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 예전보다 배나 된다. 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

1439년(세종 21년), 세종 임금이 치세에 사형수가 많다는 것은 부덕의 소치라고 반성한다. 그는 의정부에 “고의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와 전과 3범의 절도 등은 형량을 좀 감해주면 안되겠냐”고 하문한다. 미집행 사형수가 자신의 치세에서 190명에 이르자 특별사면령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영의정인 황희를 비롯한 대신들은 격론 끝에 ‘불가하다’는 의견을 모은다. 

구한말 태형을 가하는 모습.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에 달했고, 능지처사를 당한 이도 60명에 이르렀다. 

■사형수가 190명이나 되다
 “전하, 송나라 주희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벼운 형벌을 미덕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지만 형벌이 가벼울수록 패역하여 작난(作亂)의 마음만 자라게 됩니다.’라고…. 결국 이들이 살아나면 모두 범죄를 가볍게 여겨 범법행위가 날로 늘어날 것입니다.”

결국 세종의 사면령은 대신들의 반대로 공포되지 못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다.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의 시대에 사형수가 감옥에 넘쳐나 190명이나 됐다니 참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 뿐이 아니다. 이상한 대목은 또 있다. 세종 시대에 도적이 창궐했다는 것이다.

“한양 한복판에서 도둑이 끊이지 않습니다. 근심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거리 위에 들립니다. 내탕(內帑)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립니다.”(<세종실록> 1436년)

사간원의 상소문을 보면 매우 심각하다. 문제는 “이들을 잡아도 곤장 몇 대와 자자형(얼굴에 죄명을 새기는 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벌을 받은 그 날부터 다시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온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며 그 고기를 씹고자 해고 어쩔 줄 모르고….”

얼마나 도적이 창궐했으면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금작)이 털리고,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제기(은찬)까지 도둑맞았을까.

“대명률에 따르면 ‘절도 3범의 경우 교수형에 처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해마다 국가의 경사나 수재, 혹은 한재 등의 이유로 대사면령이 내려집니다. 전과가 말소되면 그 날로 다시 도둑으로 되돌아가, 10여 범에 이르러도 형벌을 받지 않는 자가 수두룩합니다.”

 

■‘도적의 발뒤꿈치를 잘라라’
대신들의 아우성은 대단했다. 결국 세종은 대신들이 내민 계책을 받아들이고 만다.

“범죄를 저지르는 자에게 한쪽 발의 힘줄을 끊는 단근형(斷筋刑)의 벌을 내리면 좋습니다. 팔다리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 억세고 날랜 힘만 꺾을 뿐입니다. 그러니 생업에는 방해되지 않습니다.”(1436년)

요컨대 다시는 도적질을 못하게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버리는 단근형을 시행하자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죄가 줄어들었을까. 

아니었다. 중형을 가했지만 범죄는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자 형조는 더욱 강력한 처벌책을 마련했다.

단근형을 당한 뒤에도 절도하는 자는 다리 양쪽의 힘줄을 모두 끊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세종은 결국 다시 이 안을 추인했다.(1437년)

그래도 도적질이 근절되지 않자 양발의 발뒤꿈치 힘줄은 물론, 왼발의 전근(前筋)까지 끊는 형벌을 마련했다. 세종은 또 한번 의정부의 상소를 따랐다.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중국으로 망명한 뒤 자객에 의해 피살된 김옥균. 그는 대역죄인의 죄명으로 사후에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60명에 이른 능지처사자 
단근형은 그래도 약과였다. 놀라지 마라.

“사노 매읍동이 본주인을 때려 죽였으므로 능지처사 시켰다.”(1418년)

“간부(姦夫)와 짜고 본남편과 시어미, 그리고 딸을 살해한 북청 여인 금슬을 능지처사했다.”(1439년)

무슨 이야기인가. 해동의 요순이며, 그 누구보다 백성을 긍휼히 여겼다는 세종대왕 때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은 자가 60명에 달한다는 것이다.

기자가 <세종실록>에서 ‘능지처사’, ‘능지처참’, ‘거열’ 등의 단어로 검색해보니 능지처사 51명, 능지처참 7명, 거열 2명이 검색됐다.

이들 가운데 절대다수(58명)는 주인과 부모, 남편을 살해한 이른바 강상죄인들이었다. 모반이나 대역 죄인은 2명에 불과했다. 물론 신분과 효를 최고가치로 여기는 유교국가에서 패륜의 범죄인 강상죄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 것은 맞다. 하지만 그래도 능지처사는 심하지 않을까.

1424년(세종 6년), 임금은 “백성이 법을 어기더라도 형벌은 조심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런데 바로 이날 임금은 병든 남편을 죽이고. 주인의 아들을 살해한 범인 2명을 능지처사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너무나 다른 얼굴이 아닐 수 없다.

또 있다. 세종은 장인을 독살한 사위와, 그 독살 사실을 알고도 방관한 피살자의 딸, 그리고 후처를 능지처사시킨다. 그러나 장인을 죽인 사위가 능지처사 당하는 것을 그렇다치지만 살해를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딸과 후처까지 능지처사라는 극형을 내린 것은 너무 심한 판결이 아닌가.  

 

■고문에 허위자백까지 받아낸 세종
심지어 1430년(세종 12년), 내연남과 공모해서 본남편을 살해한 원비라는 여인이 능지처사를 당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기록한 <세종실록>을 보면 묘한 뉘앙스를 풍긴다.

“국문 때 원비에게 매질을 17차례, 압슬(壓膝)을 5차례나 했다. 그런데도 원비는 자백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은 나중에는 장형도 실시하지 않았는데도 자백했다. 사람들은 허위 자백이 아닌가 의심했다.”

결국 이 원비라는 여인은 무진 고문 끝에 허위자백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압슬은 무릎에 자갈을 깔고 널판을 올려놓은 뒤 사람이 올라가 짓밟는 고문이다.

여인에게 능지처사의 극형을 선고하고, 내연남에게는 그보다 한 단계 밑인 참수형에 처한 것도 실은 옳은 판단이라 할 수 있을까.

이쯤해서 사마천의 <사기> ‘혹리열전’을 떠올려본다. “법망이 촘촘할수록 백성의 간교함은 도리어 악랄해졌다”는 대목 말이다.

“법령은 다스림의 도구일 뿐이다. 진나라 때 법망이 치밀했지만 간사함과 거짓은 싹이 움트듯 일어났다.”
사마천은 이 대목에서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을 두고 “불은 그대로 둔채 끓는 물만 식히려 했기 때문”이라 했다.

“법망은 배를 집어삼킬만한 큰 고기도 빠져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너그러워야 한다.”

사마천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마디 더한다.

“법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릴 때 백성들을 무슨 일을 저질러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오로지 도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릴 때 백성들은 비로소 그 부끄러움을 알고 바른 길을 간다.”(<사기> ‘혹리열전’)

 

■불은 두고 꿇는 물만 식히려 한 세종
물론 공자는 “형벌 대신 도덕으로 다스리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한비자>가 “옛날 상나라의 법도엔 공중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는 그 손을 잘랐다(棄灰于公道者 斷其手)”고 하자 다음과 같이 말했단다.

“이것이 치국의 도리(此治道也)이니라.”

세종 시대에 사형수가 190명, 능지처참을 당한 이가 60명에 이른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한쪽 발 뒤꿈치 힘줄을 자르는 단근형도 모자라, 양쪽 뒤발꿈치, 아니 더나아가 왼발 앞쪽의 힘줄까지 자르게 된 상황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세종은 결국 사마천이 말한 대로 ‘불은 그대로 두고 끓는 물만 식히려 한(救火揚沸)’ 법집행에 머문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해동의 요순’답지않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대증 요법으로 창궐한 도적떼들을 없애려 한 것은 아닐까.

이 시간, 그 옛날 순임금이 관리들에게 입버릇처럼 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신중하라. 신중하라. 오로지 형벌은 신중히 해야 하느니라.(欽哉 欽哉 惟刑之靜哉)”(<사기> ‘오제본기’)

■정조 시대의 신중재판 

1807년, 전라도 강진 사또가 유배 중이던 다산 정약용에게 청을 올린다. 

"해결하기 어려운 자살사건인데, 검안보고서 좀 검토해달라"는 청이었다.

다산은 검안보고서를 들춰보았다. 24살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정씨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었다.

남편을 잃은 정여인은 어린 딸과 함께 수절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그런 정여인에게 눈독을 들인 남자가 있었다. 고을의 하급장교 김씨(45)였다.

자식이 없던 김씨는 정씨를 첩으로 들이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역적죄 혹은 강상죄 등 중죄인을 처벌할 때 가한 참형의 모습.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수록돼 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

그렇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았다.

 

사람을 보내 설득했지만 "수백마리의 소를 갖다주어도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고 퇴짜를 놨다.

 

김씨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야음을 틈타 정씨의 집에 침입해서 강제로 욕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것으로도 강간미수죄가 성립할텐데 김씨의 행동은 통제불능이 되었다. 

 "심사가 뒤틀린 김씨는 자신의 동료를 꾀었다. 허위로 정여인의 가족을 관아에 고발했다."

전형적인 스토커였던 것이다.

김씨의 사주를 받은 포졸들이 정씨집을 들이닥쳐 “오라를 받으라”고 소리쳤다.

정여인은 이 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번에 붙들려 가면 정절을 잃을 것이다. 살아 정절을 잃느니 차라리 죽어 정절을 지키겠다.’

정여인은 문을 걸어잠근 뒤 목을 매고 말았다.  그런데 이 검안보고서를 읽은 다산은 결정적인 실착을 저지른다.

‘스토커’ 김씨를 두둔한 것이다.

"아니 ‘자식이 없어 대를 이으려 했기에 단순한 정욕과는 다르다’고 한 것이다.

결국 ‘스토커’ 김씨는 ‘고의없음’이라는 다산의 대리판결 덕분에 유배형과 약간의 벌금형에 그친다. 

 

 

조선시대 검시장면. <사법제도연혁도보>에 수록돼 있다. 다산은 법의학을 통한 철저한 수사를 누누이 강조했다.|서울대 중앙도서관 소장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
다산인 훗날 <흠흠신서>를 쓰면서 이 때의 판결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한 여인을 겁박하여 죽음으로 내몬 ‘스토커’ 김씨를 구명해준 격이 됐기 때문이다.

 

반성의 시간을 가진 다산은 "백성들이 원통함을 호소해도 목민관이 법을 모르니 아전이나 향리에게 맡겨버린다"고 오로지 백성을 위한 수사와 판결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백성들은 이들의 노여움을 살까봐 억울한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게 된다는 것이다.


 

다산의 지론은 ‘법은 그 마음을 처벌한다’는 것과, 원칙을 지키면서 입법취지에 맞는 시의적절한 판결을 내리는 이른바 ‘시중(時中)’의 정신이었다.

 

■‘화간’은 사형죄가 아니다.
다산은 화간(和姦)하다가 실수로 내연녀를 죽인 남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한 중국의 판례를 비판했다.

 

우선 ‘화간’을 사형에 처한 예도 없었다. 다산은 특히 “남자가 살인할 ‘마음’이 없었으므로 사형에 처하는 것은 법적용의 잘못”이라 강조했다. ‘결과’보다는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다산은 또 법의학을 토대로 한 철저한 수사도 누누이 강조했다.

 

1785년 경기 고양에서는 묏자리 시비 끝에 집안끼리 싸움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집단구타 당하던 이경구라는 사람이 밤중에 도망가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에 경기관찰사는 이경구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지면서 목뼈가 부러져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순실족사’로 처리한 것이다. 하지만 다산은 부러진 목뼈에 주목했다.

 

“스스로 떨어질 때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다리와 팔로 떨어진다. 검안서를 보면 사고자는 목뼈가 부러졌을 뿐 다리, 발엔 상처가 없다. 이경구는 실족사가 아니라 떠밀려 머리로 떨어진 것이다.”

 

■자살여인에게 웬 정절문?
다산은 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다”며 맹목적인 자살을 맹비난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다산의 6촌 아우가 죽자 그 아내가 남편을 따라 자살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려문을 세워 아내의 정절을 기려야 한다“며 관아에 신청서를 내려 했다. 그러자 죽은 6촌 아우 집안에서 다산을 찾아와 ‘추천서’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다산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유없이 남편을 따라 죽는 행위는 바른 의리가 아닙니다.”


다산은 1778년, 황해도 재령의 최여인 사건도 특히 주목했다. 최여인은 천척의 전답에서 이삭을 주으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오촌 숙부가 그런 최여인을 ‘쌀을 훔쳤다’며 도둑으로 몰았다.

 

그러자 이를 비관한 최여인은 자식은 물론 조카들까지 데리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7명이 죽은 것이다. 정조 임금은 이 사건을 처리하면서 최여인을 비롯한 7명을 죽음으로 내몬 오촌 숙부를 원인제공자로 지목,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다산은 정조의 판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다산은 최여인이 느꼈던 오욕의 정도가 과연 7명의 목숨을 빼앗을만큼 심했냐는 것이었다. 그 정도 일로 쉽게 목숨을 끊고 다른 자녀들까지 희생시킨 최여인이야말로 살인죄로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죽여야 할 상놈?’
그러나 <흠흠신서> 다산 역시 신분질서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컨대 전라도 함평에서 상민이 양반에게 맞아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술에 취한 상민이 길거리에서 욕설을 퍼붓는 등 행패를 부리자 안승렴이라는 양반이 이 상민을 잡아갔다.

 

양반은 이 상민을 결박해 넘어뜨리고 마구 구타했으며 오물을 입에 붓고 나막신으로 머리를 때렸다. 상민은 결국 사망했다. 가해자인 양반은 사형당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강진의 유배지에서 사건 보고서를 읽은 다산은 이 양반을 살인자로 취급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언급한 내용이 후세의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세상에서 가장 가증스러워 죽여야 할 이는 도리에 어긋나는 상놈들이다.~ 양반 안승렴은 공공이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한 마을을 위해 도리에 어긋난 흉악범을 없에 모든 이의 치욕을 없앴으니….”

‘가증’ ‘죽여야 할 상놈’…. 이것이 다산의 언급이 맞는지 눈을 씻어 의심할 뿐이다. 당혹스러운 것은 또 있다.

 

 “‘평(平)’이란 저울질이며, 마음 속에 먼저 하나의 저울을 갖고 있다면 공평(公平)할 수 없다”며 공평한 법집행을 주장한 이가 바로 다산이었으므로….

그러나 다산과 정조가 살던 시대는 유교가 정신을 지배했던 조선사회였다. 다산은 발 그 조선시대의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의 잣대로 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몇년전 다산의 <흠흠신서>로 분석한 책의 이름이 출간됐느데,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책문)였다.

 

안성마춤이다. 다산은 다산의 시대에 맞는 당대 조선의 정의를 말하고 있다. 

 

해동의 요순이라는 세종 시대에 사형수가 넘쳤다? 당황스러운 일이다. 만약 세종에게 정약용 같은 신하가 있었다면 그래도 좀 나아졌을까. 그래서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하지 않던가. 고기(어진 신하)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물(임금), 바로 그 물과 고기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저작자 표시
신고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