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의 ‘훈요 10조’ 중 3조는 ‘맏아들의 왕위계승 원칙’을 천명했다.

‘맏아들이 불초할 때는 둘째가, 둘째가 불초할 때는 형제 중에서…’라는 단서 조항도 따른다.

 

조선시대 들어 특히 ‘적자와 장자’의 의미가 강조됐다. 1차 왕자의 난(1398년) 후 정권을 잡은 이방원은 “적장자가 뒤를 이어야 한다”면서 둘째형인 방과(정종)을 옹립한다.

첫째형(방우)은 고려의 충신으로 남았던 인물이었고, 술병에 걸려 죽었다. 그래서 둘째인 방과가 적장자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태종의 속셈은 뻔했다.

정종과 정부인인 정안왕후 김씨가 묻혀있는 후릉. 정종가 정안왕후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정종은 9명이 첩으로부터 15남 8녀를 두었다. 그러나 동생인 이방원의 존재 때문에 슬하의 자녀들을 모두 출가시켰다.  

 

둘째형에게 일단 넘겨주고 몇 년 후에 자신이 ‘왕세자’가 되어 3대 임금으로 등극하는 절차를 밟겠다는 속셈이었다. 정통성을 획득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불노라는 사나이가 “내가 정종의 적장자”라며 불쑥 등장한 것이다.

 

숨겨놓은 정종의 맏아들이 맞았다. 정종의 정부인은 정안왕후 김씨였지만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다.

 

정종은 대신 9명의 첩으로부터 15남 8녀를 두었다. 불노는 정종의 첩 가운데 그래도 신분이 높았던 가의궁주 유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 맞았다.

 

‘임금의 맏아들’이 어느날 갑자기 궁중에 들어오자 이방원 세력이 민감하게 움직였다.

 

정종이 불노를 세자로 책봉한다면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이 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정종은 ‘원자’라 일컬었다. 이방원의 신하들은 ‘죽쒀서 개주는 거냐’고 앙앙불락했다. 불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

 

태가 심상치않다는 것을 간파한 정종은 ‘불노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 선언해버린다. 앗 뜨거 싶었던 것이다. 정종는 한술 더 떠 불노를 포함한 슬하의 아들 15명에게 “전원 출가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복 동생들을 죽이고, 세자의 외숙들까지 “내(태종)가 양위발표를 하자 웃는 낯을 보였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로 몰살시킨 동생(태종)이 아니었던가. 정종이 큰아들을 세자로 고집했다면 아마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 인조의 질투 속에 의문사를 당한 소현세자는 어떤가.

 

볼모로 잡혀있던 청나라로부터 엄청난 선물을 받았고, 귀국길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속에 금의환향한게 화를 불렀다.

 

귀국한 지 두 달 만(1645년)에 급사한 소현세자의 몸은 전부 검은색을 띠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인조실록>조차 “약물에 중독된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독살설이 제기될만 하다.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씨마저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를 넣어 인조를 죽이려 했다”는 혐의로 사사됐다.

 

따지고보면 조선조 27명의 왕 가운데 적장자로 등극한 이는 7명(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뿐이다.

신하간·형제간 암투는 물론 임금·세자 간에도 처절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인 김정남의 피살은 왕조시대 권력투쟁극 중에서도 최악의 막장드라마라 할 수 있다. 할아버지(김일성)에게 인정받지 못한 유부녀 며느리(성혜림)가 낳은 아들이지만 장남은 장남 아닌가.

갑자기 태종 생각이 난다. 피도 눈물도 없던 태종도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형(정동)의 맏아들(불노)을 죽이지는 않았다. 공주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태종의 측근들이 “변란죄로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여러차례 고했지만 태종은 “죄를 묻지 않겠다”고 일축했다. “도망가서 내 눈에 띄지 않으면 된다”고 무마했다.

 

불노는 이후에도 ‘정종의 아들’임을 자처하고 떠들고 다녔다. 그래도 태종은 문책하지 않았다. 불노는 승려가 되어 천수를 누렸다.

 

이미 권력을 잡은 이상 자신에게 위해가 되지 않은 사람은 벌주지 않은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