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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세종이 고려임금의 어진을 불태운 까닭은

옛 초상화를 보고 있노라면 한가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왜 쭈글쭈글한 노인들만 주인공으로 등장했을까. ‘꽃청년’들은 왜 초상화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을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수양도 덜됐고, 학식도 부족하며, 경륜도 쌓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상화에 등장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들은 초상화를 그저 사람을 본떠 그린다는 의미의 ‘초상(肖像)’이라 하지 않았습니다. 사진(寫眞)이라 했습니다. 내면의 ‘참됨(眞)’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으니 아직 모든 면에서 설익은 젊은이들은 ‘사진’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으니 ‘터럭 한올, 털끝 한오라기(一毫一髮)’라고 허투루 그릴 수 없었습니다. 
임금의 초상화도 어진(御眞)이라 했습니다. ‘임금의 참됨’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임금의 초상화라는 것입니다. 이번 주는 초상화의 의미를 알아보고, 나아가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을 둘러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62회 팟캐스트 주제는 ‘세종이 고려임금 어진을 불태운 까닭은?’입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자화상은 평론가 오주석(1956~2005)의 표현대로 영락없는 ‘잔나비상’이다.
표암 스스로 쓴 그림의 찬문에 “내가 몸집도 작고 얼굴도 잘생긴 편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종종 날 얕잡아 본다”고 썼을 정도였다. 표암은 그 찬문의 말미에 ‘기진자사(其眞自寫) 기찬자작(其贊自作)’이라 했다. ‘그 초상화는 내가 그리고, 그 찬문도 내가 썼다’는 것이다.

그런데 표암은 초상(肖像), 즉 닮을 초(肖) 본뜬 상(像)이라 하지 않고 ‘사진(寫眞)’이라 표현했다. 오주석은 이 대목을 주목하고 있다. 즉 참(眞)의 어원은 ‘차다’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면에서 차오르는, 내면의 것을 그린다는 뜻이다.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御眞)으로 일컬은 이유다.

표암 강세황은 자화상을 그린 뒤 초상화를 사진으로 표현했다.

1713년(숙종 39년) 임금의 초상화 제작을 맡은 이이명은 “어떤 대상의 정신이나 태도를 사실대로 표현해내는 것을 사진이라고 하니 임금의 초상화를 어진이라고 해야 맞다”고 했다.

그러니까 옛 선비들은 학문과 수양, 그리고 벼슬아치가 된 다음에 백성들을 위한 훌륭한 정치를 펼쳤던 경륜…. 이 세 가지를 보여주려고 초상화를 그린다는 것이다. 오주석의 말을 듣고 보니 과연 그렇다.
왕조시대의 초상화 가운데는 ‘젊은날의 초상’이 없다. 꽃다운 얼굴 대신 왜 쭈글쭈글한 노인들만 그리는 것일까. 바로 ‘사진’이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경륜도 학문도 수양도 아직 덜 익었기에 ‘참’하지 못하며 따라서 그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딱 맞는 말이다.
하기야 북송의 유학자 정이(1033~1107)의 정신, 즉 “터럭 한오라기가 달라도 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이라는 원칙에 따라 초상화를 그렸다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퇴계 이황이 가장 좋아했다는 말이 바로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毋自欺)”였다. 그랬으니 “마음에 내적인 성실함이 있으면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마련(誠於中 形於外)”이며, “그 뜻을 성실하게 갖는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대학>)이라 한 것이다.

 

■임금 초상화의 뿌리
사대부의 초상화가 그럴진대 하물며 군주의 얼굴(용안)이랴.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의 유래는 뿌리깊다. 삼국시대부터 있었다는 방증자료가 각종 문헌에 속출한다.
<신당서>를 보면 “고려기를 연주하는 악기의 상아 장식 위에 국왕의 형상을 그렸다(畵國王形)”라는 구절이 있다. 고려기(高麗伎)는 당고조(재위 618~626) 즉위 직후 수나라 제도에 따라 만든 9가지 악 가운데 하나인데 고구려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 ‘김수로왕진’에도 나온다.
즉 신라 말년에 충지라는 인물이 금관성(김해)을 공략한 뒤 성의 주인(城主)이 되어 장군직에 올랐다. 그런데 이때 영규라는 자가 충지의 위세를 이용해서 묘향(廟享·가락국 역대 임금과 왕비를 모신 종묘의 제사)을 빼앗은 뒤 어쩐 일인지 부러진 대들보에 깔려죽었다. 이를 두려워한 충지는 ‘석자 크기의 비단에 가락국 시조 수로왕의 진영을 그려 봉안한 뒤 아침 저녁으로 치성을 들였다.

5세기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 벽화 속에 그려진 인물상. 고구려 임금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계속 일어났다. 벽에 걸어놓은 지 겨우 3일 만에 김수로왕의 진영에서 피눈물이 흘러 거의 한 말이나 됐다. 충지는 수로왕의 후손인 규림을 불러 “진영을 그려 모신 것이 오히려 불경죄였던 것 같다”고 후회하며 수로왕의 진영을 모시고 사당으로 나가서 불태워 버렸다.
회화 형태의 초상화 뿐이 아니다. 646년(보장왕 5년) “동명왕 어머니의 조각상에서 3일간이나 피눈물이 흘렀다”는 <삼국사기> ‘보장왕조’ 기록도 있다. 물론 이 작품들은 지금 남아있지 않다.
다만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5세기 전반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감신총(평남 용강 신덕리)의 인물상은 심상치 않다.
이 인물은 임금이 쓰는 흑라관(黑羅冠·비단을 재료로 만든 관모)에 홍포(紅袍)를 입고 있다. 조선미 교수(성균관대)는 “다른 쪽에 그려진 인물상의 경우도 얼굴 부분은 떨어져 나갔지만 뒤에 드리워진 비단장막에 왕(王)자가 수도 없이 쓰여있다”고 밝힌다. 인물상이 감신총의 주인공인 임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신라에 원한을 품은 궁예의 일화도 있다. 901년 고구려의 재건을 목표로 삼은 궁예는 “신라가 당나라군을 청해 고구려를 깨뜨려 지금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꽉 차있다”면서 “내 반드시 (고구려의) 원수를 갚겠다”고 다짐했다. 궁예는 흥주(경북 영주 순흥면)에 있는 부석사에 이르러 벽에 그려진 신라 임금의 초상을 보고 칼로 내리쳤다. <삼국사기> ‘열전·궁예조’는 “지금도 궁예의 칼 자욱이 남아 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궁예가 신라 어떤 왕의 초상화를 칼로 내리쳤는지는 알 수 없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상은 경주 숭혜전에 지금도 5점이나 남아있다. 물론 후대에 옮겨 그린 것들이다.  

5세기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 벽화 속에 그려진 인물상. 고구려 임금일 가능성이 있다.

 

■고려 임금 초상화를 불사른 것은 세종이었다
고려의 어진문화는 매우 활발했다. 하지만 멸망과 함께 수난을 겪는다. 고려 임금들의 영정을 괴롭힌 이는 믿기 어렵겠지만 조선의 세종 임금이었다.
“1426년(세종 8년) 고려멸망 후 도화원이 간수하고 있던 고려 역대 군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불태웠다. 태조 왕건의 비인 신성왕후의 반신 초상화도 불살라버렸다.”
세종 임금은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가 지극히 꼴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1428년(세종 10년) 충청도 천안군이 소장한 고려 태조의 진영과, 문의현(충북 청원)이 갖고 있는 태조의 진영과 쇠로 만든 주물상 및 공신들의 영정들을 모두 각각의 무덤에 묻었다. 전라도 나주가 소장한 고려 2대왕 혜종의 진영과 조각상, 그리고 전라도 광주에 있던 태조 왕건의 진영도 개성으로 옮겨 능 곁에 묻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술 더 떴다. 1433년(세종 15년) 세종은 고려 역대 임금 18명의 어진이 마전현(경기 연천 미산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전현의 정갈한 땅에 묻으라”고 명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437년(세종 19년)에는 경기 안성군 청룡사에 봉안돼있던 공양왕의 어진을 고양현의 무덤 근처에 있던 암자로 이장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세종은 고려 역대임금들의 초상화를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 이른바 ‘분진갱영’(焚眞坑影)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세종은 고려 임금들의 어진을 왜 보는 족족 불태우거나 묻어버렸을까. 아마도 마치 살아있는 듯 사실적으로 그린 고려임금들의 초상화를 보는 일이 불편하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어진은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왕조를 상징한다고 봤을 것이다. 그러니 색출작업까지 해서 없애버릴 생각을 했던 것이다.

공민왕 부부의 초상화. 조선은 태조 이성계 가문을 중앙무대로 진출시킨 공민왕의 영당을 종묘 옆에 세우고 극진히 모셨다.

 

■조선이 공민왕 어진을 모신 까닭
그렇게 없애려 했던 고려 임금들의 초상화가 몇 점 남아있다. 태조 왕건의 어진은 7명의 고려 임금 위패를 모신 마전(연천)의 숭의전에 소장돼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됐다. 태조의 초상화는 근대에 제작된 소략본이다. 이 어진은 장막을 치고 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인데 얼굴을 왼쪽으로 약 30도 돌리고 두손을 앞으로 모은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하나 전해지는 고려 임금의 초상화로는 공민왕 부부의 어진이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5년 종묘를 만들면서 고려 공민왕의 영당을 곁에 세우고 공민왕의 초상화를 받들었다는 점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직계선조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에 왜 왕(王)씨인 공민왕을 섬겼다는 것인가. 구전에 따르면 태조 이성계가 종묘를 세울 때 강한 바람이 불었는데 그 바람을 타고 공민왕의 어진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이성계로서는 공민왕을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이성계 가문은 원나라 지배를 받던 쌍성총관부 지역에 머물러있던 변방세력에 불과했다. 그런데 공민왕이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에 나설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적극 도왔다. 쌍성총관부를 탈환한 공민왕은 이자춘에게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당시 20대였던 이성계도 원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이성계 가문은 공민왕 때 중앙무대로 진출했던 것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변방의 세력으로 머물던 가문을 발탁한 공민왕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국립고궁박물관에는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부부 초상화가 남아있다. 1395년 당시 공민왕 영당에 봉안됐다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건물을 복원하면서 이모(移模·원본을 베껴 그린 그림)한 것이다. 사실 공민왕의 노국공주 사랑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공민왕은 사랑했던 부인이 죽자 손수 영정을 그려놓고 밤낮으로 슬피 울며 3년간이나 고기를 먹지 않았다. 특히 노국공주의 능인 정릉을 지키는 수릉관(守陵官)과 시릉관(侍陵官)을 두어 머리를 풀어헤친채 마치 효자처럼 지내도록 했다.”(<성호사설> ‘인사문·수릉관’)
고궁박물관이 소장한 공민왕 부부상은 부부가 서로 마주하듯 약간 몸을 틀어 앉아있다. 장중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풍긴다. 공민왕 부부가 나란히 앉은채 그린 초상화의 형식은 이후 역대 3대 악성으로 꼽히는 박연(1378~1458) 부부와, 문신 하연(1376~1453) 부부의 초상화 등 조선 전기의 부부초상화 형식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초상화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윤두서의 자화상. 박진감 넘치는 표정이 압권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눈, 치켜 올라간 눈썹, 세밀한 턱수염 등에서 주인공의 성격과 기개를 엿볼 수 있다.

 

■‘털끝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다.’
조선 어진 문화의 정신은 실록 등 각종 문헌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알려졌다시피 군주나 세자의 모습은 함부로 노출시키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었다. 1472년(성종 3년) 일본인 정수라는 인물이 4년 전에 승하한 세조 임금의 어진을 진상품으로 들고 조선을 방문했다. 정수는 세조의 생전이던 1467년 조선을 방문해서 세조를 접견한 적이 있었다. 그랬기에 5년 만에 다시 온 정수는 과거에 자신이 세조 임금을 친견한 인연을 알아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정의 논란을 불렀다. 정수는 “정성껏 그린 어진을 제발 받아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대신들은 ‘안된다’고 극력 반대했다. 정창손과 홍윤성 등은 그 유명한 정이의 언급을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때 한 터럭, 한 털끝이라도 같지 않으면 부모가 아니다’(人寫父母之眞 一毫一髮不似 則非父母矣)라고 했습니다. 대면해서 그려도 진짜 모습과 같기 어려운데 하물며 잠깐 세조의 용안을 본 정수가 어찌 제대로 그리겠습니까.”
조정은 의논 끝에 정수의 세조 어진을 받지 않기로 했다. 정수 일행이 머물고 있는 제포(경남 진해) 해변에 단을 세워두고 어진을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물론 정수에게는 죄를 묻지는 않고 상급은 내렸다. 조선의 임금을 섬긴 정신만은 높이 산 것이다. 신숙주 등이 정수에게 한 말이 흥미롭다.
“조선의 법에는 백성이 임금의 성용(聖容·어진)을 그리지 못하며 범한 사람은 중죄(重罪)를 받는다. 다만 너는 외국의 사람이므로 꾸짖지 아니한다. 또 전하께서 너의 지성을 가상히 여기어 특별히 물품을 하사하여 상을 주셨다.”(<성종실록>)

 

■자기 초상화가 못마땅했던 태종
이렇게 ‘털끝 하나도 잘 못그리면 부모(임금)가 아니’라는 의식 때문에 몇몇 임금들은 초상화 그리기를 매우 꺼렸다. 인종의 경우 생전에는 물론 죽은 뒤에도 그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태종은 어떠했는가. 효성이 지극한 세종 임금은 상왕이던 아버지(태종)의 초상화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주인공인 태종은 완성된 초상화를 보고는 “당장 불살라버리라”고 명했다. 
“‘만일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다면 내 자신이 아니다(若有一毫未盡 卽非吾親)’라는 말이 있어요. 주상! 이 초상화는 불태우는게 좋을 것 같아요.”(<세종실록> 1444년 10월22일)
필시 태종은 자신을 그린 이 초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면 그려진 본인의 얼굴이 낯설고 쑥스러웠을 수도 있겠다. 하기야 자기의 본모습이 그대로 찍힌 사진을 두고 ‘잘 나왔다’고 여기는 경우가 몇이나 될까. 태종도 아마 그랬을 가능성이 짙다. 하지만 아들인 세종은 이미 그려진 아버지의 초상화를 불태울 수 없어 그냥 남겨두었다. 그러다 1443년(세종 25년) 세종이 화공들을 궐내에 모아두고 세종 자신과 소헌왕후(세종의 부인)는 물론 아버지(태종)와 할아버지(태조)의 어진까지 그리게 했다. (계속)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조선미, <왕의 얼굴-한중일 군주의 초상을 말하다>, 사회평론, 2012
          <한국의 초상화 형과 영의 예술>, 돌베개, 2009
오주석,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솔, 2003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도록>, 국립고궁박물관, 2015
한국고전번역원, <후설>, 한국고전번역원, 2013

박정혜·윤진영·황정연·강민기, <왕과 국가의 회화>,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