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쌍릉의 주인공은 서동왕자, 백제 무왕이었다 ”

‘50~70대 남성 노년층. 연대는 서기 7세기 중반. 키는 161~170.1㎝’
지난 4월 전북 익산 쌍릉(사적 87호)의 대묘(대왕릉)에서 확인된 인골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선화공주와의 혼인 등 서동설화의 주인공인서동백제 무왕(재위 600~641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결과가 나왔다. 그동안 쌍릉 중 규모가 큰 대왕릉이 서동설화의 주인공인 백제 무왕의 능묘라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에 인골분석으로 ‘쌍릉=백제 무왕설’에 더욱 무게를 둘 수 있게 됐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서울 고궁박물관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전북 익산 쌍릉에서 발굴한 인골과, 3D프린팅으로 재구성한 복제뼈 등을 공개했다. |김기남 기자

■무왕의 서거년(641년)과 비슷한(620~659년) 인골연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이상준)는 대왕묘의 석실에서 확인한 나무상자에 담긴 인골 조각 102개를 분석한 결과 “주인공의 키는 161㎝에서 최대 170.1㎝, 나이는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 연대는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됐다”고 밝혔다. 연구소측은 고고학·법인류학·유전학·생리학은 물론 암석학과 임산공학 전문가들을 총동원했다고 밝혔다.
인골의 주인공은 일단 남성으로 추정됐다. 팔꿈치뼈의 각도와 목말뼈(발목뼈 중 하나)의 크기, 넙다리 뼈의 무릎 부위 너비가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키는 어떨까. 넙다리뼈에서 산출한 키(161~170㎝)의 경우 19세기 조선 성인남성의 평균키가 161㎝였던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건장한 축에 속한다.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의 기록에도 부합된다. 주인공의 뼈 상태는 최소 50대에서 평균 60~70대

익산 쌍릉에서 발견된 남성인골더미. 1917년 이 무덤을 발굴한 일본인 야쓰이가 인골을 상자에 담아 무덤방에 넣은 것을 101년만인 지난 4월 재발굴 과정에서 찾아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로 평가해도 무리가 없다는 것이 연구소측의 분석이다.
목의 울대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의 표면이 거칠며,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고, 불규칙한 결절이 있었다. 무엇보다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 다리와 무릎의 통증 등 몇가지 병리학적 특성을 관찰할 수 있었다.

뼈를 관찰한 결과 옆구리 아래 골반뼈에 ‘|’ 모양으로 골절됐다가 치유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뼈가 어긋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완치에는 약 3개월이 걸렸을 것으로 판단했다. 아마도 낙상으로 인한 흔적이어서 직접사인은 아닌 듯 했다.
무엇보다 가속질량분석기를 이용한 정강이뼈의 방사성탄소연대 결과가 가장 주목을 끌었다. 연구소가 숨죽이며 기다린 결과인데, 서기 620~659년으로 측정됐다. 무왕의 탄생연대는 미상이지만 서기 600년에 백제 제 30대 임금으로 등극했고, 641년 서거한 기록이 분명하다. 인골연대측정결과는 무왕의 ‘몰연대’에 부합된다.

무덤방에 고이 놓여진 나무상자. 그 안에 백제 무왕으로 추정되는 인골 102조각이 담겨 있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인골을 상자에 담아 놓아둔 이유
익산 쌍릉은 1917년 일본인 야쓰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약식으로 발굴됐다.
야쓰이는 이때 주요 유물들은 모두 수습하고 인골더미는 나무상자에 담아 무덤방에 그대로 두고 나온 것 같다. 나무상자의 연대가 백제시대가 아니라 근대에 제작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불과 20여 년 전까지도 발굴과정에서 인골이 나오면 불길하다는 이유로 불에 태워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야쓰이가 남의 나라 왕릉을 무단으로 파헤쳤다는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그나마 인골상자를 무덤방에 놔두고 나간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8월부터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 관리사업의 하나로 쌍릉을 다시 발굴하다가 아쓰이가 무덤방에 놓고간 인골 나무상자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치아논쟁의 끝
2016년 국립전주박물관은 야쓰이가 수습한 유물 중에 쓸려들어간 대왕릉의 치아 4점을 분석한 결과 20~40대 여성일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이때 대왕묘의 주인공을 두고 또 한차례 설왕설래 했지만 이번에 치아 뿐 아니라 인골 전체를 분석한 결과 다시 50대 이후의 남성으로 밝혀진 것이다.
즉 이번에 새롭게 확인한 인골 더미 102개 중에는 치아 2개가 포함돼 있었다. 101년전 야쓰이가 주요 유물을 수습할 때 쓸려 들어간 치아 4점과는 다른 것이었다. 이번 분석결과 새롭게 확인된 2점은 위턱의 치아였고, 기존의 4점은 아래턱 치아였다. 연구소측은 당연히 이 6점을 다시 검토했다.
분석에 참여한 이우영 가톨릭의대 교수는 “새로 확인한 2점을 포함한 치아 6점과, 팔꿈치·발목뼈·넙다리뼈 등을 종합분석해서 내린 결론이 50대 이상의 남성노년층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골 분석 장면. 키 161~170㎝, ㎝나이 최소 50대이상, 60~70대 사이의 노년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연대측정결과 7세기 초중반으로 판명됐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그렇다면 불과 2년전 ‘20~40대 여성의 것’이라는 국립전주박물관의 분석 결과는 틀렸다는 말인가.
이우영 교수는 “남아있던 4개의 치아는 파손된 상태여서 성별과 연령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뼈 없이 치아만 남아있을 경우엔 치아분석이 유용하겠지만 분석할 수 있는 뼈가 있을 경우엔 뼈와 치아를 종합적으로 검토해서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준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국립전주박물관도 2016년 당시 20~40대 여성이라고 추정하면서도 ‘치아만으로 성별과 연령을 구별하기는 어렵다’는 단서를 달아놓았다”고 전했다.  핬
이밖에 연구소측은 나무상자에 담긴 인골 102개도 한사람의 것으로 추정했다. 야쓰이가 여러 사람의 인골을 쓸어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미 고려시대 때 도굴당한 쌍릉
익산 쌍릉은 고려시대부터 여러차례 ‘무왕과 서동왕자’의 이름으로 기록에 남을 정도로 유명한 왕릉이었다. 즉 <고려사> ‘지리지·전라도 군마군조’는 “후조선 무강왕과 그의 비 능이 있는데 민간에서는 무강왕을 말통대왕 혹은 어릴 때 서동이라 불린 백제 무왕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고려사절요> ‘세가·충숙왕조’는 도굴 기록이 등장한다.
“충숙왕 16년(1327년) 도적이 금마군(익산) 무왕의 능을 발굴했다. 애써 잡은 도굴범이 탈출하자 정승 정방길이 전법관(수사관)을 탄핵했다. 그러자 ‘도굴된지 2년이 지나도 장물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는데 무슨 처벌이냐’는 변호가 잇달았다. 그러자 정방길은 ‘무슨 소리야. 도굴범이 그 무덤에 황금유물이 많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되받아쳤다.”
무왕의 왕릉으로 알려진 쌍릉에서 황금 유물이 도굴범의 표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인골 분석 장면. 키 161~170㎝, ㎝나이 최소 50대이상, 60~70대 사이의 노년층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연대측정결과 7세기 초중반으로 판명됐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왕릉일 수밖에 없는 이유
1917년 쌍릉을 발굴한 야쓰이는 1쪽도 안되는 약식보고서에서 무덤의 구조나 내부 석관의 잔존상태 등을 감안할 때 백제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전문가들은 쌍릉이 백제 말기의 임금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무엇보다 무덤의 규모가 부여 능산리에 있는 백제왕들의 무덤보다 오히려 큰 편이다.

판석을 다듬어 만든 널길까지 갖춘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인데, 내부에는 목제 관을 안치했다. 무령왕릉의 벽돌 무덤 내에 있던 목관과 유사한 형태의 관이 있었다. 또 무령왕릉의 목관처럼 쌍릉의 목관 역시 일본산 고야마키(コウヤマキ·일본에서만 사는 침엽수)이다.
목관도 심상치 않지만 발굴된 유물 또한 의미심장하다. 도굴된채 발굴되었기 때문에 유물은 매우 적었지만 토기 및 옥장신구(대왕릉)와 금동제관장식과 관못(소왕릉)은 왕릉급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특제유물들이다.
예컨대 옅은 갈색으로 타원형 심엽형 고리인 옥장신구는 2013년 중국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楊州) 수나라 양제(재위 604~618) 무덤에서 발견된 징식품과 유사하다. 612년(무왕 12년) 수양제가 무왕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는 <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 기록이 눈에 띈다. 또 “624년(무왕 24년) 당나라 고조가 무왕을 대방군왕백제왕으로 책봉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무왕조’)는 기록 역시 허투루 볼 수 없다. 김낙중 전북대 교수는 “이 무렵 중국에 선물로 주었거나 수입한 중국제 옥대를 무왕이 차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1917년 일제강점기에 야쓰이 세이치가 약식으로 발굴할 당시의 익산 쌍릉

 

■그럼 선화공주의 무덤은?
쌍릉 중 대왕릉의 실체가 다름아닌 백제 무왕릉일 가능성이 커졌지만 그렇다고 100%는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도굴의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 때문에 여전히 무덤의 주인공과 성격을 완전히 확정지을 수 없다. 인골의 부식이 심해 유전자 분석에 실패했다는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앞으로의 과제는 도굴된 채로 남아있는 무왕의 부인묘, 즉 소왕릉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다.
소왕릉이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무왕과 선화공주의 전설 때문이다.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 부르게 했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정을 통하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는 내용이었다. 동요가 퍼져~서동과 비밀리에 정을 통하고~함께 백제로 와서….”(<삼국유사> 무왕조)
우여곡절 끝에 선화공주와의 결혼을 성사시킨 서동(무왕)은 익산에 선화공주를 위한 절(미륵사)을 조성했다. 이것이 무왕과 선화공주 전설의 요약이다. 이 <삼국유사>의 구절 덕분에 최근까지 쌍릉의 소왕릉이 선화공주의 무덤이라는 믿음은 확고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이런 믿음에 금이 갈만한 발굴 결과가 터져나왔다.

미륵사의 구조는 <삼국유사>에 나온 그대로다. 3개의 금당과 3개의 탑이 모여있는 형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가운데 금당과 탑은 선화공주가, 서탑과 서금당은 사택왕후, 동탑과 동금당은 의자왕의 모친이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선화공주, 사택적덕의 딸, 의자왕의 모친
2009년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해체과정에서 쏟아진 유물 중에 석탑 조성과정을 적은 금판이 발굴됐다. 내용은 획기적이었다. 미륵사 석탑을 조성한 주체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왕후인 사택적덕의 딸’이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당장 <삼국유사>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가공된 설화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그러나 얼마후 “이 내용만으로 무왕과 선화공주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사실 미륵사를 유심히 보면 ‘3탑3금당’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탑 하나에 금당 한 채 씩 모두 3세트의 탑+금당으로 조성돼 있다. 서쪽 탑을 조성한 이가 ‘사택적덕의 딸’이라면 중앙탑과 동탑은 선화공주와 의자왕의 모친이 만든 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왕의 부인이 한 명 뿐이었겠는가. 무왕도 선화공주와 사택적덕의 딸, 의자왕의 모친 등 3명을 왕후로 들 수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일리있는 추론이다.
이성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내년부터 소왕릉을 발굴해서 주인공을 확인해볼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주인공 명문이 나오면 모르되 완전히 도굴된 소왕릉에서 어떤 발굴성과가 나올지 의문이다. 소왕릉의 주인공은 과연 선화공주일까. 사택적덕의 딸일까, 혹은 의자왕의 모친일까, 그도저도 아닌 다른 사람일까.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