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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조선시대 감찰반과 청와대 감찰반

청와대 특별감찰반의 공직기강이 도마 위에 오르자 청와대는 지난달 대책을 내놨습니다. 민정수석실 반부패비서관실 산하 특별감찰반 이름을 공직감찰반으로 바꾸고 감찰반의 인적구성을 다양화하는 등의 개선책을 마련했습니다.

청와대가 민정수석실에 특별감찰반을 만든 이유가 무엇일까요.

광화문 날개에 설치된 동십가각. 조선시대 감찰이 이곳에서 궁궐을 출입하는 관리들을 감시했다.

기자가 ‘대통령 비서실 직제령’ 제7조(감찰반)를 찾아보니 “1)대통령이 임명하는 행정부 소속 고위 공직자, 2)대통령이 임명하는 공공기관·단체 등의 장 및 임원, 3)대통령의 친족 및 대통령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자에 대한 감찰업무를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임명 한 뒤에도 감찰할 필요가 있지만 새로운 인재를 임명하기 전에도 흠결 있는 인물인지 아닌지 대통령이 판단할 자료를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는군요. 이제 기자가 호기심을 살려 조선시대에는 이와같은 감찰조직이 없는지 한번 찾아보았습니다.

당장 여말선초의 정치가 학자인 조준(1346~1405)의 언급이 눈에 띄었습니다.

“감찰은 백관을 살펴서 왕의 ‘귀와 눈’(耳目)이 되고, 모든 제사와 조회로부터 전곡과 출납에 이르기까지 단속합니다.”

조준은 사헌부 감찰의 직분을 ‘임금의 이목지신(耳目之臣)’이라 했습니다. 백관을 탄핵하고 임금의 잘못을 가리는 언론활동은 지평(5품) 이상의 사헌부 관리(대관)가 맡고, 임금의 눈과 귀를 대신해서 백관을 규찰하는 임무는 감찰(6품) 24명이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감찰에게는 이른바 형벌권은 없었습니다. 비위 및 부정부패 사실을 감찰 적발하면 본부(사헌부)에 보고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감찰에게는 ‘사회적 매장권’이 부여됐습니다. 즉 악질관리의 집 앞에서 다시(茶時·티타임을 열고는 그 사람의 악행을 백판(白板)에 열거하고 대문에 걸고는 가시나무로 단단히 봉한 뒤 연명으로 서명하고 돌아갔습니다. 

낙인찍힌 관리는 영영 관직에 복귀할 수 없었다.(<지봉유설>) 공소권이 없으니 죄상을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 공개해서 매장시키는 격입니다. 감찰의 업무는 광범위했습니다. 전곡의 출납과 제사는 물론 관원의 불법행위과 각종 집회, 부당한 상거래,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사신단의 비위 등도 감찰 대상이었습니다.

사헌부 감찰들의 모임을 그린 ‘총마계회도’(보물 제1722호). |밀양박씨 문중종회 소장

1445년(세종 25년) 경기감사 허후는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제때 규휼미를 분배받는지를 감시할 감찰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도록 해달라”고 청했습니다. 

감찰의 ‘여명분대(黎明分臺·새벽에 업무 시작)’, ‘조사만퇴(早仕晩退·일찍부터 일하고 늦게 퇴근한다)’의 일화입니다. 직권남용과 비위의 사례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1424년(세종 6년)에는 광흥창(녹봉 창고)에 배치된 감찰 허비가 창고 관리와 짜고 햅쌀과 해콩만을 골라 감찰 동료들에게만 지급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집단 이기주의의 발로라 할까. 같은 권력기관인 의금부의 정 3품 이상 고위관리를 소환해서 땅바닥에 꿇어앉히고 정 5품의 사헌부 지평에 의자에 걸터앉아 심문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최근 청와대 감찰반이 논란의 중심에 서있었습니다. 어감이 좋지 않다고 특별감찰반에서 ‘특별’자를 빼고 ‘감찰반’으로 이름을 바꾸는 등 여러가지 보안책을 마련했답니다. 

물론 지금의 청와대 감찰반이 조선의 사헌부 감찰과는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감찰은 백관을 규찰·단속하는 자리이니 반드시 자신의 몸가짐부터 소박하게 가진 뒤에 사람들의 부정과 불법을 문책할 수 있다”(<지봉유설>)는 것입니다.

임금(대통령)의 이목지신이 되어 관료의 기강을 세우고 민원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관민의 사표가 되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공을 초월해서 결코 잊지말아야 할 금과옥조입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