5공군은 서울 북쪽 한반도 회랑지대를 중심으로 수색작전을 펼쳤다. 지미의 항공기는 아마도 평양 남쪽 상공을 비행하다 해주 섬이나 서울 북서쪽 연안에 추락한 것으로 판단됐다, 아버지는 레이더 계기판에서 항공기 추락으로 추정되는 징조를 포착하자 몹시 초조한 모습으로 그 결과를 기다렸다. 하지만 항공기 잔해나 폭발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무런 성과없이 날이 저물자 밴 플리트는 부인 헬린 등 본토의 가족에게 보내는 통지문을 준비했다.
“나는 전투중 실종된 지미가 곧 발견되어 안전하게 우리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있소. ~서울 북서쪽 진남포와 해주 사이에서 추락한 것으로 판단되오. 이런 상황에서 구출된 경우가 많소. ~공군은 수색작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소. ~부디 당신도 의연하게 버텨주기 바라오.”

 

밴플리트 장군의 아들 제임스(지미)의 실종사실을 보도한 신문기사.

■“모든 부모들의 심정은 다 같을 겁니다.” 

지미의 시신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참모들이 ‘수색작전을 펴서 시신을 찾자고 건의했다.

하지만 밴플리트는 “다른 작전이 내 아들을 찾는 것 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다. 집무실 벽에 걸린 한반도 지도에서 서울 북서쪽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일이 많았다. 300통이 넘는 위로편지가 사령부에 쇄도했다. 밴 플리트는 이 중 200여통의 편지에 손수 답장을 보냈다. 가망이 사라지자 밴 플리트는 부활절을 기해 한국전에서 실종된 모든 부모들에게 위로전문을 보낸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아들이 공군 보다는 육군 보병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들 지미는 '육군 체질'이 아니라면서 공군을 택했다. 마침내 창공을 나는 꿈을 이룬 지미는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참전을 자원했다.

아버지는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지미는 참전명령을 받자 어머니 헬렌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버님은 모든 사람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고 있읍니다.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됐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대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1952년 3월19일 지미는 아버지의 60세 생신을 축하하려고, 아버지를 찾아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울 북쪽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나갔다. 부자의 마지막 나들이가 됐다.

그리고 4월2일, 밴 플래트 장군은 아들과 전화통화를 했다.
“아버지, 제가 북한 지역으로 출격할 겁니다.”
그것이 부자간 마지막 대화가 되었다.

 

■한국전에 참전한 지도층 인사

비단 밴 플리트 뿐이 아니었다. 그 밖의 많은 지도층 자식들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모두 합해 미군 현역 장성(將星)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이 가운데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2차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원수의 아들 존 소령은 미3사단 대대장으로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다.
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아들 샘 대위는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유엔군총사령관 클라크 장군의 아들 빌 대위는 미9군단장 무어 장군의 부관이었다. 그러나 일선 소총 중대장으로 자원하여 ‘단장의 능선’ 전투 등에서 부상을 입고 소령으로 진급하였다. 하지만 빌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끝내 사망하고 만다. 미 해병 제1항공 사단장인 해리스 소장의 아들인 해리스 해병 소령도 장진호 철수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밴플리트 장군(왼쪽) 등 미군수뇌부가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한국전쟁에 미군 현역 장성(將星) 아들 142명이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반굴, 관창, 원술...

우리 역사에는 없을까. 반굴과 관창, 원술이 있다.

660년 김유신 장군의 동생인 흠순에게 반굴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660년 나당연합군은 계백 장군이 이끄는 백제군과 황산에서 싸워 4전 전패하는 등 고전했다. 그러자 김흠순은 아들 반굴에게 말했다.
“신하노릇 하자면 충(忠)만한 게 없고, 자식노릇하자면 효(孝)만한 게 없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치면 충효를 다하는 것이다.”
반굴은 아버지의 말을 듣고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도 아버지의 독려를 가슴 깊이 새긴채 적진에 뛰어들어 백제군과 싸우다 중과부적으로 잡혔다.
계백장군이 어린 그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돌려보내며 장탄식했다.
“신라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이렇게 어린 소년들이 있는데, 하물며 장년병사들이야!”
목숨을 보전한채 돌아온 관창은 우물물을 마신 뒤 또 다시 출전했다. 계백 장군은 할 수 없이 그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어 보냈다. 아버지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붙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의 얼굴과 눈이 살아 있는 것 같다. 능히 왕실의 일에 죽었으니 후회가 없다.”
고전하던 신라군은 반굴과 관창의 용기를 보고는 백제군을 크게 격파했다.
다음은 원술이다. 원술은 김유신 장군과 지소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아들이었다.

672년 김유신은 전쟁에서 패전하고 살아 돌아온 아들 원술에게 "왕명을 욕되게 했고, 가문의 수치가 되었다"면서 "당장 저놈의 목을 베야 한다"고 앙앙불락했다.

이회영 일가 6형제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망명계획을 짜던 모습을 그린 그림.

임금(문무왕)이 겨우 뜯어말리면서 원술은 겨우 목숨을 보전했다. 그러나 원술에게는 살아남은게 수치였다. 원술은 부끄럽고 두려워 감히 부모님을 뵙지 못했다. 김유신이 죽은 뒤에야 원술은 어머니를 찾았지만 "아들 구실을 못한 자의 어미가 될 수 없다"는 어머니의 꾸지람을 듣고 돌아서야 했다.

원술이 통곡하며 가슴을 두드리고 땅을 구르면서 차마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부인은 끝내 보지 아니하였다. 원술은 4년 뒤 당나라를 한반도 밖으로 내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매소성 전투에 나가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부모에게 버림 받은 자가 무슨 상이냐”며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한 세상을 마쳤다. 

 

■6형제 독립투사 이회영 일가 

삼국시대까지 갈 것도 없다.

일제 강점기에 전 재산을 털어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회영 일가 6형제도 보기드문 가문이었다.

고려와 조선 양조에서 대대로 고관대작을 지낸 이회영 형제들은 일제 치하에서 후작, 백작, 남작 소리를 들으며 떵떵 거릴 수도 있었다. 두둑한 은사금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회영 일가는 일제의 회유를 뿌리치고 전 재산을 팔아 40만원을 마련한 뒤 60여 명의 식솔을 데리고 한만 국경을 넘었다. 40만원은 지금 가치로 600억~2000억원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배부른 노예’ 보다는 ‘배고픈 투사’로 가문의 영광을 빛낸 것이다.
다시 거울을 나에게 비춰본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까.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한번 스스로의 가슴에 거울을 비춰보기 바란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