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7년 단옷날을 앞둔 초여름 날이었다.

36살의 다산 정약용이 훌쩍 도성을 빠져나갔다. 당시 승정원 좌부승지로 일했던 다산으로서는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다산은 <여유당전서>에 그 전말을 전했다.

“석류가 처음 꽃을 피우고, 보슬비가 깔끔하게 개자 불현듯 초천(苕川)에서 고기잡이 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여유당전서> ‘유천진암기’) 

초천은 다산의 생가(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 앞을 흐르는 실개천이다. 다산은 어릴 적 형제들과 뛰놀던 고향이 불현듯 떠오른 것이다. 일탈을 감행한 다산은 고향에서 형제들을 만났다. 오랜만에 회포를 푼 사형제는 다음 날 강을 가로질러 투망으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경기 남양주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의 생가. /실학박물관 제공

■사형제의 ‘추억여행’


“크고 작은 물고기가 모두 50여 마리였다. 작은 배가 감당을 못했다. (잡은 물고기가 너무 무거워) 겨우 몇 촌 정도만 남기고 잠길 정도였다. 배를 남자주(濫子洲·두물머리의 작은 섬)에 정박시키고 즐겁게 한바탕 배불리 먹었다.”

오랜 만의 추억여행에 들뜬 다산이 ‘낭만파’의 기분을 낸다.  

“옛날 장한(張翰)은 강동을 그리워하며 농어와 순채 이야기를 했습니다. 물고기는 이미 맛을 보았으니, 지금 산나물이 한창 향기로울 때인데 천진암에 가서 노는 게 어떻습니까.”

다산은 중국 진(晋)나라의 장한이 ‘고향(강동)에서 먹던 순채국과 농어회가 그리워 벼슬을 버린 것(蓴羹로膾)’을 예로 든 것이다. 장한처럼 벼슬을 버릴 수 없지만, 잠깐의 일탈은 즐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제안이었다. 천진암은 경기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 있는 사찰이었다. 다시 다산의 회고.

“우리 사형제는 일가 3~4명과 더불어 천진암에 갔다. 산 속에 들어가자 초목은 벌써 울창하였고, 산 중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향기가 코를 찔렀다. 온갖 새들의 울음소리가 맑고 아름다웠다. 길을 가면서 새소리를 듣고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 했다.”

절에 도착한 사형제는 ‘술 한 잔에 시 한 수 씩 지으며(一觴一詠以窮日)’ 지내다 3일이 지나서야 돌아왔다. 이 때 지은 시가 모두 20여 수가 되었고, 냉이과 고사리, 두릅 등 이 때 맛본 산나물도 5~6종이 되었다.”(<여유당 전서>)

다산이 형님들을 모시고 천진암에서 놀며 지은 시 가운데 한 편을 보자.

“바위 언덕 첩첩으로 절집을 싸고 있어/불경이며 향로가 모두 그윽하고 깊네/개울가 풀이 청·황·녹색으로 섞여 있고/산새들은 열에, 백에, 천가지 소리로세/~풍류와 문채도 신령한 곳이라야 제격이지/한나절 술잔 돌리고 한나절 시를 읊었네.(巖阿層壘抱祗林 經卷香爐深復心 澗草雜靑黃綠色 山禽交十百千音~風流文采須靈境 半日行杯半日飮)”(<여유당전서>)

참으로 대단한 풍류이다. 하기야 다산의 낭만파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은 이번 뿐이 아니었다.
1791년 여름날, 다산은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지인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혹독한 더위 속에 갑자기 먹구름과 함께 마른 천둥·벼락이 치기 시작했다. 다산이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났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징조네.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으려나. 가지 않겠다면 벌주로 술 열 병을 한꺼번에 주지.”

“이를 말인가. 좋은 얘기네.”

다산과 친구들은 마부를 재촉하여 창의문을 지나 세검정에 닿았다. 일행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고 서까래와 난간을 흔드는’ 계곡물을 스릴 넘치게 감상했다. 친구들은 질탕한 농지거리를 주고 받으며 술과 음식을 질펀하게 마시고 먹었다. 하지만 그 때의 일탈은 그야말로 애교에 불과했다.

 

다산 생가를 가로지르는 초천. 당시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일하던 다산은 초천에서의 고기잡이를 그리며 근무지를 무단이탈했다.


 

■다산은 ‘정조의 남자’


6년 뒤, 즉 ‘1797년의 일탈’은 명백한 근무지 이탈이었다. 다산 스스로도 그걸 너무도 잘 알았다.

“~법에는 벼슬하는 자는 임금을 뵙고, 고하지 않고는 도성 문을 나설 수 없었다. 그러나 뵙고 재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출발하여 초천으로 갔다.”

더욱이 당시 다산의 지책은 승정원 좌부승지였다. 승정원은 알다시피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비서실이다. 좌부승지는 병조의 일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다산은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비서실의 ‘국방수석’ 정도?

그런데 그런 요직에 있던 사람이 대통령에게 보고도 하지 않은 채 2박3일간이나 근무지를 무단이탈한 것이다. 만약 지금 그랬다 치자. 각 언론은 갖가지 해석을 붙여 ‘국방수석의 무단이탈’이란 제목으로 십자포화를 쏘았을 것이다. 그럴 만 하다.

다산은 정조 임금이 총애하던 사람이었다. 요즘 언론이라면 ‘정조의 남자’ 했을 것이다. 정조는 똘똘하고 재기 넘치는 다산을 아꼈다.

두 사람은 다산이 22살 때(1783년) 진사과에 합격한 뒤 임금을 알현한 자리에서 처음 만났다. 정조는 특별히 “다산에게 얼굴을 들라”면서 다산의 나이를 묻고는 재능을 인정해주었다.

그 뒤부터 다산을 아끼는 정조의 사랑은 끔찍했다. 24살 때인 1785년 다산은 초시(과거의 1차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본시험에서는 불합격했다. 예비고사 수석을 본고사에서 탈락시킨 것이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불합격 처리’는 다산을 담금질하려는 정조의 깊은 뜻이었다. 

“임금이 다산의 시험답안지를 읽게 하고 무릎을 치며 칭찬하기를 ‘네가 지은 것이 사실은 (과거시험의) 장원에 못지 않다. 다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사암연보>)

정조는 다산의 6촌 처남인 홍인호를 불러 “정 아무개 같은 사람은 반드시 재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다산은 모든 시험마다 죄다 수석을 차지했다.

“임금이 춘당대 식당에서 음식을 드시며 식당명(食堂銘)을 짓도록 하자 다산이 수석을 차지했다. 붉은 비점(批點·시문의 잘된 곳을 찍는 점)이 찬란했다. 다음 날 유생들을 성정각으로 불러 비궁당명을 짓도록 했는데 역시 수석이었다. 정조의 격려와 칭찬이 분에 넘칠 지경이었다.”

28살 때(1789년) 드디어 과거에 급제한 다산은 정조의 끔찍한 사랑으로 승승장구한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어느 날 정조가 병조에서 숙직하고 있던 다산을 찾아왔다. 임금은 돌연 ‘왕길사조사(王吉謝鳥詞)’라는 고루한 고전적인 시제를 내어주고 철언배율 100운을 새벽까지 지어바치라고 명령했다. 모두 다산의 재능을 시험하고 관각(館閣·홍문관, 예문관, 규장각)에 승진시키려는 국왕의 배려가 숨어 있었다.
다산은 임금의 기대에 부응했다. 비필(飛筆), 즉 일필휘지로 글을 지어 국왕의 칭찬을 받았다. 임금은 다산의 글을 여러 대신들에게 공개했다. 문신들은 다산의 글을 공개적으로 평가한 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의 만남을 ‘풍운지회(風雲之會)’라 한다. 훌륭한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나 서로 존경하고 믿으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우를 ‘어수지계(魚水之契)’라 한다. 물고기가 좋은 강물을 만나 활발하게 헤엄칠 수 있는 모습인 것이다.”(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정조와 다산의 관계가 바로 ‘풍운지회’이자 ‘어수지계’가 아닌가.

 

다산의 열초산수도. 다산이 고향마을 앞을 흐르는 한강(열수)에서 산수를 유람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조선판 매카시즘


임금은 그런 다산을 지근거리에 놓고 싶어했다. 1년에 3품계씩 뻔질나게 승진시키더니, 승정원(대통령비서실) 동부승지-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1796년)에 앉혔다. 다산이 고향의 추억을 잊지 못해 2박3일의 무단 이탈을 감행했을 때의 직책은 좌부승지였다. 또한 때가 어느 때인가.

천주교를 공부한 이력이 있는 정약용은 지금으로 치면 철저한 종교·사상 검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판 ‘매카시즘’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바로 그 때였다.
산이 1784년부터 자형인 이승훈과 이벽의 영향을 받아 서학(천주학)의 서적을 보았다. 이 때 나름대로 감명을 받았던 이력이 두고두고 발목을 잡았다.

1791년 다산의 외종형인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천주교를 믿고 선조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집어치운 죄목으로 사형을 당하는 일이 생한다. 이를 계기로 반대파들은 천주교를 서학(西學), 즉 사학(邪學)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다산과 이가환 등을 사학도로 지목한다.
특히 1791년 홍낙안이 좌의정 채제공에게 보낸 장서를 보면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다. 

“지금 총명하고 재주있는 선비들이 열에 여덟 아홉은 거기(邪學·천주학)에 빠져버려 남은 자가 거의 없습니다. 나라의 금법이 무서워 골방에서 모이던 자들이 이젠 백주대로를 멋대로 돌아다니며 공공연히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지한 하천민과 부녀자들은 한번 이 말을 들으면, 목숨을 걸고 뛰어든다”며 “영원한 천당 지옥설에 끌려 들어간 뒤에는 현혹된 것을 풀 길이 없다”고 ‘고발’하고 있다. 홍낙안은 “이를 방치할 경우 황건적과 백련교도의 난처럼 나라를 뒤흔드는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들의 괴수인 교주에게는 선물 꾸러미가 산더미처럼 쌓이는가 하면~ 이 무리들은 임금과 아비를 길가는 사람처럼 보니~이미 예악으로 감화시킬 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그는 조상의 신주를 스스로 불태운 윤지충의 죄를 ‘시역(弑逆)의 변괴’로 규정했다.

“~사학(邪學)은 아비도, 임금도 없으며 윤리를 무시하고 어지럽힙니다. ~마땅히 대로 변에 목을 매달아 놓고~ 역적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천주교를 삼강오륜을 범한 강상죄(綱常罪) 가운데서도 가장 극악한 ‘시역(부모와 임금을 시해하는 행위)’으로 본 것이다. 1795년에는 청나라 신부 주문모(周文謨)의 국내잠행-선교-탈주 등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다. 또 다시 다산 등이 탄핵의 대상이 된다. 정조는 할 수 없이 다산을 ‘금정(홍성)찰방(역첨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좌천시킨다. 지금으로 치면 ‘홍성역장’ 정도? 이 무렵(1797년 10월) 조진정이 언급한 다산과 이가환의 죄목은 다음과 같다.   

“아, 요즘 이른바 ‘사학(邪學)’은 세도(世道)에 해를 끼치는 것이 홍수나 맹수와 같습니다.~ 그런데 저 이가환과 정약용의 무리들이 몰래 서로 전하였으니 그들이 마음 속으로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정조실록>)

 

정약용 생가 앞을 흐르는 한강.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기에 두물머리라 한다.

 

■다산, 결국 반성문을 쓰다.


하지만 정조는 불과 5개월 만에 다산을 불러들였다. 이듬해(1796년) 12월 정적들의 곱잖은 눈초리 속에서 다산을 병조참지-우부승지를 거쳐 좌부승지로 승직시켰다. 그로부터 다시 5개월 후 5월 단옷날을 앞두고 다산은 2박3일 간의 ‘근무지 무단이탈’을 감행한 것이다.

당연히 살벌한 사상검증의 칼 끝이 다산을 겨누고 있었던 때였다. 그랬으니 얼마나 가슴 답답하고 힘겨운 나날이었겠는가. 다산은 이 ‘하수상한 시절’, 복잡한 심중을 훌훌 털고 형제들과 뒤놀던 어릴적 고향 땅으로 ‘무작정’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형제들과 천진암으로 놀러 가면서 남긴 시에서 심경의 일단을 밝힌다.

“~흐르는 물에 발 씻는 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臨流濯足知何意) 조선 천지 많은 먼지를 밟았기 때문일세.(曾踏東華萬斛塵)”(<여유당전서>)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시름 다 잊고 속된 말로 ‘잠수’ 타고 싶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산은 2박3일 간의 꿀맛 같은 ‘일탈’을 감행한 뒤 속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슬아슬 칼 끝을 걸어야 하는 정치의 세계였다.

다산이 속세로 들어온 지 불과 한 달도 안된 1797년 6월. 정조는 다산을 동부승지로 발령냈다. 반대파들의 아우성이 극에 달했다. 
그러자 다산은 자신을 ‘무조건’ 지지해준 정조 임금에게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그는 먼저 어릴 때 서양서적을 보았고, 한동안 서학의 교리에 마음이 이끌린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신은 약관의 초기에~ 소위 서양의 사설(邪說)을 보고 기뻐하면서 사모하며 여러 사람에게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설은~ 옛날에 보았던 책에는 없던 것이며, 승냥이나 수달도 놀랍게 여길 것입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약간이라도 있으면 어찌 마음이 무너지고 뼛골이 떨려 어지러운 싹을 자르지 않겠습니까.”(<정조실록>)

당시 서학의 ‘폐제지설(廢祭之說)’, 즉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강상의 죄, 시역의 죄와 같이 인륜을 저버리는 대역무도한 범죄행위로 지탄받고 있었다. 다산 역시 그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다고 자인한 것이다. 그러면서 한 때마다 서학에 빠진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했다.

다산이 고향 소천의 사계절을 읊은 ‘소천사시첩’, /실학박물관 제공


"양심이 회복되자 ~지난 날 좋아했고 사모했던 것들을 돌이켜 보니 허황되고 괴이하지 않는 게 없었습니다. ~하늘의 거스르고 귀신을 업신여겨서 그 죄가 죽어도 용납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는 “서학에 ‘물들었던 것(染跡)’은 ‘아이들 장난(兒戱)’이었다”면서 ‘그것은 한낱 과거의 일이 됐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이제 심장을 쪼개고 창자를 뒤져도 (서학의) 남은 찌꺼기가 없다”고 결백을 주장했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반대파들의 집요한 공세에 더는 버틸 명분이 없으니 사직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위로는 군부(君父)로부터 의심을 받고 아래로는 당세에 꾸지람을 당하니~ 입신한 것이 단 한 번 무너짐에 모든 일이 기와장처럼 깨졌습니다.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으며 죽어서는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정조의 무한사랑


그런데 정조는 다산의 ‘사직의 변’에 또 한 번 감동하면서 사직서를 반려했다.

“선(善)의 싹이 봄바람에 만물 싹트 듯 하는 구나.(善端之萌) 상소문에 열거한 말들이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하다. 사직하지 마라.”

하지만 반대파의 서슬에 너무 시퍼렇자 정조는 다산을 곡산(황해도)부사로 제수했다. 그를 ‘피신’시켜 준 것이다. 그러면서 다산에게 친필편지를 전달했다.

“(자네를) 등용하려 하는데 웬 잡음이 그렇게 많은 지 모르겠다. 1~2년 늦어도 무방하다. 곧 다시 부를 테니 염려하지 마라.”

그야말로 ‘무한사랑’이다. 혹 다산처럼 단옷날 근무지를 무단으로 이탈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생길 지 모르겠다. 호기롭게 ‘낭만’ 운운하면서…. 
그러나 스스로 판단해보라. 다산처럼 윗사람으로부터 무한신뢰를 받을 만큼 능력이 있는가. 아니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다산처럼 오로지 백성을 위해 일하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면 ‘아서라.’ 근무지 무단이탈죄로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시말서를 쓰거나, 감봉·감호를 당하거나. 사표를 내야 할 테니….

또 하나 걱정거리가 있다. 혹 온갖 구설에 오르는 측근들을 끝까지 비호하고, 남들의 비판에 귀를 막을까봐…. 그러면서 ‘정조도 그러지 않았냐’고 변명할까봐…. 그렇다면 ‘아서라!’ 정조 임금과 다산 정도는 되어야 맺을 수 있는 ‘군신관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므로…. 

 

 

<문화체육에디터겸 스포츠경향 편집국장>

 

 <참고자료>
 <다산과 천진암의 관계>, 김상홍, 동양학 제35집,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2004년 2월
 <실학파과 정다산>, 최익한, 청년사, 1989
 <다산을 찾아서>, 고승제. 중앙일보, 1995
 <뜬세상의 아름다움>, 정약용 지음. 박무영 옮김, 태학사, 2001
 <조선의 탐식가들>, 김정호, 따비, 2012
 <새벽녁 초당에서 온 편지>, 박석무, 2006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