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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조선은 왜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

지난주엔 고려 조선의 빼어난 천문관측 사례를 더듬어보았습니다. 1572년의 ‘티코 초신성’과 1604년의 ‘케플러 초신성’ 등 밤하늘의 우주쇼를 조선의 천문학자들도 목격했으며,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석담일기> 등에 그 관측기록을 담았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1604년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한 초신성의 경우 조선천문관리들이 4일이나 먼저 관측했습니다. 1572년 서양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목격한 초신성의 경우 똑같은 날짜 <선조수정실록>에 기록됐습니다.
비단 서양에서도 거의 동시에 관측된 객성(초신성·신성·변광성)의 기록뿐이 아닙니다.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서양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중요한 객성 기록이 있습니다. 예컨대 1973년과 1074년 고려의 하늘에서 관측된 신성과, 1592~1594년 사이 15개월이나 목격된 변광성 및 신성 기록이 그것입니다. 천문관측에 관한한 고려 조선의 수준이 서양을 뛰어 넘어섰다는 증거입니다.
그렇다면 의문점이 생깁니다. 왜 고려 조선 등 우리 조상들은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아닌게 아니라 천문관측을 잘못한 관리들은 곤장을 맞고 유배형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요즘 날씨예보를 잘못했다 해서 기상청 관리를 처벌하고, 일식이나 객성 출몰소식을 잘못 전한 천문관리들을 “매우 쳐라”는 식으로 치도곤한 셈이지요.
이렇게 고려나 조선의 임금들이 천문관측가 날씨예보에 왕조차원의 관심을 보인 까닭이 있었습니다.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습니다. 왜냐. 옛 임금들은 민심은 곧 천심이며, 하늘의 조화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곧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52회는 ‘조선은 왜 천문관측에 목숨을 걸었을까’입니다. 천문관측에 왕조의 명운을 걸었던 옛 조상들의 하늘땅 별땅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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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고려·조선시대의 객성관측 뿐이 아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나라를 개창한 직후인 기원전 54년 “박혁거세 4년 여름 4월 일식이 있었다”는 천문기록과 함께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이후 <삼국사기>에는 67회의 일식기록과 함께 월식과 행성의 움직임, 혜성의 출현, 유성과 유성우, 심지어는 오로라까지 약 240가지의 천문 현상이 기록돼있다.
<고려사> ‘천문지’에 나타나는 ‘흑자(黑子·흑점)’ 기록은 당시의 흑점 주기가 약 11.3년의 짧은 주기적 변화와 약 97년의 장기 변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흑점의 주기는 현재 잘 알려진 태양의 흑점 주기와 일치한다.

지난해 6월 전갈자리 꼬리부분에서 관측된 신성의 흔적. 1437년 폭발한 신성이다. <세종실록>에 나온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우리 조상들은 왜 다른 분야에 비해 유독 천문학에 목숨을 걸었을까.
이유가 있었다. 왕조시대 임금들은 천인감응설에 따라 하늘이 내리는 상서로움과 재앙, 길흉의 조짐을 잘 파악하는 것을 제1덕목으로 삼았다. 제정일치의 사회부터 임금은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중간자의 입장이었다. 상형문자인 임금 왕(王)자를 보라.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를 소통시키는 형국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객성과 같은 이변이 일어나면 불길한 징조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그 경우 임금은 위로는 몸과 마음을 삼가고 반성해서 하늘의 징계를 두려워 해야 했고(공구수성·恐懼修省), 밑으로는 신하들에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거침없이 바른 말을 하라”고 ‘구언(求言)’해야 했다.

 

■천문은 하늘과 백성을 소통시키는 제왕의 덕목 
단적인 예로 1604년의 객성(초신성) 폭발 등 기상이변이 잇따르자 선조는 “내 탓이오”를 외치는 반성문을 전국에 반포하면서 “나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는 구언(求言)의 명령을 내린다.
“내 부덕한 자질로…아래서는 백성들이 원망하고 위에서는 하늘이 노하여…객성이 나타나고…하늘 견책을 보이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말을 할수록 내가 깊은 골짜기에 빠지는 것 같구나.”(<선조실록> 1605년)
객성과 같은 별자리 이변(星變)이 일어나면 임금은 소복에 검은 띠를 두르고 월대(궁전 앞의 섬돌)에서

지난해 6월 국제연구진이 칠레에서 관측한 전갈자리 신성의 폭발 잔해. 1437년 세종시대에 관측한 신성 현상을 일으킨 별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른바 구식(救蝕·기상이변 때 임금이 삼가는 뜻에서 펼치는 의식)을 행했다. 1770년(영조 46년) 봄에 객성이 출현하자 영조는 월대에 올라 사흘 밤낮으로 간절히 외쳤다.
“제발 객성아.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옮기지 마라.”
<영조실록>은 “임금이 사흘간 간절한 마음으로 빌자 객성이 사라졌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하늘의 성변을 제대로 관측하는 것은 하늘과 백성의 마음을 제대로 읽는 통치권자의 능력이었다. 이것이 왕조 시대 임금들이 천문학에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잘못 예보한 천문관리는 처벌받았다
오죽하면 천문관측을 잘못한 천문관(서운관 관리)은 처벌을 받아야 했다.
조선 조정이 참고한 명나라 법률(<대명률>)은 “무릇 서운관(관상감) 관리가 점을 잘 못 쳐서 임금에게 아뢴 경우엔 곤장 60대를 맞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또 상서로운 징조를 허위 조작한 경우에는 곤장 60대에 도형 1년에 처했다.
이밖에 나라의 재이 또는 상서로운 징조가 있는데도 천문담당 관원이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으면 2등을 더해 가중처벌했다.(<대명률>) 곤장 80대와 도형 2년에 해당됐다.
실제로 1398년(태조 7년) ‘월식 예보’를 잘못한 서운관 주부(종 6품) 김서가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전문가란 자가 어리석어 천문현상을 잘못 예보하여 임금과 백성을 속였으니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태조는 처벌상소를 뭉그적거리며 제때 올리지 않은 사간원·사헌부·형부의 관리들을 직위해제했다.
1406년(태종 6년)에는 일식을 제대로 예보하지 못한 서운관 관리 박염에게 유배형을 내렸다. “박염을 처벌하라”는 사간원의 상소문이 추상같았다.
“박염이 일식 현상의 시기와 분도를 예보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 직무를 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박염을 법률에 따라….”

 

혜성을 관측한 장면이 그림과 함께 빠짐없이 기록된 성변측후단자.

■1각의 차이도 용납하면 안된다
1413년(태종 13년)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음력 정월초(1월1일) 설날 아침 제사를 지낸 뒤 신료들의 신년인사를 받기로 했는데, 일식이 일어난 것이다. 일식같은 기상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은 흰옷을 입고 각대를 찬 뒤 정전의 월대(섬돌)에서 하늘의 처분을 기다렸다. 오정(午正) 무렵부터 시작된 일식은 신초(申初·오후 3시) 2각에 끝났다.
그런데 여기서 착오가 생겼다. 서운관의 술자 황사우가 “이번 일식은 신초 3각에 복원될 것”이라 예보했는데, 결과적으로 1각(刻·14분24초)의 오차가 난 것이다. 비롯 틀리기는 했어도 나름 선방한 예보였다. 그러나 태종은 짐짓 신하들에게 운을 뗀다.
“예보한 것과 1각의 차이가 났는데, 서운관 관리(황사우)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그러자 지신사(도승지) 김여지는 ‘참 애매하다’는 듯 “조금 어긋나기는 했지만 죄가 있고 없음을 판단하지 못하겠다”고 판단을 유보했다.
좌부대언 한상덕도 비슷한 입장이었다.
“일식이라는 게 일정한 법칙은 있겠지만 임금이 정치를 잘하면 일식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또 혹시 압니까. 누각(漏刻·물시계)이 착오를 일으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태종은 “죄가 애매하면 가볍게 처벌하고, 공훈이 애매하면 후하게 상급을 내리라는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라면서 오히려 황사우에게 미두 20석을 하사했다.
이 실록기사는 두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처벌은 웬만하면 가볍게, 상급은 웬만하면 후하게 한다’는 인군의 모습을 과시한 것이 첫번째다. 또하나는 비록 1각의 착오로 선방했다지만 완벽한 예보는 아니니만큼 다음에 더 잘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조선의 관상감에서 편찬한 천변의 관측 기록을 모아놓은 등록. 객성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보인다.|연세대 도서관 소장

 

■천문대장에 국무총리(영의정)을 둔 이유
그랬으니 국왕들은 천문예보에 온 힘을 쏟았다,
특히 세종은 천문·지리·역법·측후·각루(물시계) 등 사무를 관장하는 서운관(훗날 관상감)을 설립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서운관의 총책임자는 영의정이었고, 2인의 장관급 관리가 보좌했으며 65명의 관리가 배속됐다. 지금으로치면 국무총리가 천문대장과 기상청장을 겸한 것이다.     
천문관측은 정교했다.
천상을 23종으로 분류하고 관측 규정을 비상현상과 통상형상으로 구분했다. 예컨대 일·월식, 백운(白暈), 지진, 혜성, 신성 등의 출현은 비상현상으로 분류됐다.
이때는 출현시각, 모양과 정도, 위치, 변화 등을 엄밀한 예규에 따라 기록한 보고서(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를 작성해서 올렸다. 4통의 보고서는 승정원과 승정원의 주서, 시강원, 규장각에 1통씩 제출됐다. 보고로만 그치지 않았다. 서운관은 <관상감일기>와 <천변등록(天變謄錄)>에 자세한 사항을 기록하여 원부로 보관했다. 2중3중의 지독한 기록과 보관이었다.

 

■매뉴얼에 따른 천문 관측 기록
이뿐이 아니었다. 일·월식과 태양흑점, 햇무리와 달무리, 유성, 눈, 비, 우박 등의 천문현상을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기록했다.
예컨대 객성의 경우, “밤 어느 경에 객성이 어느 수(宿)의 어느 도(度) 안에 나타났습니다.”라 했다.
강수현상의 경우도 측우기의 수심과 강수의 정도에 따라 8단계로 구분하여 명기하도록 했다. 

‘비…몇 시 몇 경, 쇄우비가 내리다. 측우기의 깊이 몇 촌, 혹은 몇 분…’, 뭐 이린 식으로 기록해야 했다.
심지어 구름의 경우도 ‘모양, 색, 크기, 출현시각, 방향, 소멸시각과 이동경로’ 등까지 빠짐없이 써야 했다. 우박은 내린 시각과 함께 그 크기를 ‘소두(작은 콩), 대두(큰 콩), 진자(개암나무 씨), 조란(새알) 등으로 분류했다.
<고려사>에서 유성의 크기를 ‘달걀, 술잔, 모과, 바리, 질장구’ 등으로 나눈 것과 일맥상통한다.
서운관 관리들을 하루 밤낮을 5교대로 입직해서 관측해야 했다. 당번은 그때마다 관측일지를 직성했는데, 일지와 보고서에는 관측자가 반드시 서명해야 했다. 책임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었다. 

 

창경궁 안에 있는 천문 관측 시설. 1688년 설치됐다. 화강석 축조물로 그 위에 소간의를 설치하고 천문을 관측했다.

■잘못된 예보는 임금 구실을 못하게 한다
태종시대에 일식을 잘못 예보한 서운관 관리(박염)를 탄핵한 사간원 관리는 그 이유를 적나라하게 고한다.
“법전에 ‘때에 앞서는 자도, 때에 늦은 자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서운관 관리 박염은 시기도, 분도도 어긋나는 예보를 했습니다. 태양은 모든 양기의 으뜸입니다. 덮이거나 먹히는 것, 즉 일식이 있으면 엄청난 천변입니다. 만약 이런 일식이 일어나면 ‘제발 일식이 걷히게 해달라’는 의례행사를 벌여야 합니다. 그런데 박염의 잘못된 예보 때문에 이런 의례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박염의 죄가 무겁습니다.”
일식과 같은 천문상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이 마땅히 공구수성하는 몸가짐을 하고, 하늘제사를 드려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서운관 관리 한사람의 잘못으로 임금이 임금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고려·조선시대의 천문은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목숨을 걸고’ 관측했다는 표현이 옳을 지 모른다. 천문은 나라와 임금, 그리고 무엇보다 백성의 안녕을 지켜주는 하늘의 경고메시지였기 때문이다.

 

■세종시대 천문학자가 관측한 사랑의 조각  
때는 바야흐로 만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이 조선을 다스리던 1437년(세종 19년) 음력 2월 5일이었다.
“유성이 하늘 가운데에서 나와서 동북쪽으로 향하여 들어갔다. 꼬리의 길이가 4, 5척이나 되었다.

햇무리를 하였는데 양쪽에 귀고리를 했다. 객성(客星)이 처음에 미성(尾星·전갈자리 별자리)의 둘째 별과 세째 별 사이에 나타났는데, 세째 별에 가깝기가 반 자 간격쯤 되었다. 무릇 14일 동안이나 나타났다.”(<세종실록>)
보기드문 우주쇼였다. 밤하늘에 유성과 햇무리에 이어 객성이 출현했다는 것이었다. 특히 객성은 14일간이나 나타났다는 것이다.
최근 미국 뉴욕 자연사박물관 연구원과 영국 리버풀존무어대, 폴란드과학아카데미 등 6개국 공동연구진은 지난해 칠레의 라스 캄파나스 천문대에서 전갈자리에 있는 한 별을 둘러싼 가스 구름을 관측했다.

이 별의 움직인 방향과 속도를 계산하던 공동연구진은 깜짝 놀랐다. 바로 조선의 천문관이 1437년 관측한 바로 그 객성과 동일한 별임을 확인한 것이다. 이 신성에게 ‘노바(신성) 스코피 1437’라는 이름이 붙었다. 1437년 전갈(스콜피온) 자리에서 발견된 신성(노바)라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이 별의 가스구름은 1437년 폭발한 객성의 흔적이었던 것이다. 공동연구진은 이 별에서는 최근(1934·35·42년)에도 최소한 3번의 작은 폭발현상(왜소신성)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간 신성 폭발이 일어나고 다음 신성 폭발이 일어나기까지 별이 어떤 상태를 지나는지 알지 못했는데, 이 사이에 왜소신성이 수차례 발생한다는 것을 최초로 확인한 것이다.

세종시대의 관측기록이 580년 후 현대천문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된 셈이다.      
이 연구에 동참한 스티븐 쇼어 이탈리아 피사대 교수의 한마디가 흥미롭다.
“‘노바 스코피 1437’ 신성은 역사학에서 사랑스러운 조각 중 하나이다.”
비단 세종시대 천문학자 뿐이 아니다. 1073~1074년의 고려 천문학자들과 1572년과 1592~94년, 그리고 1604~1605년의 조선 천문학자들은 밤하늘에 수많은 사랑의 조각들을 찾아냈다. 참 신기한 일 아닌가.(끝)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박명구, ‘한국 고천문 초신성 기록 연구’, 2006년 기관고유사업 위탁연구과제 보고서, 한국천문연구원, 2007
양홍진, ‘천문기록을 활용한 변광성 연구, 한국천문연구원, 2014
        ‘Analysis of Korean historical astronomical records:고천문 자료를 이용한 유성과 유성우 R Aqaurii 연구와 고인돌에 대한 천문학적 연구’, 경북대 박사논문, 2004
전상운, ‘서운관지 해제’, <국역 서운관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최병조, ‘천상예보부실죄? 서운관 술자 황사우 사건’, <서울대학교 법학> 제53권 제3호,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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