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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호로고루

 “662년 김유신의 신라군이 야밤에 몰래 행군하여 표하(瓢河)에 이르니 고구려군이 추격해왔다. 김유신이 군사를 돌려 총반격에 나섰다. 신라는 고구려군의 수급을 1만이나 베고, 5000명을 사로잡았으며….”(<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조’ 등)
 “673년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이 침범했다. 신라군이 호로하(瓠瀘河) 등에서 아홉번 싸워 모두 이겨 20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두 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헤아릴 수 없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경기 연천 장남면 원당리에 있는 호로고루성. 고구려가 신라와 맞서 싸울 때 세운 최전방사령부이다. 호로고루가 있는 임진강은 553년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이었으며, 일종의 군사분계선이었다.|김창길 기자      

■삼국시대 군사분계선
 37번 국도를 따라가다 경기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쪽 도로로 빠져들면 섬짓한 표지판들이 보인다. 19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12사태 침투로와, 북한이 팠다는 고랑포(제1) 땅굴 등…. 하기야 신라 경순왕릉을 빙 둘러싼 철망이 바로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가리키는 것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한숨을 쉬고 임진강변 쪽을 바라보면 야트막한 구릉 하나가 시야를 붙든다. 바로 호로고루(瓠瀘古壘)이다. ‘호로’는 옛 문헌의 ‘표하’와 ‘호로하’, ‘칠중하’ 등과 함께 임진강의 구간 이름이다. ‘고루’는 국경선을 지켰던 요새인 ‘옛 보루(堡壘)’를 뜻한다. 예로부터 전략적인 요충지일 수밖에 없었다. 임진강 하류 쪽에서 볼 때 배를 타지 않고 건널 수 있는 최초의 여울목이기 때문이다. 깊이가 무릎 정도 밖에 되지 않기에…. 그랬으니 중무장한 백제·고구려·신라·당나라의 기마부대는 이 여울목을 거쳐야 했다. 특히 신라가 553년 한강유역을 점령하고 북진하면서 임진강은 자연스레 고구려-신라의 국경선이 되었다. 고구려는 임진강의 여울목마다 호로고루, 당포성, 은대리성 등 크고 작은 성과 보루를 쌓았다. 특히나 인마(人馬)가 건널 수 있는 첫번째 코스였던 호로고루는 고구려 최전방 사령부였다. 1998년부터 이어진 발굴조사 성과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보루 안에서 임진강 유역에 자리잡은 40개 고구려 유적 가운데 가장 많은 고구려 기와가 출토됐습니다.”(심광주 토지주택박물관장)
 특히 2006년에 확인된 고구려 지하보급창고에서는 흥미로운 유물들이 쏟아졌다. 소·말·개·사슴·멧돼지 등 6종의 동물뼈와, 불에 탄 쌀·콩·조·팥 등 곡물들이 출토된 것이다. 이곳에서는 1300g들이 밥공기도 출토됐다. 요즘의 밥공기가 200~350g 정도되니까 고구려 병사들은 엄청난 양의 밥을 먹은 것이다. 6세기 국경선을 지킨 고구려 병사들의 ‘짬밥’이 만만치 않은 호식(好食)이었음을 웅변해준다. 이곳에서는 적의 습격이나 아군의 진격을 알릴 때 쓴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만든 북(鼓)이 확인되기도 했다. 

멀리서 본 호로고루성. 이 성 내부에서 엄청난 양의 고구려 유물과 유구가 쏟아졌다. |김창길 기자

■마주 선 고구려 초병과 신라 초병
 필자는 답사 때마다 제법 깔끔하게 정비된 호로고루의 정상에 서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강 건너 저 편에 지금은 폐허만 남은, 그 조차도 무성한 수풀로 둘러싸인 성(城)의 흔적이 남아있으니…. 이 쪽의 호로고루를 빼닮은 맞은 편 성의 이름은 이잔미성(二殘眉城)이라 한다.
 문득 눈을 돌리면 인마가 쉽게 건널 수 있는 옅은 여울의 모래톱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553~660년 사이 고구려군과 신라군은 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을 겁니다. 마치 지금의 남북한 병사들이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총부리를 겨누듯….”(심광주 관장)
 그러니까 고구려와 신라가 대치한 110여 년 동안 고구려군은 호로고루에, 신라군은 이잔미성에 주둔하면서 숨막히는 냉전을 벌였을 것이 아닌가.
 한 번 더 객적은 상상에 빠져본다. 부모·형제를 고향에 두고 최전방에 배치된 고구려·신라군 병사들이 서로 고함치고 소통하면서 냉전의 무료함을 달래지는 않았을까.
 살얼음판을 걷던 냉전은 신라·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660년) ‘열전’으로 바뀌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밥 먹었냐” “고향이 그립지 않냐”고 대화를 나누던 고구려·신라 병사들은 진군의 북소리와 함께 ‘상잔(相殘)의 비극’ 속으로 빠져든다.
 662년 2월, 호로고루 인근에서 벌어진 ‘표하(호로하) 전투’는 승전한 신라에게나 패전한 고구려에게나 모두 피곤한 싸움으로 기록될 것이다.
 무슨 사연인가.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를 멸망시킬 때까지는 좋았다. 내친 김에 고구려까지 도모하려 했지만 만만치 않았다. 당나라가 지원군과 군량미를 끊임없이 요구함으로써 신라를 괴롭힌 것이다. 앞서 인용한 662년의 전투는 신라군이 평양 주둔 중이던 당나라군에 군량미를 전달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구려 추격군과 싸운 것이다. 신라군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군량미 운송 도중 궂은 비와 눈보라가 한 달 이상 이어졌고, 사람과 말이 얼어죽었다. 게다가 당나라군이 철군하려고 했다. 신라군 역시 철군할 수밖에 없었다. 철군 행렬이 호로하(호로고루 앞)에 이르렀지만 고구려 기병대가 추격했다. 신라·고구려 군사들이 강의 언덕에 진영을 나란히 쳤고, 고구려군이 강을 건너기 전에 반격을 가해….” 
 신라는 고구려와의 ‘호로하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하지만 당나라는 아예 한반도를 집어 삼키려는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호로고루에서 바라본 여울목. 고구려와 신사 기마부대가 충분히 건널 수 있었다. 신라 김유신군과 고구려군의 전투와 신라-당나라군의 전투로 유명하다.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 탱크부대가 도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673년의 ‘호로하대첩’
 당나라는 백제의 고토에 세운 5도독부를 통해 백제의 부흥운동을 은밀하게 지원했다.
 앞서 밝혔듯 고구려 정벌전을 벌일 때는 신라군을 평양까지 오라가라 하면서 계속 허탕을 치게 만들었다. 문무왕이 당나라 설인귀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삼국사기> ‘신라본기·문무왕조’)
 “667년 신라군이 고구려 칠중성을 쳐서 당나라군을 위해 길을 터주려고 했소. 그런데 성이 막 함락될 무렵 당나라 사자가 갑자기 달려와 ‘칠중성(호로고루 인근)을 치지 말고 빨리 평양성으로 와서 군량미를 공급하라’는 명을 내렸소. 그래서 공격하다 말고 군사를 돌려 수곡성(황해도 신계)에 이르렀소. 그런데 이번에는 당나라 군사가 벌써 철군한다는 말을 전했소.”
 당나라는 신라를 우습게 보고 ‘똥개 훈련’을 시킨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군은 장안(당나라 수도)에 돌아가서는 “신라가 군사를 늦게 보냈으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말을 황제에게 고해바쳤다. 고구려 멸망 뒤 악화일로를 걷던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급기야 670년대 들어 파국으로 접어든다.           
 673년 5월 당나라 총관 이근행이 이곳 호로하 서쪽에서 고구려 유민들을 치고 수 천 명을 포로로 잡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로 모두 도망가고 말았다. 호로하 서쪽이면 바로 호로고루에서 하류 쪽으로 보이는 모래톱, 바로 그 곳이다. 호로고루와 이잔미성의 사이를 흐르는 여울목을 가리킨다.
 그러나 4개월 뒤인 그 해(673년) 9월 당나라·말갈·거란 연합군을 역시 호로하에서 격퇴시켰다. 특히 이 때의 전투는 무려 9차례나 거듭된 혈투였는데, 9번 모두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다. 가히 ‘호로하 대첩’이라 일컬을 수 있겠다. 신라는 이 호로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고 당나라를 내쫓는 기반을 닦았다.  

호로고루 맞은 편에 흔적이 남아있는 이잔미성. 신라군이 주둔했다. 6~7세기 고구려와 신라군이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을 것이다.   

 ■파란의 전쟁터
 그 후 900여 년이 지난 1637년 2월 5일이었다.
 왕세자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부부 등 왕족과 대신들의 아들·형제 등 200여 명이 인조 임금에게 하직을 고했다.
 병자호란 패배로 청나라 인질로 끌려가야만 했던 것이다. 왕세자의 뒤를 역시 인질로 끌려가던 백성들이 따랐다. 이 꼴을 차마 보지못한 길 가의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심양장계>는 “사로잡힌 남녀가 산에 들에 가득하여 길을 가기 쉽지 않아 하루에 30~40리밖에 가지 못한다”고 걱정했다.
 “왕세자 행차인지라 누가 재촉하지는 않겠지만…. 길에 있는 날이 길어지니 앞으로 식량이 바닥날 것 같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거북이 걸음으로 발걸음을 겨우 떼던 소현세자와 인질들은 4일 뒤인 9일 파주에 도착, 하룻밤을 묵은 뒤 임진나루에 닿았다. 그러나 배가 달랑 한 척 뿐이었다.
 강폭이 넓고 물이 깊어서 도저히 건널 수 없었다. 이들은 할 수 없이 임진강변을 따라 상류로 상류로 걸어갔다. 그들이 한 숨을 돌린 곳은 바로 첫번째 여울목인 호로하였다.

호로고루 일대의 각종 군사유적들. 임진강은 한반도를 경영하려는 세력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요처 중 요처였다. 

<연려실기술>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끌려간 사람들이 물경 60만 명이 넘는다”고 기록했다. 상상해보라. 임진강변과 호로하의 여울을 끊임없이 건너는 거대한 인간띠의 참상을…. 못난 임금과 못난 조정을 만난 탓에 죽도록 고생해야 했던 백성들의 고초를….
 다시 400여 년이 지난 1950년 6월 25일, 이 기구한 팔자의 여울목은 또 한 번 파란의 전쟁터가 된다.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개성에서 문산 쪽의 임진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들은 결국 20㎞나 우회한 뒤 호로고루 쪽 여울목인 호로하를 도하했다.
 그것도 모자라 북한군은 호로고루 정상에 포대를 설치했었다니, 그것이야말로 현대판 보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역사는 이곳의 여울목에서 그렇게 반복되고 있었다.(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