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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세종이 특별사면을 주저했던 까닭은

632년(정관 6년) 당태종(재위 626~649)이 천하의 사형수 390명을 방면했다. 그러면서 “이듬해 가을 사형을 집행할 때 다시 돌아오라”는 다짐을 받았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모든 사형수가 이듬해 약속한 날짜에 돌아온 것이다. 태종은 이를 가상하게 여겨 사형수들을 모두 사면해주었다.(<자치통감>)
당대 시인 백거이는 ‘칠덕무(七德舞)’라는 시에서 당태종의 치세에 찬사를 보냈다.
“원망하는 궁녀 삼 천 명을 궁궐에서 내보내고, 사형수 사백 명이 자진해서 옥으로 돌아왔다오.(怨女三千放出宮 死囚四百來歸獄)”(<백거이 시집>)

■당태종의 셀프미담 만들기
그런데 좀 미심쩍다. 뭔가 미담을 꾸며낸 듯한 냄새가 난다. 형제들을 참살한 이른바 ‘현무문의 정변’(626년) 끝에 즉위한 태종의 ‘셀프미담’일 가능성이 짙다.
굳이 사형수들을 풀어주고 다음해 모월까지 돌아오라고 기한을 정해준 것도 이상하다. 그런 냄새를 직감한 이가 있었다. 북송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구양수(1007~1072)였다.
“만약 태종이 ‘죄수들이 반드시 돌아오리라’고 여겨 풀어주었다고 치자. 이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정을 해친 것이다. 또 죄수들이 ‘반드시 사면된다’고 여겨 돌아왔다고 치자. 이것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마음을 해친 것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해쳐서 이런 미명(美名)을 얻은 것에 불과하다.”(<종수론(縱囚論)>)
구양수는 그러면서 “대체 당태종이 무슨 은덕을 베풀었다는 것이며, 사형수 390명은 무슨 신의를 지켰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그야말로 짜고치는 고스톱이자 고도로 기획된 셀프미담이었다는 소리다.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의 불행
‘잘못된 사면은 임금과 백성 모두를 해치는 행위(上下交相賊)’이라는 구양수의 지적은 천고의 명언으로 자리잡고 있다.
구양수의 지적을 받은 당 태종 또한 사면과 관련해서 불세출의 명언을 남긴다.
“사면이라는 것은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의 불행이다.(小人之幸 君子之不幸)”
자신의 허물을 가리기 위해 사면을 셀프미담으로 포장한 당 태종이었다. 그랬던 당태종은 사면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꿰뚫어보았던 군주였다.
“무릇 사면의 은혜는 오직 법을 지키지 않는 무도한 무리들에게만 미친다. 1년에 두 번 사면령을 내리면 좋은 사람이 벙어리가 된다.”
당태종은 “가라지(독성의 잡초)를 기르는 자는 곡식을 상하게 하고 간궤(사악한 무리)를 은혜롭게 하는 자는 양민을 해친다”면서 촉나라 제갈량과 양나라 무제의 예를 든다.
“촉 제갈량은 10년이나 사면령을 내리지 않아서 번성했다. 그러나 양나라 무제(502~549)는 해마다 2~3차례씩 사면했지만, 나라가 끝내 기울고 말았다.”(<역대명신주의>)
후대의 임금과 신하들은 ‘사면은 소인의 다행 군자의 불행’이라는 당태종의 명언을 가슴 깊이 새겼다. 군주는 통치행위의 하나인 사면권의 유혹에 빠지는 와중에도 늘 ‘소인다행, 군자불행’의 고사를 되뇌였고, 신하들은 군주가 사면권을 남용할 때 역시 ‘소인다행, 군자불행’을 외치며 군주를 다그쳤다.

세종이 재난에 따른 사면령을 내리면서 "모든 과오는 나에게 있다"고 인정한 <세종실록> 내용. 세종은 사면이 결코 재난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혹시라도 잘못된 처벌이 있었을 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다.   

■사면은 악행만 부추긴다  
예컨대 1401년(태종 1년) 대사헌 이지가 상소문을 올렸다. 사면은 군주의 통치권이지만 쉽게 쓰거나 남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지는 예의 그 당태종의 ‘소인다행, 군자불행’의 고사를 인용한다.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는 불행입니다. 사면이 없는 나라는 그 정치가 공평무사합니다. 다스리는 도는 권선징악이어야 합니다. 전하는 경사가 생기거나 재이를 당하면 반드시 사면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정은 한번 두번 세번을 겪으면 마음이 달라집니다.”
왜 사면이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의 불행’이라는 것일까. 이지의 설명을 들어보자.
“사면이 잦으면 악한 짓의 마음이 고쳐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면날만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온갖 악행하는 풍속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지는 “그러므로 착한 자는 게을러지고, 악한 자는 방자해져서 천심을 잃는다”고 지적했다. 잦은 사면으로 형사와 정사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니 결국 소인들만 다행으로 여길 뿐이라는 것이다.     

■사면을 바라고 악행을 일삼는다
1540년(중종 35년)1월24일 헌납 민세량의 언급이 흥미롭다.
“사마광(송나라 역사가)은 ‘죄가 있다면 절대 사면해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못박았습니다. 왜냐. 죄 지은 자들이 반성은커녕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사면이 있을 것’이라면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경사가 있으면 그 때마다 사면했기 때문에 죄인들이 사면 받을 기대에 가득차 있습니다. 대사면을 기대하고 일부러 싸워 원한을 갚으려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 무슨 말인가. 민세량은 비근한 예를 든다. 즉 어떤 자가 유생과 칼부림을 벌여 상처를 입힌 일로 체포됐다. 그런데 그 아비가 대신 잡히면서 자식에게 ‘도망가라’고 채근했다. 그러면서 한 말이 걸작이다. “내가 혼자 잡혀 있을 테니 넌 우선 피하라. 가까운 시일에 필시 사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나도 풀려날 것이다.”
민세량은 이 어처구니없는 사례를 예로 들면서 “이것이야말로 사면을 바라고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라 했다.
민세량의 말을 들은 중종은 혀를 차며 “사면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중한 죄를 범하니 백성들의 방자함이 심하다. 설사 사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와 같은 사건들은 사면의 혜택을 입게 해선 안 된다”고 불같이 화를 냈다.

■세종이 주저했던 사면령

그렇지만 역대 군주들은 사면권 행사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면의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다. 왕실의 혼례와 가례와 같은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혹은 가뭄·홍수·지진과 같은 나라의 재변이 있거나…. 중요한 것은 왕조시대인 조선에서도 임금이 최소한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동의를 구하는 형식을 빌려 사면령을 내렸다는 점이다.
예를들어 1441년(세종 23년) 7월23일 왕세자빈 권씨(문종의 부인)가 원손(단종)을 낳자 세종의 기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세종 임금은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대사면을 내려도 될 것 같다”면서도 의정부에 의견을 물었다.
“세자가 장년이 되어 힘들게 얻은 적손이다. 얼마나 기쁜가. 그러나 사면이라는 것은 군자에게 불행이요, 소인에게는 다행이 아닌가. 그래서 과인이 오랫동안 행하지 않았다.”
세종이 꺼림칙하게 여긴 것이 하나 있었다. ‘비록 경사이기는 하지만 원자(아들)가 아닌 원손(손자)였으니’ 대사면령의 기준에 맞는지 저어했던 것이다.
이때 도승지 조서강이 나섰다.
“당나라 고종 때 황손이 탄생해서 대사면령을 내리고, 연호까지 고쳤습니다. 이번 원손의 탄신 역시 조선의 경사가 아닙니까. 대사면령은 가합니다.”
세종 임금이 도승지의 말을 듣고 못이기는 척 신하들을 돌아보며 “경들의 의향은 어떠냐”고 물었다.
“나라의 경사에 이보다 더한 것이 없사오니 대사면령이 가합니다.”
세종은 이에 따라 “대역 모반죄와 부모·조상·상전·저주 살인죄 같은 강상죄 등 중형을 제외한 모든 죄인을 풀어주도록 했다.

■그래도 신하들의 의견을 구했다
성종 임금도 마찬가지였다. 1487년(성종 18년) 2월29일 세자(연산군)가 입학하자 성종은 “온 나라의 경사를 맞아 사면령을 내리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개진한다.
이에 한명회 등 대부분의 신료는 “지당하다”는 찬성의 뜻을 냈지만, 김수손 등은 “사면은 소인에게만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반대표를 던졌다. 이계남 등 일부 신료들은 아예 “아니 세자의 입학은 예문(禮文)의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사면은 말도 안된다”고 일축한다.
성종은 당연히 한명회 등의 ‘찬성표’에 손을 들었다. 형식적이나마 정상적인 절차를 밟으려는 임금의 소통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사면이 재난 극복에 도움이 되겠냐
나라의 경사가 축하하면 될 일이지만, 재변이 일어나면 임금으로서는 큰일이었다. 만백성의 어버이로서 무한책임을 지는게 왕조시대의 군주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재변이 일어나면 군주는 공구수성(恐懼修省·몸과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반성하고 수양하는 마음)해야 했다. 이때 빠짐없이 논의되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면이었다.
억울하게 처벌받은 자들이 많아서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아니냐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1440년(세종 22년) 4월25일 세종과 영의정 황희가 사면령을 언급한다. 먼저 황희 정승이 사면 이야기를 꺼낸다.
“가뭄이 심해서 임금이 하늘의 재앙을 두려워했지만 아직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걱정하면서 사면을 조심스럽게 청한다.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지만 군자의 불행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형벌이 공정하지 않아 원통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가뭄같은 재변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입니다. 감옥에 죄인이 넘치면 농사짓는 일도 차질을 빚게 됩니다. 도형(징역형) 이하의 죄인을 사면해서 재변을 멈추도록 하소서.”
가뭄이 극심한 이유가 형벌이 불공정한 탓이니 사면령을 베풀어 임금의 덕을 내보이라는 황희 정승의 간청이었다. 황희 정승은 사면령을 구하면서도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요, 군자의 불행”이라는 전제는 깔았다. 사면이 결코 정상적인 통치행위가 아님을 전제한 것이다.
세종도 극히 부정적인 반응을 나타냈다. “지난 22년간 몇차례나 사면령을 내렸지만 단 한번도 하늘의 응험을 얻지 못했다”면서 “사면이라는 것이 재앙을 면하는데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유(赦宥·사면)은 재앙을 구제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또 내가 들으니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사면을 학수고대하면서 ‘하늘이 왜 가물지 않나’ 한단다. 사면이라는 것이 본래 재앙을 그치고자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외려 죄인이 살길을 찾으려고 ‘가뭄이 와라’고 외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세종은 사면의 폐해를 낱낱이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세종은 결국 황희 정승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했다. 가뭄이 워낙 심한데 어떤 수라도 써야됐으니까.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다
눈치챘겠지만 재변에 따른 사면령을 내릴 때는 피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 하나 있었다.
임금이 사면령을 내리기에 앞서 일단 “과인의 부덕 탓에 재변이 일어났다”는 자기책임론을 개진한 것이었다. 1445년(세종 27년) 5월11일 가뭄과 홍수가 몇년동안 잇따르자 세종이 “모든 게 과인의 부덕 탓”이라고 자아비판하면서 사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낸다. 이날의 <세종실록>을 읽으면 사면령을 주저하는 임금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근자에 가뭄과 홍수가 잇달아 여러 차례 사면령을 내렸는데, 또 내려야 하는가. 착한 자에게 복을 주고, 악한 자에게 화를 주는 천도(天道)의 뜻에 어긋남이 있지 않은가. 도형(징역형)과 유배형 이하의 죄인을 석방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그러나 도형과 유배형은 중죄이다. 재변을 만날 때마다 사면을 남발하면 어찌될까. 중죄인은 사면을 바라면서 요행을 엿볼 것이 아닌가.”
세종은 결국 “가뭄이 너무 심하니 어쩔 수 없다”면서 “도형(징역형) 이하의 죄수들 모두에게 사면령을 베풀라”는 사면령을 내린다. 멋대로 사면이 아니라 끝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사면령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아니되옵니다’를 외친 신하들
또 하나, 임금이 사면권을 발동할 때마다 신하들이 ‘소인불행, 군자다행’의 명언을 인용하면서 ‘아니되옵니다’를 외쳤음을 알 수 있다.
1493년(성종 24년) 3월10일 사헌부 지평 민수복과 사간원 정언 최연손 등은 “사면이 너무 잦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사면령을 내리면 어떻게 하냐”고 성종 임금을 비판했다.
1507년(중종 2년) 8월5일 중종이 사면대상의 실명까지 거론하자 대간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열거되지도 않은 죄인들의 이름을 써서 ‘풀어주라’고 명하면 안됩니다. 폐조(연산군)에서 억울했던 자들을 반정 초에 풀어주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올 2월 또 다 방면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면령을 내리시다뇨? ‘사면이 심히 양민(良民)을 해롭게 하는 것이다.’ ‘사면은 소인에게는 다행, 군자에게는 불행한 것이다’ 이런 말들이 있지 않습니까.”
1533년(중종 28년) 7월4일 사헌부가 “사면이라는 것은 임금이 한 때 베푸는 넓은 아량의 은전이지만 자주 내려서는 안된다”고 꼬집는다.
“지난해와 올해 경사가 겹쳐 두번이나 사면령을 내렸지않습니까. 우리 사헌부는 그때마다 ‘아니되옵니다’하는 상소를 올리려 했으나 참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또 재변이 잇따르자 일부 대신들이 사면령 운운하고 있습니다. 주상 전하께서도 ‘잦은 사면은 간인(姦人)의 악을 조장한다’고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까.”
중종은 이때 사헌부의 상소를 받아들여 사면불가령을 내렸다. 그러면서 “죄인들을 서둘러 처결하라”는 지시까지 덧붙인다.

■사면만 바라는 세상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절 특사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7월8일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의 요청에 ‘좋은 생각’이라고 화답하는 형식으로 거론한 것이다.
물론 헌법 79조에 따라 대통령은 헌법이 보장하는 사면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헌법 11조 1·2항을 보면 대통령의 사면권 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 나온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지 성별·종교·사회적 신분에 의해~모든 영역에 있어 차별받지 않고(1항),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않고 어떤 형태로도 창설할 수 없다(2항)”는 것이다. 제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사면권을 함부로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잘못된 사면은 임금과 백성 모두를 해치는 행위’라는 구양수의 지적과 ‘사면은 소인의 다행이며, 군자의 불행’이라는 당태종의 천명 또한 영영토록 새겨두어야 할 금언이다.
무엇보다 무한권력을 휘둘렀다는 왕조시대의 군주조차 사면권을 함부로 행사하지 못했음을 깨달아야 한다. 군주는 사면권을 행사할 때마다 신하들의 의견을 묻는 과정을 거쳤다. 신하들도 군주의 독단에 마냥 휘둘리지 않았다. 군주가 사면권을 남발할라치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니되옵니다’를 외쳤다. 무엇보다 재난을 맞았을 때 군주는 ‘내가 부덕한 탓’이라고 일단 고개를 숙인 뒤에 사면권을 행사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과연 왕조시대보다 잘난 시대인가.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