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10일, 부여 왕흥사 목탑지를 조사하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은 숨이 멎는듯 했다.


이미 노출된 목탑지 초석의 남쪽 중앙 끝단에서 다른 석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제 뚜껑이었다. 석재는 사리구멍을 조성한 뒤 이를 막아낸 뚜껑역할을 한 것이었다.

직사각형 형태의 뚜껑(25센티미터×15센티미터×7센티미터) 표면앤 붉은 주사(朱砂)로 칠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런 주칠은 익산 왕궁리 오층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이나 남원 출토 사리기에서도 보이는 것이었다. 주칠을 한 이유는 벽사, 즉 나쁜 귀신을 물리친다는 의미이다.

왕흥사 목탑지에서 수습된 명문 사리장엄구.

■'백-제-창-왕!'

조사단은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뚜껑을 열었다.


내부구멍(20센티미터×10센티미터×15센티미터)은 진흙을 흠뻑 머금은 흙탕물로 가득 차 있었다. 조사단은 조심스레 대나무칼로 흙을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흙탕물 속 대나무 칼에 무언가가 걸렸다. 청동사리함(직경7.5센티미터, 높이 8센티미터)이었다. 조사단은 여전히 진흙투성이인 사리함의 표면을 정성스레 닦아내기 시작했다.

차츰 조사단의 눈과 귀가 멀기 시작했다. 진흙이 지워지자 1500년을 흙탕물 속에서 견뎌온 영롱한 글자들이 하나하나 현현하는 것이 아닌가.

분명히 「丁酉年 二月十五日」이라는 간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조사단원들의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것은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이 유적의 연대를 똑똑히 알려주는 명문이었기 때문이다.


글자를 더듬어가던 조사원들의 숨이 일순 멎었다.

명문은 "정유년 2월15일, 즉 577년, 백제 창왕(위덕왕)이 세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고, 본래는 사리 2매를 ○했는데, □때문에 셋으로 변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百-濟-王-昌!』

조사단은 이 대목에서 잠깐 넋을 잃었다.

『꿈인지 생신지. 이런 발굴을 하다니. 조사단원들은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발굴이었으니까요.』(이규훈 당시 국립부여박물관 학예관)

 
그럴수밖에 없었다. 「백제왕 창」이라면 바로 백제 25대왕인 위덕왕(재위 554~598년), 바로 그 이였기 때문이다.

 

「백제 창왕」이라는 명문은 이미 1996년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석재 사리감에서도 나왔다. 다만 왕흥사에서는「백제왕 창」이라고 했고, 능산리에서는「백제 창왕」이라고 한 점은 달랐지만….

 

이외에도 심초석 상부의 남쪽 채움토에서 구슬, 금환, 과판장식, 곡옥 등 엄청난 양의 유물이 쏟아졌다.

명문 사리함 말고도 하나하나가 모두 국보급 인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

현장은 난리가 났다. 부여연구소 보존과학팀이 급거 현장으로 달려왔고, 서산 보원사 발굴현장에 출장 중이던 김용민 당시 부여연구소장이 김혜정 연구원의 숨 막히는 전화보고를 듣고는 버선발로 뛰어왔다.

연구소 팀은 노출된 사리함 겉면의 명문을 하나하나 검토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해석하기 어려운 글자가 별로 없어서 몇몇 글자를 빼고는 해독 가능 했습니다.』

당시 연구소팀이 처음에 읽은 명문내용은「丁酉年二月十五日百濟王昌爲(三)王子立刹本舍利二枚○時□化爲三」였다.

즉,『정유년 2월15일, 즉 577년, 백제 창왕(위덕왕)이 세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고, 본래는 사리 2매를 ○했는데, □때문에 셋으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이때「삼(三)」자로 보였던 글자는 전문가들의 정밀 판독 결과「망(亡)」으로, 그리고 해석이 어사무사했던 ○은「장(葬)」자로, □은「신(神)」자로 해독해 발표했다.

결과적으로 이 명문은「577년 2월15일, 백제왕 창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세우고 본래 사리 두 매를 묻었을 때 신의 조화로 셋이 되었다.」고 읽혔다.

명문 내용을 곧이곧대로 해석한다면 이 발견은 역사기록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자료가 되었다. 우선 왕흥사의 창건기록이 수정될 판이었다.

정교한 금알갱이를 붙인 공모양 장식.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틀렸다?

『삼국사기』「백제본지」‘법왕조’ㆍ‘무왕조’와『삼국유사』「흥법(興法)」‘법왕금살(法王禁殺)조’에 기록된 왕흥사 창건기록을 보자.

『법왕 2년(600년) 봄 정월에 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인을 두었다. 무왕 35년(634년) 봄 2월 왕흥사가 준공됐다. 절은 물가에 닿아있어 무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 향을 피웠다.』(『삼국사기』)

『법왕이 다음해(600년) 도성인 사비에 왕흥사를 창건할 때 겨우 그 터만 닦고 돌아갔다.(중략) 무왕이 즉위하여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하여 수 십 년이 지나 완공했다. 그 절은 산을 등지고 물을 내려다보며 화목이 수려하여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추었다. 국왕이 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절에 들어와 그 형승의 장려함을 감상하였다.』(『삼국유사』)

즉, 각종 역사서에 따르면 왕흥사는 법왕 2년, 그러니까 600년에 처음 세워지기 시작했으며, 34년 후인 아들(무왕)대(634년) 완공됐다.

하지만 이번에 출토된 명문사리기에 따르면 왕흥사는 백제 창왕(위덕왕) 23년인 577년, 즉 역사기록(600년)보다 23년이나 빠른 시점에서 세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으니….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낸 보도자료(2007년 10월24일)도 이것에 크게 주목하여『기록을 통해 그동안 삼국사기의 기록에 600년(법왕 2년)에 축조되고 634년(무왕35년)에 낙성되었던 왕흥사의 실제 축조연대가 577년(위덕왕 24년)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신주처럼 인용되던 각종 역사서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되며, 이것은 역사연구에 상당한 충격파를 던지는 것이다.

사실 역사서라는 것은 후대의 기록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모두 고려 시대에 쓰여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금석문은 당대의 기록이다. 당연히 더 믿을 만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역사기록과 금석문의 기록이 1~2년의 차이라면 또 몰라도 23년의 차이라면 어떨까.

 

이것은 「삼국사기」「삼국유사」 등 정사(正史)의 신빙성에 큰 타격을 입는 격이 된다. 

금으로 만든 판

■"아니다.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너무 호들갑 떨지 말고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과연『삼국사기』와『삼국유사』기록은 23년이나 틀렸을까.

학자들은 발굴된 왕흥사 명문 가운데 찰(刹)이라는 글자에 주목한다.

『찰(刹)은 두 가지의 뜻을 담고 있어요. 하나는 인도말 크시트라에서 온 말로 땅(土), 나라(國), 곳(處)의 뜻이 있고, 다른 하나는 락사타에서 온 말로 장대(竿), 깃대(旗竿)의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찰간(刹竿)이라는 단어는 탑에 꽂혀 위로 높이 솟아나는 막대와 기둥을 뜻하기도 합니다. 즉 찰은 장소를 뜻하는 절(寺)도 되고, 장대와 기둥을 뜻하는 탑도 됩니다.』(강순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강순형씨는『설문해자』를 인용하면서 왕흥사 명문에 나오는「입찰(立刹)」이라는 의미는 탑을 건립한 연대를 뜻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손환일 박사의 말도 비슷하다. 
『「찰(刹)」은 기둥이며, 석가의 무덤 위에 기둥을 세우고 그 가운데 사리를 안장하는데 그 역시 찰(刹)이라 했다고 합니다. 반면「사(寺)」는 건물의 개념입니다. 이는 고대의 사전인「설문해자(說文解字)」등 각종 서적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왕흥사 명문에 나온「입찰(立刹)」연대는 곧 탑을 세운 연대, 즉 577년을 뜻하고, 그로부터 23년 후인 600년에 건물(寺)이 조성되었으며, 그 건물은 634년에 완공되었다는 것이다. 찰(刹)과 사(寺)가 완공된 것은 무려 57년만의 일이라는 것이다.

손 박사는 『사찰(寺刹)은 탑-대웅전-강당-요사채 순으로 건립되는데 위덕왕의 아들이 죽은 뒤(577년) 탑이 처음 건립됐고, 어떤 사정에 의해 대웅전과 강당 등은 법왕 2년(600년) 건립이 시작되어 무왕 35년(634년) 완공됐다.』고 보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거대한 목조탑을 짓기 위해 지반조성 과정, 공사자금 시주 과정 등이 필요했을 것이며, 따라서 577년에 탑을 세운 다음, 600년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고, 그 공사는 634년 끝났다는 것이다.

왕흥사 출토 명문 가운데 또 하나 주목되는 대목은『창왕(위덕왕)이 죽은 아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을 세웠다.(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고 한 것이다.

■창왕의 죽은 아들은 과연 누구?

창왕의 아들 가운데 사서에 기록된 이는 유명한 아좌(阿佐)태자 한 사람 뿐이다.

『일본서기』「스이코(推古)조」를 보면 『597년 백제왕이 왕좌 아좌를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하는 내용이 있다.

 

이 아좌태자는 일본 쇼도쿠(聖德)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아좌태자가 그린 쇼도쿠 태자의 초상화는 일본 국보로 나라현(奈良縣)의 호류사(法隆寺)에 남아 있었는데, 1949년 소실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확인된 왕흥사 명문에 따르면 창왕(위덕왕)에게는 577년 무렵에 죽은 아들이 또 한 사람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조사단이 처음 판독한 대로, 명문(百濟王昌爲亡王子立刹) 가운데 망(亡)자를 삼(三)자로 보아『창왕이 세 왕자를 위해 절을 세웠다.』는 해석도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창왕에게는 아좌태자를 비롯해 세 사람의왕자가 있었을 수도 있다.

연꽃모양의 백운모판. 백운모판으로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한 이 유물은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인 겹친 형태였다. 운모판의 두께는 0.008센티미터였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다.

■탄성이 터져나온 백제유물

사리기 명문이 워낙 중요해서 그렇지 왕흥사 발굴은 유물의 측면에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

 

우선 명문이 새겨진 사리함 안에는 은제 사리병(외병ㆍ6.8센티미터×4.4센티미터)이 있었고, 다시 그 안에 금제사리병(내병ㆍ4.6센티미터×1.5센티미터)이 들어있었다.

금제사리병의 경우 금(Au)성분이 98% 이상인 순금제였고, 은제사리병의 은(Ag) 성분도 99%였다.

결국 왕흥사 사리기는 사리함-외함(은제)-내함(금제) 등 3중 세트로 이뤄졌고, 연대와 내용이 분명한 삼국시대 최고(最古)의 사리기인 셈이다.

사리공 주변에서 확인된 8150여 점 이상의 공양품들은 하나하나가 국보ㆍ보물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찬란하다. 공양품들은 금은제와 동합금. 옥, 유리, 철제 등 다양한 재질을 써서 제작했다.

금제품들로는 목걸이와 귀고리, 탄목금구, 금모장식(金帽裝飾), 구슬, 금사(金絲) 등이 쏟아졌다.

 

이 가운데 곡옥의 머리를 씌운 모자형 장식(금모장식)과 작은 고리를 연접하여 만든 공구체(空球體), 탄목(탄화된 나무)을 장기알처럼 깎고 가장자리에 금판을 덧씌운 장식 등은 그 정교한 솜씨가 일품이다.

이한상 교수(대전대)는『공모양 장식, 즉 공구체의 경우 중간 중간 연결된 접점에 1㎜ 정도에 불과한 금속 알갱이(金粒)들을 붙이는 마감 방식까지 사용했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은환과 은구슬, 은허리띠 장식 등 은제품과 젓가락, 팔찌, 동전 등 동제품도 정교한 솜씨를 자랑했는데, 특히 주목되는 동제품은 상평오수전(常平五銖錢) 2점과 오수전 1점이었다.

 

원래 오수전은 한 무제 때(기원전 118년) 처음 유통된 화폐였는데, 640여 년 뒤인 양나라 무제 4년(523년) 철제 오수전을 만들어 다시 사용했다. 반면 상평오수전은 북제시대인 550~577년 사이 제작됐다가 유통이 중단된 화폐다. 

왕흥사에서 오수전과 상평오수전이 동시에 출토된 것은 백제가 당시 중국의 남북조와 동시에 활발한 교역을 했음을 웅변해주는 대목이다.

공양품 가운데는 백제인들이 금, 은 못지않게 귀하게 여긴 옥제품, 즉 곡옥과 대추옥, 비녀, 진묘수형 패식 등이 출토됐다. 옥제품은 지금으로부터 8000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근거지인 발해연안과 한반도 동부지역에서 사랑해온 보석이다.

출토된 유리옥 가운데는 쌀알보다 훨씬 작은 구슬에 샤프심보다 약간 작은 구멍을 뚫은 초절정 정밀극세공을 자랑하는 것도 있다.

왕흥사에서 확인된 금 은 동 사리기.

■백제 예술의 결정판

무엇보다 전문가들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연꽃모양의 백운모판이다.

 

명문에 가려서 그렇지 이 운모판은 그야말로 백제 예술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운모판으로 연잎 사이에 마름모꼴 금박을 넣어 장식한 이 유물은 각각의 연잎을 따로 만들고, 중심은 둥근 원형판인 겹친 형태였다. 그런데 문제는 운모판의 두께이다.


 

놀라지 마라! 운모판의 두께는 0.008센티미터였다. 그야말로 불면 날아갈세라 만지면 부서질세라 얇디얇은 판이었으니.

 

『처음엔 운모판인지 몰랐습니다. 진흙 속에 묻혀있었으니…. 다만 아! 정말 저렇게 정교하게 재단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김혜정씨)

 

잘 보니 이 연꽃모양의 운모판은 관모 장식 테 중앙부에 얹혀진 상태였으며 원형의 주임부 좌우측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즉, 이 구멍에 끈을 연결해서 관모에 장식했던 게 분명했다.

고고학자 조유선 선생은 『이 관모를 평상시에 쓰고 다닐 수는 없었을 것이고…. 위덕왕(창왕)의 아드님 시신에 장식해놓은 것이 분명하다.고 감탄사를 냈다.

 

운모는 도교신앙에서 불로장생을 기원하는 신선의 약재로도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공양구들은 당대 백제 절정기의 예술을 상징하는 공예품들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끈다.

『사실 1993년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되자 그 제작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어요.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 기울어진 백제의 국세를 감안하면 그렇게 정교한 향로가 제작되었을 리 만무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었지. 그래 금동대향로가 중국 수입품일 수도 있다는 설이 설득력을 갖기도 했지요.』(조유전 선생)

 

하지만 왕흥사 유물은 이 같은 일말의 의구심을 완전히 불식시켰다.

『왕흥사 사리용기와 유물은 무령왕릉 출토품과 강한 친연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모자형 장식과 구체 반구형 장식을 땜으로 접합한 공구체(空球體), 탄목금구 등은 무령왕릉 출토 금속공예품과 유사합니다.』(이한상 교수)


 

또한 왕흥사 사리용기의 꼭지도 무령왕릉 동탁은잔(銅托銀盞)과 연속선상에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령왕(재위 501~523년)의 무덤(525년)인 무령왕릉과 창왕(재위 554∼598)이 죽은 아들을 위해 지은 왕흥사 탑(577년) 사이에는 50년이 넘는 시간차가 있다. 

이 교수는 결국『50여 년의 차이가 있다지만 무령왕릉 공예품이나 왕흥사 공예품은 모두 왕실물품을 제작하던 공방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 것』이라면서『그러므로 양자간 공예기술이 비슷한 전통을 잇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그려본 왕흥사의 구조.

■창왕은 왜 절을 세웠을까. 

궁금증이 생긴다. 창왕, 즉 위덕왕이 왕흥사를 세운 까닭이 과연 죽은 아들을 기리기 위함이었을까.

 

이 대목에서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확인된 「창왕명」사리감을 한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인가. 능산리 절터는 1993년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된 바로 그 절터를 뜻한다.

 

그런데 향로가 발견된 지 2년만인 1995년, 절터 목탑지에서 또하나의 엄청난 유물이 확인된다.

「百濟昌王十三年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진「석제 사리감」이 확인된 것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창왕 13년, 즉 정해년(567년)에 왕의 누이동생, 즉 성왕의 따님이 사리를 공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창왕이 죽은 아버지 성왕(재위 524~554년)을 위해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결국 노중국 교수(계명대)의 말대로 창왕은 567년 죽은 아버지 성왕을 위해 능산리에 절을 세웠고, 그보다 10년 뒤(577년)에는 역시 죽은 아들을 위해 왕흥사를 건립했다는 말이다. 왜 창왕이 그 같은 불사를 잇달아 감행했을까.

여기에는 창왕과 아버지 성왕, 그리고 한성백제 멸망이후 기울어져간 국세를 만회하려다 실패한 백제의 쓰라린 역사가 녹아있다.

 

■왕흥사에 녹아있는 쓰라린 백제역사

기원전 18년부터 무려 493년간 번성하던 한성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왕(개로왕)이 참살당하는 등 멸망한다.(475년)

 

백제는 남으로 남으로 쫓겨 웅진(공주)에서 국가를 재건한 뒤, 다시 538년 평야지대인 사비(부여)로 옮겨 중흥을 노린다. 63년간의 공주시대를 이은 122년의 사비시대가 개막된 것이었다.

 

한때는 삼국 가운데 최강국의 위세를 떨쳤지만, 백제의 국세는 찌그러질 대로 찌그러진 상황. 이 때 등장한 중흥군주가 바로 성왕(재위 523~554년)이었던 것이다.

확인된 금실

재위 기간 중 사비시대를 연 성왕(무령왕의 아들)은 불교의 정치철학인 전륜성왕(轉輪聖王) 사상을 바탕으로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했다. 또한 실추된 왕권의 위엄을 되살려야 했다.

 

불교에서 전륜성왕은 진리의 수레를 굴리면서 통치하는 정법(正法)의 수호자이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과 손잡고 북벌을 단행했고, 한강하류 6개군을 점령한다. 고토 수복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553년 신라 진흥왕의 배신으로 천신만고 끝에 빼앗은 수복지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만다. 백제로서는 신라의 배신을 묵과할 수 없었다.

이때 성왕의 아들인 창왕이 치를 떨며 나선다. 원로대신들은『아직 때가 아니다.』라며 극구 만류하지만 원정을 고집한다.『일본서기』에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태자인) 여창(餘昌)이 신라 정벌을 계획했다. 그러자 원로대신이「하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니 화가 미칠 게 두렵습니다.」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여창은「늙으셨네요. 어찌 겁을 내시오.」하고 출전을 고집했다.』(『일본서기』)

554년, 태자는 대가야 연합군까지 동원, 국경지대에 관산성(管山城ㆍ옥천)을 쌓고 다금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신라는 한강하류인 신주(新州) 주둔 군대까지 빼돌려 관산성 포위에 나섰다.

 

백제인의 신앙을 담은 다양한 공양물

사태가 심각해졌음을 간파한 아버지(성왕)는 아들을 격려하기 위해 554년 7월 보병과 기병 50여 명의 호위를 받으며 야간행군을 거듭하며 현장으로 떠난다. 하지만 성왕은 관산성 근처 구천(狗川)에 이르렀을 때 신라 매복군의 습격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성왕의 목이 잘리고 최고관등인 좌평 4명과 사졸 2만9천600명이 몰살하는 등 참패한다.

 

■아들의 만용 탓에 전사한 아버지 

여창(餘昌)은 천신만고 끝에 탈출, 왕위에 올랐는데 그 사람이 바로 창왕, 즉 위덕왕(재위 554~598년)이다. 이 참패는 백제에게, 아니 창왕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특히 창왕은『원로대신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리한 원정을 단행함으로써 아버지를 전사시키고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다.』는 비난의 소용돌이를 비켜갈 수 없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패전을 두고두고 자책하던 창왕은 555년 8월 신하들에게『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하들은『잘못을 뉘우친 것으로 됐다.』면서『차라리 백성들 100명을 출가시키고, 갖가지 공덕을 이루라.』고 달랬다고 한다.

 

뼈저린 반성을 거듭하면서 왕위에 오른 창왕은 44년 재위 기간 내내 은인자중하면서 내치를 다졌다.

 

대신 창왕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국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잇달아 절을 창건하고 죽은 이들의 혼을 달리는 등 불교 제의에 힘을 쏟은 것 같다.

 

창왕의 시호인 위덕왕(威德王)은『법화경(法華經)』「화성유품(化城喩品)」의 게송(偈頌)에 나오는「큰 위덕(威德)을 갖추신 세존(世尊) 운운」이라는 구절에서 따 온 것일 수도 있다.

『창왕, 즉 위덕왕은 아버지를 죽이고, 가뜩이나 어려운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 빠뜨렸다는 죄책감에 평생 살아왔던 분이었던 것 같애. 평생 자책하고 살면서 왕실과 나라의 중흥을 불교에 맡긴 것이고….』

 

주경미 교수(부경대)는 성왕과 창왕(위덕왕)대의 진신사리 공양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해석을 가한다. 즉, 성왕과 창왕은 왕권강화 뿐 아니라 삼국통일을 염두에 둔 정치적인 목적에서 행한 이벤트였다는 것이다.

 

탄목금구. 불에 탄 나무에 금테를 두른 장신구이다.

『즉, 성왕과 창왕은 전륜성왕을 자처했어요. 그런데 인도 전역을 통일한 아쇼카왕과, 이를 본받고자 한 후대의 중국 양무제, 진무제, 수문제 등 전륜성왕을 자처한 통치자는 모두 통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어요. 이런 예를 종합하면 성왕과 위덕왕대의 진신사리 공양은 전륜성왕이 되고자 한 정치적 목적에서 행해진 것이며, 국내에서의 왕권강화는 물론 삼국통일의 꿈을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흥사의 풍치는 절묘하다.

 

과연 『삼국유사』,『삼국사기』의 내용대로 산을 등지고 화목이 수려하여 사계절의 아름다운 경치를 갖췄다.(附山臨水 花木秀麗 四 時之美具)

국왕(무왕)은 늘 배를 타고 강을 건너 왕흥사에 들어와 경치를 감상했고, 향을 피웠다.

 

강을 건너 왕흥사에 오던 무왕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 역시 불교의 힘을 빌려 나라의 중흥을 빌었으리라.

 

왕흥사 앞에 백마강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 낙화암이 보인다. 저곳으로 삼천궁녀가 뛰어 내렸다고 한다.

 

과연 그랬을까.     

저 좁고 작은 강에 3000명이 뛰어내렸을 리 만무하지만 그 이야기는 과연 기구한 백제역사의 응축된 스토리가 아닐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