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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숙종, 영조, 정조가 북한산성에 오른 까닭

18세기 <해동지도>. 한양도성과 함께 북한산성까지 그려놓았다. 숙종은 1711년 성곽을 완성시킨 뒤 연잉군(영조)의 손을 잡고 북한산성에 올랐다. 원래는 도성 북쪽의 직선로를 따라 올라야 했지만, 길이 험해 서북쪽 길로 올라갔다. 내려올 때도 대동문을 통해 수유리쪽으로 길을 잡았다, 백성들의 하소연을 들어주기 위한 행차였다. |경기문화재단 제공    

 

 “(북한산성) 대서문 입구에서 뒤돌아보니~시름 절로 풀리네. 도성의 지척에 금성탕지 있으니 내 어찌 서울을 지키는 백성을 버릴 수 있으리.”(숙종의 북한산성 행차 기념시)
 1712년4월10일(음력) 아침, 임금(숙종)이 막 수축을 끝낸 북한산성 행차에 나섰다.
 북과 피리소리가 울려퍼진 가운데, 기병 수천명의 호위를 받은 왁자지껄한 ‘행행(行幸)’이었다.
 연잉군(당시 19살·훗날 영조)이 부왕을 따랐다. 원래 최단거리는 도성 바로 북쪽의 창의문(자하문)을 지나 대남문(혹은 대동문)을 통해 오르는 것이었다. 전쟁 혹은 쿠데타와 같은 비상사태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평시의 행행인데, 임금이 가파른 길로 올라갈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산을 한바퀴 돌아 서북쪽(북한산 초등학교 입구쪽) 평탄한 길로 접어든 것이었다.
 임금은 막 공사를 끝낸 산성을 ‘금성탕지’라며 흡족해 하면서도 노파심에서 한가지 지시를 더 내린다. “이곳(서문) 쪽이 조금 낮구나. 이중성을 한번 더 쌓아야겠구나.” 

 ■“과연 천험의 자리일세!”
 “행궁(行宮)에 이르니~시단봉(柴丹峯)이 바로 동쪽이네.~동장대에 오르니 무수한 봉우리가~구름에 접했네. 도적과 비도(非徒)가 감히 다가올 수가 없고, 원숭이들이라 해도 기어오를 수 있을까.”(숙종의 시)
 숙종은 완공을 눈앞에 둔 행궁(임금의 임시거처)을 둘러본 뒤 맞은 편 동장대에 올랐다. 절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과연 천험(天險)의 자리로세!”
 동장대는 산성 수비의 총지휘소였다. 백운대와 만경봉, 노적봉이 지호지간이고…. 무수한 봉우리를 둘러싼 안개와 구름, 그리고 구비구비, 까마득한 계곡 사이로 꼭꼭 숨겨진 행궁이 눈 앞이고…. 숙종의 말마따나 ‘도적과 외적은 물론 원숭이조차 오를 수 없는 금성탕지’였던 것이다. 동장대에 선 숙종의 감회는 새로웠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우여곡절 끝에 쌓은 요새였던가.
 북한산성은 예로부터 ‘보장처(임금과 조정의 도피처)’로 각광받았던 곳이다. 고려 우왕 때(1388년) 최영 장군이 요동정벌을 도모하면서 이곳에 산성을 수축한 적도 있었다. 조선조 선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6년, “전쟁이 10년 안에 그칠 가망이 없으며, 100년 뒤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며 “삼각산(북한산) 밑에 산성을 수축하는 방법을 찾자”고 했다.
 이 때 북한산을 답사한 병조판서 이덕형은 “과연 천험만전의 지세”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전란 중이어서 백성들을 동원해서 산성을 쌓을 여력이 없었다. 이후 광해군~효종을 거쳐 숙종 즉위년(1674년)에도 꾸준히 제기되던 북한산성 축조론은 1703년(숙종 29년)부터 공론화 됐다. 도성(한양도성)이 너무 넓고, 남한산성과 강화도는 강과 바다를 건너야 하므로 ‘보장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특히 전쟁이 나자 백성을 버리고 도망갔고(임진왜란), 창졸간에 강화도가 함락되어, 고립무원의 남한산성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던(병자호란) 쓰라린 과거가 있지 않은가. 이 뿐인가. 인조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또 한 번 도성을 버리고 공주로 줄행랑을 치지 않았던가.

 

행궁은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동장대. 백운대와 만경봉 등 깎아지른 듯한 북한산의 위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숙종과 영조, 정조가 올라와 감탄을 했던 곳이다.   

■“백성과 함께 지킨다”
 “(임진왜란 때) 의주까지 파월(播越)했을 때 망극한 일이 많았다. 더구나 오늘날 인심이 결코 도성을 떠나 멀리 갈 형세가 될 수 없다.”(<숙종실록> )    
 숙종은 ‘믿고 따라오는 백성들을 끝내 버리지 않았던’ 유비(촉)의 고사를 떠올리며 “도성민이 나의 적자(赤子)인데 난리를 맞았다고 어찌 버리고 가겠느냐”고 했다. 숙종의 논리는 바로 ‘백성과 함께 지킨다’는 ‘여민공수(與民共守)’를 바탕으로 한 전통의 ‘청야술’이었다. 도성을 지키되 여의치 않으면 백성들이 모두 산성에 들어가 최후항전을 벌인다는, 고조선·고구려 때부터 채택해온 전략·전술이었다.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과연 위급한 시기에 모든 도성민(19만명 추정)이 산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할 경우 도성의 종묘사직과 백성들을 모두 적에게 내어주는 격이 아닌가. 차라리 한양도성을 수축하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하는게 아닌가. 더구나 당시 한재와 수재 등 잇단 천재지변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었다. 행사직 이인엽은 “환난에 대비하려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킴으로써) 도리어 난만 부를까 걱정된다”고 반대했다. 팽팽한 논쟁을 종식시킨 것은 숙종이었다.(1711년)
 숙종은 “여러분들의 의견 수렴을 기다리다가 이미 적군이 강을 건너겠다”(<비변사등록>)고 짜증을 내면서 산성의 축조를 최종결정했다. ‘선조 때부터’라면 215년, ‘숙종 즉위년부터’라면 37년의 기나긴 논쟁이 종식된 것이다, 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용암봉~문수봉…원효봉~영취봉 등 깎아지른 봉우리들을 굽이굽이 연결, 총 둘레 12.7㎞의 산성을 완성했다.  

북한산성 행궁지 사진, 1902년 무렵의 사진이다. 행궁은 그 어느 쪽에서도 노출되기 어려운 금성탕지에 조성됐다는 소리를 들었다.|경기문화재단 제공

■1500여명의 국왕 친위대
 군기가 바싹 들은 삼군문(수도방위사령부) 병사들이 구간별로 사역했으니 불과 6개월만에 끝났다. 임금의 도피처인 행궁도 건설됐다. 동장대(지휘소)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 짓다보니 북동향이 됐다. 군량미 10만석을 쌓을 식량창고도 8곳 마련했다. 특히 식량이동의 불편함을 호소하는 바람에 산성 밑 평지에 8만석 규모의 대규모 창고를 마련했다. 이곳이 ‘평창(平倉·평창동의 유래)’이다. 산성의 내부에 기존의 증흥사 외에 새로운 사찰 10곳과 암자 2곳을 세웠다. 괜한 사찰이 아니었다, 산성을 지키는 이른바 ‘승영사찰’이었다. 수방사격인 삼군문의 병사들 만으로는 산성의 수비가 불안했기 때문에 승병들이 동원됐다.
 정규군(삼군문)은 성곽의 주요진출입로와 창고를 방어하고, 승병들은 성곽의 암문 등 허점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이덕무가 북한산성을 둘러보고 남긴 기행문을 보자.
 “보광사에 도착했다. ~승려들은 모두 군사와 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고, 벽실에는 창·칼·활·화살 등을 저장하고 있었다.”(<청장관전서>)
 그러니까 1500명이 넘은 삼군문 병사와 승병들이 국왕의 친위대 노릇을 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런 말도 나온다. 북한산성은 외침이 아니라 내란, 즉 민란이나 쿠데타 방지용 도피처가 아닌가.
 앞서 언급한 숙종의 기행시 가운데 ‘도적과 외적이 감히 다가올 수 없고~’라며 ‘도적’을 언급한 대목이 심상찮다. 사실 당시의 시절은 하수상했다. 전국을 강타한 자연재해 때문에 유민이 대거 발생했다. 먹고 살 길이 없던 유민들은 무작정 상경했다. 1648년(인조 26년) 10만 명 남짓이던 서울의 인구는 69년 후인 1717년(숙종 43년) 19만 명으로 급증했다.  

<숙종의 어제시>

 깊은 생각 끝 궂은 비 무릅쓰고 새로 쌓은 북한산성 올랐네. 새벽에 남문 나오자 북소리 피리소리 울려퍼지네. 날랜 기병 수천명 대오 이뤄 호위하니, 훈풍이 불고 해는 길어 어느 덧 여름이 되었구나.
 서문으로 들어가 고개 돌려보니 왕성하고 웅장한 기운 포부 내 맘 속 시름 절로 지워지네. 도성의 지척에 금성탕지 있으니 내 어찌 백성을 버려 서울을 지키지 않으리오.
 도성 10리 거리 행궁 이르니 높고 험한 시단봉이 바로 동쪽이구나. 노적봉 머리엔 아직도 구름이 걷히지 앟고 백운대 위는 안개가 여전히 덮여있구나.
 하늘 위 저 동장대에 오르니 무수한 봉우리 운연과 맞대어 가프르게 서있어 도적과 비적이 감히 다가올 수 없고 원숭이라도 가까이 하기가 어려울 것이네.
 호송 군사의 선진은 이미 되돌아 나갔고, 성 동쪽으로 어가 나오니 또한 험하구나.
 서서히 가며 주위를 돌아보니 형승이 다체롭구나. 더구나 이 맑은 강의 흥취도 홀로 하지 않으니
 사찰 길 지나니 봉우리가 이뤄져 있고 평탄한 길 나오네. 풍진이 눈 앞에 자욱하고 해는 저물어가네. 백성들이 수풀처럼 모여 깃발을 바라보도 억울함 품은 모든 사람들 어가 앞에서 하소연 허락하였네.

■쿠데타 걱정에 밤잠 못이룬 임금
 온갖 흉흉한 소식이 난무했다. 1697년(숙종 23년)엔 경기 광주의 백성 수백명이 대궐 앞에서 출퇴근 하던 관리들을 막고 농성하는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광주 백성들이 대궐 앞에서 관리들의 출퇴근을 막고 ‘먹을 것을 달라’고 호소했다. ~백성들은 수어사 이세화의 집에서 밤샘농성을 한 뒤, 그의 집에 들어가 군관을 집단구타하고….”(<숙종실록>)
 여기에 요승 여환이 “미륵의 세상이 와서 용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관한다’는 등의 해괴한 소문을 퍼뜨리다 적발되기도 했다.
 “양주 청송면(연천 대전리)에 한 요사스러온 자(여환)가 있어 민간에 왕래하면서 스스로 신령(神靈)이라 일컫고 도당(徒黨)을 모아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하고 있는데…. 여환은 ‘미륵의 세상이 오는데~ 이 세상은 영원할 수 없고 용이 곧 아들을 낳아서 나라를 주관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양주에서 정씨 성인 여자무당 계화의 집에 머물며 자신의 처를 용녀부인이라 했고, 계화를 정성인(鄭聖人)이라 했다.”(<숙종실록>) 여환에 퍼뜨린 괴서에는 “(1688년) 큰 비가 퍼붓듯 내리면 산악이 무너지고 도성이 탕진할 것이며, 9~10월 쯤 군사를 일으켜 도성에 들어가면 대궐 가운데 앉을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민심이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무렵 출몰한 장길산이 중국인 출신의 승려 무리와 결탁해서 조선과 중국에서 반역을 일으킨다는 소문도 횡행했다.
 “(1697년) 운부라는 중국 송나라 후예의 중이 있는데, 장길산의 무리와 결탁해서 진인(眞人)들인 정씨와 최씨를 얻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나라를 평정해서 정씨 성을 왕으로 세운 뒤 중국을 공격하여 최씨 성으로 왕을 세우겠다고 했답니다.”(<숙종실록>)
 이 뿐인가. 지금의 폭력조직인 검계가 들끓었고, 그들 가운데는 포도청 수감 중 칼로 가슴을 베는 등 자해공갈의 패악을 저지르는 이들도 있었다.
 “도하의 무뢰배들이 검계를 만들어 그 걱정거리가 외구보다 심할 듯합니다.… 포청에 잡힌 검계 10여명 가운데 가장 패악한 자는 칼로 살을 깎고 가슴을 베기 까지 하면서 온갖 흉악한 짓을 다 합니다. 느슨하게 다스려서는 그 걱정거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저 우두머리를 중법으로 처결하고….”(<숙종실록>)
 지금의 떼강도 격인 명화적도 전국에 출몰했다.
 “(1703년) 명화적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여행을 가지 못하고 장사꾼의 발길이 거의 끊어지게 됐습니다. 이 자들은 거지나 좀도둑 무리가 아닙니다. 떼로 몰려다는 강도입니다.”(<숙종실록>)
 여기에 잦은 환국(정권교체)으로 번갈아가며 대신들을 죽이고 살리기를 반복한 숙종으로서는 혹 있을 지도 모를 쿠데타도 염려해야 했다.
 반면 외침의 우려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17세기 후반 청나라 강희제의 치세동안 중국은 청국의 실질적인 통치아래 놓여 안정을 찾았고, 조선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1702년(숙종 28년) 좌의정 이세백은 숙종임금에게 고하는 내용이 이를 반영한다.
 “지금 남북에 근심이 없지만 도적이 치성하고 있으며, 천재가 심해 흉년이 들어 민심이 불안합니다.”(<비변사등록>)
 즉 남(청나라), 북(왜적) 등 외적의 침입보다는 내부의 도적이 더 큰 근심거리라는 것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숙종으로서는 외침은 물론이고, 혹 일어날 수도 있는 내란에 대비하고자 한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은 금성탕지를 조성해놓은 것일테니까….  

숙종이 행차를 마치고 내려간 대동문 구간. 성곽길을 따라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을 통하면 도성북쪽(구기동 평창동)으로 직접 통할 수있었지만 통로가 너무 험했고, 또 백성들의 사연을 들어주기 위해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경기문화재단 제공   

 

■백성과 소통하다
 “해는 저물어가고…. 숲처럼 모인 백성들 어가행렬 바라보고~사람들의 억울한 사연을 모두 허락했네.”
 확 트인 동장대에서 긴 숨을 들이 쉰 숙종의 어가행렬은 막 조성된 성곽을 따라 대동문으로 빠져나왔다.
 역시 녹록치않은 길이었지만, 천천히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도성암(수유리)을 지나 평지로 내려왔다.
 어가행렬이 최단거리, 즉 대성문~대남문~구기동~창의문~도성을 통하지 않고 우이동 계곡으로 우회 하산한 까닭이 있었다. 우선 어가행렬이 능선을 따라 막 조성된 성곽길을 따라 대성문~대남문을 통해 내려오기는 벅찼다. 지금 이 순간도 설치해놓은 동아줄을 잡고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하는데…. 내관들이 교대로 임금을 업고 모시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숙종이 우회로로 내려온 더 큰 이유는 백성들과의 소통이었다. 백성들과 직접 만나는 드물었던 예전에는 임금의 행차가 그런 역할을 했다. 볼거리가 적었던 때여서 수천명의 수행원과 수천필의 말이 동원되는 임금의 행차는 국가적인 이벤트였다. 예컨대 정조는 1779년(정조 3년) 여주행궁에 행차하면서 대신들이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 행차 때 이렇게 많은 ‘구경하는 백성(觀光民人)’을 처음 본다고 하는데…. 저렇게 많이 모인 자가 다 내 백성인데…. 한 사람이라도 한탄하는 이가 없도록 하라.”
 정조는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 즉 ‘관광민인(觀光民人)’을 막지 마라”고 한 것이다. 임금들은 또 이 이벤트를 ‘과시용 행차’로 여기지 않았다.   
 숙종도 1675년, 사직단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면서 “임금의 행행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달래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숙종실록>)
 숙종은 이날도 해가 저물기 전에 서둘러 내려와 어가를 가로막고 궁핍한 삶과 억울한 사연을 풀어놓는 백성들의 하소연을 일일이 들어준 것이다.

 

 ■숙종-영조-정조가 걷던 길
 1772년(영조 48년) 4월10일, 영조가 다시 동장대에 올랐다. 연잉군 시절 부왕(숙종)을 따라 북한산성에 오른 바로 그 날이었다. 이미 79살 호호백발인 영조로서는 무리한 등반이었다.
 그러나 부왕의 북한산성 등정 60주년을 추념하기 위한 행차였으니 강행했다. 그는 ‘도성 이북의 금성탕지, 한양을 수호하는 우뚝 솟은 봉우리’와 ‘호위하는 군사들의 늠름한 모습’을 노래했다.
 영조의 곁에는 20살의 왕세손(정조)이 있었다. 60년 전의 부왕(숙종)처럼…. 정조는 이미 연로한 할아버지(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정조 역시 한 수 읊었다.
 “임금 호위하는 어가, 말타고 돌아가는 산성 길, 구불구불 가파르기도 해라. 하늘 높은 기세는 세바위 봉우리로 솟고 땅 위 경치는 두 장대가 으뜸이라. ~여유로운 오늘 행차 느긋한 일도 많았는데, 어느 새 앞 숲에는 석양이 쌓이네.”
 다시 그후 100여 년이 지난 뒤, 조선은 ‘어느 새 쌓여가는 석양’을 간파하지 못한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왕국이 멸망의 길에 접어들었지만, 누구도 ‘천험의 금성탕지’에서 결사항전하자고 외치는 이가 없었다. 조선과 북한산성은 그렇게 흙먼지 속에 묻히고 말았다. 지금 기자가 걷고 있는 바로 그 ‘숙종 임금의 길’에도 흩날리는 낙엽과 함께 석양이 무섭게 쌓이고 있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조윤민, <성(城)과 왕국>, 경기문화재단 펴냄, 주류성, 2013년
 이근호, <18세기 전반의 수도방위론>, ‘군사(軍史)’, 국방부, 1998년 
 안샘이나, <조선시대 조정수호를 위한 성곽도시의 축성론과 도시구조:강화성·남한산성·북한산성·수원화성을 중심으로>,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사논문,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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