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유럽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세운 나라다.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 않으려는 대인배의 나라다.”
청나라 외교관으로 주일청국참찬관이었던 황준헌(1848~1905)은 <조선책략>에서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라 평했다. 이 책자를 읽은 조선 조야의 반향은 엄청났다.

재야에서는 보수유생들을 중심으로 거센 위정척사운동이 일어났지만 고종을 비롯한 집권층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막연한 기대감을 품게 됐다. 고종 역시 ‘영토의 야심이 없는 대양인(大洋人)’으로 철석같이 믿었다. 훗날 제2대 주미공사를 지낸 이하영(1858~1929)의 글을 보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1888년 1월 초대 주미공사로 내정된 박정양 등 사절단 일행이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려고 백악관을 방문한 모습을 그린 잡지

“1)미국은 조선과 거리가 멀어서 내국침입이 그다지 심하지 않을 것이다. 2)미국은 황금의 부국이니 조선은 물질적으로 덕을 볼 것이다. 3)종교지상주의의 국가이니 도덕을 존중할 터라 모욕과 야심이 적을 것이다.”   
이런 믿음 덕분인지 통상조약을 맺은 첫번째 서양국가가 바로 미국(1882년)이었다. 특히 조·미 통상조약의 ‘제1조’는 조선과 고종 임금에게 매우 의미심장했다.
즉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는 다른 한쪽 정부가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한다”는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이 들어있었다.
고종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지않으려는 대인배이자 대양인인 미국의 중재자 역할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는 훗날 드러난다. 먼로주의로 대표되는 미국의 패권주의적인 외교정책과 제국주의 열강의 손바닥에서 놀아나는 국제외교의 냉엄한 현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큰절을 받고 당황한 미국대통령

초대공사관원 일행. 앞줄 왼쪽부터 이상재, 이완용, 박정양, 이채연. 뒷줄 왼쪽부터 김노미, 이헌용, 강진희, 이종하, 허용업  등 수행원과 하인들도 함께 찍었다.  |한국이민사박물관 소장

그것은 훗날의 이야기이다. 조미통상조약 체결 즈음인 1880년대만 해도 미국을 향한 조선 지배층의 환상은 대단했던 것 같다.
미국은 조약체결 10개월 만인 1883년 5월22일 루시우스 푸트(조선명 복덕·福德)를 초대 전권공사로 임명해서 서울에 상주시켰다. 이에 고종은 민영익(1860~1914)을 정사(전권대신)로 한 사절단, 즉 보빙사를 미국에 파견한다. 보빙사 일행 11명은 1883년 9월18일 뉴욕 23번가 피브스 에버뉴 호텔 1층 대연회장에서 당시 체스터 아서 미국대통령에게 국서를 전달했다. 이때 역사에 남을 해프닝이 벌어졌다.
오전 11시가 되자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재인 1881~1885)은 접견실에서 보빙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모관대를 갖춘 관복으로 차려입은 보빙사 일행 11명은 대접견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서 대통령을 향해 큰 절을 올렸다. 생전 처음보는 의전에 아서 대통령은 크게 당황했다. 아서 대통령이 조선보빙사의 뜻밖 큰절에 당황해하는 모습이 당시 뉴욕 신문의 삽화에 생생하게 실렸다. 당시 ‘뉴욕헤럴드’는 이 특이한 인사법에 대해 조선보빙사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소개했다.
“이런 인사와 경례는 국왕이나 기타 독립국가의 국가원수를 알현할 때에만 행한다. 그 이외엔 이런 경례는 결코 하지 않는다.”(‘뉴욕헤럴드’ 1883년 9월19일)
보빙사는 양국간 문화적인 차이로 이렇듯 엄청난 화제를 뿌렸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도 자주국의 자존심은 지켰다는 평을 듣는다.
아서 대통령에게 전달한 친서에 청나라의 연호대신 조선의 개국연호를 사용했고,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1883년 보빙사로 파견된 민영익 일행이 당시 체스터 아서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는 장면이 보도됐다. 당황한 아서 대통령의 표정이 흥미롭다.

■일일이 청나라의 허락을 받으라는 영약삼단의 조건
하지만 미국에 상주공사관을 두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심했고 타국에 상주공사관을 둘만큼 예산도 넉넉하지 않았다.
특히 갑신정변(1884년)이 실패하자 청나라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가 조선의 외교통상은 물론 국정 전반을 사사건건 간섭했다. 청나라 종주권을 행사한다는 것이었다. 고종은 청나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주권 행사에 나선다. 1887년 8월18일(이하 양력) “미국 등 서구에 주재공사를 파견한다”는 내용의 교지를 내린다.
“미국과는 제일 먼저 통상해서 서로 교빙(交騁)한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아직 상주 공사를 파견하지 못했다. 이는 결점이 되는 일이다. 내무부 협판 박정양을 전권대신으로 특파해서 미국의 수도에 주재하면서….”
그러나 곧 난관에 부딪쳤다. 9월24일 청나라 외교와 통상업무를 관장하는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이 위안스카이를 통해 반대 입장을 전한 것이다.
“조선에서 서양 각국으로 사절을 파견하려면 먼저 (종주국인) 중국에 요청하여 인준을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속방의 체제다.”
고종은 사절단의 출국을 일단 보류했다. 청나라와 조선, 미국의 3각 줄다리기가 벌어졌다. 청나라는 석달 남짓한 줄다리기 끝에 선심 한 번 크게 썼다는 듯 사절의 호칭에 ‘전권’이라는 두 글자를 허락했다. 그러나 다시 내민 조건은 기가 막혔다. 이른바 ‘영약삼단(령約三端)’이었다. ‘따로, 별도의 약속’을 뜻하는 영약(령約)과 세가지 단서(三端)를 합한 말이었다.
“첫째 조선 사절이 주재국에 도착하면 마땅히 먼저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온 이유를 중국 사신에게 보고하고 함께 외부에 다녀와야 한다. 둘째 조회나 공연에서 수작이나 교제를 당하면 조선 사절은 중국 사신의 뒤를 따른다. 셋째 교섭할 대사에 관계가 긴요한 것은 조선 사절이 먼저 중국 사신과 은밀히 상의하여 명확하게 제시한다.”
하나가 더 있었다. “이 영약삼단은 속국(조선)이 종주국(청나라)를 위한 당연한 의무”라는 것과. “다른 나라는 일절 간섭도, 지나친 질문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청나라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야 하며, 각종 행사마다 청나라 사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어디 자주독립국의 외교사절이라는 말인가.

 

1889년 1월 초대 주미공사관이 들어서있던 워싱턴 O 스트리트의 1513번지. 일명 ‘피셔옥’이라 했다. 1981년 12월 9일 경향신문 기자가 찾았을 때는 건물은 헐리고 세차장으로 변해있었다. 지금은 다시 아파트가 들어서있다.|경향신문 자료사진

■엘리베이터의 첫경험
그러나 일단 출발이 중요했다. 3개월여의 실랑이 끝에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드디어 11월12일 궁궐을 나와 미국군함인 오마하호를 타고 임지로 떠났다.
박정양을 수행한 이는 참찬관 이완용(1859~1926), 서기관 이하영·이상재(1850~1927), 번역관 이채연(1861~1900) 등과 미국인 의사 호러스 앨런(미국·1858~1932) 등 10명이었다. 고종은 서울에서 4년간 거주한 미국인 앨런에게 참찬관의 벼슬을 내려 주미공사단에 포함시켰다. 앨런은 이미 한달전인 10월초에 서울을 떠나 가족(아내와 두 자녀)과 함께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합류한 앨런은 그 얼토당토 않은 ‘영약삼단’의 내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일행이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것은 12월 28일 아침이었다. 이때 주미공사 일행은 팰리스 호텔에 머물렀다. 미국인 앨런의 <조선견문기>에는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첫경험’한 조선공사 일행의 모습을 흥미롭게 묘사해놓았다.
“팰리스 호텔의 엘리베이터 작은 공간에 사람들을 밀어넣자 조선인들은 ‘우리를 왜 이렇게 좁은 공간에 몰아넣었느냐’고 의아해 했다. 이때 엘리베이터 조종수가 로프를 잡아당기자 사람들이 공중으로 향해 올라갔다. 일행은 모두 나(앨런)를 붙들고 공포에 질려 ‘지진이 일어났다’고 소리쳤다.”
이 소동을 겪은 뒤 사절단 일행은 호텔에 들 때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낮은 층의 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1891년 고종의 내탕금 2만5000달러로 사들인 두번째 공관. 태극문양이 선명하다.|독립기념관 소장

 

■영약삼단을 어긴 사절단, 국무부과 직거래하다
일행이 기차를 타고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에 도착한 것이 이듬해인 1888년 1월9일이었다.
초대 조선공사가 된 박정양은 “서울을 떠나 육로 및 해로로 3만9215리를 여행한 끝에 워싱턴에 도착했다”고 감회어린 소감을 밝혔다.
주미공사 일행은 도착하자마자 분주히 움직였다. 도착 이튿날인 27일 한문으로 된 고종의 국서(신임장)를 영어로 번역하여 미국 국무부를 방문해서 언제 어떤 방법으로 국서를 전달할 지를 논의했다. 물론 앨런을 대동했다. 이 때가 고비였다. 청나라가 강요한 ‘영약삼단’ 조항에 따르면 초대 조선공사 박정양은 미국 정부에 신임장을 제출하기 전에 반드시 중국 공사를 만나 협의해야 했다. 하지만 박정양은 끝내 이 영약삼단을 따르지 않았다.
앨런 역시 시벨론 브라운 국무차관과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외교관례에 어긋나는 얼토당토 않은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1월13일 박정양 공사가 국무부를 방문해서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국서(신임장)을 전달할 면담 일정을 잡기로 합의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차린 청국공사 장음환(張蔭桓 1837~1900)이 세사람을 급파하여 “영약삼단을 왜 지키지 않았느냐”고 펄펄 뛰었다. 박정양 주미공사는 구렁이 담넘어가는 해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서울을 출발할 때 톈진(天津)에서 온 전보가 위안스카이에게 도착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그러나 출발 날짜가 너무 촉박해서 우리 정부의 공문을 받지 못했다. 우리 정부의 정식 공문을 받지 못했는데 어찌하느냐.”
할말이 없어진 청나라 측은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후에도 끈질기게 이 문제를 거론하며 박정양 공사는 물론 본국 정부까지 괴롭혔다.

 두번째 공관. 건물옥상에 ‘국기’라는 글자와 함께 국기게양대가 있고, ‘개국498년 4월초9일(양력 1889년 5월8일)’이라는 조선의 개국연호를 써놓았다. |연세대박물관 소장

 
■대통령을 몰라본 박정양 공사
국무부와의 조율 끝에 백악관 방문일정이 확정됐다.
1월17일은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이 미국의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재임 1885~1889, 1893~1897)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날이었다.
오전 11시 사모(紗帽·관복 모자)와 목화(木靴)에 흑단령(관복)을 입은 공사일행은 국서를 받는 이완용을 선두로 마차에 올랐다. 때마침 눈발이 내리고 있었다.
백악관에 도착한 일행은 토마스 베이야드 국무장관과 브라운 국무차관의 안내로 접견실에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기다렸다.
이때 4년전 뉴욕을 방문한 보빙사 민영익이 아서 대통령을 접견할 때와 비슷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집무실에 들어갔던 베이야드와 브라운이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모시고 접견실로 나왔다. 대통령이 신임장을 받으려 접견실 중앙에 나섰는데도 박정양 공사 등 사절단 일행은 멀뚱멀뚱 서있었다. 그럴만도 했다. 대통령이라면 조선 임금의 어의(곤룡포) 같은 뭔가 특별한 관복을 입었을 것이 아닌가.
조선공사 일행은 베이야드나 브라운과 다름없는 양복을 입은 대통령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채 집무실 쪽을 바라보며 ‘특별한 관복을 입은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나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공사 박정양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방바닥에 조아리며 세번 절하려 했다. 4년전 조선보빙사의 민영익 일행이 아서 대통령을 접견했을 때 큰 절을 올린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외국의 국가원수를 만났을 때의 예절이었던 것이다.

 

■멘붕에 빠진 사절단
그러나 미국측은 4년전 아서 대통령이 민영익 등의 큰 절을 받고 당황했던 때와 달랐다. 이번에는 “미국의 의전상 그런 예의를 표하지 않아도 된다”고 정중하게 만류했다. 가뜩이나 긴장했던 박정양 공사 일행은 예기치못한 상황이 잇따르자 시쳇말로 ‘멘붕’에 빠진 듯하다.

신임장을 상자에서 꺼내야 하는데, 열쇠를 찾지못해 우물쭈물 댔다. “열쇠가 어디있냐”며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앨런은 이날의 해프닝을 소개하면서 “그럼에도 대통령과 국무장차관은 손님들이 무안하지 않게 의젓하게 처신했다”고 전했다. 물론 박정양의 <미행일기>에는 체면 때문인지 이런 해프닝을 적어놓지 않았다.
아무튼 한동안의 소란 끝에 신임장 제정행사가 열렸다. 박정양 공사가 진사(陳詞)를 낭독했다. 
“대조선국 흠차 주차 미국전권대신 박정양은 조선 대군주의 칙지(勅旨·칙명)를 받들고 국서를 소지하여 대미합중국 대통령에게…양국의 우의가 더욱 돈독하며 영원히 화평하여 피차 인민이 균등한 권리를 누리기를 간절히 원하며….
박정양 공사가 신임장을 제출하자 클리블랜드 대통령의 답사가 이어졌다.
이어 박정양 공사가 수행원들의 관직과 성명을 대통령에게 소개했다. 수행원들이 차례로 경례하니 대통령 역시 고개를 숙여 답례했다. 박정양은 <미행일기>에서 이 때의 상황을 소개했다.
“사절 접견의 예절은 구미 각국이 다 같지 않다. 미국은 민주국이므로 예절이 퍽 간편하고 오직 성심으로 서로 대접하는 것이 예라 한다.”
그러면서 백악관을 방문한 소감을 밝혀놓았다.
“대통령 관저는 굉장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3층에 불과하다. 평민의 사저와 모양이 특별히 다르지 않다. 다만 백색으로 벽을 칠했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은 백옥(백악관)이라 한다.”

 

■“영약삼단 어긴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공식행사를 마친 공사 일행은 워싱턴 주재 28개국 공사관과 미국의 15개 부처를 방문했다. 관례상 문 밖에서 명함을 투입하고 돌아가는 형식이었다.
신임장 제정 사실을 전보로 알린 것은 다음날인 1월18일이었다. 이때 박정양은 “불가피하게 영약삼단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고종에게 보고했다.
“미국에 신임장을 제출했는데 청나라의 영약삼단 중 먼저 청나라 공사를 만난 뒤에 같이 미국 국무부를 방문해야 한다는 ‘선부동부사(先赴同赴事)’ 조항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가장 중요한 신임장 제출을 청나라 공사에게 보고하지 않고 순발력있게 독자적으로 처리함으로써 조선의 자존심을 지켜낸 것이다.
앨런은 훗날 “이 (영약삼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애로사항이었다”고 밝혔다.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공사가 ‘청나라 속국의 사절’로 우리를 소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우리가 속국 사절의 자격으로 신임장을 제출하는 게 아니라는 보장을 받는게 나의 임무가 됐다. 저들(청국)의 부당한 요구를 물리치는 것도 역시 임무였다.”

1900년대 미주 한인 사이에서 유통된 엽서. 전면에 주미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이 인쇄되었다. 옥상 국기게양대가 있는 부분에 태극기 그림을 그려넣었다. 미주 한인 사이에서 공사관은 태극기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태극기 꽂은 첫번째 공사관
박정양 공사 일행은 앨런의 주선으로 주재할 공관을 임대했다. 워싱턴의 ‘O 스트리트의 1513번지’에 있던 일명 ‘피셔옥’이었다.
앨런의 지인인 ‘피셔’의 이름을 딴 집이다. 이 공관은 자색 벽돌로 새로 건축한 남향 3층집이었다. 매년 임대료는 은화 780원(매월 65원)이었다. 초대 조선공사관의 일등서기관으로 박정양 공사를 수행한 월남 이상재는 1926년 <별건곤> 잡지에 피셔옥 공관의 풍경을 생생하게 전한다.
“응접실과 집무실, 침실, 식당, 욕간, 변소, 화장실, 창고까지 구비했다. 맨꼭대기 층의 전면에 깃대를 세우고 태극기를 높이 게양했다.”
이것이 워싱턴에 태극기를 꽂은 첫번째 기록이다. 조선의 자주외교를 상징하는 대목이다. 최초의 주미공사관인 이 피셔옥은 도시계획으로 철거되어 주차장과 세차장으로 운영되다가 지금은 고급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파티장에 모인 여성들은) 기생들이냐”
우여곡절 끝에 업무를 시작한 초대 공사일행은 워싱턴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앨런은 “이 독특한 사절단은 우아한 색깔의 명주옷을 입고 실내에서도 갓을 쓰고 있었다”고 전했다. 앨런은 워싱턴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은 조선공사 일행을 자못 흥미로운 필치로 전하고 있다.
“우리는 윌리엄 위트니(1841~1904) 해군장관의 관저를 방문하면서 사교계에 첫발을 내밀었다. 박정양 공사일행은 연회장에 모인 부인들을 보고 ‘저 여인들은 기생들이냐’고 물었다. 내가 ‘저 여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부인들이자 딸들’이라고 손사래쳤다.”
조선의 관습으로 보면 파티에 모인 워싱턴 정가의 귀부인들을 보고 “기생들이냐”고 물어볼만 했다. 앨런이 “저 여인들은 지체높으신 분의 부인들”이라고 하자 박정양 공사는 매우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저 분들 똑바로 쳐다봐도 되냐”고 되물었다.
앨런은 이 대목에서 조선과 미국의 문화적인 차이를 설명한 뒤에 박정양 공사가 “위엄있는 거동으로 스스로 신사임을 증명해보였다”고 칭찬했다.
“조선에서는 존경받는 여인들이 조그만 방에 갇혀 낯선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낮처럼 밝은 실내에서 음악이 울려퍼지고 남녀의 웃음소리가 자유롭게 어울린다. 이 정중한 노인(박정양)은 그리 익숙치않은 환경에도 위엄있는 거동으로 스스로 신사임을 입증했다.”

 

초대 주미공사였던 박정양. 그는 청나라의 ‘영약삼단’ 조건을 어기고 직접 미국 국무부와 직거래해서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했다.

■“서로 껴안고 맨실을 드러내니 아찔하다”
그러나 앞가슴이 패인 여인의 옷과 남녀가 서로 붙잡고 추는 왈츠는 조선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조선 외교관의 체면을 지키느라 짐짓 의연한 척 했던 박정양이지만 이 대목에서는 “아찔한 경험이었다”는 소감을 밝혔다. 
1888년 2월 7일 미국 법무부장관이 주최한 연회를 경험한 박정양의 <미행일기>를 들춰보자.
“술과 안주가 낭자하고 관현악이 연주되었다. 남녀가 서로 껴안고 춤추고 심지어 저고리를 벗어 맨살을 드러낸 여자들이 태반이다. 속적삼을 뚫은 모양을 한 여자, 수건을 목에 두른 여자, 주옥으로 장식한 것을 늘어뜨려 목에 건 여자, 머리를 산발한 여자, 가발을 뒤로 늘어뜨린 여자 등…. 기혼녀든 미혼녀든 모두 연회에 참석한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어지러워 아찔하고 의아할만 하다.”

 

■끝내 귀국당한 초대공사
초대 주미공사인 박정양은 워싱턴 주재중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청나라는 박정양 공사가 영약삼단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끝끝내 문제삼았다.
결국 조선정부는 초대공사 박정양을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말인즉은 “공사의 병이 염려되어 귀국하라”는 것이었다.
그때가 1888년 11월10일이었다. 고종은 박정양 후임에 미국인 앨런을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박정양은 “조선인이 있는데 외국인으로 대신하는 것은 매우 구차스러워서 남의 비웃음을 살 염려가 있다”고 상소문을 올렸다.
결국 제2대 조선공사는 이하영이 맡게 되었다. 그래도 앨런은 박정양을 수양아버지로 여기고 존경했다.
“나는 점잖은 박정양 공사를 수양아버지로 불렀다. 조선에도 박정양 같이 점잖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외국어를 못하든, 기이한 도포를 입든, 누구나 신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노인이었다.”(알렌의 <조선견문기>)

 

■‘대조선국 개국 498년’…조선의 개국연호를 쓴 외교관들
결국 초대 주미공사였던 박정양은 부임 11개월 만에 귀국하게 된다.
이른바 ‘피셔옥’에 둥지를 틀었던 주미 조선공사관도 곧 이사하게 된다. 1889년 2월 13일 워싱턴 북서 13가 1500번지(현 로건 서클 15번지) 건물을 임대해서 옮겼다.

이 건물은 미국 남북전쟁 참전군인 출신 정치인이자 외교관인 세스 펠프스의 저택이었다. 당시 이 건물의 소유주는 펠프스의 사위이자 국무차관을 지낸 시벨론 브라운이었다. 이후 1891년 11월 28일 고종은 내탕금 2만5000달러를 들어 이 건물을 아예 매입했다.
이 건물에도 자주독립국임을 과시한 흔적들이 잘 남아있다. 즉 당시 찍은 사진들을 보면 건물 옥상에 ‘국기(國旗)’라는 글자와 함께 국기게양대가 세워져 있다. 사진 뒷면에도 청나라의 연호 대신 ‘대조선국 498년 4월초 9일’(1889년 5월 8일)이라는 조선의 독자적인 개국연호를 사용하고 있다.
이 두번째 주미조선공사관은 1893년 개최된 시카고 박람회 참가 준비 등 16년간 활발한 외교활동의 중심 무대로 쓰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기면서 일제가 이 건물을 인수관리했다. 급기야 1910년 한·일병합 즈음에 주미일본대사였던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가 5달러로 공사관 건물을 대한제국으로부터 강제로 인수받았다. 우치다는 3개월 뒤인 9월 미국인 호레이스 풀턴에게 이 건물을 1만달러에 팔아넘겼다. 매도증서에는 가급적 매도가격의 기입을 피하는 워싱턴의 관례에 따라 10달러를 받고 매각했다고 되어 있다. 매도금액은 일본 외무성을 거쳐 조선총독부로 인계됐다.
 

외국인으로서 초대 주미공사관의 참찬관으로 활약한 미국인 의사 러스 앨런(오른쪽)과 부인(가운데). 앨런은 박정양 공사가 청나라가 내건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도록 조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악 청나라와 신악 미국
문화재청은 지난 2012년 1889~1905년 사이 16년간 조선의 두번째 주미공사관이었던 이 건물을 350만 달러에 사들인 뒤 5년간의 복원 공사를 거쳐 최근 공개했다.
일제에 공사관을 빼앗긴지 102년 만에 찾은 소유권이다.
문화재청은 열강이 각축을 벌였던 조선 후기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극복하고 더 큰 외교적 지평을 열고자 했던 고종의 자강·자주 외교 정신을 상징하는 건물이라고 평가했다. ‘영악삼단’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던 청나라의 방해를 뚫고 자주외교를 펼쳤던 박정양 등 초기 외교관들의 노고와 분투가 녹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을 ‘대인배의 나라’니 ‘식민지배의 야심이 없는 대양인의 나라’니 하며 의지했던 조선의 순진함도 거론할 수밖에 없다.
조미통상수호조약 1조의 이른바 ‘거중조정’ 조항을 미국이 지킨 적이 없다.
미국은 물론 조선을 식민지로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조선을 문호개방을 통해 이익만 챙겨가면 되는 대상으로 여겼다.    
1905년 9월 조선의 일본 지배권과 미국의 필리핀 지배권을 합의한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조약을 보라. 고종은 그래도 미국의 선의를 끝까지 믿었다.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1901~1909)의 외동딸인 앨리스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공주급’ 환대를 했지만 그때는 이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후였다. 일본은 루스벨트의 도움을 받아 한국을 그들의 보호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미국은 조선을 ‘나약하고 자치 능력이 없는 나라’로 평가절하했다.
얼토당토 않은 영약삼단의 조건을 내건 청나라나, 새롭게 ‘대인배의 나라’로 부각된 미국이나 자국의 이익만 챙기면 그 뿐이었다. 청나라가 ‘구악’이었다면 미국은 그저 ‘신악’이었을 뿐이다. 국제정세는 예나 지금이나 냉혹할 뿐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박정양, <미행일기>, 한철호 옮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미속습유>, 한철호 옮김,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8
호러스 알렌, <조선견문기>, 신복룡 역주, 집문당, 1984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한미우호의 요람 주미대한제국공사관>, 2014
한종수, ‘주미 조선공사관 개설과 자주외교 상징물 연구-공문서 및 사진자료 분석을 중심으로’, <역사민속학> 제44호,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