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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평양기생 '차릉파' 신라57대왕으로 등극하다

  16번째 흔적의 역사 팟 캐스트는 <기생의 머리 위에 씌운 신라금관> 편입니다. 일제시대 때 일어난 황당한 사건입니다. 이 금관이 바로 서봉총 금관이었습니다. 서봉총 금관은 사연 많은 금관입니다. 스웨덴의 구스트파 아돌프 황태자가 직접 발굴한 금관이지요. 과연 서봉총 금관에 무슨 일들이 생겻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가 소개합니다.  

‘금관의 파문(波紋), 박물관의 실태(失態)? 국보를 기생의 완롱물(玩弄物)로.’
 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소식을 평양발로 타전했다. 기막힌 사연은 다음과 같다.
 때는 바야흐로 기사가 나간지 약 9개월 전인 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제1회 고적애호일을 기념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특별전에는 경성박물관로부터 대여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유물들을 전시했다.

 

 

 평양기생 차릉파가 특별전 폐막기념 축하연회에서 서봉총 금관을 비롯, 신라 장신구를 쓴채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건은 9개월 만에 들통나 언론에 보도됐다. 1936년 6월29일 부산일보 기사

■기생의 머리에 신라금관을…
 금관은 물론 금제귀고리와 허리띠, 목걸이가 총출동했다. 당시 평양박물관장은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였다.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경주 발굴에 관여했던 고고학자였다. 그랬기에 웬만해서는 공개될 수 없는 금관을 평양까지 대여할 수 있었다. 국보급 유물이었으므로 전시는 삼엄한 경계 속에 이뤄졌다. 평양의 내로라하는 유지들은 물론 시내 각급학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찬란한 신라의 금관을 친견했다.  
 그런데 사건은 전시회를 끝내고 예정된 유물반환일을 하루 앞둔 9월10일 터졌다. 이날 박물관은 성공적인 전시회를 자축한다는 명목으로 축하연회를 열었다. 평양에서 힘깨나 쓴다는 각급 기관장들이 다 모였다. 평양에서도 유명한 기생들도 총출동했다. 기생들과의 술자리가 질펀해지고 취흥(醉興)이 도도(滔滔)해졌다. 술기운에 이성을 잃어갔다. 그때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탈행위가 벌어졌다.
 그만 차릉파(車綾波)라는 기생의 머리에 금관을 씌운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금제 허리띠와 금귀고리, 금목걸이까지 차릉파의 몸에 휘감았다. 그러면서 금관을 쓴 차릉파의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기생 차릉파, 신라 57대왕으로 등극?
 신라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친 것이 935년이니까…. 그리고 평양기생 차릉파가 금관을 쓴 것이 1935년이니까…. 꼭 1000년만에? 신라는 꼭 1000년만에 ‘제57대 여왕 차릉파’를 내세워 부활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활한 신라의 여왕은 평양 출신 기생이었던 것이다.
 그날 참석자들은 술이 깨자 입단속을 하면서 천인공노할 이 사건을 덮으려 했을 것이다. 아마도 술이 ‘웬수’라고 하면서…. 하지만 진실을 가릴 수는 없는 법. 금관을 쓴 차릉파의 사진이 평양시내에서 나돌기 시작했다. 참새들의 입방아가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언론이 9개월 만에 폭로하고 말았다. 요즘 같으면 SNS를 통해 연회장 장면이 생중계됐을 터인데…. 식민지 백성들의 공분(公憤)을 샀다. 연회참석자들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으니까….
 그들이 신라금관을 쓴 기생을 마음껏 농락했다는 것 때문에, 또 ‘신라여왕’을 끼고 술판을 벌였다는 점 때문에…. 이 사건은 소설가 이효석의 일본어 작품 ‘은은한 빛(ほのかな ひかり)”의 소재가 됐다.

 

서봉총 발굴전 모습. 옆에 시천교 교당이 보인다. 표주박형태의 고분이었다.

■이효석 작품에 등장한 ‘금관사건’
 이 작품은 1940년 4월 일본잡지 <문예(文藝)>가 마련한 ‘조선문학특집’의 일환으로 실렸다. 작품은 조선인 골동품상인 ‘욱’이 평양박물관장인 ‘호리(堀)’의 회유를 뿌리치고 고구려 도검(刀劍)을 지키는 과정을 담고 있다. 평양의 유명한 기생인 남월매도 등장한다. 호리 관장은 바로 ‘고이즈미’ 관장을, 남월매는 ‘차릉파’를 지칭한다.
 이효석의 소설 ‘은은한 빛’을 보자.
 “남월매가 호리 관장과 가까이 하는 한편 욱과도 기묘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은 수년 전의 왕관사건 이래의 일이었다. ~그 당시는 전선적(全鮮的)인 화제를 던진 것으로, 주인공인 월매도 덕분에 기계(妓界)에서 한때 날린 것이었다. ~당대의 지사가 취흥에 맡겨 박물관에 비장된 신라조의 왕관을 유두분면(油頭粉面·화장)의 월매에게 씌우선 이를 기념으로 사진을 찍은 것인데 그 일의 길잡이를 선 것이 호리 관장이었다.~”
   비록 소설로 재표현된 것이므로 과장되고 재포장 됐을 수 있다. 하지만 ‘금관사건’이 얼마나 전 조선적인 화제를 뿌렸는 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 하룻밤의 은밀한 놀음이 한번 항간에 드러나게 되자 시시비비의 소리가 물끓듯 하여 국보의 존엄을 모독한 지사의 경거에 대한 비난의 소리는 높아 신문기자와 변호사들로 구성된 일단은~궐기하였다. 월매네 집에 숨어들어가 문제의 사진을 훔쳐내어 사회면에 폭로하고 시민의 여론에 호소하여~ 지사는 부득이 실각했고 호리 관장은 간신히 유임만은 허락되었다.”(‘은은한 빛’)
 실제의 ‘금관사건’도 이 소설에서 쓴 것처럼 여론이 들끓었을 것이다. 국보를 ‘기생의 악세사리’로 전락시켰으니 말이다. 실제의 고이즈미 관장은 신문보도 후 총독부로부터 견책을 받고 시말서까지 썼다고 한다. 하지만 평양박물관직에서 물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서봉총 금관. 소지왕의 부인인 선혜부인의 것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금관기생, 전국구 스타가 되다.  
 그렇다면 문제의 차릉파는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 소설 ‘은은한 빛’에는 남월매, 즉 실제의 차릉파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호리 관장이 남월매를 두고 하는 말이다. 
 “딴 건 고사하고 노랫가락만 하더라두 시체 기생들은 유행가가 고작이지. 옛노래는 하나두 모른단 말이야.~ 
예전 기생은 노랫가락을 잘할 뿐만 아니라, 무고(舞鼓)에 통한데다가 서화(書畵)를 잘했구, 시를 읊는가 하면 사서(四書)를 죽 죽 내리 읽었거든. 지금의 기생은 쇠통 무재주란 말야. 어때 월매, 자네 같은 사람은 참 신통하단 말야. 역시 ‘왕관기생’은 다르지. 오늘밤은 옛것을 한 곡 불러달라구.~”
 소설속 남월매처럼 차릉파도 평양에서는 손꼽는 기생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금관을 쓴’ 이력 때문에 일약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금관’ 사건이 벌어진 뒤 20여 일이 지난 1936년 7월19일의 일이다.
 이 날짜 <조선중앙일보>는 “‘금관기생’이 가짜승려에게 속아”라는 제목의 기사를 쓴다. 광법사의 중(승려)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찾아와 돈을 뜯어갔다는 것이다.
 <동아일보>도 같은 날 “자칭 광법사 중이 기생의 금전을 사취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제재한다. 그러면서 ‘모 사건으로 한때 세간의 화제에 올랏든 평양기생 차능파의 수난이야기’를 부제로 단다.
 “광법사의 중 김대술이 차군(차릉파)의 집에 찾아와~ 광법사 수축에 총독부에서 3천원의 보조비가 잇어 이를 수축하는 동시에 ‘백일제’를 행할 것인바 ‘등’을 만들어 걸게하면 행운이 조타하야 등값으로 1월을 얻어갔다. 다시 광법사의 이복경이라는 자가 나타나 감언이설로 5원을 얻어갓는바 그 뒤 3번째로 금품을 요구하는 동시에 거절하는 때는 집안이 금년 내에 망해버린다고 위협을 가해~공포를 견디지 못하여 신고한 것이라고 하며~”
 예나 지금이나 복권당첨이 되거나 유명세를 타게 되면 빌붙으려는 온갖 사기꾼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금관’ 사건 이후 일약 유명세를 탄 차릉파의 집으로 가짜 승려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래서 공포심을 견디지 못한 차릉파가 평양경찰서를 찾아 신고한 것이다.

 ■‘기생재벌’에 오른 금관기생
 ‘차릉파’는 원래 평양의 기성권번(箕城券番) 소속 기생이었다. ‘권번’은 일제 때 기생들이 기적(妓籍)을 두었던 조합을 뜻한다. 당시 경성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대동권번(大東券番)·한남권번(漢南券番)·조선권번(朝鮮券番)이 있었다. 평양에는 기성권번 등이 있었다. 권번은 동기(童妓)에게 노래와 춤을 가르쳐 기생을 양성했다. 기생들의 요정출입을 지휘하기도 했다. 또 화대(花代)를 받아주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런데 1940년 8월에 나온 ‘모던 일본’ 조선판에 차릉파라는 이름이 나온다. 즉 잡지는 경성기생의 자산순위를 발표했는데, 종로권번의 ‘차릉파’가 공동 2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1위는 조선권번 김월색(金月色·총자산 25만엔)이었으며 한성권번 강산월(康山月)과 종로권번 차릉파(車綾波)가 나란히 18만엔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 뒤 순위는 8만엔 전후의 자산을 모은 기생들이 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생집을 10년 운영한다 해도 고작 평균 3~4만엔을 모았을 뿐이었다. 이 차릉파가 평양에서 활약한 차릉파가 맞다면? 서울로 진출한 차릉파는 평양에서 얻은 ‘금관기생’의 유명세를 바탕으로 ‘기생재벌’의 반열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구스트프 아돌프 스웨덴 황태자 부부가 발굴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일제가 마련한 외교적인 발굴이벤트였다.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서봉총
 당시 구설에 오른 ‘서봉총’은 발굴 당시부터 많은 에피소드를 뿌린 신라고분이었다. 표주박처럼 쌍무덤이었다.
우선 금관총(1921년)·금령총(1924년)에 이어 세번째로 금관이 발굴된 곳이기도 했다. 서봉총은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직접 발굴에 참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연인즉은 이렇다. 1926년 5월 대구~경주~울산을 경유,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예정이었다.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했다. 총독부는 바로 이 고추밭의 흙을 파내 기관차 차고를 짓는데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한데 공사 도중에 신라고분이 발견됐다. 그러자 총독부 촉탁으로 근무 중이던 문제의 고이즈미 아키오가 현지로 급파됐다. 
 발굴이 막바지로 흐르던 10월, 마침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재위 1950~73) 부부가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다. 황태자 부인인 루이즈의 우울증 치료를 위한 세계일주 여행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고도 나라의 사찰과 쇼소인(正倉院)을 관람한 뒤 조선을 거쳐 중국을 방문하는 일정을 갖고 있었다. 그 순간 일본조정이 묘안을 짜낸다. 황태자가 북유럽과 그리스·로마 고분을 발굴했던 경력에 착안한 것이다.
 일본의 저명한 고고학자 하마다 게이사쿠(濱田耕作)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마침 조선반도의 경주라는 곳에서 한창 발굴중인데 한번 가보심이? 황금보관이 절반쯤 출토되어 전하의 내방을 기다리고 있다 하옵니다.”
 “그렇습니까. 얼마나 엄청난 행운인가요. 당연히 가봐야죠.”
 44살의 황태자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면서 한마디 농을 던졌다.
 “그 금관, 혹시 박물관에서 일부러 묻어놓은 것은 아니죠?”
 하마다가 받아쳤다.
 “그것이 거짓인지 아닌지는 고고학자이신 전하가 확인하고 감정해주시죠.”
 당시 발굴자인 고이즈미는 황태자가 발굴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도록 묘안을 짜냈다. 즉 출토유물을 수습하지 않고 출토현상을 그대로 두어 황태자가 마지막 발굴의 방점을 찍도록 한 것이다. 한마디로 밥상을 차려준 것이다. 다음은 고이즈미의 회고. 

 

유물을 발굴중인 구스타프 황태자. 옆에 있던 이가 발굴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이다.

■“마-베라스, 감탄사 연발한 황태자”
 10월10일 10시, 경주 현장에 도착한 황태자는 능수능란한 자세로 발굴현장에 뛰어들었다.
 고이즈미가 현장을 싼 흰 천을 걷어냈다. 관 안에 흩어져있던 금관과 금장신구, 각종 구슬류가 햇빛의 직사광선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탄성이 터졌다. 황태자 부처는 한쪽 무릎을 꿇고 피장자의 혼령에게 정중한 서양풍의 경의를 표했다.
 “전하, 이 요패(腰牌)만큼은 전하께서 발굴하시도록 남겨놓았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고이즈미의 말이 떨어지자 고고학자의 끼가 발동한 황태자는 즉시 상의를 벗고 발굴에 나섰다. 고고학자다운 신중한 발굴은 1시간이나 걸렸다.
 “마-베라스!!(와! 경이롭다!!)”
 금제곡옥이 달린 요패가 모습을 드러내자 황태자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황태자는 완전한 고고학자의 모습으로 발굴단과 한 몸이 되어 발굴작업에 몰입했다. 황태자를 자지러지게 만든 발굴단의 말한마디가 이어졌다.
 “전하, 전하께서 이 금관을 수습해주시옵소서.”
 황태자는 조심스럽게 무릎을 꿇고 금관을 들어올린 뒤 나무상자에 넣었다. 1500년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신라금관은 이렇게 북유럽의 프린스의 손에 의해 부활한 것이다.         

태양의 직사광선을 받아 반짝거리는 황금관

■사이토 총독, 스웨덴 황태자에게 신라금귀고리 선물하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 있다. 당시 사이토 조선총독이 11일 열린 만찬에서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에게 고려청자와 신라 금귀고리 한쌍을 선물했다. 최근 스웨덴 스톡홀롬의 셰프스홀맨 섬의 동아시아박물관에서 상설한국실이 생겼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그런데 개관식에 금귀고리 한쌍이 선보였다고 한다. 필시 사이토 총독이 선물로 준 금귀고리일 것이다. 남의 나라 국보급 유물을 선뜻 내주다니…. 이것 또한 약탈문화재라 할 수 있다.  
 어떻든 이때 발굴된 금관은 이전의 금관·금령총 발굴 금관과는 사뭇 달랐다. 금관의 나뭇가지 장식 끝에 세마리의 새 장식이 보였다. 발굴단은 이를 봉황이라 여겼다. 또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한 점도 특이했다. 따라서 이 고분의 명칭은 스웨덴의 한문명칭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서 ‘서봉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국과 깊은 인연을 쌓은 구스타프 황태자는 1950년 구스타프 6세로 황제에 오른다. 황제가 된 이후에도 한국전쟁 당시 파견된 스웨덴 의료진에게 “경주를 반드시 방문하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소지왕비, 선혜부인의 무덤?
 한편 서봉총 고분에서는 금관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연수원년(延壽元年)’, ‘태왕(太王)’, ‘신묘(辛卯)’ 등의 글자가 새겨진 명문은합은 무덤의 조성연대와 주인공을 밝혀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구려 장수왕의 연호가 ‘연수’라는 점, 또한 고구려왕을 지칭한 ‘태왕’이라는 글자가 나온 점, 또한 신묘년이라는 간지….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은합의 제작연대는 연수원년이자 신묘년인 451년일 수밖에 없다.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서봉총의 주인공이 5세기말이나 6세기초에 살았던 여성일 것이라고 짐작한다. 왜 여성이냐? 이한상 대전대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서봉총에서는 남성의 고분에서 흔히 보이는 대도(大刀·칼)와 관모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귀고리와 허리띠 장식 등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장신구가 다수 나왔습니다. 의류 등 섬유제품도 많았고…. 여성의 무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서봉총 은합에 기록된 명문. '연수원년', '태왕', '신묘' 등의 명문이 보인다.

학자들은 이 여성의 신분을 신라왕(마립간)의 배우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금관은 신라국왕과 그 배우자 혹은 후계자의 무덤에서만 보인다는 것. 특히 서봉총의 동쪽에 인접한 금관총의 주인공과 상관관계를 주목하는 학자들도 있다. 즉 금관총은 신라국왕, 서봉총은 왕의 부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499년에 서거한 소지왕(마립간)의 부인인 선혜(善兮)부인이 주목된다. 선혜부인은 내숙(乃宿) 이벌찬(伊伐飡)의 딸이다. 신라 17관등 중의 제1등인 최고위직이다.
 그러고 보면 1500년 후 금관을 쓴 이도 비록 기생신분이지만 여성이 아니었던가. 기구한 인연이다. 물론 서봉총의 주인공은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지는 모른다. 다만 무덤의 내력으로 보아 주인공도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삶을 살아간 여인이 아니었을까. 또 하나, ‘금관사건’의 주범인 고이즈미는 시말서만 쓰고 견책을 받는데 그쳤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는 여전히 경주발굴을 주도했던 저명한 고고학자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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