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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욕받이'에서 주연으로 거듭난 야신의 후예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공식 포스터에는 검은색 유니폼을 입은 골키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사진)

러시아(구 소련) 출신의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1929~1990)이다.

야신은 소속팀(디나모 모스코바)과 대표팀(74경기)에서 출전한 400경기 중 270번의 클린시트(무실점 경기)를 달성했고 페널티킥도 151차례나 막아낸 ‘통곡의 벽’이었다.

큰 소리로 동료들을 다그치기도 했고, 때로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골문을 박차고 나가 공격수에게 재빠르게 공을 던지거나 차주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야신은 골문을 지키느라 문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던 골키퍼의 페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은 인물이었다.


야신에게도 씻을 수 없는 흑역사가 있다. 바로 1962년 칠레 월드컵이다. 구 소련은 콜롬비아전에서 후반 23분까지 4-1로 크게 리드했다. 그러나 야신은 8분만에 무려 3골을 허용한다.

콜롬비아 마르코스 콜의 코너킥은 그대로 야신의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월드컵 역사상 전무후무한 코너킥 실점의 희생양이 바로 야신이었다. 구 소련은 개최국 칠레와의 8강전에서 1-2로 져 탈락했다.

야신은 패배의 책임을 홀로 뒤집어썼다. 고국팬들은 “야신 은퇴하라. 집으로 가라”고 외쳤고, 자택 유리창이 박살났다. 자동차에는 조롱섞인 낙서가 도배했고, 협박편지가 배달되었다.

소속팀 경기에서 야신의 이름이 호명될 때마다 야유가 울려퍼졌다. 프랑스 스포츠 신문인 ‘레퀴프’는 “야신의 골키퍼 인생이 끝장났다”고 전했다. 야신이 경기중 뇌진탕에 걸린 몸으로 버텼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야신은 “당장 은퇴하고 싶다”고 괴로운 심경을 토해냈다. 하지만 훌훌 털고 일어난 야신은 이듬해(1963년) 발롱도르상(최고의 축구선수상)을 받은 전무후무한 골키퍼가 됐다. 

‘이기면 본전, 지면 역적’이라는 골키퍼의 숙명을 삭이는 야신의 명언이 있다.

“실점을 괴로워하지 않는 골키퍼는 골키퍼가 아니다.”
1~2일 벌어진 러시아 월드컵 8강전은 두 경기 모두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골키퍼의 운명도 갈렸다.

실수가 잦아 ‘기름손’의 오명을 들었던 러시아의 이고리 아킨페예프 골키퍼는 2명의 스페인 키커 슛을 막아 ‘제2의 야신’으로 부활했다.

반면 현역 중 최고의 골키퍼라는 스페인의 다비드 데헤아는 평범한 수문장으로 전락했다.

크로아티아의 다니엘 수바시치와 덴마크의 카스페르 슈마이켈은 둘다 승부차기 선방쇼를 펼쳤다. 결국 승리를 거둔 수바시치의 승리로 끝났지만 연장전에서 결정적인 페널티킥을 막은 슈마이켈도 ‘승리한 패배자’라는 찬사를 들었다.

수비가 대세인 현대축구에서 골키퍼는 더이상 엑스트라나 조연이 아니다. 한국의 조현우 골키퍼가 독일전 기적의 승리 드라마에서 주연으로 거듭나지 않았던가. 세계축구는 바야흐로 골키퍼의 세상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