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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허난설헌은 표절작가인가

 27살에 요절한 천재 여류시인이 있습니다. 여성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뚫고 조선은 물론 중국대륙에까지 필명을 떨친 조선의 대표작가…. 허난설헌입니다.
 그녀의 유고시집이 출간되자 중국대륙은 ‘난설헌앓이’에 휩싸였습니다. ‘난설헌의 시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난설헌의 시가 출간되자 명나라 문사들이 열광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무슨 일입니까. 유고집인 <난설헌집>이 출간(1608년)된지 44년만엔 1652년 명나라에서 표절의혹이 제기됐습니다. 난설헌의 시 대부분이 당나라의 시를 베낀 것이라는 의혹이었습니다. 그러자 조선문단에서도 파문이 일었습니다. 어찌된 일일까요.
 조선이 자랑했고, 그의 필명이 중국대륙에까지 떨친 허난설헌은 과연 표절작가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36회의 주제는 <허난설헌은 표절작가인가> 입니다. 반드시 블로그나 인터넷 기사를 참고 삼아 보시면서 팟 캐스트를 들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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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륭하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異哉 非婦人語)”
 1590년(선조 23년) 서애 류성룡은 허균의 죽은 누이 허난설헌(1563~1589)의 시를 읽어보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류성룡은 허난설헌의 시집(난설헌고)에 발문을 붙여달라는 허균의 청에 “허씨 집안에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많으냐”고 탄복했다.
 “말을 세우고 뜻을 창조함이 허공의 꽃이나 물 속에 비친 달과 같아서 맑고 영롱해서 눈여겨 볼 수 없고…. 한·위나라 제가보다 뛰어나고 성당(盛唐)의 것만 하다. …열사의 기풍도 있으며 세상에 물든 자국도 없으니….”(<서애집>)
 허난설헌의 시를 보고는 한·위나라와 당나라 전성기(성당) 시기의 유명한 시인들과 견줄 수 있거나 오히려 뛰어나다니…. 극찬이 아닐 수 없다. 류성룡은 그러면서 “돌아가 보배롭게 간직해서 한 집안의 말로 간직하고 반드시 후세에 전하라”고 허균에게 신신당부했다.
 그랬다. 허난설헌은 여성이라는 당시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명나라는 물론 청나라 시대까지 필명을 자랑한 조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대표작가였다.
 그녀가 요절한 뒤 100년도 훨씬 지난 1695년(숙종 21년)의 <연려실기술> ‘별집·사대전고’ 기사를 보라.
 “청나라 황제가 조선 고금의 시문과 <동문선(東文選)>, <난설헌집>, 그리고 최치원과 김생, 비해당(안평대군), 죽남(오준)의 필적(筆蹟)을 요구해서 이에 응했다.”
 허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지금의 한류 이상으로 중국 황제(강희제)까지 매혹시킬만큼 사랑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죽은 아이들의 무덤이 함께 있는 허난설헌의 무덤. 경기 광주 초월읍에 있다. 허난설헌은 남편 김성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두 아이를 두었다.|민경화 사진작가  

  ■천재들의 집안
 27살에 요절한 천재 여류 시인 허난설헌, 그녀는 누구인가.
 난설헌은 1563년 강릉에서 초당 허엽(1517~1580)의 세째로 태어났다. 이조판서를 지낸 첫째 오빠 허성(1548~1612)과, 때어난 문장가였던 둘째오빠 허봉(1551~1588), 그리고 동생 허균(1569~1618) 등 이름만 들춰도 유명했던 집안이었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여자에게는 이름도 없었던 시절이었고, 재주가 없음을 오히려 덕(女子無才便是德)이라고 칭찬했던 때였다. 하지만 난설헌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둘째오빠 허봉은 여동생을 안방에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내가 책 상자에 보물처럼 간직한지 몇해가 지났다. 너에게 주니 한번 읽어보렴. 이제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게 다시 나오게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허봉은 자신이 아끼던 <두율(杜律)> 시집을 난설헌에게 보내면서 “누이동생을 통해 두보의 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고 했다. 하기야 허난설헌은 이미 8살 때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음으로써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을만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허봉은 당시 시의 천재로 일컬어졌던 손곡 이달(1561~1618)에게 허난설헌과 허균의 시 공부를 맡겼다.
 허난설헌은 여느 양반댁 규수처럼 문벌집안인 안동 김씨인 김성립(1562~1593)과 혼인했다. 하지만 부부의 금슬은 좋지 않았다. 허균은 훗날 자형 김성립의 됨됨이와 누나의 결혼생활을 이렇게 표현했다.
 “자형 김성립은 경사를 읽을 때 혀도 제대로 못움직인다.…생전에 부부 사이가 안좋더니 죽어서도 제사를 모실 아들도 없구나. 아름다운 구슬이 깨졌으니 슬픔이 끝이 없네.”(<학산초담>)

 

 

   ■두목을 사모했다?
 그런 탓에 허난설헌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을 품에 품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졌다. 그런데 마음에 품었다는 남성이 다름아닌 당나라 대표시인 두목(杜牧·803~853)이었다는 것이다.
 “난설헌이 남편의 사랑을 얻지못해 이런 시를 지었다. ‘인간에서는 어서 김성립과 사별하고,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人間願別金誠立 地下長隨杜牧之)’ 그런 뒤 자신의 호를 경번당(景樊堂)이라 지었다. 호가 번천(樊川)인 두목을 사모한 것이다.”(<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허난설헌을 언급하거나 그녀의 시를 실은 중국의 거의 모든 시집에서 ‘경번당’을 허난설헌의 호로 인정할만큼 국제적인 공인을 받았다.
 하지만 이것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표현대로 허난설헌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특히 내로라하는 조선의 문인들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논박했다.  
 “경번당은 허씨가 스스로 붙인 호가 아니다.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조롱하는 말이다. 젊은 여자가 아무리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해서 어찌 다른 세대의 남자를 사모하여 호까지 만들 수 있겠는가.”
 밖으로 나도는 남편에, 그리고 어렵게 얻은 두 아이마저 잃었으며, 시어머니에게 인정받지도 못한 허난설헌에게 유일한 낙은 시(詩)였다. 그렇지만 천재의 운명은 너무도 짧았다. 23살에 고향 강릉에 돌아와 그의 대표작인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를 지었는데, 시를 보면 그의 운명을 알 수 있다.
 “파란 바닷물이 구슬바다에 넘나들고 파란 난새가 채색 난새와 어울렸네. 부용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碧海侵瑤海 靑鸞倚彩鸞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내 저작들을 모두 불태우라”
 ‘연꽃 스물 송이 붉게 떨어진다’는 시귀에 자신이 27살에 요절한다는 뜻이 담긴 것은 혹 아닐까.
 이를 둘러싼 이야기가 하나 전해진다. 난설헌의 시를 사랑한 경란이라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조선역관 허순과 중국여인 사이에 태어난 여류시인이었다. 경란은 스스로 난설헌의 후생으로 여겼을만큼 경모했다. 호도 소설헌이라 지었다. 지금으로 치면 난설헌의 사생팬 혹은 광팬이라고 할까.
 경란은 허난설헌의 시 123편에 차운(次韻·남의 시 원작 그대로 문자를 달거나 시작하며 짓는 시)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경란이 27살이 되자 ‘나 역시 난설헌처럼 올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것을 삼구지참(三九之讖·3×9, 즉 27살에 죽는다는 예언)이라 한다. 그런데 그 해가 지나도록 죽지 않자 경란은 장탄식을 내뱉으며 ‘나는 평범한 여인이로구나’라고 괴로워했다는 것이다.
 허난설헌은 1589년 죽기 직전 “나의 저작들을 모두 불태우라(平生著述甚富 遺命茶毘之)”는 유언을 남긴다.
 이후 조선은 물론 중국 대륙까지 허난설헌 열풍으로 휘몰아간 그의 주옥같은 시들은 동생 허균이 정리한 것이다. 그랬다. 6살 연하의 동생 허균은 허난설헌의 유고를 모으고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시들을 정리해서 시집 <난설헌집>을 펴냈다. 류성룡의 발문을 받은 게 1590년이었지만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정식출간은 뒤로 미뤄졌다.
 하지만 정유재란 즈음(1597·1599년)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오명제가 신라~조선에 이르는 100여 명의 문집을 수집, 이를 중국에 소개했다. 이 가운데는 허난설헌의 시문집도 있었다. 오명제가 펴낸 책이 바로 <조선시선>이다.
 “허균은 기억력이 매우 좋아 시 수백편을 외었다. 허균의 누이가 지은 시 200편을 얻었다. 한음 이덕형이 문집을 구해주었다. 이 책들을 두달간 펼쳐보고는 좋은 시들을 모아 종류별로 기록했다.”(<조선시선> ‘자서’)

동생 허균이 엮은 <난설헌집>.   허난설헌 사후에 동생 허균이 엮어낸 <난설헌집>. 이 책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허난설헌은 조선이 낳은 대표작가였지만 사후에 표절의혹이 제기됐다.  

 ■중국대륙에 불어닥친 난설헌 열풍
 <조선시선>에 기록된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1606년 조선을 방문한 중국 사신 주지번은 허균을 불러 허난설헌의 시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당시 허균은 중국사신을 맞는 영접단의 종사관이었다. 허균이 누나의 시권을 주지번에게 선물했는데, 주지번이 그 시를 읽어보고 매우 감탄했다.(허균의 <병오기행>) 그러자 허균은 주지번에게 난설헌집의 서문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주지번은 결국 한 달 뒤 난설헌집의 서문을 지어주었다. 이로써 <난설헌집>은 그녀의 사후 19년 만에 남동생 허균의 노력으로 간행된다. 그 때가 1608년이었다.
 <난설헌집>은 이후 중국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조선을 찾은 중국사신들은 앞다퉈 허난설헌의 시집을 구해달라고 아우성쳤다. 예컨대 1609년 명나라 사신 유용과 서명 등은 허균을 만나 “당신 누이의 책좀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도망령(당대 유명한 명나라 문인)이 우리 사신단에게 신신당부했습니다. 조선에 가면 제발 <난설헌집>을 구해가지고 오라고…. ‘그 누이의 시가 천하 제일’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신들도 허균에게 <난설헌집> 좀 달라고 너도나도 허균에게 부탁했다. 난설헌의 시는 오명제의 <조선시선> 이후 많은 문인들에 의해 재편집되고 소개됐다.
 얼마나 인기를 끌었는지 허난설헌의 시를 ‘표절’이라 폄훼한 명나라 <열조시집>에서도 “난설헌의 시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꽃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됐다”고 표현했다.
 “우리나라(명나라) 문사들은 기이한 것만 찾아다니다가 한갓 외방 오랑캐 여자(허난살헌)의 손에서 나온 시만 보고 놀라고 찬탄했다.”(<열조시집>)

 

 ■난설헌은 혜녀(慧女)이자 천인(天人)이다
 그 뿐인가. 난설헌의 시를 164수나 수록한 <긍사(亘史)>를 보라. 이 책의 편집자인 반지긍은 허난설헌을 이렇게 극찬한다.
 “조선에 한나라 반소(유명한 여류시인)와 견줄 수 있는 여인이 있다. 조선의 군신들도 그녀보다 앞서지는 못할 것이다. 허경번(난설헌)은 혜녀(慧女)만이 아니라 천인(天人)이라 할 수 있다. 허경번이 7살에 지은 <백옥루상량문>을 보라. 하늘이 내린 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글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뿐인가. 명나라 시인 종성이 편찬한 <명원시귀(名媛詩歸)>는 68편이나 되는 난설헌의 시를 싣고 있다. 편찬자 종성은 “남편 김성립이 죽자 허난설헌은 여도사(女道士)가 되었다”고 했다. 그녀를 신격화의 경지로 올린 것이다. 허난설헌의 시 41수를 실은 <고금여사(古今女史)>는 “어려서 사서를 공부했고 육예를 통달했으며 7살부터 붓을 들면 곧 문장이 됐다”고 허난설헌을 극찬했다. 그러면서….
 “저명한 희곡가인 탕현조가 말했다. ‘내가 북경에서 우연히 <난설헌집>을 읽었는데 내 눈을 비비고 다시 보게 됐다, 이역(異域)에 이처럼 출중한 여인이 있었단 말인가.’”
 중국인들이 그야말로 허난설헌의 시에 열광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그랬으니 훗날 청나라 황제까지 허난설헌의 시집을 <동문선>은 물론 최치원·김생·안평대군의 필적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으며 ‘구해오라’고 했던 것이다.

 

 ■중국에서 불거진 표절시비
 하지만 허난설헌의 작품들은 곧 표절시비에 휩싸이고 만다. 표절시비를 제기한 이는 바로 중국 강남의 기녀 출신 여류시인이자 화가였던 유여시(1616~1664)였다.
 그녀는 남편 전겸익이 편찬한 <열조시집>에서 허매씨(허난설헌) 소전을 쓰면서 허난설헌의 시는 ‘표절’이라고 단정하면서 “난설헌이 원작자를 숨기고 자신의 작품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라 비난했다. 그러면서 “명나라 문사들이 오랑캐 여인의 솜씨에 놀라 원작자가 누구인지 따져보지도 않고 열광하고 있다”고 꼬집은 것이다.
 유여시는 “<조선시선>에 등장하는 난설헌의 시 81편 대부분이 당나라 시인들의 시구를 본떠서 만든 것”이라 폄훼했다.
 중국의 대표 시집이었던 <열조시집>에서 표절의혹을 제기하자 조선 문단도 들끓었다. 허난설헌과 동년배인 지봉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에서 “난설헌의 시는 근세 규수 가운데서는 으뜸”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그렇지만 2~3편을 제외하고는 다 위작이며, 그가 8살에 지었다는 ‘백옥루 상량문’도 동생인 허균과 이재영이 합작해서 쓴 것”이라 했다.
 김만중(1637~1692)는 <서포만필>에서 “난설헌의 천부적인 지혜는 매우 특출나지만 아우 허균이 그녀의 시집에 명성을 첨가하려 하다가 표절을 저질렀다”고 안타까워했다.
 “허균이 원·명의 시인들의 좋은 글귀 중 흔히 보기 어려운 시들을 뽑아 그녀의 시집에 첨가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속일 수 있었지만 그것이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는 마치 도둑이 남의 소나 말을 도둑질하여 다시 그 마을에 판 것이 아닌가. 어리석기 짝이 없다.”
 홍만종(1643~1725)은 <시화총림>에서 “난설헌의 시 한 편 중 5·6구를 보니 중국사람의 구절과 한 글자도 틀린 것이 없으니 마치 산 채로 집어 삼킨 것이라 하겠다”고 비판했다. 후대 사람인 이덕무(1741~1793) 역시 “허난설헌은 중국인인 전겸익과 유여시에 의해 고시를 표절한 흔적이 여지없이 폭로됐으니 남의 작품을 표절하는 자들에게 밝은 경계가 될 것”이라 했다.(<청비록>) 그와같은 허난설헌의 표절시비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같지만 다른 느낌
 그렇다면 허난설헌을 둘러싸고 제기된 표절시비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예컨대 <열조시집>이 제기한 의혹 가운데 난설헌의 시와 당나라 시인 포용(鮑溶)의 ‘요수사(瑤水詞)’를 살펴보자.
 “난새 타고 구중성 내려와 붉은 휘장 무지개 깃발 세우고 태청을 떠났네. 주영왕 태자를 만나서는 벽도화 꽃 속에서 깊은 밤 생황을 불었다오.(乘鸞來下九重城 絳節霓旌別太淸 逢着周靈王太子 碧桃花裏夜吹笙).”(난설헌의 시)
 “곤륜산 구중성 높은 곳에 요수의 물이 열두 성을 굽이 돌아 흐른다. 주영왕 태자를 흠모하는 이 마음에 벽도화 꽃 속에서 홀로 생황을 연습했소.(崑崙九層幾千丈 瑤水四流十二城 心羨周靈王太子 碧桃花下裏吹笙”(포용의 시)
 ‘구중’과 ‘구층’이 나오고, 주나라 영왕의 태자가 등장하며, 더구나 마지막 구절은 ‘하(下)’가 ‘이(裏)’만 다를 뿐 똑같은 내용이다. 표절의혹을 제기할 만 하다.
 그러나 포용의 시에 나오는 선녀는 마음 속으로 주영왕 태자를 흠모하지만 만날 수는 없어 그저 혼자 생황을 연습할 수 밖에 없다. 반면 난설헌의 시에 등장하는 선녀는 한밤중에 난새를 타고 깃발을 앞세워 위풍당당 구중성을 타고 내려와 기어코 주영왕 태자를 만난다. 태자를 만나 벽도화 꽃 속에서 생황을 불고 있다. 소극적인 여신과 행복을 쟁취하는 여신의 모습이 다르다.(김성남의 <허난설헌>, 동문선, 2003)
 또 하나의 표절의혹을 받고 있는 시를 보자.
 “자양궁 궁녀가 단사를 받들고 서왕모의 명령으로 한 무제 집으로 가네. 창 아래서 우연히 동방삭을 만나 웃었는데, 헤어지고 옥수에 여섯번이나 꽃이 피었네.(紫陽宮女捧丹砂 王母令過漢帝家 窓下偶逢方朔笑 別來琪樹六開花)”(난설헌의 시)
 “자양궁 궁녀가 단사를 받들고 왕모의 명으로 한무제의 집으로 가네. 봄바람 부니 신선마차 멈추지 못해. 봉래산으로 살구꽃 보러 간다네.(紫陽宮女捧丹砂 王母令過漢帝家 春風不肯停仙馭 각向蓬萊看杏花)”(당나라 장계의 시)
 두 시를 비교하면 허난설헌 시는 장계의 시 가운데 앞 두 구절을 그대로 따왔다. 그렇지만 내용을 보면 같은 시는 아니다. 장계는 선녀가 세상에 내려와 봄바람에 놀러가고 깊은 마음에 봉래산으로 꽃구경 가는 마음을 그렸다. 그러나 난설헌의 시는 세상에 내려온 선녀가 우연히 동방삭을 만나 눈길을 주고 받는다. 찰나의 눈맞춤이었지만 여운은 여섯 번이나 꽃이 피고 질 동안 짙게 남는다. 이것을 표절이라 할 수 있을까.
 또 동시대인인 이수광이 제기한 표절의혹을 살펴보자.
 “난설헌의 시집 가운데 ‘금봉화연지가(金鳳花染指歌)’는 명나라 사람의 ‘거울같은 하늘에 유성 흐르는 달밤이요, 그린 눈썹은 꽃비가 봄산을 지남이라.’는 구절을 점화(點化)해서 만든 것이다.”(<지봉유설>)
 그런데 명나라 사람의 ‘금봉화염지가’의 끝구절은 ‘화미홍우과춘산(畵眉紅雨過春山)’이고, 허난설헌 작품은 ‘지우홍우과춘산(只疑紅雨過春山)’이라 했다. 얼핏 보면 표절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논란의 여지는 있다. ‘화미홍우과춘산’은 “때마침 눈썹 그리는 붓을 쥐고 초생달같은 눈썹을 그리는데 바로 붉은 빗방울이 미간에 지나가는 것 같다”는 것이고, ‘지의홍우과춘산’은 “거울 같은 하늘에 유성이 흐르는 달밤이요. 그린 눈썹은 꽃비가 봄산을 지남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수광이 허난설헌의 ‘점화’를 문제삼았다는 것이 논란거리다. ‘점화’란 점철화금(點鐵化金)이라는 뜻이며, 표절과는 전혀 다른 환골탈태와 비슷한 뜻이다.(허미자의 <허난설헌>, 성신여대 출판부, 2007)

강릉시 초당동에 있는 허난설헌의 생가.  허성 허봉 등 두 오빠와 남동생 허균 등과 더불어 천재남매 집안으로 인구에 회자됐다.   

 

 ■표절은 침략과 같다.
 사실 허난설헌을 둘러싼 표절논쟁은 그 정답을 찾기 어렵다.
 표절에 대한 기준이 시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고금을 막론하고 표절은 문자 그대로 도둑질이었다. 오죽했으면 예전에는 표절을 다른 나라백성들을 괴롭히고 침략하는 의미로 썼을가. 예컨대 여말선초의 문인이자 학자인 권근은 왜구의 침략을 표절이라 칭했다.
 “왜놈들 성품이 위낙 완악해.(倭奴稟性頑)…언제나 간흉을 부렸지.(常自肆兇奸) 가만가만 이웃 나라 침략해 오고(剽竊侵隣境)….”(<양촌집>)
 이색은 이같은 표절을 의리를 모르는 행위이며 천인공노할 짓이라 비난했다.(<동문선> ‘표전’) 비단 물리적인 침략 뿐이 아니다. 이규보는 “표절은 사람을 현혹시키니 진실로 취사롤 정하지 못하면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혼동할 수밖에 없다.”(동문선> ‘표전’)
 심지어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경서 주석 모아놓고 제자백가 열람하는 세상의 표절을 똥묻을 수치로 여겼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표절이냐 환골탈태냐
 하지만 표절의 기준은 허난설헌의 시대에도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송나라 양만리는 두보와 소동파·황정견·한유 등의 시구를 비교하면서 “이들 모두 옛 사람의 구절을 습용하였지만 의경(意境·작자의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이 객관적인 사물이나 대상을 만나 융합하면서 생성되는 의미 또는 형상)을 받아 쓰지 않았으므로 새롭고 환골탈태한 것”이라 했다.
 청나라 시인 오교(吳喬)는 한술 더 떴다.
 “옛 시인의 시구가 매우 많아서 뒷사람에게 서로 같은 구절이 있게 마련이다. 어찌 예전의 시구를 다 살펴서 피해가며 지을 수 있겠는가. 다만 스스로의 의경을 다 표현해내기 위해 우연히 같아지는 것을 따질 필요가 없다.”(<위로시화)>) 
 청나라 손도(孫濤) 역시 “대부분의 경우 옛 시인의 시를 많이 외우는데 오래 지나다보면 어쩌다 기억을 못해 그것을 자기 것으로 알고 쓰는 수가 있다”고 했다.(<전당시화> ‘속편 왕유조’) 서거정의 주장도 참고할만 하다.
 “옛 시인의 시를 읽은 것이 무르익어 더러 마치 자기 것인양 생각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시인에게 흔히 있는 일이다. 어찌 남의 시를 표절한 것이라 욕하겠는가.”(<동인시화>)
 이것이 허난설헌을 위한 변명 한마디 쯤은 되지 않을까. 아닌게 아니라 허난설헌이라면 꽤나 억울할 것도 같다.

 

 ■남동생 때문에?
 가만 보면 허난설헌은 유언으로 “내 저작들을 모두 불태우라”고 했다.
 그것을 시집으로 엮어 꾸미려 하지 않았고, 그랬으니 더군다나 그 책으로 돈을 벌 생각도 없었다. 과거시험을 꿈꾸지 않았다. 그가 남긴 시 가운데는 어릴 적부터 선인들의 시작을 참고로 지었던 습작시가 많았을 것이다. 즉 어릴 적 당나라 시를 모방해서 습작한 뒤에 창작의 단계로 넘어갔을 것이다. 게다가 당대에는 당시, 즉 당나라 시에 대한 향수가 짙었던 때였다. 당시를 배우는 이들은 시를 배우는 모범으로 옛 사람의 글귀를 빌려와 새로운 뜻과 이미지를 창출했다. 허난설헌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훗날 표절이라 손가락질 당했던 시 가운데 상당부분은 어릴 적 습작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난설헌집>은 허균이 엮은 것이다. 그 가운데 허균의 기억에 의해 복원된 시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허균의 입김이 살짝 들어갔을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허균은 <난설헌집>을 편찬한 뒤 불과 10년 만에(1618년) 대역죄로 능지처참의 극형을 받는다. 허균에 대한 증오심은 곧 난설헌의 표절논란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난설헌은 조선의 규수 가운데 오직 한사람인 혜녀(慧女)였지만 남동생 때문에 흠을 당했다”고 안타까워했을까.

 

 ■허난설헌 표절논쟁이 남긴 것
 무엇보다 핵심은 역시 허난설헌 본인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400년 이상 계속되는 표절논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 자기 스스로 책을 펴낸다고, 책으로 돈을 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이미 죽은 뒤였으므로 표절 의혹에 조선 및 중국 독자들에게 입장을 표명할 수도 없었으니까.
 또하나 중요한 포인트는 허난설헌 표절논쟁이 수백년동안 계속됐다는 것이다. 문단권력이니 하는 핑계로, 평론가나 문인들조차 비평에 인색한 작금의 문단과도 비교되는 대목이다. 또 혹독한 표절의혹에도 허난설헌의 존재는 400년 동안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허난설헌의 시를 싣고 있는 <고금야사>는 허난설헌을 중국의 대표시인 이태백과 강엄에 견주며 이렇게 칭찬했다.
 “허난설헌의 신령한 기백은 이태백조차 뒤로 물러나게 한다. 강엄 역시 허난설헌 문장의 아름답고 화려함 때문에 자리를 피하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진한의 고문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허미자, <허난설헌>, 성신여대 출판부, 2007
 김성남, <허난설헌>, 동문선, 2003

 이혜순·정하영 등 공편, <표절 인문학적 성찰>, 집문당, 2008
 허경진, ‘허난설헌의 생애를 통해서 본 조선시대 여성의 권리’, <인문학보> 제31집, 강릉대 인문과학연구소, 2006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