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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세종대왕도 말릴 수 없던 '소주 한잔'의 유혹

성인 1인당 1년에 소주 85병을 마신다는 2016년 통계가 있다.

일주일로 따지면 1.26병이요, 하루에 0.23병이다. 소줏병을 늘어놓으면 서울~부산(428킬로미터)을 1708회 왔다갔다 할 거리라고 한다. 거두절미하고 전국적으로 1년에 34억병의 소주가 팔렸다니 대한민국은 가히 '소주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세종이나 영조 같은 이들도 '쐬주 한잔'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소주를 어떻게 금하냐.' 

1736년(영조 12년) 영조 임금이 야대(밤중에 베푸는 경연)를 끝내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렸다.

그 때 검토관 조명겸이 임금에게 쓴소리를 던졌다. 

“세간의 여론을 들어보니 성상(임금)께서 술을 끊을 수 없다고들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바라건대 조심하시고 염려하시며 경계하소서.”

요컨대 '술 좀 작작 마시라'는 것이었다. 지존이라는 군왕이  신하들의 성화 때문에 소주 한 잔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웃기는 것은 영조의 군색한 변명이다.

“아니다. 그저 목 마를 때 간혹 오미자차를 마신다. 아마도 남들이 그걸 소주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겠지.” 

신하의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술이 아니라 오미자차다"라고 한 것이다.
1433년(세종 15년)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의 폐해를 조목조목 논한다. 

“예로부터 술 때문에 몸을 망치는 자가 많습니다. 신이 벼슬에 오를 때는 소주를 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집집마다 있습니다. 게다가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이가 흔합니다. 금주령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나 세종은 난색을 표한다.
“엄금 한다고 무슨 소용이겠느냐. 막지 못할 것이다.(雖堅禁 不可之也)”
이조판서가 “추상같은 금주령을 내리면 근절시킬 수 있다”고 재차 고했다. 그러자 세종이 마지못해 한마디 덧붙인다.
“그러나 술을 금하기는 정말 어렵다. 대신 과인이 주고(酒誥·술을 경계하는 글)를 지어 내려주겠다.”
하기야 세종의 말이 그럴듯 하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쐬주 한 잔의 유혹’을 어느 누가 막는다는 말이냐.

 

신윤복의 풍속화인 '유곽쟁웅'. 술집에서 만취한 남자들이 싸움을 벌인다는 내용의 그림이다. 웃통을 벗어던진채 한바탕 주먹다짐을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렸다.|간송미술관   

■기생과 소주판을 벌인 고려 장군의 말로

사실 소주는 한국을 대표하는 술이지만, 처음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다. 
기원전 3000년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이 처음 제조했다.

이 증류주는 지금도 아랍지역에서 ‘아라끄’라는 명칭으로 전승되고 있단다. 1258년 몽골 정벌군이 압바스조를 공략할 때 이 술의 제조법을 배워갔다.

몽골군은 일본 원정을 위해 고려의 개성과 안동, 제주도에 양조장을 만들었다. 원정군이 이곳에서 만든 소주를 가죽 술통에 넣어 휴대용으로 마신 것이다.

왜 지금까지 안동소주가 유명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고려인들은 ‘물처럼 맑고. 맛은 매우 진하고 강렬한’(<본초강목(本草綱目)>) 소주에 단번에 매혹됐다.

예컨대 1376년 경상도원수 겸 도체찰사인 김진은 부하 장수들과 함께 기생들을 모아 밤낮으로 소주파티를 벌였다. 

휘하장병들이 소주에 빠진 김진 일당을 ‘소주도(燒酒徒·소주의 무리)’라 하며 혀를 찼다.

이듬해 왜구가 합포영(창원지역)을 불사르고 유린했다.

하지만 김진의 휘하병사들은 "출전하라"는 명에 콧방귀를 뀌었다.

“저희가 뭐하러 갑니까. 저 소주도라는 인간들을 시켜 적을 무찌르라 하시든가요.”

장병들이 출동하지 않자 김진은 혼자 줄행랑을 쳤다.

김진은 결국 평민으로 강등됐다.  

 

■소주 좀 보내달라고 애원한 대마도주 
조선왕조에서도 소주는 폭넓은 사랑을 받았다. 

임금은 종친과 신하들에게 소주를 즐겨 하사했다. 
태종은 2차 왕자의 난에서 패한 뒤 귀양을 갔던 넷째형 방간에게 소주 10명과 안주를 하사했다.(1417년)

세종은 세자의 자리를 내놓은 뒤 멋대로 살았던 형(양녕대군)에게 향온과 소주를 내려주었다.(1433년)

왕위를 동생들에게 내준 형들에게 소주 한 잔 대접한 것이다.
소주를 약으로도 썼다.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1552년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단종에게 소주를 권했다. 어린 임금에게 왜 소주를 권했을까.

부왕(문종)의 장례를 치르면서 허해지고, 기운이 약한 것을 보충해주려 한 것이다. 

“주상께서 나이가 어리셔서 혈기가 정하지 못하니 타락(우유)를 드시옵소서. 또 여름 달이라 천기가 지고 무더우니 소주를 조금 드소서.”

조선소주는 외교무대에서도 크게 사랑받았다. 

1429년(세종 11년) 명나라 사신 여창성은 중국황제에게 ‘바칠’ 진헌물목을 쓰면서 ‘소주 10병을 올리라’고 요청했다. 또 성종은 명나라 황제에게 홍소주와 백소주 각각 10병씩을 특별히 보냈다.(1480년)
또 대마도 정벌 이후에는 대마도주에게 보낼 하사품 목록에서 소주는 빠지지 않았다. 1435년(세종 17년) 대마도주 종정성이 사신을 보내 간청했다.     

“제가 농사에 실패했습니다. 기근이 쌓여 매우 곤란한 상황입니다. 쌀과 소주를 보내주십시요.”

웃기는 일이다. 농사가 실패하고 기근에 시달린다면 쌀만 달라고 하면 될 일인데, 무슨 소주인가.

대마도주가 얼마나 조선의 소주를 좋아했는지 기근 핑계를 대고 소주를 청한 것이다. 세종은 못이기는 척 소주 20병을 내려주었다.

 

구한말 술판을 벌이고 있는 장면. 흐트러지지 않고 격조있는 술자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성계의 장남은 왜 소주 먹고 죽었을까 

조선왕조실록을 소주를 마시고 죽는 사례와 소주를 이용해서 사람을 살해하는 장면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첫번째 희생자는 다름아닌 태조 이성계의 맏아들(이방우)였다.

“태조 4년(1393), 술을 너무나 좋아해서 매일 마셔댔다. 이방우는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

중중 10년(1515) 제주 목사 성수재는 너무 소주를 좋아해서 병을 얻어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중종실록>의 사관이 안타까워 한다.

“성수재는 일찍 무과에 장원급제한 자못 청렴하고 유능해서 임금이 크게 쓰려고 했다. 하지만 소주를 너무 좋아해서….”

1526년에는 이세렴이라는 이가 소주를 폭음하는 바람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래도 이 사람들은 술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단순사건’이라 치부할 수 있다.    
 

■남편 살해에 폭탄주를 사용했다

1536년(중종 31년)의 일이다. 황간현(충북 영동) 사람인 오여정이 그만 넘지 못할 선을 넘고 말았다.

아버지(오찬)의 첩(돌지)과 정을 통한 것이었다. 점점 대담해지는 간통행각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간통사실을 들킨 남녀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아비를 죽인 뒤 경상도 지방으로 도주한 것이다.
내연 남녀는 변복을 하고 생선을 팔며 살다가 포도관에게 검거되고 말았다.

강상죄를 범한 오여정과 돌지는 극형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런데 <중종실록>에는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돌지가 남편을 죽였을 때 소주와 백화주를 사용(用燒酒及白華酒)했습니다.”(<중종실록>)

오여정이 철쭉을 담가 만든 백화주와 소주를 아버지에게 먹였다는 것이다.

철쭉은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성분이 들어있어 먹으면 안된다.

독성성분이 든 백화주에다 소주를 함께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실록이 더는 설명하지 않았기에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주와 백화주를 함께 사용해서 남편을 죽였다면 ‘소주+백화주’ 폭탄주 였을 가능성이 짙다.

 

■바람 핀 부인 때문에 폭음한 뒤 사망한 남편

중종 29년(1534년) 영산(창녕 영산) 현감인 남효문이 소주를 폭음하고 사망했다. 그 사연이 기막힌다.

아들이 없던 남효문은 조카뻘인 자(남순필)를 수양아들로 삼았다.

그런데 괴상야릇한 일이 생겼다. 남효문의 아내와 수양아들 남순필이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어느날 남효문은 수양아들이 자기 아내에게 보냈다는 한글 편지를 입수해서 열어보고는 놀라 자빠졌다.
음란하고 더러운 말이 편지안에 가득 차있었다.

“기가 찬 남효문은 그 편지를 가지고 늙은 어머니와 함께 앉아 아내를 불러 추궁했다. 그의 아내가 더듬거렸다. 남효문은 화를 참지 못했다. 급기야 어머니와 붙잡고 통곡하다가 어머니와 함께 소주를 폭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효문은 죽고 말았다."

그러나 곧 진상이 밝혀졌다. 거짓편지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남효문의 첩이 정처를 모함하려고 거짓편지를 꾸며 일으킨 사달이었다.

하지만 남효문은 그 거짓편지를 철썩같이 믿고 노모와 소주를 마시며 한탄한 것이다. 그러다 죽어버린 것이다.             

동이족의 후예인 전국시대 중산국 유적에서 출토된 2300년 전의 술병.  

 

■소주 먹이고 남편 때려죽인 간통녀

내연남과 짜고 본남편에게 소주를 먹여 취하게 한 뒤 몽둥이로 때려 죽인 여인의 사연도 실록에 실려있다. 1491년(성종 22년) 소은금이라는 여인은 간통남(강위량)과 짜고 본남편(초동)에게 소주를 잔뜩 먹여 만취하게 만든 다음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는 것이다.

형조는 "내연녀 소은금은 능지처사, 내연남 강위량은 참대시(겨울에 사형시키는 형벌)에 해당된다”고 임금에게 고했다. 그러자 우의정 이극배 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변론했다.

“본남편이 소주 한 그릇만 마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5~6차례 구타당하면서도 소리도 지르지 못한 게 이상합니다. 함께 있었던 사람이 5~6명 이라는데 몰랐다는게 이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종의 판결은 추상같았다.

“계집은 남편을 죽이려고 소주를 준비해서 억지로 먹인 게 틀림없다. 마침 한밤 중이었던데다 너무 취한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한채 비명 횡사했을 것이다. 형조의 의견대로 둘을 극형에 처하라.”

 

■1924년 소주의 도수는 35도…

물론 지금도 과음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지만 실록에는 소주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례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소주가 얼마나 독했기에 그런 것일까.
전통의 소주는 원래 안동소주와 같은 증류식 소주였다.

원래 증류를 시작하면 처음엔 알코올 도수가 80~70% 정도인 독주가 나온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 알코올 도수가 내려가게 되어 45% 정도의 소주가 되는 것이다. 
일제시대 때인 1924년의 소주도수는 35도였다. 그러다 증류식이 아니라 희석식 소주가 나오면서 소주의 도수는 낮아지기 시작했다. 희석식은 양조주를 여러차례 가열해 여기서 나온 고농도의 에틸 알코올(주정)에 물과 첨가제를 넣은 방식을 사용한 방식이다.

이로써 30도(1965년)-25도(1973년)-23도(1998년)-20도(2006년)를 거쳐 지금엔 15.5도짜리 소주까지 출시됐다. 지금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보면 최소한 45도에 이르는 조선시대 소주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소주와 풍류객

이렇게 독했으니 그 폐해가 만만치 않았다. 1433년(세종 15년) 세종은 술을 경계하는 ‘금주령’의 교서를  내렸다.

"이 교서를 지방 관아의 벽에 걸어두고 늘 금과옥조로 삼으라."

말하자면 ‘금주해야 할 이유’ 등을 적어놓은 플래카드를 관아 벽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1491년(성종 22년) 성종은 의정부에 '금주령'을 내렸다.

“소주가 지나치면 사람이 상한다. 앞으로는 늙거나 병이 들어 약으로 복용하는 것을 빼고는 마시지 말도록 해라.”

그러나 어떻게 소주를 약으로만 쓰겠는가.

1657년(효종 8년) 효종은 사대부들의 못된 술버릇을 지적했다.

“이름난 벼슬아치라는 자들이 음주를 풍류로 여긴다. 심지어는 술을 마시지 않고 국사에만 전념하는 사람을 도리어 '잗단(하찮은) 무리'라고 지목하며 폄훼한다. 참 한심한 일이다.”

술꾼을 풍류를 아는 멋쟁이로 알고,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찌질이’로 폄훼하는 풍조를 비난한 것이다. 

 

중국 상나라 시대의 술잔. 동이족의 일파로 알려진 상나라는 술때문에 망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술을 사랑했다.

■소주 한 잔에 목숨을 바꿀뻔한 노비

하지만 술 끊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신분이 노비였어도 그랬다. 
1489(성종 20년) 전연사(典涓司)의 노비인 비라가 내의원의 홍소주를 훔쳐 마셨다는 혐의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하지만 성종 임금은 소주 한잔을 훔쳐먹은 죄 치고는 너무 중하다고 여겼는지, 감형처분을 내렸다.
한번은 1494년(성종 25년) 행호군(무관직 벼슬·재상에 해당) 경유공이 병든 첩이 요양간 집에서 집주인과 소주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때 사헌부의 하급관리가 급습해서 술을 마시던 경유공과 그 첩, 그리고 집주인을 긴급체포했다. 금주령을 어겼다는 죄목이었다. 그러자 임금은 혀를 끌끌 찼다.

“아니 그래 병든 첩이 요양간 집에서 술 한잔 했기로서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일국의 재상을 그렇게 업신여긴단 말이냐. 경유공 등을 체포한 관리를 국문하라.”

사헌부가 "그 관리는 업무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변호했지만 임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재상에게 너무 심한 처사였다"고 역성을 들어준 것이다.


■"술병에 걸렸다"는 갑골문

3300년 전의 갑골문에서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필이 과음 때문에 술병이 걸렸는데, 대왕의 분부를 받들 수 있을까요(畢酒才病, 不從王古)"

갑골문이 무엇인가. 중국 상나라 때 정인(貞人·점을 치는 관리)이 점을 치고 그 내용을 새겨넣은 것이다. ‘필’은 상나라 때에 중책을 맡은 신하였다.

정인은 술을 진탕 마신 뒤 술병이 단단히 걸린 필이라는 신하가 왕의 명령을 받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얼마나 술을 마셨으면 왕의 명령까지 이행할 수 없을 정도였을까.
상나라는 동이족의 나라였다. 술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동이족이 세운…. 오죽했으면 서주(西周)시대 청동솥인 ‘대우정(大盂鼎)’에 “상나라는 제후와 백관이 술에 절어 패망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을까.

술을 사랑하는 유전자를 갖고 있는 동이족에게 ‘물처럼 맑고, 진하고 강렬한’ 소주는 견딜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담배도 이미 끊었다.

경험칙상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술, 그리고 담배를 끊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