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주민 최씨의 그물에 갈퀴 4개가 달린 쇠닻이 걸려 올라왔다.

길이 2m30㎝에 무게가 140㎏이나 되는 대형 닻이었다.

최씨는 “정치망 어장의 그물추로 쓰라”고 이웃 주민 박씨에게 건넸다. 박씨는 2㎞ 떨어진 죽도 해역까지 쇠닻을 끌고가 어장의 그물추로 썼다.

청나라 궁중화가 서양의 <고소번화도>. 신안선과 같은 모양의 닻이 그려져 있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4년 뒤인 1976년 10월부터 신안앞바다에서 보물선의 본격 발굴이 시작되었다. 박씨의 동생은 4년 전 이웃 주민 최씨로부터 선물받은 쇠닻의 존재를 떠올리고 즉시 신고했다.

전문가의 감정결과 송·원나라 시대에 사용된 중국제 닻이었다.

쇠닻의 크기와 무게에 비추어 볼 때 신안선의 규모가 400t에 이르는 중국산 대형무역선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발굴된 유물을 토대로 복기해보면 신안선은 1323년 여름 원나라 경원(닝보·寧波)를 출발해서 일본 하카다(博多·후쿠오카)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바둑과 장기, 주사위 놀이를 하던 탑승객들은 갑작스런 태풍을 만났을 것이다. 배는 갯바위나 암초에 걸려 걷잡을 수 없는 침몰의 순간을 맞았다.

즉 무언가에 충돌하면서 뱃머리 우현에 틈이 벌어졌고 그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물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다.

배는 서서히 물이 차면서 선수 우측부터 가라앉으며 갑판으로 물이 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태풍철인 6~7월에는 배를 띄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고 항해를 강행한 ‘인재’였을 가능성이 짙다. 

140㎏의 정박용 쇠닻도 이 때 속절없이 끊어져 수장되었을 것이다. 그후 7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쇠닻은 ‘찬밥’ 대우를 받았다.

2만5000점에 이르는 갖가지 형태의 도자기와 28t에 달하는 동전, 1000본이 넘는 인도·동남아산 자단목 같은 화려한 유물들이 쏟아졌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신안선 인근 해역에서 어부가 끌어올린 닻. 신안선의 닻이 확실하다,|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그런 탓인지 1976~87년 사이 정식 발굴 작업이 진행되는 사이에도 도굴범들이 신안앞바다를 누볐다.

도굴의 유혹에 빠진 어민들은 영농자금까지 대부받아 보물건지기에 나서기도 했다. 훗날 국회의장을 지낸 박희태 검사가 1976년 구속한 도굴범들의 경우 인양한 도자기를 1240만원(당시 쌀한가마니에 1만원)에 팔았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눈이 뒤집힐만 했다.

실제로 도자기 인양으로 떼부자가 된 어민이 다른 도굴범과 함께 수중작업에 나섰다가 익사하기도 했다. 감시선이 나타나자 도굴범들이 물속에 들어간 어민을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신종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12년간 언론에 보도된 신안도굴건수만 100건이 넘는다”고 말했다.

적발되지 않은 신안선 유물이 지금까지 정식 보고된 유물의 양(2만4000여점)에 버금갈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도굴범들은 도자기가 수장된 곳을 족집게처럼 짚어냈다고 한다.

그래서 발굴 초기에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도굴범이 발굴대원으로 ‘초대’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벌써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이야기가 됐다.

어쨌거나 당시엔 중요한 발굴로 평가받지 못했던 쇠닻이 특별전에 초대되는 대접을 받았다.

14일부터 전남 목포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45년 만의 재회, 신안선과 닻’ 특별전이 열린다.

지난해엔 신안선의 솥을 주제로 열린 ‘솥, 선상의 셰프’전 이후 두번째 테마전이다. 신안선엔 나막신 게타와 도자기, 장기말 등 기타 유물들도 많다. 이렇게 ‘기타 유물’ 만으로도 재미 쏠쏠한 전시회를 열 수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