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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최치원, 발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까닭

 팟캐스트 19회는 ‘최치원이 발해를 향해 쌍욕을 퍼부은 까닭’입니다. 
 9세기 말 만고의 명문장가라는 최치원이 막말을 퍼붓습니다.
 발해를 겨냥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같은 무식한 놈들’, ‘추한 오랑캐’, ‘떼강도’, ‘군더더기 같은 부락민’…. 그뿐 아니라 멸망한 고구려를 두고도 ‘고구려의 미친바람’이라고 합니다.
 최치원은 과연 왜 발해를 향해 쌍욕을 해댔을까요.
 새삼 북한이 남측 정부와 인사, 미국정부와 인사들에게 퍼붓는 막말이 떠오릅니다.
 이명박 전대통령이 회고록을 내자 ‘정치 무능아’, ‘못난이 하는 짓마다 사달’, ‘돌부처도 낯을 붉힐 노릇’, ‘역사의 시궁창에 처박힌 산송장’이라 표현했지요.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시집못간 노처녀의 술주정’ ‘유신군사깡패의 더러운 핏줄’, ‘살인마 악녀’, ‘방구석 아낙네의 근성’, ‘못돼먹은 철부지 계집’ 등의 막말을 해댔구요.
 그뿐인가요.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아프리카 원시림 속의 잰내비 상통(원숭이 얼굴) 그대로다. 인류가 진화되어 수백만년 흐르도록 잰내비 모양이다.”라 했지요. 지독한 인종차별 발언이지요. 존 케리 국무장관을 겨냥해서는 “주걱턱에 움푹꺼진 눈확(눈구멍), 푸시시한 잿빛 머리털에 이르기까지 승냥이 상통인데다…”라 표현했지요.
 아무리 인종차별이자 성차별이고 인신공격이라 해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1200년 전 최치원은 왜 발해를 향해 막말외교를 펼쳤을까요.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기에 그랬을까요. 돌이켜보니 그 때도 일종의 남북국 시대였고, 남(신라)와 북(발해)가 대립하고 있었던 시기였잖아요. 당나라에서 펼쳐진 치열한 외교전의 세계로 한번 들어가보겠습니다.(다음은 관련기사입니다.)

 

  872년,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과거시험이 열린다. 외국인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빈공과(賓貢科)’였다. 9세기대 당나라가 정책적인 배려로 외국유학생들을 관리로 선발한 것이다. 이날 빈공과를 감독한 이는 ‘정공(靖恭) 최시랑’이었다. 채점결과 발해유학생 오소도(烏沼度)가 수석합격의 영예를 차지한다.
 신라 유학생 이동(李同)보다 앞선 성적을 얻은 것이다. 이 소식은 신라 유학생들에게 ‘충격과 공포’였다. 특히 장안에서 유학중이던 최치원은 합격자 명단에 발해인의 이름이 신라인보다 앞서 등재한 것을 한탄하며 수치심을 느꼈다. 최치원은 나날이 밀리는 신라의 국세와, 욱일승천하는 발해의 성세가 이같은 결과를 낳았다고 자학한다. 900년 전통의 신라가 ‘듣보잡’의 나라인 발해에 밀리다니….
 ‘분명, 당나라가 신라보다 발해를 우대하고 있음이야.’  

 

최치원의 초상화. 당나라 유학생들을 상대로 치른 빈공과에서 발해인이 수석합격하자 최치원은 발해를 욕하고 당나라에 원망하는 편지를 보낸다.

 

 ■최치원의 적개심
 2년 뒤(874년) 최치원은 18살의 나이로 빈공과에 합격함으로써 스스로 치욕을 푼다. 또한 877년 빈공과에서도 발해유학생은 한 명도 선발되지 않았지만 신라유학생 두 명(박인범과 김악)만 합격한다.
 최치원으로서는 감개무량했다. 그는 ‘공정한 시험을 주관한’ 당나라 고위관리에게 잇달아 감사의 편지를 보낸다. ‘당나라 예부 배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禮部裵尙書瓚狀)’(874년)와 ’당나라 고대부에게 편지(新羅王與唐江西高大夫湘狀)’(877년)이다. 그는 두 편지에서 ‘872년의 치욕’을 언급하면서 발해를 한없이 폄훼했다. 그런 다음 발해인들이 잇달아 좋은 성적을 나는 것은 불공정한 시험관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모자와 신발이 거꾸로 뒤바뀐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冠구實참於倒置)”
 “사린(四린)의 조롱거리요, 길이 남을 일국의 수치가 되었습니다.(四린之譏 永胎一國之恥)”
 둘 다 최치원의 <고운집>에 실린 편지글 들이다. 두 편지를 보면 최치원은 신라의 수치를 말하면서, 발해에 대한 극도의 적개심을 나타내고 있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 진 뒤 잔여 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름을 도둑질했습니다. 그것이 지금의 발해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 발해가 근년에 와서 계속해서 고과(高科·우등급제)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물론 애꿎은 고구려까지 끌어들여 욕을 해댄 것이다. 그러면서 최근들어 발해인들을 우대하는 듯한 당나라를 향해 원망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당나라는) 닭을 천하게 여기고 고니를 귀하게 여기는 혐의가 있었습니다.(賤계貴鵠)~ 정공 최시랑이 빈공과에서 합격자 발표를 할 때 (발해의) 오소도를 수석으로 뽑았습니다. 한비가 노자와 같은 열전에 있었던 것도 감수하기 어려웠고~어찌 술지게미를 박주(손님접대에 쓰는 술)와 함께 마시며 취할 수 있겠나이까.(縱謂파揚糠粃 豈能포철糟)”

 

 ■신라와 발해는 철천지 원수
 최치원의 문장은 워낙 유명하다. 또 웬만큼 고전을 통달하지 않고는 글을 읽어내려 갈 수 없다.
 ‘닭과 고니’ 이야기는 한나라 왕충이 지은 <논형(論衡)>에 나온다. 즉 가까이 있는 닭은 천하게 여기고, 멀리 있는 고니를 귀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는 시험을 주관한 당나라 최시랑이 가까운 신라보다 멀리서 온 발해 유학생을 더 특이하다고 여겨 우대한 혐의가 짙다고 꼬집은 것이다.
 또 최치원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에 ‘노자한비열전’이 있음을 예로 삼았다. 즉 한비가 노자와 함께 열전에 묶여있음을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과거급제자 명단에 발해인의 이름이 신라인과 함께 등재돼있음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뜻이다. ‘술지게미와 박주’ 이야기는 초나라의 애국시인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여기서 술지게미는 발해를, 박주는 신라를 뜻한다.
 한마디로 발해라는 나라와 동등한 입장이 된 것도 참을 수 없는데, 그것도 모자라 발해의 뒷전에 놓이게 된 것은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는 것이다. 때문에 주변국의 조롱거리이자 일국의 수치요, 모자와 신발이 바뀐 형국이었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이렇게 발해와, 발해인을 ‘우대한 혐의가 짙은’ 당나라 관리(정공 최사랑 같은 사람)를 싸잡아 맹비난했다. 그런 다음 신라인인 자신(874년)과 박인범·김악(877년)을 뽑아준 예부상서(배찬)와 고대부를 상찬하는 감사의 글을 덧붙인다.     
 그는 우선 자신의 급제를 두고 “실로 공정함을 만나 예전의 수치를 씻었다”며 감개무량한 소감을 밝혔다. 공정함을 만났다는 것은 시험주무관이었던 ‘당나라 예부상서’ 배찬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공평무사한 분(배찬)을 만난 덕분에 이전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혹시라도 바뀌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877년 빈공과 후에도 최치원은 신라인만 두 명 뽑은 ‘당나라 고대부’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다.
 “~대부의 엄정한 시험관리로 (신라인) 박인범과 김악은 급제했지만, ‘추한 오랑캐(발해인)’은 용납하지 않아 과거에 흠집을 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발해 수도 상경용천부의 유적. 옛 고구려 땅 이상의 영토를 개척한 발해는 해동성국으로 일컬어질만큼 번성했다.사진은 발해국왕이 거처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경성 궁전터이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발해의 반격
 그러나 발해도 가만 있지 않았다. 그로부터 20년 뒤 총공세에 나선 것이다.
 897년 7월 당나라에 파견된 발해 왕자 대봉예가 매우 민감한 문제를 꺼낸다. 즉 이제부터는 신라보다 윗자리에 앉아야 한다고 당나라에 정식으로 요청한 것이다.
 이것을 ‘쟁장(爭長)사건’이다. <동사강목>은 이를 두고 “발해가 스스로 강대국을 자처했다(時渤海國 自謂國大兵强)”고 했다. 물론 당나라는 발해의 요청을 거절했다.
 “국명의 선후를 어찌 ‘강약(强弱)’으로 따질까. 조제(朝制)의 순서도 ‘성쇠(盛衰)’를 근거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관례대로 하라.”(<고운집>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신라는 당나라의 조치에 반색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의 조치에 감읍한 나머지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올렸다. 즉 북국(발해)이 신라 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 당나라에 감사하는 표문이다.
 그러나 이 ‘사불허북국거상표’를 찬찬히 뜯어보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즉 당나라도 당시 발해가 강(强)하고 성(盛)하며, 신라는 약(弱)하고 쇠(衰)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당시 신라는 효공왕 즉위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원종·애노의 난(889)으로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한반도 남부는 후삼국으로 분열되고 있었다. 반면 발해는 ‘해동성국’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제 발해 밑입니다”
 때문에 발해로서는 당나라에 자리변경을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가 거절했으니 말이지 신라로서는 가슴을 쓸어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최치원은 또 한 번 발해를 향해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붓는다.
 “발해의 원류는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에는 보잘 것 없는 부락에 불과했습니다. ~백산(백두산)에서 악명을 떨치며 떼강도짓을 했습니다. 추장 대조영은 신라로부터 제5품의 대아찬의 벼슬을 처음 받았습니다.”
 최치원은 대조영이 신라로부터 진골(대아찬)의 벼슬을 받은 신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이 사실인 지는 확인할 길은 없다.  
 “요즘 그들은 차츰차츰 우리의 은혜를 저버리고 갑자기 신의 나라와 대등한 예를 취하겠다는 소문이 들려옵나이다.~ 신의 나라가~ 무식한 놈들과 함께 서있다는 것 자체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습니다. 저 발해야말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갈과 모래 같고~ 삼가 제 본분을 지킬 줄을 모르고 오로지 웃사람들에게 대들기만을 꾀했습니다.”
 욕설은 끊이지 않는다.
 “발해는 소의 엉덩이(牛後)가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엉큼하게도 용의 머리(龍頭)가 되고자 켸켸묵은 말을 지껄였습니다. 저 오랑캐의 매는 배가 부르면 높이 날아가고, 쥐는 몸집이 있으면 방자해지고 탐욕스럽게 됩니다.(察彼虜之鷹飽腹而高양鼠有體而恣貪) 다시는 위아래가 뒤집히지 않도록 하게 하시옵소서.(不令倒置冠구)” 
 

동모산 성산차산성의 기념비.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을 중심으로 이곳 동모산에서 둥지를 틀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제가 오소도입니다.”
 전성기인 발해의 외교공세는 계속된다.
 906년 당나라에서 치러진 빈공과의 결과가 도화선이 된다. 발해 유학생 오광찬(烏光贊)이 빈공과에 급제했지만, 신라유학생 최언위(崔彦휘)보다 등수가 낮았다.
 그러자 오광찬의 아버지인 오소도가 이의를 제기한다. 오소도가 누구인가. 872년 신라 유학생 이동을 제치고 빈공과 수석을 차지한 발해의 천재가 아닌가. 아마도 그의 귀국길은 금의환향 그 자체였을 것이다. 숙적 신라의 유학생들을 제친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이 천재유학생은 귀국 후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들이 신라유학생보다 성적이 낮았다는 소식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혹 신라가 사주한 것이 아닐까. 예전과 형편이 달라져 이제는 발해의 국세가 신라를 훨씬 능가하는데…. 아버지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당나라에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한다. <고려사> ‘최언위전’을 보자.
 “발해재상 오소도의 아들 광찬이 급제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최언위의 아래에 있게 되자 아버지 오소도가 표를 올렸다. 예전에 신(오소도)도 (신라인) 이동의 위에 있었습니다. 이번에 신의 아들도 (신라인) 최언위의 윗자리로 옮겨주소서.”
 하지만 당나라 조정은 “최언위의 재주와 능력이 오광찬을 능가한다”는 이유로 불허했다.

  
 ■발해·신라의 국비유학생
 볼썽 사나운 다툼이었다. 그렇지만 발해와 신라 양국은 당나라 유학에 국운을 걸 정도였다.
 신생국 발해의 경우 당나라 선진문물을 받아들이려고 온 신경을 썼다. 해동성국이라는 말로 여기서 나왔다.
 “발해가 학생들을 자주 당나라 태학에 보냈다. 거기서 고금의 제도를 배워 이 때에 이르러 해동성국을 이뤘다.(習識古今制度 至是遂海東盛國)”(<신당서> ‘발해전’)
 한마디로 발해의 당나라 유학생이 귀국해서 신생국인 발해의 ‘동량(棟梁)’이 된 덕분에 해동성국으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다.
 발해는 714년 6명을 당나라로 보낸 것을 필두로, 학생들을 수시로 교대하면서 유학을 이어갔다. 714년이면 발해가 건국한자 불과 16년 되는 해이다. 이를테면 지금의 국비유학생이었을 것이다.
 당나라 시인 온정균(溫庭均·812~866)은 당나라와 발해는 ‘문물제도가 한 집안을 이뤘다(車書本一家)’고까지 했다. 그가 장안에 머물던 발해왕자 대문악(大文악)의 귀국길에 지어준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신라인들은 더 했다. 조정은 국학의 교육을 통해 유교적 이념에 충실한 관료를 배출하려고 중국에 유학생들을 파견했다. 최치원처럼 골품제에 따른 신분의 한계를 중국유학으로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문성왕 2년(840) 당나라에 유학했던 105명이 유학만료가 되어 귀국했다”(<삼국사기>)는 기록이 있다. 당시 얼마나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 유학에 나섰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학에 머물지 않고 빈공과에 급제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로 여겨졌다. 

충남 보령시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는 낭혜화상 무염(800~888)을 위한 비. 최치원이 왕명을 받고 찬했다. 최치원은 잇단 비문청탁에 매우 부담을 느낀 듯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비문에 “당나라 유학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다 했는데 누구는 스승이 되고 누구는 일꾼이 되니...”하고 푸념했다.

 ■80명 대 10명? 
 신라가 낳은 불후의 천재 최치원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 6두품 출신인 최치원은 불과 12살 때(868)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다. 아버지는 먼 길을 떠나는 어린 아들에게 이렇게 신신당부한다.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부단히 노력해라(十年不第 卽非吾子也 行矣勉之)”(<삼국사기> ‘최치원전’)
 극성 아버지라 해야 할 지, 높은 교육열의 발로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은 있다. 최치원은 ‘6두품’도 얻기 어려운 신분이라는 의미에서 ‘득난(得難)이라고 했다지만, 신분의 벽은 높았으니까…. 6두품은 행정기관의 장인 영(令)에 이를 수 없었으니까…. ‘어려서부터 정밀하고 민첩했으며, 학문을 좋아했던(致遠少 精敏好學)’ 최치원은 874년 빈공과에 합격한다. 18살의 나이에 딱 한 번 도전으로 급제한 것이었다.
 고려시대 최해(崔瀣·1287~1340)의 문집(<졸고천백·拙藁千百>)은 “당나라와 그 뒤를 이은 오대까지 빈공과에 합격한 이는 모두 90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했다. 그 가운데 발해인 10여 명(渤海十數人)을 빼고 나머지 80명 가까운 합격자가 신라인이었다고 한다. 발해인 합격자 가운데는 이미 언급한 오소도·오광찬 부자와 고원고(高元固), 흔표(欣彪), 사승찬(沙承贊) 등이 있다.
 빈공과 합격자의 절대 다수를 차지한 신라의 자부심은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 발해라는 신생국이 불쑥 나타나 해동성국이니 뭐니 하며 윗자리를 내놓으라 했으니…. 여기에 신라인들이 독차지했던 빈공과 수석자리를 발해인이 차지해버리니…. 최치원, 그리고 신라사람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필설로 다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치원이 앙앙불락하며 발해를 욕한 이유이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
 최치원의 ‘욕’ 가운데 한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최치원은 발해를 욕하면서 ‘축로(丑虜·추악한 오랑캐), 피로(彼虜·저 오랑캐), 피번(彼蕃·저 오랑캐), 우췌부락(우贅部落·군더더기 같은 부락으로나 번역됨)’이라 했다. 심지어는 ‘작얼(作孼·훼방), 제악(濟惡·악행을 일삼음), 흉잔(凶殘), 훤장(喧張), 고은(辜恩) 등 다양한 욕설을 해댔다. 이 대목을 두고 중국학자 웨이궈중(魏國忠)은 이런 증오심 가득한 욕설을 퍼부은 것으로 보아 신라와 발해는 서로 다른 민족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욕을 해댔다고 해서 다른 민족이라 단정할 수 있을까.
 예컨대 고구려는 같은 부여계인 백제를 두고 ‘백잔(百殘)’이라 칭했다.(<광개토대왕 비문>) 또 백제는 고구려왕을 ‘소수(小竪·더벅머리 어린애)’라 깔보는 한편 고구려를 ‘장사(長蛇·큰 뱀)’와 ‘추류(醜類·추악한 무리)’로 욕한 바 있다. 지금은 또 어떤가. 남북한이 ‘북괴’니 ’빨갱이’니 ‘미제의 앞잡이니’, ‘남조선 괴뢰도당’이니, ‘철천지 원쑤’니, ‘역도(逆徒)’니 하면서 적개심을 발산하지 않는가.
 제아무리 형제라도 등을 돌리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판이 아닌가. 더구나 최치원의 표문을 살펴보면 ‘발해=고구려의 후신’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나온다.
 “고구려의 미친 바람이 잠잠해진 뒤 잔여세력이 느닷없이 나타나 이름을 도둑질 했으니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로 바뀐 것을 알겠습니다.(즉知昔之句麗 즉是今之渤海)”(예부 배상서에서 보내는 글)
 <삼국사기>는 최치원의 문집에서 당나라 문하시중에게 보내는 편지를 뽑아내 인용했다. 거기에는 “고구려의 유민이 모여 북으로 태백산(동모산의 오기) 아래를 근거지로 하여 발해를 세웠다”고 했다.
 최치원은 발해를 두고 쌍욕을 하는 과정에서도 ‘발해는 고구려의 후신이 분명하다’고 밝힌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