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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박제가, '조선은 똥덩어리'라 셀프디스한 까닭

실사구시, 이용후생의 실학자 초정 박제가는 무던히도 '중국타령'을 해댔습니다. 그의 <북학의>에는 중국을 배우자는 뜻의 '학중국(學中國)'이라는 표현이 20번도 더 나옵니다. 박제가가 말하는 중국이란 당시 조선 사대부가 오랑캐라 폄훼했던 '청나라'였습니다. 박제가는 대체 왜 중국, 즉 청나라의 문물을 배우자고 노래를 불렀을까요. 반면 박제가는 조선을 똥투성이의 더럽고 지저분한 나라라 손가락질했습니다.  박제가, 그 분은 왜 그토록 자신이 태어난 조선이라는 나라를 '셀프디스'했을까요. 그가 조선의 버팀목이라 하는 사대부를 왜 그토록 '조선의 좀벌레'라 비난했을까요. 박제가는 아예 조선말을 금하고 중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해야 한다는 망언에 가까운 주장을 폅니다. 왜 그는 그토록 중국어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자고 주장했을까요. 박제가가 조선을 똥덩어리라 셀프디스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68회 이야기입니다.       

 

 

“너무 더러워 입에도 댈 수 없는 음식이 바로 장(醬)이다. 콩을 씻지도 않아 좀이 슬고 모래가 섞여 있다. 마치 마시는 우물물에 똥을 던지는 행위가 같다.”
북학파로 유명한 초정 박제가(1750~1805)가 던진 ‘돌직구’다. 그 뿐인가.
“삶은 콩을 맨발로 밟아대는데 온몸의 땀이 발 밑으로 떨어진다. 장에서 종종 손톱이나 몸의 털이 발견된다. 구역질이 난다.”
사실 당대 ‘중국의 옷과 일본의 주택, 그리고 조선의 장’은 ‘동양삼절(三絶)’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제가는 “대체 무엇이 중국보다 낫다는 것이냐”면서 조선의 자랑인 장(醬)을 똥 취급하면서 “구역질 날 정도”라고 폄훼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있다.
“한양에서는 날마다 뜰 한귀퉁이나 길거리에 똥·오줌을 쏟아버린다. 그래서 우물물이 모두 짜다. 시냇가 다리나 돌로 쌓은 제방에는 인분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디스’로 이런 ‘디스’가 없다. 그런데 과장이 아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당대 조선의 현실을 직설어법으로 폄훼한다.

초정 박제가를 그린 초상화. 남과의 토론에서 절대 지지않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성품의 소유자였다.


■까칠한 박제가의 직설화법
까칠한 그의 성격 탓도 물론 있다. 후배이자 동료인 성해응(1760~1839)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제가는 뛰어난 재능을 자부했다. 말을 꺼내면 바람이 일었다. 자신을 힐난하는 자를 만나면 기어코 꺾으려 했다. 그런 탓에 쌓인 비방이 크고 요란했다.”
하기야 박제가 스스로도 “날 믿지 못하는 자들과 여러번 논쟁했는데 날 비방하는 자가 많았다”고 토로했으니까….
그런 직설적인 박제가가 바라본 18세기 조선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한심한 나라였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다.   
<북학의>(돌베개)를 완역한 안대회 교수(성균관대)에 따르면 그 ‘중국에서 배우자(學中國)’이라는 말이 20번 쯤 나온단다. 
예를 들어 박제가는 “중국은 똥을 황금으로 여겨 모두 거름으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니 ‘중국에서 배우라’는 것이다. “100만섬의 분뇨를 버리는 것은 곡식 100만섬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서…. 그 뿐인가.

 

■‘중국처럼’ 타령
“중국 백성들은 비단옷에 담요에서 잠을 잔다. 우리 시골 농부들은 무명옷 한벌도 얻어입지 못한다. 남자나 여자나 멍석깔고 잔다.”
그는 “조선사람들은 10살이 넘도록 벌거숭이로 다니고 도시여자들마저 맨발로 다닌다”면서 “중국 사람을 보라”고 한다.
“중국은 변방 여성들까지 분단장하고 수놓은 가죽신을 신는다.”
박제가의 ‘중국처럼’ 타령은 끝을 모르고 이어진다.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
“중국처럼 벽돌로 성(城)을 쌓아야 한다. 무한정으로 벽돌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반하기도 가공도 어려운 돌성(석성)은 버려야 한다.”
박제가는 이어 “쓸수록 뾰족해지는 중국붓과 쓸수록 보물이 되는 중국 먹, 그리고 두가닥 실이면 충분한 중국 서책을 본받아야 한다고 목청을 돋웠다.
심지어는 조선의 도자기 기술까지 형편없는 것으로 깎아내렸다. “(3000년 전 시대인) 중국의 하·상·주 시대에도 팔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조잡하다”면서…. 또 ‘중국처럼’ 도랑과 하천을 준설하고, ‘중국처럼’ 가축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하며, 특히나 ‘중국처럼’ 소도살을 금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천공개물. 명 말에서 청 초의 송응성이 지은 산업 기술 서적이다. 박제가가 <북학의>를 쓰면서 영향받은 책이다.

 

■나라의 좀벌레들
박제가는 왜 이렇게 ‘중국에서 배우자’고 타령했을까. 박제가가 바라본 조선은 곧 망할 수밖에 없는 가난하고 폐쇄적인 나라였다.
답답한 나머지 다소간 험악한 표현으로 당대의 조선을 ‘디스’한 것이다. 철저한 자기부정으로 조선의 허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중국을 상징으로 하는 선진문물의 도입을 재촉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조선의 버팀목이라는 사대부(선비 혹은 유생)는 ‘우물안 개구리’이자 ‘나라의 좀벌레’이며, ‘반드시 도태시켜야 할 부류’였다. 그는 ‘지금 당장’ 이 자들을 확 바꾸지 않으면 조선이라는 나라와 백성은 무너지고 만다고 보았다.
“국가의 폐단은 가난인데, 나라의 좀벌레들인 사대부만 번성하고 놀고먹는 자들만 늘고 있다. 이들이 천하를 야만족이라 무시하면서 자신들만 중화(中華)라고 떠들고 있다.”
박제가는 이런 자들보다는 차라리 서양인들을 기용하라는 혁명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즉 “기하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기술에 능한 서양인들을 관상감에 ‘영입’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관상감은 천문·지리·책력·측후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푸른 눈의 서양인을 관리로 채용한다? 지금의 관점에서도 상당히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사고임을 알 수 있다.

 

■우물론

그는 이어 뱃길을 열어 통상하고 천하의 도서(책)들이 들어오면 고루하기 짝이 없는 선비들의 좁디좁은 사고가 절로 무너진다고 생각했다. ‘우물론’을 제기하면서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기도 했다.
“재물은 우물이다. 우물에서 물을 퍼내면 물이 가득 차지만 길어내지 않으면 물이 말라버린다.”
소비의 미덕을 이토록 간결한 비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의 우물론은 계속된다.
“비단옷을 입지 않으니 비단짜는 사람이 없고, 정교한 도자기를 숭상하지 않으니 나라에 공장과 도공, 풀무쟁이의 할 일이 없어졌다. 농업이 황혜하니 농사방법이 형편 없고, 상업을 박대하니 상업 자체도 실종됐다. 사농공상 백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곤궁하게 살기 때문에….”
박제가가 주장한 요체는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영위하는 ‘이용(利用)’과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후생(厚生)’이었다.

이용후생을 주장한 박제가는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박제가가 그린 <목우도>

 

■조선의 왕안석
박제가의 사상은 당대 조선사회에 큰 충격파를 안겼다. 박제가의 <북학의>는 조선의 부국강병과 선진문물의 수용, 이용후생, 기술문명의 향상을 강조하는 사히사상의 모델이 됐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이용후생을 담당할 이용감을 설치하자”고 주장했다. 박제가의 제안을 정부기구 설립 제안으로 구체화 한 것이다.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1789~?)는 “초정 박제가의 <북학의>를 헐뜯을 수 없다”고 동조했고, 서유구와 이규경 등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대 조선은 아직 박제가의 개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것이 문제였다.
박제가 스스로도, 또한 그를 무진장 아꼈던 정조 임금도 그것을 알았다. 그랬으니 정조는 초정을 ‘왕안석(王安石)’에 비유했다. 왕안석이 누구인가.
왕안석은 소나라 시절 과감한 개혁을 꾀하다가 보수파의 반발로 끝내 실패하고 말았던 미완의 개혁가다. 중국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사상가였지만 보수파에 의해 소인배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정조 임금 조차 박제가의 개혁론이 왕안석의 그것에 견줄만큼 위대했으나 너무 급진적이어서 당시로서는 좌절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던 것이다.

 

■거짓말 쟁이 박제가
사실 그가 연행 후 귀국하자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그를 찾아왔던 것 같다.
“북경에서 돌아왔더니 나라 안 인사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와 ‘저들(중국)의 풍속을 알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말하자 모두들 망연자실했다. 내가 오랑캐 편을 든다는 눈치였다.”
이 대목에서 박제가의 장탄식이 하늘에 닿는다.
“아. 저들이 우리나라 학문을 이끌고 백성을 다스릴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저렇게 완고하니 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않는 오늘날의 현실이 이상할 것이 없구나.”
아마도 걸핏하면 “중국을 배우라”고 떠드는 박제가를 꼴사납게 여기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스스로도 그걸 알았다. 사대부의 눈에는 박제가가 보았던 중국은 청나라 오랑캐일 뿐이었으니까…. 그들은 명실상부한 중화(中華)는 조선이라고 여겼으니까….   
“날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이들도 나를 비방하는 자의 말을 믿는다. 내가 ‘중국의 풍속이 이러저러 해서 너무나 좋다’고 하면 그들이 기대했던 말이 아니라 매우 실망한다. 나를 믿지 않는다.”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조차 역관의 말을 믿고, 정작 박제가의 말은 믿지 않았단다. “하도 진짜냐. 거짓이 아니냐”고 묻기에 답답한 나머지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했단다. “그래요. 내가 내가 거짓말을 했구려.”

 

이용후생을 주장한 박제가는 "중국처럼 수레를 만들어야 한다. 수레가 없으니 주택가격은 물론 나막신가 짚신값도 오르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박제가의 오버, ‘중국어공용론’

이랬으니 가뜩이나 직선적인 성격의 박제가가 얼마나 조바심을 냈을까. 그런 탓인지 <북학의>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논란을 일으킬만한 대목이 있다.
바로 박제가가 주장한 이른바 ‘중국어 공용론’이다. 오죽했으면 1955년 북한학자 홍희유·강석준이 번역본을 펴낼 때 이 ‘중국어’조를 제외시켰을까.
사실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을 읽으면 좀 당혹스럽다. 박제가는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라고 전제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중국어는 ‘天’을 그냥 ‘천(天·톈)’이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굳이 ‘하늘 천’이라 한다. 이 무슨 장벽이란 말인가.”
같은 북학파인 이희경(1745~?)의 <설수외사(雪岫外史)>를 보면 박제가의 주장을 뒤받침하는 내용이 나온다.
“글자는 말의 근본이다. 한데 조선은 글자를 말로 쓰지 않고 따로 말을 만들었다. 예컨대 ‘天’을 그냥 ‘천’이라 하지 않고 굳이 ‘하늘 천’이라 한 것이다.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다.(故乎天 不曰天 而曰寒乙天)”

 

■‘톈과 하늘 천’
즉 중국처럼 ‘天’, 즉 ‘톈’이라 말하면 될 것을 ‘하늘 천’이라 음과 뜻으로 나눠 겹겹이 부른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이 때문에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어렵다”고 했다. 이희경 역시 “한 글자에서 소리와 뜻이 전혀 달라서 말은 말대로, 글자는 글자대로 각각 사용하고 있다”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박제가의 주장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우리는 중국과 접경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 해도 안될 이치가 없다. 그래야 오랑캐의 글자라는 모욕을 피할 수 있다. 이로써 조선은 저절로 주·한·당·송의 풍속과 기운을 뒤찾을 수 있다.”(<북학의>)
박제가의 주장을 한마디로 한다면, “오랑캐 소리를 듣지 않고 중화(주·한·당·송)에 속하려면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중국어찬양론을 더 살펴보면 기가 막힌다.
“중국어는 사물의 이름을 분간하기가 특히 쉽다. 글 모르는 부인이나 어린아이도 일상으로 쓰는 말이 모두 제대로 문구를 이룬다. 경전이나 역사, 제자서, 문집의 글월이 입에서 줄줄 쏟아져 나온다. 중국은 말로 인하여 문자가 생성됐다. 문자를 탐구해서 그 말을 풀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중국 외의) 외국(조선과 같은)이 제 아무리 문학을 숭상하고 독서를 좋아해서 그 수준이 거의 중국에 가깝다고 해도 결국에는 중국과 차별이 발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한글을 버리고 말과 뜻이 같은 중국어를 공용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특히 우리 땅에서 중국어가 사라진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청나라 화가 나빙이 1790년 북경을 방문한 박제가를 위해 그려준 초상화와 매화묵죽도. 박제가는 세차례 북경을 방문, 중국의 신문물을 배웠다. 조선도 중국처럼 해야 발전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발해 멸망 때문인가”
“옛날 기자가 5000명을 이끌고 평양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열었다. 그 때 (이 땅의 백성들이) 기자의 중국말을 배웠을 것이다. 조선이 한사군의 영역을 편입된 이후 상용되었을 중국말이 전해지지 않는다. 왜일까. 발해가 멸망한 이후 한사군 백성들이 중국으로 들어가고 조선으로 귀속하지 않은 결과는 아닐까.”
박제가는 중국의 현인 기자(箕子)가 은(상)나라 멸망(기원전 1046년 무렵) 이후 조선 땅에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음을 강조했다. 또 기원전 108년 중국이 한반도에 한사군을 세웠음을 떠올렸다. 그 때 중국말이 이 땅의 공용어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게 박제가의 주장이다. 그러나 발해 멸망(926년) 이후 옛 땅이 중국에 편입되면서 중국어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박제가는 이것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박제가는 더 나아가 “역대 임금들이 중국어를 익히도록 명을 내렸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실 조선시대 땐 외국어에 능통한 자들이 없어 대대로 곤욕을 치렀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1597년, 선조는 도원수인 권율 장군을 맞아 적의 형세에 관해 논의하면서 땅이 꺼져라 한탄한다. 
“정탐의 중요성을 더 말해 무엇하랴. 심지어 중국 장수를 접견할 때에 통역(通譯)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혼선을 일으키는데 이러고서야 무슨 일을 하겠는가.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다.”
특히 박제가의 시대에는 더 심각했다. 청나라가 흥기한 이래 중국을 부끄럽게 여긴 사대부가 중국어를 일절 배우지 않았다니 말이다.
“사대부는 중국을 오랑캐로 여겼다. 억지로 사절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가지만 일체의 행사나 문서의 대화는 통역관들에게 맡겼다. 통역관의 농간 때문에 부정부패가 심했다. 이 때문인지 지금 역학이 쇠퇴해서 훌륭한 통역자가 10명도 안된다.”(<북학의>)
하루빨리 중국을 배워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박제가로서는 조바심을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박제가가 ‘중국어 공용론’을 펼친 이유이다. 박제가는 “오호라! 지금 중국어를 오랑캐가 지껄이는 조잡한 언어로 여기지 않은 자가 없다”고 안타깝게 여겼다.

 

■박제가의 주장은 웃기는 말
그러나 박제가의 주장은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다. 반대파의 논리도 정연하다.
“중국은 말이 문자와 동일하다고? 그렇다면 말이 변하면 문자의 소리도 변하지 않은가. 우리 말은 말은 말대로, 글은 글대로 사용하지 않나. 우리는 맨처음 받아들여 배운 한자의 소리를 그대로 유지하지 않은가.”
유득공의 <고운당필기>는 “동방의 소리가 중국의 소리보다 낫다(東音勝華音)”면서 “특히 동방에는 고음이 있다(東方有古音)”고까지 했다.
물론 박제가는 이런 주장에 대해 “문자와 말은 하나로 통일하고 옛 한자의 소리가 바뀐 것은 학자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재반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한자공용론’을 제기한 이유를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라고 못박는다.
사실 박제가의 ‘한자공용론’을 접하면 당혹스럽다. 한글이 모욕적인 오랑캐 글이며, 중국과 대등해지기 위해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화해야 한다? 박제가의 주장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박제가의 순수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그는 <북학의>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천지를 그리워하며 수심에 잠긴다. 천 개의 글자로 가슴 속 생각을 풀어내려니, 어느 겨를에 내 한 몸 위해 고민하리오.”(<정유각시집> 제2권)
일신을 초개처럼 버리고 백성을 끔찍이 여기던 박제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중국어 공용론’ 만큼은 어떨까.
한글이 모욕적인 오랑캐 글이며, 중국과 대등해지려고 한글을 버리고 한자를 공용화해야 한다? 제 아무리 망국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긴급구책이라 해도 박제가의 ‘중국어공용론’ 주장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저 과감하고 급진적인 개혁책을 내놓던 박제가의 ‘오버’라 할 수 있겠다.

 

■박제가의 진심
만약 박제가가 요즘의 학자였다면 어땠을까. 거침없는 성격에 거친 표현도 서슴치 않은 박제가의 글은 인터넷 공간을 뜨겁게 달구며 극심한 논쟁을 일으킬 것이다. 아마도 ‘골수 보수파’들은 과격개혁파인 그에게 십자포화를 쏟아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경고메시지는 지금도 심금을 울린다.
“(지금 아시아에) 전쟁 먼지가 일지 않은 지 거의 200년이 되었습니다. 천재일우의 기회에 온 힘을 다해 국력을 닦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에 변고가 발생할 때 더불어 우환이 발생할 것입니다.”
박제가의 경고메시지 이후 수십년이 지난 고종 시대에 일본과 서구세력의 압력에 의한 강제적인 개혁개방이 이뤄졌다. 남의 손에 의한 타율·강제개방으로 빗장이 풀린 조선은 결국 망국의 길로 급속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