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의 레시피는 1800년대 말엽의 음식조리서인 <시의전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밥에 고기를 부쳐 썰고, 각색의 채소와 다시마 튀각을 부셔 놓고…깨소금·기름을 넣어 비벼서…위에는 계란을 부쳐…넣는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비빔밥의 유래가 뿌리가 깊었음을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이런저런 재료를 다 넣어 비비기만 하는데 번듯한 레시피를 남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과,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아야 할 섣달 그믐날에 부엌 찬간에 남은 반찬을 어떻게 처리했겠는가.

 

농사철 아낙들이 이고간 새참을 어떻게 먹었겠는가.

 

아마도 큰 그릇에 밥(잿메)과 갖가지 반찬(혹은 제사음식)을 넣고 그냥 썩썩 비벼먹었을 것이다.


 

비빔밥은 얼마 전까지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이것이면 이것, 저것이면 저것 하는 선명한 노선을 선호했다. 만약 비빔밥처럼 이런저런 노선의 사람이 섞이면 사쿠라 소리를 듣기 일쑤였다.

 

‘색깔 좀 분명히 하라’는 다그침이었다. 하도 공작정치가 판을 쳤던 시대였으니 그럴만도 했을 것이다. 단일민족의 단일문화를 신줏단지 모셨던 시대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비빔밥에서 한국 문화의 특성을 찾기 시작했다. 30가지에 달하는 재료, 즉 다양한 개성의 개체들을 하나로 모으는 조화와 화합의 정신이 비빔밥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형형색색의 외양으로 식욕까지 촉진하겠다, 다양한 영양을 한꺼번이 비벼 섭취하겠다, 이렇게 편리한 음식도 찾기 힘들지 않을까.

 

비빔밥을 무척 좋아한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생전에 “모든 것을 뒤섞는 비빔밥은 내 예술

품과 비슷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시쳇말로 퓨전이지만 백남준은 정보량이 폭주하는 현대 문명을 관통하는 혼합매체(Mix Media)이라 했다. 마이클 잭슨과 패리스 힐튼, 니콜라스 케이지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비빔밥의 맛에 매료됐다는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로 꼽혔다.


 

이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내외가 주최한 한·미 정상회담 백악관 만찬의 메인 메뉴가 ‘비빔밥’(사진)이었다. 미국산 재료인 캐롤라이나산 황금쌀과 도버솔(Dover sole·도버해협에서 잡히는 가자미류 생선)로 만든 한국의 비빔밥이라면 어떤가.

 

한·미 양국간 협력과 화합을 강조하는 음식외교로는 손색이 없다.

간과하기 쉬운 비빔밥의 장점의 하나더 있다. 스트레스 쌓이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냉장고 안에 남은 모든 반찬을 긁어모아 큰 양푼에 넣고 먹었다는 것이다.

 

화가 나서 분이 풀리지 않아도, 실연 당해 폭풍처럼 울고 나서도 이 양푼 비빔밥을 썩썩 비벼먹으면 마음이 풀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실타래처럼 얽힌 외교문제도 양푼비빔밥 먹듯 풀어갈 수 있다.

 

한미관계는 물론 남북 관계, 한중 관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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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