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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일본 짝퉁' 판결에 퇴출된 '한때 국보'의 재심을 요구한다

상원사 동종이라고 하면 강원 평창 오대산의 상원사에 있는 국보(제 36호)를 쉽게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경기 양평 용문산에도 또다른 상원사가 있으며, 그 용문산 상원사에도 한 때는 ‘국보(제367호)였던’ 동종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무엇보다 1929년 1월1일 경성방송국이 개최한 최초의 제야행사에서 타종한 유서깊은 동종이었다. 이 행사는 당시 라디오로 생중계됐다. 그랬던 ‘국보 종’에게 ‘국보였던’이라고 과거형을 쓴 이유가 있다. 지금은 국보는커녕 가짜 취급을 받고 56년 동안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양평 용문산 상원사에 있는 동종. 일제 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된 후 해방 이후 국보 367호로 명명됐다가 1962년 '일본 짝퉁'이라는 낙인이 직혀 국보의 지위를 상실했다. 종은 지금 비만 겨우 피할 수 있는 보호각 안에 덩그러니 서있다. 보호틀도 없다.

기자가 용문산 상원사를 답사한 것은 지난 6월 말이었다. 용문산이라면 수령 1100년 가량의 은행나무(쳔연기념물 제30호)가 서있는 용문사가 유명하지, 상원사는 생소한 사찰이었다. 네비게이션에 ‘상원사’를 찍고 보니 용문사에서 서쪽으로 3.5㎞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분으로는 용문산(해발 1069m) 정상에서 7부쯤은 되는 것처럼 비포장길을 한참 올라가야 했다. 외길이었지만 그래도 어렵지않게 오르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아담하고 아늑한 사찰에 닿아 마당 한 편을 바라보니 큼지막한 종 하나가 서 있었다. 보호각은 있었지만 보호틀은 없었고, 누구나 접근해서 만질 수 있는 동종이었다. 비전문가인 필자가 보기에도 고색창연한 동종이었다. 마침 상원사 주지인 수종 스님과 마주쳐서 동종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저 종은 국보의 가치가 넉넉한 종인데, 일부 전문가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보에서 해제됐어요.”(수종 스님)
“지금도 저 종을 치고 있나요?”(기자)
“예. 지금도 사월 초파일이 되면 5차례 종을 칩니다. 은은한 종소리가 일품이지요.”(수종 스님)

 

■국보가 졸지에 짝퉁으로
이 상원사 동종이 문화재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9년이었다. “제작연대는 불명이지만 고려초기에 속하는 듯하며 신라와 중국의 양식을 절충한, 전혀 유례를 찾기 힘든 진귀한 사례”라는 일본학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평가에 따라 이 종을 보물로 지정했다. 상원사 동종은 해방 이후 국보 제367호로 명명됐다.
그러나 1962년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문화재들을 다시 검토해서 국보와 보물 등으로 분류하고 재지정할 때 문제가 생겼다. 12월12일 열린 문교부 문화재위원회 제1분과위원회에서 불교미술 전문가인 황수영 위원(동국대 교수)이 “이 상원사 동종은 진품이 아니라 일제가 만든 위작이며, 진품은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빼돌렸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고고미술사학자인 김원룡 위원이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황수영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 상원사 동종은 졸지에 ‘가짜’로 전락하고 국보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이후 이 동종의 진위여부를 두고 산발적인 논쟁이 이어졌다.
그러다 2012년 진위 논쟁의 분수령이 될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동종을 성분 분석해보니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짙다는 결과를 얻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후 문화재청 같은 책임있는 기관의 제대로 된 검증 노력은 없었다. 
기자는 사찰의 마당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동종을 바라보며 조바심이 끓어올랐다.
‘정말로 전문가의 판단미스로 잘못 국보에서 해제됐다면 어찌 되는 것인가. 통일신라 시대의 찬란한 문화유산이 자칫 짝퉁의 오명을 뒤집어쓴채 결국에는 고철덩어리 신세로 전락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자는 전문가가 아닌 그저 기자의 상식적인 시각으로 이 상원사 동종의 진위 여부를 짚어보기로 했다.

양평 용문산 상원사 동종(왼쪽)과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종들. 국보인 평창 오대산 상원사종과 성덕대왕 신종의 경우 종뉴가 단룡이고, 소리관(용통)을 갖춘데 반해 양평 용문산 상원사 동종의 종뉴는 쌍룡이며, 소리관도 없다.   

■남산 밑 일본 사찰에서 사들인 종의 행방
상원사 동종은 그 파란만장한 이력을 상징하듯 이리저리 거처를 옮겼다. 그에따라 이름도 보리사종-상원사종-동본원사종-조계사종-상원사종으로 여러번 바뀌었다. 원래는 용문산 밑의 절인 보리사에 걸려있던 종이었다.
그러나 나말여초에 창건한 것으로 보이는 보리사가 폐사하게 되자 인근의 상원사로 이전됐다.
그러다 1900년대초 상원사가 항일의병의 근거지가 되면서 다시 소용돌이에 빠졌다. 일제가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한 1907년 의병운동이 거세게 일어났을때 권득수·조인환 의병장이 이끄는 양평 의병은 용문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항일투쟁을 벌였다. 일제는 의병의 근거지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용문산 일대의 사찰들을 무차별 불태웠다. 이때 상원사 동종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 무렵(1906년) 일본 교토(京都)에 근거지를 둔 정토종 사찰인 동본원사(東本願寺·히가시혼간지) 경성별원이 서울 남산 아래(엣 TV방송국 자리)에 들어선다. 동본원사는 사찰에 동종을 걸려고 수소문하다가 양평 상원사 동종 이야기를 구입한다. 1931년 10월 25일 동본원사가 발행한 ‘남산 본원사 소사’라는 소책자를 보면 구입경위가 나온다.
“1907년 7월(혹은 4월) 경기 용문산 상원사 소장의 범종을 구입했다.… 양평 일대의 폭도(의병)가 일어나 상원사의 가람도 폐허가 됐다. 이 와중에 본원사는 거금 800원을 주고 종을 구입했다.”
이 소책자는 “운반 도중 동대문 밖에서 일어난 폭도(한일병합 시대의 의병)의 방해를 받아서 3차례 시도 끝에 겨우 헌병의 도움으로 수로를 이용해서 용산을 거쳐 본원사에 도착했다”고 덧붙였다. 책자에 등장하는 권말의 연표를 보면 “1908년 4월23일 상원사서 구입한 동종이 도착했고 25일 공양회를 열었다”고 명시했다.

 

상원사 앞뜰에 보호각 안에 놓인 상원사 동종. 한때는 국보의 대우를 받다가 지금은 누구나 만질 수 있는 일반종으로 전락한채 56년간 서 있다.

■종을 운반한 마을 노인들의 증언
이 동종은 해방 이후 동본원사 경성별원이 소실된 이후 조계사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었다.
그런 동종이 50여년이 지난 1962년에 와서 왜 ‘가짜’로 판명되었다는 것인가. 1962년 제정된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문화재 재지정 때 ‘가짜’로 판정한 황수영 위원의 논리는 무엇이었을까.
황수영 위원은 우선 1908년 상원사 종을 서울(경성)로 옮길 때 인부 노릇을 했던 마을 주민 3명의 증언을 근거로 꼽았다. 1907~8년 종을 옮겼다는 15~16살 정도의 청소년들은 재조사 때인 1962년 70살이 넘는 노인이 되었다. 황수영 위원이 청취한 노인들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가 종을 산상에서 용문까지 육로로 운반했다.) 행선지는 혹은 서울이라 했고, 혹은 일본이라 했다. 이후 4~5년이 지난 뒤 서울에서 공진회(박람회)가 있어 서울에 올라갈 기회가 생겼다. 이때 동네에서 반출된 동종이 서울 진고개 일본인 사원(남산 동본원사)에 있다기에 아는 사람들과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그때의 종은 보이지 않았고 그보다 작은 종이 걸려 있었다.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황수영 위원은 “이런 증언은 내가 물어서 대답한 것이 아니라 노인이 먼저 나에게 말해준 것”이라고 의미를 두었다.
황수영 위원 등은 이 노인들을 조계사(1962년 당시 상원사 동종을 모셔둔 곳) 종각까지 모셔와 동종을 친견하게 했다. 그랬더니 노인들은 “(한결같이 어렸을 때 보았고, 1908년 당시 옮겼던) 그 종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특히 노인들은 종 안에 들어가서 팔을 위로 들면서 “옛날에는 손이 안 닿았는데, 이제는 닿네. 종이 작아졌나. 유두도 솔방울 같아서 손에 큼직하게 잡혔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네”라 이구동성했다는 것이다.

1962년 12월5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황수영 문화재위원의 '가짜설' 기사. 황수영 위원은 상원사 동종이 가짜임이 분명하며 남산에 조성된 일본의 사찰(동본원사)이 상원사 종을 운반해올 때 진짜는 일본으로 실어나르고 서둘러 가짜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짝퉁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황수영 위원이 마을 주민들의 증언 외에도 ‘짝퉁설’에 무게를 둔 나름의 이유는 또 있다.
양평 상원사에서 운반되어 동본원사-조계사를 전전한 동종이 한국 범종의 전통양식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종인 평창 상원사 동종(725년·국보 36호)과 성덕대왕 신종(771년·국보 29호)은 종의 고리부분인 종뉴가 용 한마리를 형상화한 단룡이다. 또 소리관인 용통도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양평 상원사 동종은 사뭇 다르다. 종의 고리 부분인 종뉴가 두마리 용을 형상화한 쌍룡이며, 소리관(용통) 또한 붙어있지 않다. 황수영 위원은 이 모두가 일본 범종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 동종에서 상원사 동종과 유사한 형식의 예가 없다는 것이다. 황수영 교수(동국대)는 특히 “종의 수법이 엉성하고 폭도 좁다”는 점을 꼽았다.
황교수는 결론적으로 “세키노 다다시는 이 상원사 동종이 ‘한국+중국 절충형’이라 했지만 오히려 ‘한국+일본 절충형’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한국+일본의 짬뽕’이라는 것이었다.

 

■진품은 일본으로?
그렇다면 1908년 상원사 동종을 운반할 때까지는 진짜였던 것이 언제 어느 순간에 가짜로 둔갑하여 동본원사에 버젓이 걸렸다는 것일까. 황수영 위원 등은 일제가 진짜 상원사 동종을 운반하면서 짝퉁 하나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왜? 그것은 일본 사찰인 남산의 동본원사에 상원사 동종을 걸어 종을 친다는 것은 일제의 자존심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일제가 가짜 동종을 동본원사에 걸어놓고는 진짜 상원사 동종은 어디론가 빼돌렸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1962년 12월 5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황수영 교수의 주장은 “진짜 상원사 동종은 처음부터 서울에 상륙하지도 않았음이 틀림없다”면서 “인천 앞바다를 통해 약탈자들의 계획대로 어디론가 갔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한마디로 진짜 상원사 동종은 1908년 일본의 어느 곳으로 무단 반출되었고, 동본원사-조계사에 남아있던 동종은 짝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6일 뒤인 12월11일 문화재위원회에서 황수영 위원의 주장대로 국보해제가 결정되었다. 김원룡 위원(서울대 교수)의 반론에도….

한국과학기술원 도정만 박사팀이 양평 상원사 동종을 성분분석해보니 다른 통일신라시대 종들의 납 및 주석 성분과 비슷했다. 고려나 조선시대 종과는 확연히 달랐다. 과학적 성분결과는 양평 상원사 종이 신라시대의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도정만박사 제공

■일제가 왜 가짜를 만들었을까
그러나 황수영 교수 등의 주장을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뭔가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 엿보인다.
먼저 ‘짝퉁설’의 근거가 된 마을 노인들의 증언이 그렇다. 1908년 15~16살 시절 상원사 동종을 옮겼다는 노인들의 50여년전 기억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 무슨 심리학 용어를 들출 필요도 없다.
어릴 적 기억이 틀림없는 진짜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지만 그 기억이 틀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기억착오이다. 사람에게는 종종 믿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는 경향도 있지 않은가.
그러니 수백년, 수천년 된 문화유산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그 중차대한 과정에서 노인들의 50년전 기억을 신봉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저 참고자료여야지 국보 해제의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일제는 신묘한 종 제작자인가
또하나 일본 사찰인 동본원사가 외형상으로 정상적인 거래로 종을 사들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여기서 상식적인 의문이 생긴다. 800원이라는 돈으로 종을 사서 천신만고 끝에 옮겨온 진짜 종을 빼돌리고 굳이 짝퉁을 따로 만들어 절에 걸어놓았다는 주장이 합리적인가. 이 상원사 동종은 일본의 동본원사가 조선에 일본절을 처음 세운 기념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한 종이었다. 그런데 굳이 위조품까지 만들어가면서 빼돌릴 이유가 있었을까.
당시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고, 영영토록 식민지로 남을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텐데….
게다가 종을 제작하는 데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소요된다. 위조품을 똑같이 만들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수십년 걸쳐 실패를 거듭했던 성덕대왕 신종은 차치하고 보신각종도 1년 7개월이 걸렸다. 1907년 7월 상원사 동종을 운반해서 빼돌렸고, 정작 동본원사에는 1908년 4월 가짜종을 제작해서 걸었다? 단 9개월만에 만들었다는 가짜 종에서 그렇게 은은한 종소리가 날 정도로 일제가 신묘한 제작자라는 말인가.

 

1902년 개성에 서있던 높이 13미터의 경천사 10층 석탑. 1907년 대한제국을 방문한 궁내대신(장관)인 다나카 미쓰야키가 주동이 되어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한대 백주에 탑을 반출해갔다. 그렇게 무도한 일본인들이 정상적인 거래로 구입해온 진짜 종을 일본으로 실어나르고 굳이 가짜종을 만들어 내걸 필요가 있었을까.

■백주에 경천사탑까지 뜯어간 자들인데…
일본인들이 어떤 자들인가. 1907년 높이가 13m나 되는 경천사 10층석탑마저 백주에 총칼로 위협하면서 뜯어 일본으로 실어나른 자들이다.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한 일본인들이지만 모조품을 만들어놓고 진짜를 빼돌린 예는 단 한차례도 없다. 게다가 비싼 돈까지 들여 사들였는데 무엇이 답답해서 또 엄청난 돈을 들여 짝퉁을 만든단 말인가.
또 한가지 드는 합리적인 의문점이 있다. 일본으로 무단반출됐다는 진품은 대체 어디 있다는 것인가.
만약 동본원사가 빼돌렸다는 진품은 어디에 있는가. 일본 교토의 동본원사 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그도 아니면 일본 어느 곳에는 있어야 한다. “진품의 행방은 알 수 없으며 반출 도중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도 있지만 이 또한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추정에 추정을 더한 2중 추정이다. 아무리 몰상식한 일본인이라고 해도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해서 일본까지 운반해온 걸 파기한단 말인가.

 

■“가짜가 아니라 7세기 가장 오래된 종”이라는 설
이렇듯 상원사 동종은 국보는커녕 가장 치욕적인 ‘일본의 짝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채 56년을 지내왔다. 물론 몇가지 다른 설이 제기되기도 했다. 일본인인 쓰보이 료헤이(坪井良平)와 스기야마 요(杉山洋)는 이 동종이 20세기초에 제작된 짝퉁은 아니라 했지만 10~14세기 일본종이라 주장했다.
이 중 역사연구가이기도 한 남천우 전 서울대 교수(물리학과)의 1972년 논문은 참신한 시각이 돋보였다.
즉 상원사 동종은 일본종의 짝퉁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삼국시대로 이어진 옛 종의 형식이 독창적인 통일신라 시대 종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과도기 형식의 종이라는 것이다.
남교수는 “양평 상원사 동종은 7세기 중후엽 제작된 것”이라 주장했다. 남교수의 견해대로라면 상원사 종을 중국종과의 절충(세키노)이나 일본종과의 절충(황수영 등)으로 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중국종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백제종 등 삼국시대 종이 7세기 중후엽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국종-백제종(삼국시대종)-일본종이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종뉴=쌍룡’ 문양으로 대표되는 특징이다.
반면 통일신라시대를 맞이한 한반도의 종은 독특한 양식으로 발전한다. 그것이 바로 통일신라시대의 국보 종인 평창 상원사 동종(국보 36호)과 성덕대왕 신종(국보 29호)이다. 동종의 고리 부분이 용한마리, 즉 단룡의 형태를 띠게 됐으며, 소리관인 용통을 갖추게 됐다. 이것이 중국식·일본식과는 완전히 다른 전통적인 한국식 동종의 형식이 됐다는 것이다. 결국 양평 상원사 동종(7세기 중후엽)은 평창 상원사 동종(725년) 및 성덕대왕 신종(771년)보다 70~100년 먼저 주조된 가장 오래된 동종이라는 것이다.

양평 상원사 동종의 종뉴는 용 두마리 형상인 쌍룡이다. 평창 상원사와 경주 신덕대왕 신종의 단룡과는 차이가 있다. 어떤 전문가는 양평 상원사 동종은 7세기 중후엽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일 가능성이 짙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성분분석결과는 통일신라시대 제품
그러나 1962년의 ‘짝퉁 결정’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12년에는 과학적 성분 분석 결과로 반전의 발판이 마련됐다. 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전통과학기술사업단의 도정만 박사팀이 양평 상원사 동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맞다”고 발표한 것이다.
도정만 박사팀은 먼저 상원사 종에 포함된 납성분을 분석한 결과 남한산 원료가 사용됐음을 밝혀냈다.
804년(신라 애장왕 5년) 충북 옥천 지방 호족의 지원으로 두 개의 옛 종을 녹여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는 선림원 종의 납동위원소와 매우 유사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것은 양평 상원사 종이 선림원 종과 같은 광산에서 채굴한 원료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현전하는 통일신라시대 종(평창 상원사 동종과 성덕대왕 신종, 선림원종, 양평 상원사종)과 고려·조선의 종의 납과 주석 농도를 비교분석해보았다니 의미심장한 결과가 나왔다.
즉 양평 용문산 상원사의 납과 주석농도는 2.81%(납)와 13.8%(주석)였다. 이것은 분석대상 신라시대 종의 납 및 주석 기준치(납 3%이하, 주석 10~15%)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세부적으로는 평창 오대산 상원사(납 2.12, 주석 13.3), 성덕대왕 신종(납 2.27%, 주석 13.2%), 선림원종(납 1.64~2.22%, 주석 8.8~12.2%)의 농도와 비슷했다.
반면 고려 종(11.9%) 혹은 조선시대 종의 납(13.6%) 성분 평균치는 양평 상원사를 비롯한 신라시대 종보다 4배 이상 높았다. 주석의 농도도 고려(23.6%)와 조선(12.6%) 등이 들쭉날쭉했다. 양평 상원사 동종이 고려나 조선시대가 아니라 최소한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이라는 의미다.
 
■자칫 국보가 고철덩이로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과학기술원의 성분분석결과가 나온지 6년이 지났는데도 ‘국보 회복’ 논의는 감감무소식이다.
여전히 ‘짝퉁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과학적 분석과 화학적 분석 등으로 유물연대와 진위를 가리는 것은 경솔한 학문연구”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일리있는 주장이기는 하다.
하지만 ‘짝퉁의 오명’을 뒤집어씌워 국보의 자격을 박탈할 때는 신중 또 신중했어야 한다. 국보든 보물이든 문화재의 명예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56년 전인 1962년 ‘짝퉁설’을 제기한 황수영 교수의 주장을 그저 독자 입장에서 읽어보면 뭔가 허술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나 “진짜 동종은 서울에 상륙되지 않은 것만은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인천 앞바다로 해서 약탈자들의 계획대로 어디론지 갔을 것”이라는 그야말로 소설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나아가 “지금 있는 가짜는 진짜를 빼돌린 약탈자들이 치밀한 계획 아래 미리 만들어 놓았을 것으로 믿어진다”고 했다.


■'국보 박탈 판결'의 재심을 요구한다. 

문화재위원회는 이 ‘믿어진다’ ‘~갔을 것이다’ ‘~틀림없다’라는 모호한 추정대로 국보 제367호의 자격을 박탈했다는 얘기다. 아무리 일제강점기에 지정된 문화재이라지만 경솔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 고고학계의 태두라는 김원룡 교수(서울대)가 반대표를 던졌다고 하지 않던가.
한번 내린 결정을 쉽게 뒤집기도 어렵겠다. 그러나 만약 진짜가 가짜 판정을 받고 문화유산의 지위를 박탈당했다면 어찌 되는가. 자칫 1200~1300년 된 소중한 문화유산이 한낱 고철덩어리로 방치되고 결국 사라져버릴 수 있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겨우 비만 피한채 56년째 허술한 보호각 안에 방치되고 있는 빛바랜 상원사 동종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다. 

생각해보면 사법제도에서 ‘재심’이라는 구제방법이 있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후에도 ‘사실 인정에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경우’ 판결의 잘잘못을 다시 심리하는 제도이다. 혹여 생길 수도 있는 억울한 사람을 구제하는 제도인데, 문화유산이라고 적용못할 이유는 없다. 문화재청에게 요구한다. ‘짝퉁’이라는 판결로 국보의 지위를 상실한 ‘상원사 동종의 국보 박탈’ 판결의 재심을 요구한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도정만·박방주·이정일·홍경태, ‘대한금속·재료학회지“ 제50권 제11호 통권 제 472호, 대한금속·재료학회, 2012년 11월25일

남천우, ‘신라 초기에 형성된 소위 조선식 종 형식의 발생과정과 조계사 동종이 차지하는 위치’, <역사학보> 제 53·54집, 역사학회, 1972년 6월30일

황수영, ‘전 용문산 상원사 동종 존의(2)’, <법시> 제57호, 법시사, 1972년 6월

이호관, ‘일제 강점기 한국문화재조사연구와 용문산 상원사 동종에 대한 여적’, <문화사학> 제38호, 한국문화사학회, 2012년 12월26일

경향신문 1962년 12월5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