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충남 부여 규암면 규암리에 살던 농부가 희한한 유물을 하나 발견했다.

뚜껑을 갖춘 쇠솥 안에 7세기대 불상 2점이 들어 있었다. 쇠솥에 불상이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유물조합인가. 먼 훗날의 발굴에서 실마리를 찾아냈다.

즉 1992년 부여 능산리 절터의 수조 유구에서 찾아낸 백제금동대향로와, 2003년 경남 창녕 말흘리 절터의 원형구덩이 속 대형솥에서 발견된 9세기대 불교공예품 500여점….

 

1907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쇠솥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불상 두 점 중 일본인 이치다 지로가 일본으로 반출했던 한 점(위 사진). 일본인 소장자가 지난해 말 국내학계에 공개했다. |최응천 동국대 교수 제공 

백제멸망기(부여)와 후삼국 혼란기(창녕)에 해당 사찰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불교용품들을 솥이나 수조에 숨겨놓고 황급히 피란했던 장면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금방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은 끝내 백제와 통일신라의 멸망이라는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규암리 농부가 찾아낸 불상 두 점은 일본 헌병이 압수 혹은 사들여 보관하고 있다가 한 점은 니와세 하쿠쇼(庭瀨博章), 다른 한 점은 이치다 지로(市田次郞)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중 니와세의 불상은 1939년 보물 320호(현 국보 293호)로 지정됐다. 문화재 지정은 소장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이치다의 불상은 비록 보물로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당대 고미술계에서는 반드시 친견해야 할 ‘최고의 백제불상’으로 손꼽혔다.

당대 도자사 전문가인 고야마 후지오(小山富士夫)는 1939년 이치다의 자택에서 이 백제금동보살입상을 감상한 소감을 “이렇게 뛰어난 조선 불상을 본 적이 없다”고 감탄했다. “허리를 비틀고

규암리에서 발견된 백제 불상 두 점 중 일제 때 보물 320호(현 국보 293호)로 지정된 한 점, 조선총독부는 1939년 이 유물을 보물로 지정했다. 

서 있는 자태가 빼어나고 미소 지은 얼굴이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대구의 개업의였던 이치다가 수집한 문화재는 해방 직후 미군정청이 접수한 것만 1000점이 넘는다.
“이치다의 별실에 진열된 신라·임나의 유물은 더욱 경탄할만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동나무 상자 5개에 수납되어 있었다는 것

이치다가 소장했던 백제불사의 뒤태. 다리에 힘을 빼고 목과 허리를 뒤튼 자세가 돋보인다.

이다. 순금제 보관, 보간장식구, 팔찌, 귀고리, 식리, 대금구 등…. 이중 백제 금동관음보살입상은….”
그런데 이치다 수집품 중 일부는 부산 골동품상의 ‘술수’에 말려 일본 반출 자체가 무산됐다. 지금 경희대박물관과 숭실대박물관 등이 소장한 이치다의 유물들이 그것이다.

이치다에게는 ‘사기’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일본인 수집 유물의 일본 반출을 막은 셈이 됐다. 그렇지만 이치다는 이 백제금동관음보살상만큼은 포기하지 않고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이후 이 불상은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해말 이 불상의 소유자가 한국 학계에 진위감정을 요청하면서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섰다.
최응천 동국대 교수와 이한상 대전대 교수 등 전문가들은 진품이 확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소장자가 불상을 공개한 이상 구입이든, 기증이든 국보급 유물의 환수가 불가피해보인다.

하지만 현 단계에서 이 불상의 가치를 두고 수백억원이니 얼마니 하고 설왕설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사야 할 사람이 먼저 가격을 높게 책정하는 것은 흥정의 기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차분하고 정교한 대처가 필요하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