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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의 눈과 귀'였던 조선시대 감찰, '사회적 매장권'을 갖고 있었다

“규정(糾正·감찰)은 백관을 살펴서 왕의 ‘귀와 눈’(耳目)이 되고, 모든 제사와 조회로부터 전곡과 출납에 이르기까지 모두 감찰 단속하는 것이니 품계는 낮아도 책임은 중합니다.”

1388년(고려 우왕 14년) 고려말 대사헌 조준이 우왕에게 올린 시무책에 아주 특별한 직분이 소개된다. 바로 규정, 다른 말로 감찰이라는 직분이다. 대사헌 조준은 감찰을 ‘임금의 눈과 귀(耳目之臣)’라 표현하고 있다.

고려~조선시대의 사헌부는 사간원과 함께 양사(兩司)가 되어 시정의 득실을 논하고 관리들의 비행을 규탄하며 풍속을 바로잡고, 임금의 잘잘못을 따지는 관서였다. 서거정(1420~1488)의 ‘사헌부·제명기’를 보면 사헌부의 추상같은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 

사헌부 감찰들의 모임을 그린 ‘총마계회도’(보물 제1722호). 시문에 적힌 간기와 기록된 인물들의 활동연대에 근거하면 1591년 8월에 만든 것이다. 당시 박지수가 사헌부 감찰로 임명된 이후 신임관원으로서 치르는 신고식(신참례)의 실체를 밝혀주는 자료다.   신참례 때 신임감찰이 준비해야 할 필수 자료로 이 계회도를 젲가했다. |밀양박씨 문중종회 소장


■언론과 감찰…사헌부의 이중 기능

“군왕에게 실책이 있을 때는 거침없이 역린을 건드리고…. 임금의 노여움에 저항하며 중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장상대신에게 과오가 있으면 규탄하고 종친 및 외척과 세도가, 그리고 임금의 측근신하 등에게 횡포가 있어도 탄핵하고…. 얼굴색을 바로 하고 조정에 서면 백관이 떨고 두려워 하는 바이니….”(<연려실기술> ‘관직서고·사헌부’)

지금의 언론과 검찰, 감사원 역할을 사헌부가 도맡고 있었다는 얘기니 얼마나 중차대한 기관인가.

사헌부는 직무의 성격이 전혀 다른 두 부류의 관원이 상하로 편제된 이중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즉 백관을 탄핵하고 임금의 잘잘못을 가리는 이른바 언론 활동을 하는 지평(정5품) 이상의 대관(상관)과, 규찰 활동만 담당하는 24명의 감찰(정 6품·하관) 등으로 나뉘었다. 직무의 성격이 다른 만큼 상관인 대관과 하관인 감찰은 서로 다른 청사를 사용했다. 반면 감찰 24명이 근무하던 감찰방은 별청에 따로 마련돼 있었다. 24명 감찰을 대표하고 통솔하는 임무는 방주(房主)감찰이 맡았다. 

감찰방에 소속된 2명의 유사감찰은 동료 감찰의 비위를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다. 지금으로 치면 대검 감찰부의 역할이랄까.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 1439년(세종 21년) 방주감찰 허눌이 동료 감찰 김복해와 감찰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만취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벼슬자랑을 하며 마침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직과 품계를 자랑하다가, 욕설을 퍼부었다. 급기야 허눌이 김복해의 입술을 깨무는 등 광태가 막심했다.”

그러자 유사감찰 김이와 이사계는 이 사건의 전말을 본부(사헌부)에 보고했다. 보고서를 보면 방주감찰 허눌이 지속적으로 부하감찰들을 괴롭힌 사실이 적시돼있었다. 이 사건으로 허눌과 김복해 등이 형장 80대(벌금으로 대신)과 고신(告身·관리 임명장)회수의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유사 감찰 김이와 이사계 또한 태장 50대(벌금으로 대신)와 파직 등의 처벌을 감수해야 했다. ‘동료감찰을 제대로 규찰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유사 감찰까지 처벌한 것이다.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권리’ 

사헌부 소속 감찰의 업무는 추상같았다. 성현(1439~1504)의 <감찰청 벽기>는 “부정을 적발하고 비위의 사실을 캐내기 때문에 감찰이 왔다는 소리만 들어도 누구나 몸을 움츠리고 무서워할 줄 알았다”고 전했다.

감찰에게는 규찰 임무만 있었다. 탄핵하고 논죄하여 임금에게 죄를 묻는 일은 사헌부 본부 언관(지평 이상)들의 몫이었다.

그러나 감찰들에게 한가지 비위 관리를 논죄할 방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사회적 매장’이었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신료 중 간사하고 참람하고 더럽고 탐하는 자를 적발하면 여러 감찰이 해당 관리의 집앞에서 다시(茶時)를 열었다. 문자 그대로 티타임이었다. 이 티타임에 모인 감찰들은 그 사람의 죄악을 일일이 열거해서 백판(白板)에 써서 문 위에 걸었다. 그런 뒤 가시나무로 그 문을 막고 단단히 봉한 뒤에 서명하고 돌아갔다. 이럴 경우 해당 관리는 폐고(廢錮·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음)되고 말았다. 

감찰이 직접 처벌할 수는 없지만 ‘집단서명으로 비위 및 부정부패 관리를 사회적으로 매장시킬 수’는 있었던 것이다. 이슈를 인터넷 공간으로 끌고 가서 여론재판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요즘의 세태가 연상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수광은 이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지금은 이런 제도가 없어진 지 오래 됐다”고 마무리지은 것을 보면 ‘여론재판’에 반발한 관리들 때문에 사라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강하라는 인물에게 사헌부 감찰직에 제수한다는 내용의 교지. 감찰은 사헌부 소속 공무원이었지만 언론활동을 하는 사헌부 본부 공무원(지평·5품 이상)과는 다른 사찰업무를 맡고 있었다.|육군박물관 소장 


■무서운 기강…과도한 신입 환영회까지

백관을 규찰하고 단속하는 감찰하는 임무이다 보니 반드시 스스로의 몸가짐부터 조심했다. 

임무에 나선 감찰들은 누추한 옷과 더러운 복색의 붉은 토단령을 입었다. 또 조련되지 않은 말과 부서진 안장, 짧은 사모, 해진 띠를 사용했다. 이런 풍속은 명종(재위 1445~1467) 말년 심의겸·박순·박응남 등이 “이래선 아니된다”고 고치기를 청했고, 마침내 화려하고 산뜻한 옷차림으로 바뀌었다.(<지봉유설> <송와잡기>)

사헌부의 상하간 근무기강은 엄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장령(정 4품)이 출근하면 지평(정 5품)은 섬돌 아래까지 나가 맞아들이고, 집의(종 3품)가 출근하면 장령 또한 그렇게 하고, 대사헌이 등청하면 집의 이하가 모두 나가 영접하고….”(<용재총화>)

시작에 불과했다. 대사헌이 대청에 앉으면 수석아전이 대장청과 집의청에 가서 ‘회의합니다’를 외쳤고, 집의-대장(장령 및 지평)이 찰례로 대사헌에게 예를 올렸고, 이어 모든 감찰이 뜰에 나와 대사헌을 뵙기를 청한 뒤에 비로소 절을 하고 물러났다. 

사헌부 본부가 이 정도였으니 하부조직인 감찰청의 기강은 어떠했겠는가. 특히 감찰들의 신입생 환영회는 독하기로 악명 높았다. 

“신참 감찰을 신귀(新鬼)라 하여 온갖 짓으로 욕을 보인다. 신귀가 방안의 서까래 같은 긴 나무를 들지 못하면 선배들이 주먹으로 신귀의 무릎을 위로부터 아래까지 친다. 또 신귀에게 연못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으라고 명한다. 거미 잡는 놀이를 시키는데, 신귀가 손으로 부엌 벽을 더듬어서 두 손이 옻 칠한 것처럼 새카맣게 되면, 그 손을 씻은 더럽고 시커먼 물을 신귀에게 마시게 한다.”(<용재총화>)

이 뿐이 아니었다. 선배가 무시로 신귀의 집에 오면 신귀는 사모를 거꾸로 쓰고 나가 맞아서 당중(堂中)에 술자리를 베풀어야 했다. 

“이때 선배들은 기생 하나씩을 끼고 앉는데, 이를 안침(安枕)이라 일컬었다. 술이 취하면 상대별곡(霜臺別曲)을 불렀다.”(<용재총화>)

‘상대(霜臺)’는 사헌부의 별칭인데, 사헌부의 감찰이 ‘서릿발 같다’고 해서 서리 ‘상(霜)’ 자를 써서 상대라 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등청에 성공했어도 또하나의 위험한 관문이 있었다. 막 출근한 신입 감찰이 전날 밤에 당직을 서고 일어난 선배와 마주치면 그 선배가 갑자기 큰소리를 치며 신입 감찰에게 목침을 던졌다. 그 목침을 피하지 못하면 얻어 맞을 수밖에 없었다. 


■티타임에서 입무를 분장했다

감찰의 업무는 ‘오지랖 넓다’ 할 정도로 광범위했으니 분주하기 이를데 없었다.

감찰은 전곡의 출납과 조회, 제사는 물론이고 크고작은 공적인 일에 개입했다. 관원의 불법행위과 각종 집회, 부당한 상거래, 과거시험장에서의 부정행위 등이 감찰 대상이었다. 심지어 중국에 파견하는 사신단의 부정행위까지 규찰했고, 시정의 물가에까지 간여했다. 

맡은 일이 많았기에 24명 감찰의 업무분담이 필요했다.

이 업무분장을 ‘분대(分臺)’라 했다. 사헌부 관헌인 감찰을 여러 관청에 나누어 파견한다는 의미였다. ‘분대’는 사헌부 소속 대장(臺長)인 지평 혹은 장령이 주관했다. 물론 이들의 부재 때는 감찰 중 책임자인 방주감찰이 분대를 대신했다.

업무분장, 즉 분대는 정례회의인 제좌(齊座)과 매일매일의 약식회의인 다시(茶時·일종의 티타임)에서 결정됐다. 

사헌부와 함께 양사(兩司)를 이루며 임금의 잘잘못을 간쟁한 사간원 관리들의 친목모임을 그린 <미원계회도>(보물 제868호). 1540년 열린 이 계모임에는 이황, 유인숙, 이명기, 나세찬, 이영현 등이 참석했고 성세창의 시문이 적혀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새벽부터 밤까지 과로했던 감찰

특히 관청에 드나드는 물품은 감찰의 주요 규찰대상이었다. 

군자감(군수물자 관장), 광흥창(관리들의 녹봉 취급), 풍저창(각 관청의 운영경비 관장) 등 각 관청은 물론 왕실의 물품을 조달하는 내섬시(궁궐의 전각과 정2품 이상 관리에게 내리는 술), 내자시(왕실의 쌀·국수·술·간장·기름·꿀·채소·과일 및 내연직조 각종 물자조달), 사재감(어물·육류·식염 등의 출납) 등 관청도 감찰의 허락을 받아야 물품출납이 가능했다. 각 관청은 이런 물품의 조달 때마다 감찰을 청했는데, 이를 ‘청대(請臺)’라 했다. 

태종은 각 물품 가운데 임금과 관련된 어수물품의 출납(내자시·내섬시·사재감)만큼은 환관들에게 맡기려 했다.(1414년 8월 17일) 

그러나 사간원은 “어찌 환관의 무리에게 그런 막중대사를 맡기느냐”면서 “제대로 된 관제 아래 감찰을 파견해서 감독하는게 마땅하다”고 간언하여 태종의 명을 뒤집었다. 

감찰은 ‘여명분대(黎明分臺·새벽에 업무 시작)’, ‘조사만퇴(早仕晩退·일찍부터 일하고 늦게 퇴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분주하게 일해야 했다.

단적인 예로 1450년(문종 즉위년) 11월 12일 문종은 “사헌부 감찰을 마땅히 새벽녘에 나눠 보내라”는 명을 내린다,

이에 사헌부가 “급한 일이라면 몰라도 일상적인 업무는 제좌(정례회의)에서 결정하는게 예법”이라고 난색을 표했지만, 문종은 “우선 감찰은 본부(사헌부)가 아니라 곧바로 해당 관청에 출근하라”고 지시했다. 

이보다 앞선 1445년(세종 25년) 2월16일 경기도 감사 허후는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군자미를 받으려고 서울까지 왔지만 즉시 받아가지 못하고 여러날 지체한다”면서 “군자감 관리 전원을 배치해서 백성들에게 제때 나눠주고 이를 규찰할 감찰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도록 해달라”고 청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불철주야 일하는 이들이 바로 감찰이었다.


■동십자각 서십자각에서 관리들을 감시했다 

감찰들의 주된 업무장소 중 한 곳이 바로 광화문의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었다.

이곳에서 감찰들은 교대로 근무하면서 경복궁을 출입하는 관원들의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있는지 주시했다. 감찰들은 또 국가 차원의 대소 행사에 반드시 입회했다. 

“큰 조회든 작은 조회든 문(文) 무(武) 두 반(班)이 동서로 나누어 들어가는데, 감찰은 한 사람씩 반(班)의 뒤에 서서 의식의 절차나 의례에 따르지 않는 자를 살폈다.”(<문헌비고>)

국가 주관의 제사 때도 감찰이 배치됐다, 특히 국왕이 몸소 제사를 주관하는 제향에는 특별히 감찰 2명을 파견했다. 이들을 청제감(淸齋監) 감찰이라 한다. 청제감 감찰은 제사 7일전부터 몸과 마음을 삼가야 했다. 

예컨대 1425년(세종 7년) 2월 장인상을 당해 상가를 지키던 허만석을 정월 초하루의 친향대제(임금이 주관한 나라제사) 청제감 감찰로 임명했던 것이 파문을 일으켰다. 동료 감찰 7명이 허만석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사간원 좌사간 유계문은 지휘책임을 물어 사헌부 수장인 대사헌 이명덕까지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은 감찰들의 지휘선상에 있던 대사헌-집의-장령-지평까지 모든 관계자가 사직상소를 내는 사태로까지 비화했다. 세종은 동료 감찰들이 ‘그 사람(허만석)하고는 같이 일 못하겠다’고 앙앙불락하자 “참 고집스러운 감찰들이구나. 알았으니 이 일을 더는 논하지 말라”고 다독거렸다. 


■몽타주 보고 적발한 감찰 

감찰은 북경에 사신으로 떠나는 사행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이를 행대(行臺)감찰이라 한다. 행대감찰은 사행원들의 사무역 행태를 감시했다. 행대감찰은 조·중 국경에 맞닿은 의주에서 사행단의 수레와 수행원의 얼굴까지 일일이 대조해가며 감시했다. 

예컨대 1408년(태종 8년) 3월 9일 사행단을 이끈 남성군 홍서(?~1418)와 수행원들이 조선 임금이 중국황제에 보내는 공식선물 궤짝에 사사로운 물건을 넣고 국경을 넘으려다가 의주에서 행대감찰에 적발됐다. 사절단장인 홍서는 특히 타고 다니던 개인 말을 팔아서 채견(綵絹·무늬있는 견직물)을 구입해온 것까지 적발됐다. 홍서는 특히 궤짝 안을 조사하려는 감찰에게 “어인(御印·임금의 도장)이 찍힌 궤짝을 열고 닫을 수 없다”고 구차스럽게 변명했다. 결국 홍서는 자원안치(거주의 제한을 받는 유배형을 자처) 형식으로 처벌 당했고, 김위민은 파직, 한중로는 곤장 80대의 형을 내렸다.   

또 밀무역을 도모하는 상인의 무리가 뇌물을 건네고 사행단의 가노(家奴)를 사칭하며 끼어든 것도 감찰의 적발대상이었다.

1421년(세종 3년) 11월15일 <세종실록>은 이들을 적발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준다.

“거느리고 간다는 가노의 생년월일, 이름은 물론 얼굴 생김새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그린 다음 의주에서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가기 직전 행대 감찰이 얼굴생김새까지 일일이 대조한 뒤 국경을 넘게 한다.”

이를테면 감찰이 조·중 국경의 출입국관리소에서 입출국하는 외교관의 얼굴 생김새까지 감찰했다는 것이다. 이래도 사행단의 비행이 계속되자 세종은 “이제부터 북경에 가는 서장관(기록관)의 직책은 반드시 사헌부 감찰이 맡으라”는 명을 내린다.   

경복궁 광화문의 망루였던 동십자각의 1930년대 모습. 사헌부 감찰들이 교대로 이곳에 서서 백관들의 출입을 감시하고 그들이 예법을 잘 지키는지 규찰했다.


■도심 도보행사까지 규찰한 감찰

감찰의 업무는 관리들의 비위만 감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궁궐 내에 잡인의 출입을 감시하기 위해 궁궐 안을 교대로 순찰하도록 한 것은 감찰의 기본업무였다.(1400년·정종 1년 11월13일) 

지금으로 치면 도심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행사를 따라다니며 규찰하는 일도 감찰이 맡았다. 1422년(세종 4년) 2월9일 <세종실록>을 보면 “고려조부터 해마다 봄 가을에 불교 각 종파 스님들이 모여 불경을 외고, 나발을 울리면서 질병과 재액을 물리치는 이른바 경행(經行) 행사를 도심에서 벌였는데 이때 감찰이 걸어서 행렬을 살피고 따라다녔다”고 했다.

감찰의 오지랖은 한도 끝도 없었다. 시장에서 판매하는 물건의 가짜 진짜 유무까지 감찰을 파견해서 가리도록 했다. 

1445년(세종 27년) 11월 14일 사헌부는 “공장과 살점에서 파는 물건 중에 가짜가 많고 혹은 자루에 모래를 넣어 쌀로 덮거나, 나무껍질과 해진 자리 조각으로 신의 속을 넣는 경우가 많다”면서 “백성들이 속지 않도록 감찰을 파견해서 적발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 뿐이 아니다. 1419년(세종 1년) 3월 6일 세종은 “각 도의 수령들이 백성을 구제하는 사업에 제대로 힘쓰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서 “감찰을 보내 그 여부를 살피고자 한다”고 명했다. 수령들이 궁벽한 곳의 굶주린 백성을 수령들이 제대로 살피는지, 또 굶어죽는 백성이 있다는 것을 감추지는 않는지 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술마시고 헛소리 하다가 극형 당한 감찰

이처럼 부정부패와 비위를 적발하는 관리들의 저승사자였으니 감찰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관리들이 벌벌 떨었다. 그러다보니 그 권한을 남용하는 감찰들도 물론 있었다. 무엇보다 술 때문에 극형을 당하고, 곤욕을 치른 감찰들이 여럿 생겼다.  

예컨대 1398년(태조 7년) 7월11일 감찰 김부와 황보전이 신입감찰 김중성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는 좌정승 조준의 집을 지나가다 술김에 한마디 던진게 화근이 됐다. 

“비록 조준이 집을 크게 지었지만 오래 살지는 못할 것 같네. 뒤에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야.”

술김의 말이 돌고돌아 조준의 귀에 들어갔고, 조준은 태조에게 고스란히 고했다. 그러자 태조는 “개국공신 조준의 집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은 곧 조선의 사직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앙앙불락하면서 감찰 김부를 극형에 처했다. 김부의 말을 들고도 곧바로 조정에 고하지 않은 감찰 황보전 등도 곤장형을 받았으며, 술자리에 참석한 감찰 18명 전원이 파면됐다.(<태조실록>)

그런 탓일까. 태종은 “감찰들은 동료들과 몰려다니지 말고, 일반인과도 같이 다니지 말며, 늘 보는 눈을 조심하라”는 특명까지 내렸다. 그러나 술이 원수라고 이런 임금의 특명을 무시하고 일반 백성들과 함께 다니며 작당해서 술을 마신 것이 적발된 감찰 2명이 파면된 사례(<태종실록> 1406년 6월20일)도 있었다.    

조선시대 백관의 녹봉을 관장하는 관청과 창고, 24명의 사헌부 감찰은 관리들의 녹봉이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 철저히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세종 때는 관리들의 녹봉은 묵은 쌀과 묵은 콩을 지급하고 동료감찰들에게는 햅쌀과 햇콩을 지급하는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조선판 검경갈등

직권남용도 있었다. 1422년(세종 4년) 의금부 도제조 유정현이 세종에게 사헌부의 월권을 비판하고 나섰다.

“근자에 사헌부가 의금부의 진무·지사·도사를, 그것도 하급관리를 시켜 소환해서 뜰에 앉혀놓고는 사헌부 지평(정 5품) 이상은 모두 의자에 걸어앉아 심문했습니다. 이는 (임금의 명을 받는 사법기관인) 의금부 관리를 일반 죄인 취급한 것입니다. 더구나 의금부 관리를 사헌부가 마음대로 불러낸 것은 실로 부당한 일입니다.”

사헌부나 의금부는 모두 사법·사정기관이었다. 사헌부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감찰·처벌하는 업무였다면 의금부는 신하의 반역사건과 왕족 관련 사건,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해치고 노비가 주인을 해친 반인륜 범죄 등 중대범죄의 재판을 다뤘다. 여담으로 형조는 백성들의 일반범죄의 소송과 재판을 맡았다. 그랬으니 사헌부와 의금부의 격돌은 한마디로 사법기관끼리의 갈등이었다.

세종은 유정현의 상소를 듣고서는 “이것은 사헌부의 잘못이니 그 까닭을 물어보겠다”고 했다. 사헌부 장령(정4품) 황보인이 “3품은 대청 앞 툇마루에서, 4품 이하는 뜰 아래에서 진술을 받는 것이 사헌부의 전례”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세종은 “임금의 교지없이, 그것도 3~4품의 관리를 대청 앞에 꿇어앉히고는 지평까지 모두 걸터앉아 진술을 받는 것은 잘못”이라고 의금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1431년(세종 13년) 11월13일에는 영의정 황희가 사헌부 감찰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황희가 동지하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감찰의 보고가 올라가자 사헌부가 통례문(조회와 의례를 관장하던 관청)의 하급관리에게 책임을 물어 태형을 가했다. 이에 의정부가 나서 “정부는 백관의 장인데, 당상관(정 3품 이상)의 동정을 사헌부에 보고한 전례가 없으니 너무나도 억울하다”고 항의했다. 이 역시 내각과 사헌부의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었다. 세종은 “아무 잘못도 없는 통례문 관리가 죄를 받았으니 사헌부의 처사가 공명정대하지 못하다”면서 “사간원이 사헌부의 관리를 국문하라”고 명했다. 이를테면 특별검사를 기용해서 검찰의 잘못을 수사하라고 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호가호위한 감찰 수행서리 

감찰을 수행하는 하급관리 중에는 호가호위하는 자도 있었다.

1454년(단종 2년) 3월 11일 문선망제(공자를 위한 제사)를 지낼 때 제사를 관리할 감찰의 수종서리 김자경이 봉상시와 성균관 서리들과 함께 명륜당 서익실에서 드러누워 있었다. 이 꼴을 보다못한 성균관 생원 김승경 등이 달려들어 김자경의 두건과 의대(衣帶)를 빼앗았다. 감찰이 본부(사헌부)에 보고하자 의정부의 논의를 거쳐 생원들을 의금부에서 추국토록 했다.

사태가 심상치않게 돌아가자 성균관 생원들이 들고 일어났다. 생원들은 “서리(書吏)는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당하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하는데 감찰을 수행한 문제의 서리는 분수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감찰은 당하(堂下·궁정의 댓돌 아래)에서 열심히 제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아전이라는 작자는 당상에서 본관(성균관) 아전과 더불어 비스듬히 앉거나 눕거나 하고, 옷을 벗고 떠들며 웃었습니다. 분이 치밀어 마침내 그 갓을 빼앗았습니다.”

상소문을 읽은 단종은 “원래 국가 대사를 위해 올리는 상소문을 너희는 벗을 구하려고 올리는 것이냐”고 야단 친 후에 “(곤장 80대에 해당되는 죄를 진) 김승경 등은 여러날 갇힌 것 자체가 처벌이었다”면서 용서해주었다. 감찰의 뒷배 덕분인지 감찰을 수종한 서리는 처벌받지 않았다. 


■감찰들만 햅쌀밥 먹은 사연

감찰의 집단이기주의가 낳은 사건도 있었다.

1424년(세종 6년) 2월12일 사헌부가 자체감사를 통해 감찰 허비·오정·오계종 등을 처벌해줄 것을 임금에게 아뢰었다. 

자체감사의 동기가 희극이었다. 마침 광흥창에 저장된 쌀이 부족해서 3품 이하의 관리에게는 군자감에 저장된 묵은 쌀과 묵은 콩을 일부 주도록 했다. 그런데 새파란 감찰들은 전부 광흥창의 햅쌀과 해콩을 녹봉으로 받아챙겼다. 그러다보니 3품 이하 관리들에게는 군자감의 묵은 쌀과 묵은 콩이 더 많이 돌아갔다. 사헌부의 자체감사 결과 이 모두가 광흥창의 규찰업무를 맡았던 감찰 허비의 짓이었다. 광흥창 관리인 최약지와 짜고 동료 감찰들에게 모두 햅쌀과 해콩을 지급하도록 한 것이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햇쌀과 해콩을 받은 감찰의 수가 <세종실록>에 따르면 모두 14명에 달한다. 이들 중 공신의 자제들은 파직되고, 깊게 연루된 자들은 곤장 50~80대의 처분을 받았다.

감찰의 직무태만 사례도 실록에 등장한다.

1411년(태종 11년) 12월24일 사헌부가 군기감 승(종5품~정9품)인 최해산(최무선의 아들)과 감찰 최세창 등의 죄를 청했다.

군기감 관리를 맡은 최해산이 권지직장(임시직 하위관리) 장의를 시켜 철 133근을 출납하게 한 것이 적발됐다. 초과지출이었다.

감찰 최세창은 바로 이런 잘못을 제대로 감찰하지 못했다는 죄로 태장 50대에 해당되는 처벌(벌금으로 대속)을 받았다. 


■품위 손상으로 탄핵당한 감찰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탄핵당한 감찰도 있었다.

1449년(세종 31년) 6월 16일 집현전은 “감찰 하순경을 파직하고 흥천사 보공재를 정지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집현전은 “모든 제향과 조회에 대감(臺監·사헌부 감찰)을 두는 것은 비위를 규찰하기 위함”이라면서 “그러나 이번 흥천사 기우제에 감찰로 나선 하순경이 체면에 손상되는 행위를 벌였다”고 탄핵했다,

“감찰은 늘 공경하고 차분한 자세를 유지해야 함에도 감찰 하순경은 흥천사 기우제를 감찰하면서 중(스님)들로 더불어 불전(佛殿)에 두루 뛰어다니어 조정의 옷과 중들의 옷이 앞뒤로 뒤섞이어 몸을 흔들고 뛰놀았습니다. 이에 땀이 흘러 등이 흠뻑 젖어서, 물건으로 옷을 괴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꿉적거리고(몸을 굽신거리고) 황당스러운 몰골은 풍헌(風憲·사헌부)의 체통을….”

집현전은 “절에서 쓸데없이 기우제를 지내느니 차라리 구황정책을 제대로 펼치는게 낫다”면서 그런 자리에서 체신머리없이 몸을 움직인 감찰 하순경을 탄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감찰과 요즘의 감찰  

최근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업무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물론 사헌부라는 정식 직제에 소속된 조선시대 감찰과, 대통령비서실 직제령에 따라 설치된 특별감찰반은 같을 수는 없다. 일례로 사헌부 소속 공무원들이 맡은 조선시대 감찰과, 감사원·검찰청·경찰청 등에서 파견된 이들이 소속한 청와대 감찰반은 다르다.

그러나 조선시대 감찰이나 요즘의 청와대 특감반이나 똑같이 해당되는 사항은 있다.

<지봉유설> 등에 기록된대로 “감찰은 백관을 규찰하고 단속하는 자리라 반드시 자신의 몸가짐부터 소박하게 가진 연후에 사람들의 부정과 불법을 독책(문책)할 수 있는 것”이다. 임금(대통령)의 이목지신, 즉 눈과 귀가 되어 관료의 기강을 세우고 민원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관민의 사표가 되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뜻이다. 과연 검찰과 감사원, 국가정보원, 청와대감찰반, 경찰 등 조선시대 사헌부와 사헌부 소속 감찰이 추구한 그런 추상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가.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이성무, <조선은 어떻게 부정부패블 막았을까-조선의 대간, 감찰, 암행어사 이야기>, 청아출판사, 2009 

김재명, ‘조선 초기의 사헌부 감찰’, <한국사연구> 65권, 한국사연구회, 1989

홍혁기. ‘사헌부의 감찰기능’, 법제처, 1984

노운현, ‘조선시대 대간과 감찰기능’, 고려대 석사논문,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