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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

중국의 바둑외교가 던진 화두

바둑을 다른 말로 난가(爛柯)라 한다.

‘기원전 700년 무렵 진(晋)나라 사람 왕질이 나무 하러 갔다가 두 동자의 바둑을 넋놓고 관전한 뒤 돌아가려 했는데, 들고 있던 도끼자루(柯)가 폭싹 썩었다(爛)’는 고사에서 나왔다. 맹자는 “술 마시고 박혁(바둑과 장기)을 하며 부모를 돌보지 않은 것이 두번째 불효”(<맹자> ‘이루 하’)라 했다.

물론 요 임금이 ‘못난 아들(단주)의 어리석음을 바둑으로 가르쳤다’(<박물지>)는 전설도 있다. 바둑이 중독성 강한 오락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절친인 네웨이핑(섭衛平) 9단에게 바둑을 배운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도 ‘바둑에서 치국(治國)의 도리를 배울 수 있다’고 했다.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는 중국 경제를 바둑에 비유하면서 “두 눈(眼)이 나야 바둑돌이 사는데 안정적인 성장과 구조조정은 바로 그 두 개의 눈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3년 양제츠(楊潔호) 외교부장은 “바둑을 잘 두려면 큰 형세를 보고(看大局), 큰 흐름을 읽고(看主流), 멀리 봐야 한다(看長遠)”는 격언으로 중국의 외교원칙을 설명한 바 있다. 중국이 바둑기사를 외교사절로 파견한 역사는 뿌리깊다.

738년 당 현종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군자의 나라(신라)에 가서 당나라 유교의 융성함을 자랑하고, 바둑실력을 뽐내라”고 신신당부했다. 현종은 바둑기사 양계응을 사절단 부단장(부사)으로 보냈는데, <신당서>는 “신라의 고수들이 모두 양계응의 가르침에서 나왔다”고 기록했다.
얼마전 리커창 총리의 한국 방문 때 바둑기사 창하오(尙昊) 9단이 동행했으니 꼭 1277년 만의 일이다. 물론 창하오는 신라고수들을 지도했던 당나라 양계응과는 처지가 다르다.

라이벌 이창호 9단과의 전적에서 한때 12연패를 당했을만큼 처참하게 밀렸다. 그러다 ‘모든 것을 내려놓으니 승부가 되더라’는 어록대로 마침내 이창호의 벽을 넘고 2007년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다.

여전히 통산전적은 11승 28패 열세다. 중국은 매번 지면서도 결국 일어나 기어코 돌부처 이창호의 맞상대가 된 창하오의 오뚝이 정신을 뽐내고 싶었을 것이다.

이참에 한·중·일의 틈바구니에 낀 우리 외교를 바둑격언을 빌린다면 ‘손 따라 (바둑) 두면 진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