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서울의 제과점 점원, 만주의 운전견습생 및 철도원,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철공소 직공, 잡역부, 날품팔이 등을 가리지 않고 일본인 행세를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가 있었다. 바로 이봉창(1900~1932년) 의사였다.

이봉창 의사의 선서문. ‘적국의 수괴(일왕 히로히토)를 도륙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하오리(일본식 남자옷)에 게다짝까지 질질 끌고다니는 이봉창이 상하이 임정 건물을 출입하자 사람들은 “백범 선생은 왜놈 행색의 저런 자를 그냥 두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백범 김구 선생은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쓰던 이봉창을 유심히 살피고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한다. 

이봉창이 철저하게 일본인 행세를 했던 것은 바로 깜짝 놀랄만한 거사를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바로 일왕 히로히토(裕仁) 암살계획을 세운 것이다. 거사준비엔 꼬박 1년이 걸렸다. 백범이 자금과 수류탄을 준비하는 동안 이봉창 의사는 일본인 철공소에서 일하며 일본 영사관도 자유롭게 출입했다. 백범은 1931년 12월13일 선생을 안중근 의사의 아우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으로 데려가 선서식을 거행했다. 선서식이 끝난 뒤 이봉창 의사는 수류탄을 양 손에 든 채 기념촬영을 했다.

4일 후인 17일 일본으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이듬해 1월8일 일왕 히로히토가 도쿄(東京) 요요기(代代木)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상하이(上海)의 백범 선생에게 ‘물품은 1월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 전보를 보냈다. 운명의 8일이 되자 이 의사는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사쿠라다문(櫻田門)에서 수류탄을 던졌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았다.

‘적의 장교를 도륙하겠다’고 선서한 윤봉길 의사의 ‘선서문’. 보물 제 568호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제는 경악했다.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그것도 일제가 신격화한 일왕의 행차에 폭탄을 던졌다는 것은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문화재청은 12일 이봉창 의사가 일왕을 처단하고자 하는 결의를 기록한 그 역사적인 ‘선서문’과 친필편지 및 봉투, 그리고 의거자금 송금증서를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했다. 국한문혼용체인 선서문은 비록 달필은 아니지만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기개가 심금을 울린다. 

또 12월24일 이봉창 의사가 백범 김구에게 의거자금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은 친필편지는 의거실행을 ‘물품이 팔린다’는 암호로 바꿔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는 1931년 12월28일에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도쿄에 있는 이봉창 의사에게 의거자금 100엔을 보낸 증서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같은 해 4월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에 기폭제가 됐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항일독립운동 전선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해(1932년) 4월29일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를 일으킨 윤봉길 의사의 선서문과는 일부가 다르다. 즉 윤봉길 의사의 선서문과는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까지는 같다. 

그러나 윤봉길 선서문은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로 끝나지만 이봉창 선서문은 “‘적국의 수괴’(일왕)을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로 마무리된다. 타격 대상에 따라 문구를 달리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친필편지. 1931년 12월24일에 이봉창 의사가 김구 선생에게 의거자금을 요청한 것으로, 의거실행을 ‘물품이 팔린다’라는 암호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윤봉길 의사가 표현한 ‘적의 장교’는 일본 상하이(上海) 주둔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가리킨다. 시라카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결국 사망한다. 또한 윤봉길 선언문이 1972년 일찌감치 보물(제568호)로 지정됐지만 ‘이봉창 선서문’은 이제와서야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됐다는 것도 다르다.

그렇다면 이봉창 의사 ‘선서문’도 곧바로 보물로 지정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격이 낮은 ‘등록문화재’로 등록예고할 필요가 있을까. 

전통적인 문화유산은 개화기를 기점에서 그 이전의 유물을 가리키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근대문화유산의 개념이 도입되면서 ‘개화기 이후~한국전쟁 전후의 문화재와 그 이후로도 멸실·훼손의 위험이 있는 문화유산’까지로 범위가 넓어졌다.   

안형순 문화재청 근대문화재과장은 “근대문화유산의 등록문화재 제도가 없던 1972년 보물로 지정된 윤봉길 의사 유물과 달리 이봉창 의사 유물은 ‘등록문화재→보물→국보’라는 문화재의 절차에 따라 일단 등록문화재가 된 것”이라면서 “향후 가치평가에 따라 얼마든지 보물로 승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봉창 의사 의거자금 송금증서’는 1931년 12월28일에 김구 선생이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 도쿄에 있는 이봉창 의사에게 의거자금 100엔을 보낸  증서이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유물처럼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근·현대 유물들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서 문화재 등록 및 지정절차에 돌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또 항일독립 문화유산인 ‘만해 한용운 심우장’(서울 성북구)을 사적으로 지정 예고했다. ‘심우장’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생이 1933년에 직접 건립하여 거주한 곳이다. 독립운동 활동과 애국지사들과의 교류 등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측면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심우(尋牛)’란 소를 사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라는 의미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이다. 집의 방향을 총독부의 방향을 피하여 동북방향으로 잡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한용운 선생의 독립의지를 엿볼 수 있으며,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되면 2017년 10월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지정된 ‘구리 한용운 묘소’와 함께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기릴 수 있는 뜻 깊은 장소가 될 것이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과 ‘이봉창 의사 선서문 및 유물’ 등은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지정·등록될 예정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