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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침략의 속죄양' 조선 호랑이 절멸 사건

 아프리카 국민사자 ‘세실’의 비참한 죽음이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조선호랑이의 운명을 보는 것 같아 그렇습니다.
 그래도 아프리카에서 일어나는 ‘트로피 사냥’은 인간의 야만성을 비난하고 대책을 마련하면 됩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의 조선호랑이 멸종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조선 호랑이의 멸종을 주도한 것은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예로부터 호랑이 사냥은 일본인들에게 ‘로망’이었다. 섬나라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창칼로 호랑이를 잡아 죽인 일은 대륙침략의 향수를 자극하는 자료로 활용됐습니다. 침략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보양식으로 조선 호랑이의 고기를 먹었답니다. 그 후 300년 뒤 조선을 집어삼킨 일제는 호랑이와 표범·곰 등을 몰살시켰습니다. 명목은 해로운 맹수를 죽인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일본영토가 된 조선 땅에서 마음껏 호랑이를 잡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이 조선의 호랑이는 멸종됐습니다. (경향신문 이기환 논설위원)  

 

  트로피(Trophy)란 말은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전승기념물, 즉 전리품을 뜻했다.
 말이 전리품이지 고대 사회 전쟁의 전리품이라는 것 가운데 으뜸은 바로 적군의 수급(首級), 즉 적군의 목이었다. 잘라온 적군의 수급 수에 따라 전공의 등급을 갈랐으니 말이다. 요즘 전 지구적인 의제가 되버린 ‘트로피 사냥(Trophy hunting)’의 개념도 다르지 않다. 다만 사람을 멋대로 죽일 수 없는 인간이 특정 야생동물을 상대로 마치 전투를 벌이듯 사냥하고 사냥한 동물의 신체 일부를 전리품, 즉 트로피로 삼아 전공을 뽐내고 있으니 말이다. 때로 사냥감 자체를 먹기도 한다니 비인간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짐바브웨의 국민사자라는 ‘세실’의 비참한 죽음 이후 온통 난리를 떨고 있지만 트로피 사냥의 역사가 어디 어제 오늘의 일이었던가.

1917년 일본의 거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가운데)가 이끄는 호랑이 사냥꾼들이 함경도에서 잡은 호랑이 두마리를 놓고 기념촬영했다. 야마모토는 한달간의 원정을 끝내고 자랑스럽게 호랑이 사냥 원정기라는 뜻의 <정호기>라는 책을 이듬해 펴냈다.( 야마모토의 <정호기>,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014년에서)

 ■트로피 사냥과 정당방위
 그런데 세실의 비참한 죽음이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났지만 사실 남의 일 같지 않다. 100년 전 20만 마리에 달했던 사자가 3만 마리로 줄었다지 않은가.
 왜 남의 일 같지 않냐면 세실의 죽음에서 한국호랑이의 운명을 보는 듯 하니 그렇다는 것이다.
 조선에서 발견된 마지막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사살된 호랑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22년과 24년에도 한반도 남부에서 호랑이 포획의 기록이 남아 있다. 뭐 어쨌든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분명하다. 단군신화부터 등장했고, 최남선의 표현대로 호담국(虎談國)이라 할만큼 호랑이 이야기가 들어간 속담이나 전설이 많았던, 두렵고도 친근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런 호랑이에게 왜 멸종의 비극이 벌어졌을까.
 예부터 호랑이는 친근한 존재이기도 했지만 퇴치해야 할 짐승이기도 했다. 사람과 너무 가깝게 살아 때때로 해쳤기 때문이다.
 실록을 보면 호랑이가 도성 안은 물론 궁궐 안까지 들어온 일이 비일비재했다. 1464년(세조 10년) 세조 임금과 세자가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군사를 풀어 호랑이를 잡았다. 또 3년 뒤인 1466년에는 경복궁의 후원인 취로정 연못가까지 출현한 호랑이를 추격하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1년 뒤에는 북악산에 출몰한 호랑이를 찾아 세조가 추격대를 이끌고 직접 나서서 골짜기에 숨어있던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1486년(성종 14년) 아예 ‘민가에서 덫으로 호랑이를 잡는 자에게 면포 3필과 부역감면 1년의 혜택을 준다’는 ‘호랑이 퇴치를 위한 규칙’을 발표했다. 더불어 호랑이의 피해를 입는 각 고을의 수령 및 관리들에게 책임을 물리려 했다.
 “각 고을에서 1년에 호랑이에게 해(害)를 입은 자가 한 사람이 되면 수령은 파출(罷黜)한다. 담당관리들은 곤장 100대에 처한다.”
 물론 각 고을의 수령 등에게 내린 처벌이 너무 중하다고 해서 처벌은 면했지만 그만큼 호랑이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W E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은 “조선 사람들은 반 년 동안은 호랑이를 사냥하고 반 년 동안 호랑이가 조선 사람들을 사냥한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조선사람들에게 호랑이 퇴치는 일종의 정당방위였음을 전하고 있다.

야마모토 호랑이 사냥단은 서울과 도쿄에서 잇달아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열었다. 야마모토는 이 자리에서 ‘임진왜란 때는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호랑이를 잡았다면 이제는 일본영토 내(조선땅)에서 마음껏 잡을 수 있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야마모토의 <정호기>에서)

 

 ■구한 말의 트로피사냥꾼
 개항 이후 조선을 찾는 이방인들에게 백수의 왕 호랑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앞서 인용한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이나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등은 호랑이 문화와 역사를 별도의 꼭지로 아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날개달린 호랑이가 꼿꼿하게 서서 입으로는 불을 뿜어내고 앞 발톱에 타오르는 불꽃을 움켜쥐고 있다. 호랑이가 땅과 공기와 하늘의 모든 힘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칼범’, ‘밀팔’, ‘산돌’, ‘소호’, ‘석호’ 등 호랑이를 표현하는 다양한 특수용어나 시적인 표현들은 조선어의 어휘를 더욱 풍부하고 더욱 생생하게 만들어준다.…사냥은 누구에게나 자유다. 호랑이는 코끼리 사냥보다는 사람을 사냥하기 더 쉽다.”(<은자의 나라 한국>, 신복룡 역주, 집문당, 1999)  
 비록 과장이나 오류가 많지만 호랑이와 관련된 조선어가 얼마나 많은 지를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19세기 조선을 다룰 때 빠짐없니 등장하는 호랑이 이야기는 당대 ‘트로피 사냥꾼’들에게도 관심의 대상이 됐다. 서구의 돈많은 자본가들과 수렵가들이 한반도로 속속 모여들었다. 예컨대 시오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아들인 커밋 루즈벨트가 조선을 방문한 유명한 대표적인 트로피사냥꾼이었다. 그는 1922년 즘 북한지역에서 호랑이를 사냥한 적이 있다. 또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모델로 알려진 로이 채프먼 앤드류는 1911년 함경도 무산에서 호랑이 사냥을 시도한 적도 있다. 이밖에 윌리엄 로드 스미스라는 인물은 1902~1903년 사이 목포 인근에서 호랑이 세마리를 사냥했고, 포드 바클리는 1903년 목포와 진도에서 두마리를 잡았다.(‘한국호랑이와 정호기’, <정호기>, 이항·엔도 기미오·이은옥·김동진 해제, 2014)

1910년대 호랑이를 잡기위해 설치한 덫.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에 따라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들의 수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선총독부의 호랑이 절멸작전
 하지만 호랑이의 멸종을 주도한 것은 일제였다.
 총독부는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앗아가는 해로운 짐승을 없애는 이른바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다.
 조선총독부는 “1915~16년 2년간 호랑이·표범·늑대·곰·멧돼지 등 맹수의 공격으로 351명의 사상자를 냈다”(<조선휘보> 1917년)면서 이 정책을 밀어붙였다.
 이 가운데 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이 12명(일본인 1명 포함), 표범에 의한 사망자는 4명이었고 곰은 1명이었다. 오히려 늑대(167명)에 의한 사망자가 많았다.
 일제의 대대적인 사냥이 이어졌다, 1915년 경찰관·헌병 3321명, 공무원 85명, 사낭꾼 2320명, 몰이꾼 9만1252명이 동원됐다. 15~16년 사이 호랑이는 24마리 사냥됐다. 그 사이 표범 136마리, 곰 429마리, 늑대 228마리가 죽어나갔다. 노루(8947마리), 토끼(612마리) 등도 죽어나갔다. 사람의 희생도 희생이지만 호랑이·표범·곰·늑대 같은 야생동물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다. 

   더구나 당시 일제는 조선인들의 소요를 막으려고 조선인들의 엽총 소지를 제한했다. 에컨대 대덕산 호랑이가 사냥된 1922년 엽총을 소지한 일본인은 1만2532명(2만300여 정)에 이르렀지만 조선인은 1203명(2327정)에 불과했다.

  무슨 이야기인가. 결국 일제가 주민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서 전국을 구석구석 뒤져 호랑이와 표범 같은 맹수를 잡았던 것이다. 당시 호랑이·표범 등의 먹잇감이던 붉은 사슴, 멧돼지 노루, 대륙 사슴도 죽어나갔기 때문에 호랑이·표범의 수도 급격히 줄었다.

 

 ■기록에서 사라진 호랑이
 조선총독부 수렵담당 관리였던 요시다 유지로(吉川雄次郞)의 ‘호랑이와 조선’(<조선> 1926년 1월호)을 보면 적나라한 통계가 나와 있다.
 “1919년~24년 사이 6년간 포획된 호랑이가 65마리였고, 표범은 385마리나 됐다. 잡힌 호랑이 가운데는 체중이 85관(318㎏)~90관(338.5㎏) 짜리 대형 호랑이들이 포함돼있었다. 당시 사이토 미노루(齊等實) 총독이 구입한 호랑이 가죽 2장의 크기가 7척(2m10㎝)이나 됐다.”
 포획된 65마리 가운데 33마리가 함북에서 잡혔다. 함남·강원·경북이 각 7마리, 그리고 전남 6마리 등이었다. 
 이후 호랑이의 기록은 야생동물 생태연구가인 엔도 기미오(遠藤公男)가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서 찾아냈다.
 1924년부터 9년 동안 호랑이 사냥건수는 단 2건이었다. 이후 1934년(1마리)-1937년(3마리)-1938년(1마리)-1940년(1마리)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기록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 때의 호랑이도 한반도 북부에서 잡힌 것이다. 남부에서는 이미 멸종됐던 것이다.
 경성사범학교 생물교사였던 우에다 츠네카즈(上田常一)는 1936년 <과학지식>이라는 잡지에 호랑이 멸종이 임박했음을 경고하고 있다.
 “옛날 조선에는 호랑이가 매우 많아…지금은 그 수가 매우 적어 북쪽 오지가 아닌 한 어느 산야를 돌아다녀도 호랑이 그림자도 보이지 않으며… 피해방지의 목적 외에도 고가의 모피와 뼈를 얻으려 연이어 호랑이를 잡았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조선의 호랑이는 가까운 장래에 멸종할 것이 틀림없다.”(엔도 기미오의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은옥 옮김, 이담, 2009)

호랑이 민화. 예로부터 호랑이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친근감과 해학의 대상이기도 했다.

 

 ■‘일본 남아의 힘을 뽐내자.’
 이쯤해서 복기해보자. 일제는 과연 조선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호랑이로 대표되는 야생동물들을 무자비하게 멸종시킨 것일까.
 아니다. 예컨대 1917년 일본의 대자본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가 7만~8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조선호랑이 사냥행사’를 개최한다.
 사냥단의 이름도 호랑이를 정복한다는 뜻이 정호군(征虎軍)이라 했다. 1917년 11월10일부터 한달간 조선반도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된 사냥행사의 목적을 보면 기가 막힌다.
 ‘근래에 점점 퇴패(退敗)해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행사를 펼친다’(<매일신보 1917년 11월 18일>)는 것이었다.
 당시 국제정세는 녹록치 않았다. 제1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일원으로서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결국 야마모토의 ‘정호군’은 조선총독부의 해수구제 정책에 부응하면서 속으로는 개인의 소영웅심 발로, 부의 과시, 일본군의 사기 진작,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확산 등 복합적인 목적에서 결성된 것이다.
 행사에는 일본의 유수언론사 기자들도 대거 합류했는데, 어떤 기자가 지은 ‘정호군가’는 사냥행사의 목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어서라 총잡이여/사냥해라 몰이꾼들/일본 남자의 투지를 보여라/사냥감으로 뒤덮일 그날까지 쏘아라/야마모토 정호군.”
 “가토 기요마사의 일이여/지금은 야마모토 정호군…/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루스벨트 그 무엇이랴/호랑이여 오라…/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을 발판으로 미국과 당당히 맞서며, 이제는 러시아까지 침략하겠다는 제국주의의 야욕을 과시한 것이다.
 원정대장인 야마모토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늑대는 관심없다. 조선 호랑이를 잡아없애야 한다. 호랑이를 잡는 것이야말로 남자 중 남자다.”

 

 ■호랑이 시식회까지 연 정호군 
 조선에서 한 달 간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작전을 펼친 이른바 정호군이 포획한 것은 엄청났다.
 호랑이 두마리와 표범 두마리, 곰 한마리, 멧돼지 세마리, 늑대 한마리와 산양 다섯마리, 노루 아홉마리, 그리고 기러기와 청둥오리 꿩 등이었다. 사냥감을 그냥 가져간 것이 아니었다. 정호군은 경성의 조선호텔에서 한 번, 일본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한 번 등 두차례에 걸쳐 사냥감의 시식회를 열었다. 특히 도쿄 제국호텔에서의 시식회에는 덴 겐자로(田健治郞) 나카쇼지 렌(仲小路廉) 대신 등 200여 명의 고관대작이 총출동했다.
 그 때 시식회에 등장한 메뉴를 보라. ‘함경도 호랑이의 차가운 고기와 영흥 기러기 스프, 부산 도미 양주찜, 북청 산양볶음, 고원 멧돼지 구이’ 등이었다.(야마모토 다다시부로의 <정호기>,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014)
 조선 각지에서 잡아온 사냥감을 요리해서 먹는 일제 고관대작의 얼굴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런데 이 시식회에서 야마모토가 감격에 겨워 했다는 연설이 무척 마음에 걸린다.
 “전국시대의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다이쇼 시대(1912~26년)의 저희들은 일본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아왔습니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일본 영토가 된 조선에서 호랑이를 마음껏 사냥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는 것이다. 호랑이 사냥을 통해 식민지배의 우월감과 자신감을 풀어놓은 것이다. 얼마나 가슴을 찢어놓는 발언인가. 그런데 야마모토는 왜 이리 감격에 겨워했던 것일까.

호랑이 담배피는 모습을 그린 민화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그랬다. 섬나라인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생태계의 가장 상위 동물은 일본 늑대였다. 그랬으니 ‘백수의 왕’ 호랑이는 일본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예로부터 ‘한반도에서의 호랑이 사냥’은 무술을 뽐내고 싶어했던 일본 무사들에게 ‘로망’이었다. 545년 3월 <일본서기> ‘흠명기’는 백제를 방문했던 일본 무사 가시와데하테스(膳臣巴堤使)가 “자식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퇴치했다”고 일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이 처자식을 동반하고 사신으로 백제에 갔습니다. 항구에서 하룻밤 머무는데 아이가 실종됐고, 다음날 아침 호랑이 흔적을 찾았습니다. 제가 암석동굴에 가서 외쳤습니다. ‘천황의 뜻을 받들어 백제에 왔는데…내 자식을 잃고…찾아왔다. 목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보복하겠다.’ 그 때 호랑이가 나와 입을 벌리고 저를 삼키려 해서 제가 왼손을 뻗어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인 뒤 껍질을 벗겨 돌아왔습니다.”
 이미 1500년 전에 일본인이 한반도의 백제 땅에 들어와 한국 호랑이를 죽인 기록이다.

 

 ■가등청정의 호랑이 사냥 신화
 임진왜란 때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군의 ‘호랑이 사냥’ 전설은 기록과 그림 등으로 남아 일본인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됐다.
 예컨대 임진왜란의 그 악명높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호랑이 사냥 기록은 140년 후인 1739년 출간된 영웅호걸담 <상산기담(常山紀談)>에 나와 있다.
 “가토는 조선의 어느 곳, 큰 산에 진을 치고 있었다.…어느 날 호랑이가 나타나 가토의 몸종인 고즈키 사젠(上月左膳)을 물어 죽였다. 화가 난 가토가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한마리 호랑이가 갈대숲을 헤치고 가토를 향해 달려왔다.… 맹렬하게 달려온 호랑이가 입을 벌리고 덮쳐온 것을 조총으로 쏘았다. 호랑이는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둥대다가 급소를 맞고 결국 죽었다.”
 정설로 확인된 기록은 없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귀국했을 때 호랑이 가죽 5장을 가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주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1853년 류테이 다네히데(柳亭種秀)가 펴낸 그림 ‘화한영웅백인일수(和漢英雄百人一首)’는 일본과 중국 영웅 100명 가운데 맨 첫번째로 가토 기요마사를 다뤘다. 그림 옆에 쓴 글을 읽어보면 의미심장하다.
 “가토 기요마사, 일본의 영웅. 자국을 떠나 멀리 삼한의 땅에 이르고 한토(漢土·중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쳐 나쁜 호랑이를 물리쳐서 모든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여….”
 특히 가토가 호랑이에 올라타 머리 위쪽에서 창을 내리찍고 호랑이는 앞발을 허공에 휘두르며 입을 벌려 고통스러워하는 그림을 보면 왠지 섬뜩하기만 하다. 1862년 우타가와 구니토라(歌川芳虎)가 그린 ‘좌토정청 조선원정 선상의 그림(佐藤正淸朝鮮遠征船上の圖)’은 배를 타고 한반도로 향하는 가토 기요마사가 등장하고 있다. 사토(佐藤)는 가토가 분명하다. 이렇듯 19세기 들어 가토의 호랑이 사냥은 한반도와 중국대륙 침략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즈음 정한론의 등장하고 한반도 침략을 노골화 하는 일본의 행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최경국의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무사그립과 호랑이 사냥’, <일본연구> 제40호, 2009)

 

 ■조선호랑이를 보양식으로 먹은 풍신수길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은 또 어떤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편집과장으로 교과서 편찬에 관여했던 역사학자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1934년 경성제대 의학부 고고회에서 강연한 내용을 얇은 책으로 엮는다. 그 책은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였는데 끝부분에 호랑이 사냥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임진왜란 원년(1592년) 일본의 무장 가메이 고레노리(龜井玆矩)가 부산 기장성을 점령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랑이 한마리를 보냈다. 드물게 보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도요토미는 교토에 있던 고요제이(後陽成)천황에게 보인 뒤 호랑이를 수레에 실어 장안을 돌아다녔다.”
 이 때 도요토미는 기뻐서 미친듯이 춤을 췄고, 그러자 조선에 출병한 일본 무장들은 경쟁적으로 호랑이를 보냈다는 것이다..
 예컨대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廣家)는 동래에서 한마리,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창원에서 두마리를 잡아 소금에 절여 도요토미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호랑이를 잡아 보내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호랑이를 사냥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에 출병했던 나베시마(鍋島) 가문의 문서를 보면 “방금 전 호랑이를 보내라는 명을 받았으므로 빨리 사냥해서 보내겠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출병과 가토 기요마사>를 쓴 오다는 ‘도요토미가 요양 때문에 호랑이가 필요했던 것”이라 해석했다. 오다는 도요토미의 부하인 깃카와 히로이에에게 보낸 문서를 근거로 삼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님의 요양을 위해 머리고기, 장 등을 남김없이 소금에 절여 보내주시오.”

 

 ■아프리카 사자의 운명은
 도요토미 측이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게 보낸 공문서를 봐도 알 수 있다.
 “호랑이의 가죽, 머리, 뼈와 고기, 간과 담 등을 목록 그대로 잘 받았습니다. 도요토미 님이 기뻐하며 드셨습니다.”
 호랑이는 당시 최고의 보양식으로 꼽혔다. 호랑이 가죽, 즉 호피는 고관대작들의 융단으로 사용됐다. 뼈와 피, 담, 고기도 최고급 정력 장강제였다. 호랑이의 뼛가루와 골즙은 호정(虎精)으로 일컬어졌다. 이것을 섞어 만든 독한 술은 호정주라 해서 고가로 팔렸다. 또 호골고(虎骨膏)라 해서 호랑이 뼈를 바짝 조린 고약의 효력은 신기에 가깝다고 했다.
 특히 앞다리의 경골에서 나오는 호골고가 유명했는데, 호랑이의 기력이 모두 앞다리에서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전란에 휩싸인 임진왜란 와중에서 조선호랑이 마저 왜장들의 무용담을 위해, 혹은 침략 수괴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보양강장제로 쓰려고 무참히 살해됐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300년, 제대로 조선을 집어삼킨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그리고 야마모토가 원정대까지 꾸며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일본인들로서는 전설, 신화로만 접했고, 간간이 침략전쟁의 와중에서만 맛봤던 호랑이 사냥을 ‘일본 영토가 된 조선 땅에서’ 제 마음껏 할 수 있게 됐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그 와중에 조선의 호랑이는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볼 수 없게 됐다. 지금 이 순간 조선 호랑이의 슬픈 운명을 되짚어보면서 아프리카 사자들의 앞날을 걱정해본다. 남의 일 같지 않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야마모토 다다시부로, <정호기>, 이은옥 옮김, 에이도스, 2014
 이항·엔도 기미오·이은옥·김동진, ‘한국호랑이와 정호기’, <정호기>, 2014
 엔도 기미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은옥 옮김, 이담, 2009
 최경국, ‘우타가와 구니요시의 무사그림과 호랑이 사냥’, <일본연구> 제40호, 2009
 윌리엄 그리피스, <은자의 나라 한국>, 신복룡 역주, 집문당,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