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통선 이북지역인 파주 덕진산성에서 고구려 시대 유물이 출토됐다는 소식이 들린다 .

그러나 이곳은 조선시대 인조반정군이 반란을 꾀하며 훈련했던 역사적인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덕진산성은 어디인가.

임진강 하류, 곡류지점에 초평도라는 섬이 있다.

초평도는 176만5000평방미터 크기의 무인도. 섬전체가 갈대밭과 수목으로 되어 있으며, 만수위 때나 비가 많이 내릴 때면 상당부분이 물에 잠기기 일쑤인 곳이다.

이 초평도 서북쪽, 즉 임진강 북안에 백제시대 때 처음 쌓은 곳으로 보이는 쇠락한 산성이 하나 있다. 그곳이 덕진산성이다.

덕진산성을 찾으려면 통일대교(문산읍 마정리) 혹은 전진교(파평면 율곡리)를 통해 민간인 통제선을 지나야 한다. 군부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길목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파주시 군내면 정자리에 있다.

-나라의 제사터

육군사관학교 지표조사 결과를 보면 산성의 외성 전체길이는 948미터 정도 된다. 임진강에 닿은 219미터 정도는 미확인 지뢰 때문에 더 이상 측량이 어렵다고 한다.

면적은 1만 여 평방미터 정도? 마을 주민들의 말로는 내성 안쪽의 북쪽 경사면에 주초석이 4개 있었는데, 이곳에 당집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이 아마도『장단읍지(長湍邑誌)』「제사조(1842~1843년)」에 나오는「덕진사(德津祠)」, 즉 국가의 중사(中祀), 말하자면 제사를 지냈던 곳이 아니었던 가 싶다.

성 안 중앙부에는 직경 15미터, 깊이 5미터 정도의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바닥에 3.2미터×3.4미터 가량의 석축이 보이는데 아마도 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9년 경기도박물관 조사결과로는 성 안에서 삼국시대~조선시대를 아우르는 토기편들이 보였고, 주거시설의 바닥이나 벽체로 보이는 짚이 섞인 소토덩어리와 탄화된 쌀, 그리고 철기편도 수습되었다.  

그런데『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을 들춰보면 이곳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놓은「운명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심야의 쿠데타

1623년 3월13일 3경(새벽). 임금(광해군)이 창덕궁의 담을 넘어 달아난다.

『광해군일기』「1623년 3월12일조」는 이 때의 상황을 드라마처럼 담고 있다.

『왕(광해군)이 북쪽 후원의 소나무숲 속으로 나아가 사다리를 놓고 궁성을 넘어갔다. 이 사다리는 평상시에 궁인들이 밤에 출입하기에 쉽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반정군의 수색으로 잡힌 상궁 김씨와 승지 박홍도 등 광해군의 총애를 입었던 이들이 즉각 참수된다.

젊은 내시의 등에 업혀 창졸간에 도망친 광해군은 하루도 버티지 못한 채 끌려오는 신세가 된다. 광해군은 그 순간부터 폐주(廢主), 혼군(昏君)의 신분으로 백성의 지탄을 받는 패륜아가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반정」이란『춘추(春秋)』혹은『사기(史記)』 등에 나오는「발난세반제정(發亂世反諸正)」, 즉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덕진산성과 이 인조반정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반란군의 소굴?

성에서는 생태계의 보고라는 초평도가 보인다.

바로 이서(李曙)가 이끄는 쿠데타군이 이 덕진산성에서 비밀리에 군사훈련을 받은 뒤 인조반정 거사일인 3월12일 한양으로 진격했던 것이다. 

1979년 전두환ㆍ노태우 등이 이끄는 신군부 세력이 일으킨 12.12사태 당시의 쿠데타군이 연상된다.

『이서가 장단부사(長湍府使)가 되어 덕진에 산성을 쌓을 것을 청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에 군졸을 모아 훈련시킨 뒤 이때에 이르러(1623년 3월12일) 거사하게 된 것이다.』(『인조실록』) 

사실 광해군을 축출하자는 모의는 1620년부터 시작됐다. 장단부사 이서를 비롯해 신경진, 구굉, 구인후 등 무인들이 맨 처음 나섰는데, 신경진과 구굉, 구인후는 모두 능양군(인조)의 인척들이었다.

다른 3사람이야 인조의 인척이라지만, 이서는 그야말로 본인의 소신대로 뜻을 세운 것이다.  

이들은 광해군대에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의 명망가인 김류, 이귀, 최명길 등을 끌어들였다. 장유와 유생 심기원·김자점 등도 합류했다.

거사 모의 과정에서 숱한 위기를 겪었지만, 후궁에게 청탁을 넣어 아슬아슬하게 화를 피한다. 장단부사 이서는 덕진산성을 쌓고 본격적으로 반란군을 훈련시킨다.(1622년 무렵)

-쿠데타군의 위기

절체절명의 위기는 이서가 반란군을 이끌고 파주로 진격했을 때 찾아왔다.

출토된 상평통보.

이서는 편비(각 군영의 부장)를 거느리고 온 이천부사 이중로와 파주에서 만났다.

그런데 이 일을 전해들은 북인 김신국 등이 서인들의 반란소식을 고변했다.

12일 저녁이었다. 곧바로 추국청(推鞫廳)이 설치되었다.

바야흐로 모든 관련자들의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광해군이 후궁과 연회를 베풀고 있을 줄이야.

『관련자들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임금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반란군에게는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반정군은 이날 밤 2경(更ㆍ밤 9~11시)에 홍제원(弘濟院)에 모이기로 했다. 이 순간 이곳에 모여든 반정군의 전력은 한심할 정도였다. 아직 이서의 반정군이 미처 도착하기 전의 상황. 

『「일사기문(逸史記聞)」 선조~인조까지 세간에 유포된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내용을 보면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홍제원에 집결했던 군사들 가운데 상당수는 유생들과 어중이떠중이들이었어요.』(한명기 명지대 교수)

무기를 잡아보거나 전투를 치른 적도 없는 오합지졸에게 군기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사기문』은『웃고 떠들며 소란을 피워 제대로 통솔되지 않았다.』고 기록해두었다.

이런 한심한 지경이었던 데다 때마침 고변 소식이 전해지자 군중이 금세 흉흉해졌다.

이윽고 이서의 장단군이 뒤늦게 능양군(인조)의 영접을 받으며 연서역(은평구 대조동~역촌동)에 진군하면서 비로소 반정군의 대오가 완성됐다.

하지만 반정군의 규모는 이서의 장단군사 700여 명을 포함해 1000~1400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앞서 밝혔듯 훈련을 잘 받은 이서의 정예병을 빼고는 나머지는 오합지졸이었다. 

사실 이런 정도의 군사라면 광해군의 경호를 맡고 있는 훈련도감(訓練都監)의 정예병을 상대하기란 무리였다.

그러나 반정군은 밤 3경(12일 밤 11시~13일 새벽 1시), 일사천리로 창의문(彰義門)의 빗장을 부수고 들어간 뒤 창덕궁에 사실상 무혈 입성했다.

광해군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창덕궁 담을 뛰어넘고 만 것이다. 왜일까.

-최측근 경호실의 배신

출토된 고구려 토기. 삼국시대때부터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늘 내부에서 불거졌던 겁니다. 대북파의 핵심 이이첨은 서인과 남인을 축출한 뒤 권력이 극도로 비대해졌어요. 대외정책에서 광해군과 다른 목소리를 내고….』(한명기 교수)

광해군 또한 말년에는 이이첨을 불신하고 견제했는데, 쿠데타가 일어나자 맨 먼저『혹시 이이첨의 짓인가.』(『광해군일기』「1623년 3월12일조」)하고 의심했을 정도였다.

 
『또 하나, 광해군은 폐위되기 전 6년간 자신의 경호실장(훈련도감 대장)를 무려 11차례가 교체했다는 겁니다. 믿을만한 이가 없었다는 거죠. 거사당시 훈련대장이던 이홍립(李興立)마저 반정군에 포섭되었으니….』 

경호실장 이흥립의 경우 반란군이 창덕궁 문 밖에 도착했을 때『지팡이를 버리고 와서 반란군을 맞이했다.』(『광해군일기』「1623년 3월12일조」)니 더 이상 할 말이 있을까. 

마지막으로는 광해군이 총애하는 상궁 김개시(介屎), 즉 김개똥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역모가 일어날 것』이라는 잇단 투서를 무시했다는 것이다. 

김개시는 용모가 그리 뛰어나지도 않았는데도 비방(성적인 기교술)로 임금을 사로잡았다.

광해군은『김개시가 별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냥 놔뒀는데, 이것이 최대의 실수』라고 자책했다고 한다. 김개시가 반정주도세력과 연결돼 있었음을 광해군이 몰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서 등 쿠데타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내면서 내건 명분은 무엇인가.

반란군이 집결했던 홍제원터. 표석만 남아있다.

-반란의 씨앗

『인조실록』등은『윤리와 기강이 이미 무너져 종묘와 사직이 망해가는 것을 보고 분연히 일어 반정(反正)할 뜻을 두었다.』고 선언했다.  

반정세력이 내건 첫 번째 이유는 이른바「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사실 첩의 아들이자 둘째아들로 태어난 광해군(재위 1608~1623년)은 극심한 정치적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었다.

광해군의 어머니는 공빈 김씨. 그는 세자 책봉 문제로 친형인 임해군(1574~1609년)과 갈등을 빚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였을 때 국난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피난지 평양에서 세자에 책봉되었다.

하지만 광해군은 세자 때부터 부왕(선조)의 집중견제를 받았고, 급기야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1606년) 위기에 빠진다.

선조가 세자인 광해군 대신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할 뜻을 은밀하게 내비친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광해군은 대북파인 이이첨 등의 후원아래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아무리 어리다지만 선왕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 때문에 광해군과 대북파는 전전반측(輾轉反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613년 4월 문경세재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한 혐의로 문초를 받던 서얼 박응서(朴應犀)가 뜻밖에 엄청난 역모사실을 실토한다.

반란군은 창의문의 빗장을 열고 무혈입성했다.

자신을 비롯한 300명이 대궐을 습격해 광해군과 세자를 죽인 뒤 인목대비에게 국새(國璽)를 바쳐 수렴청정을 하도록 요청하려했다는 것. 그리고는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것. 또한 이 역모의 우두머리는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이라는 것.(『광해군일기』「1613년 4월25일조」)

『광해군일기』는 박응서의 고변사실과 함께『살인죄로 죽을 지도 모르는 박응서가 대북파 영수 이의첨의 사주를 받고 거짓으로 고변한 것』이라고 설명해놓았다.

어찌됐든 이 고변은 처절한 피바람의 전주곡이었다.

「계축옥사(癸丑獄事)」로 명명된 이 정변으로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사약을 마셨고, 8살 어린이었던 영창대군은 영문도 모른 채 강화도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인목대비는 1618년 서궁(西宮ㆍ덕수궁)에 유폐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반정당시 그 으뜸명분으로 내세운「폐모살제」사건이다. 반정 주모자들은 이「폐모살제」를「금수(禽獸)의 행위」라고 매도했다.

쿠데타 세력이 내건 또 하나의 명분은 지나친 토목공사에 따른 민심의 이반과 부정부패의 만연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궁궐들을 중건하면서 왕권강화를 노렸다. 창덕궁 중건(1611년)에 이어 경덕궁(경희궁), 인경궁 등 대규모 궁궐을 새로 지었는데, 엄청난 비용이 소요됐다.

비용 및 노역의 부담이 자연 백성들에게 미쳤다. 세금을 대폭 늘렸음에도 재원이 부족하자 은과 목재, 석재를 바치는 이들에게 벼슬을 팔기도 했다. 

어떻든 광해군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은 인목대비는 거사가 성공한 뒤인 3월14일, 광해군의 죄상을 낱낱이 폭로했다. 그러면서 앞서 언급한 죄목과 함께 또 한 가지의 죄상을 고했다.

그것은 중국(명나라)에 대한 배은망덕이었다.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중략) 임진왜란 때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선조)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셨다. 그런데 광해는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으로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중략)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중략)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은 금수의 나라가 되었으니….』
 
-「쥐뿔도 없는 주제에」… 광해군의 실리외교

하지만 광해군에게 마냥 폭군의 낙인을 찍는 것이 옳을까.

물론 효(孝)사상과 사대(事大)에 뿌리를 둔 조선에서「폐모살제」는 분명 광해군의 씻을 수 없는 실책이었다. 또한 왕권강화를 위한 무리한 궁궐의 중건 및 신축 역시 비난을 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광해군의 업적 역시 필설로 다하기 힘들다.

이미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세자로 책봉된 직후부터 전란 내내 이른바 분조(分朝)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망명길에 오르면서 왕세자인 광해군으로 하여금 본국에 남아 종묘사직을 받들라는 왕명을 내렸다, 이때 광해군의 조정을 분조라 한다. 

분조의 책임자로서 전국을 돌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왜군에 대항하기 위한 군사를 모집한 공이 있었던 그가 아니었던가.

창의문을 뚫은 반정군이 창덕궁 돈화문으로 입성했다.

또한 광해군이 즉위할 무렵 그야말로 조선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었다. 안으로는 국난의 상처를 치유하고 바깥으로는 명청교체기(明淸交替期)라는 엄청난 격변기에서 종묘사직을 보호해야 했다.

이이첨과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들이 광해군 즉위의 일등공신이었지만, 광해군은 그들만 편애하지 않았다. 이원익(李元翼), 이덕형(李德馨), 이항복(李恒福) 등 명망가들을 우대하면서 그들의 경륜을 활용했다. 

가장 큰 내정의 업적은 아마도 1608년 경기도에서 실시된 대동법(大同法)일 것이다. 대동법은 백성이 왕실이나 관청에 바치는 공물을 현물 대신 쌀로 낼 수 있게 만든 제도이다.

조선의 공물제도는 원래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하였는데, 부담이 불공평하고 수송과 저장에 불편이 많았다. 예컨대 자기 고장에서 나지 않는 공물을 현물로 납입해야 할 경우 반드시 청부업자에게 비싼 값을 치르고 물품을 구입하여 관청에 납부해야 했던 것이다. 

이런 폐단은 농민부담을 가중시켰고 국가수입을 감소시켰다. 대동법의 실시는 백성들의 입장에서「복음」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백성을 착취, 떼돈을 벌고 있던 청부업자들 가운데는 사대부와 왕실의 인척과 관련이 깊은 모리배들이 섞여 있었다.

광해군은 이들 뿌리 깊은 기득권 세력의 아우성을 일축하고 대동법을 밀어붙인 것이다.

그야말로 백성을 위한 정치였던 것이다. 또한 지나친 감이 있어서 그렇지, 전란 중에 불탄 창덕궁 수리와 종묘 중건, 사고(史庫) 등 관청들의 건설 등은 반드시 필요한 수습책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광해군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이른바「명청교체기」에 빛을 발한「등거리 외교정책」이었다. 전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한「명청교체기」는 사실 조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격변기였다.

명나라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 1618년 후금(後金)의 누루하치가 랴오둥 반도의 푸순성(무순성ㆍ撫順省)을 함락시키자 위기감을 느낀 명나라는 조선의 파병을 요청했다. 말이「요청」이지, 실은「명령」이었다. 

이미 선대왕인 선조가『임진왜란 때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것은 이순신도 아니요, 그렇다고 의병들도 아닌 명나라이며, 명나라는 조선의 재조지은(再造之恩ㆍ나라를 다시 세우게 한 은혜)』이라고 규정하지 않았던가.

광해군은 창덕궁 후원문으로 탈출했으나 다음날 잡히는 신세가 된다.

명나라의「파병 명령」에 신료들은 그「재조지은」을 들먹거리면서『부모의 나라인 명을 도와야 한다.』고 아우성쳤다.

심지어 대북파의 핵심 이이첨까지 가세했으니…. 하지만 광해군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1618년 5월1일 신료들에게 내린 전교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누루하치는 천하의 강적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군병이 약한 것도 돌아보지 않은 채 깊이 파병시킨다면….(중략) (굳이 보내야 한다면) 국경과 가까운 의주(義州) 등 대기시켜 대치시키는 게 낫다.』

이는 국경 밖으로는 파병시키지 않는다는 얘기다. 광해군은 나아가 명나라에게도 한마디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즉,『후금의 군사력이 막강하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에 보내는 잇단 국서의 내용에『국난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조선의 군사력이 미약해서 도움이 안 된다.』는 등 갖가지 핑계를 댔다.

급기야 명나라는『지금 요동 땅에는「조선이 후금, 일본과 내통하고 있으며 후금군 가운데 조선인이 3000여 명이나 된다.」풍문이 돌고 있다.』면서 조선을 협박하자 할 수 없이 뜻을 굽혀 파병을 결정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1619년 2월, 강홍립이 이끄는 파병군을 보내면서『형세를 보아 행동을 결정하라.(觀形向背)』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끝난 뒤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죄상을 조목조목 거론한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명나라군은 조선 파병군까지 거든 이「선허전역(심하전역ㆍ深河戰役)」에서 대패하고 만다. 1619년 3월1~4일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후금군의 전사자는 고작 200여 명이었는데 명군은 무려 10만 명의 죽었다.

결국 광해군의 예상대로 명나라는 후금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만약 명나라의 요청에 나라의 명운을 걸고 명나라를 도왔다면 조선은 다시 신흥강국 후금의 침략을 받았을 것이다.

광해군의 실리외교가 빛나는 순간이었다.『털끝만큼도 믿을 형세가 없는데도 고담준론으로만 적을 제압할 수는 없으며, 대의로만 오랑캐를 막을 수 없다.』는 신조를 지닌 광해군의 안목이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향명배금(向明排金)의 대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한 뒤 조선은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를 사모하는 이른바「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썼다가, 다시 전란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이어지고, 급기야「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된다.  

청나라 태종 앞에서 굴욕적인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스스로「반정」당시의 정신을 무너뜨리고「친청책」를 쓴다. 1643년 9월, 대사간 유백증(兪伯曾)이 인조를 맹비난하면서 올린 상소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광해군대에는 그래도 전쟁은 겪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인조)는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반정은 왜 했습니까. 천재와 시변이 광해군에 비해 더욱 많고 흉년이 드는 일이 광해에 비해 더욱 심하며 인심이 원망하고 능멸하는 일이 광해보다 깊습니다.』

이는 인조가「반정의 정신」을 외면한 채 친청책을 쓰는 인조를 비난한 것. 하지만 이 대목은 현실을 도외시하고 명분만을 찾은 대가가 얼마나 쓰라린 지를 웅변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인조는 1641년 대제학 이식(李植)이 쓴 유시(諭示)에서 이렇게 자책한다.

『내가 사기(事機)를 잘 주선하지 못하여 조용했던 강토가 갑자기 병자·정묘년의 큰 변란을 당하였구나. (중략) 아, 이번 일을 당한 백성들이 아무리 나를 꾸짖고 원망한다 해도 이는 나의 죄이니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삼전도의 굴욕에 대해서는『끝까지 싸울 것을 명령할 수도 있었지만 허겁지겁 항복한 것은 백성들을 살리기 위함이었다.』고 변명한다. 그렇다면 광해군이 죄 없는 백성들을 전란의 화에서 구하려 실리외교를 편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갈대와 수목 사이에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덕진산성에서 다시 돌고 도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떠올린다. 1622년 장단부사 이서는 분명,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혼군(昏君)을 쫓아내려 이곳에서 병사들을 훈련시켰을 터. 그런데 과연 그가 일으킨「반정」은 과연「어지러운 세상을 바르게 이끌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한낱 쿠데타였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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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