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대왕 신종(국보 제29호), 일명 ‘에밀레종’을 둘러싼 설화는 해괴하고 끔찍하다.

같은 주제인데 여러 버전으로 전해진다. 즉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해서 스님들이 시주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그런데 어느 가난한 집 부인이 시주를 받으러 문을 두드린 스님에게 “마음 같아서는 시주 하고 싶지만 있는 것은 갓난아이 뿐이니 이 아이라도 시주 받겠냐”고 했다. 스님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면서 그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열심히 시주받아 종의 제작에 보탰다. 그러나 이상스럽게도 종은 완성되지 않았다. 

2003년 타종 및 음향.진동 측정조사를 위해 종을 치는 모습.

스님이 이상하게 여겨 점을 쳐보니 ‘받을 시주를 받지 않아서 종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궤가 나왔다. 스님이 문득 갓난 아이를 시주하겠다던 부인을 떠올렸다. 스님은 그 집을 찾아가 아이를 데려와 쇳물에 던져버렸다. 그제서야 종은 완성됐다. 이후 종은 어미를 원망하는 아이 소리처럼 ‘에미 탓’ ‘에미 탓’이라 했고, 그것이 ‘에밀레’로 바뀌었다.

다른 버전도 있다. 봉덕사에서 성덕대왕 신종을 제작하기로 했지만 실패를 거듭했다. 봉덕사 종장인 일전 스님은 비난의 소용돌이에 빠졌다. 일전 스님에게는 과부의 몸으로 얹혀살던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 여동생은 오빠의 실패를 자신의 탓으로 여겨 자기 아이를 바치기로 한다. 결국 아이가 쇳물이 펄펄 끓던 도가니 속에 투입된다. 그제서야 종이 완성되고, 어미를 원망하는 ‘에밀레’ 종소리가 들렸다.



■‘에미의 죄’ ‘어미일내’… 허무맹랑한 이야기

하지만 이 모든 설화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온갖 설화·전설을 모아놓은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세종실록> ‘지리지’는 물론이고 온갖 야사를 담은 <대동야승>에도 일언반구 언급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조선 후기 경주 지역의 야담을 모은 <동경잡기>(1669년)에도 없다. 

종 제작에 ‘어린아기’를 공양했다는 이야기는 구한말 선교사인 호러스 앨런의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와 호머 헐버트의 <코리안 리뷰(Korean Review)> 등에도 소개된다.

그런데 월간 대중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27일자에 아주 흥미로운 기사가 실린다.

‘오래된 벙어리 종로(鍾路) 인경의 신세타령’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종로 보신각 종이 신세를 한탄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송작생(松雀生)이 썼다는 기사는 “보신각 종을 주조할 때 조선 팔도의 모든 쇠(鐵)라는 쇠는 다 모아들였지만 처음에는 잘 붙지도, 소리도 크지 않아 기술자들의 머리가 다 희어질 정도로 고민했다”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을 소개한다.

“종이 제작되지 않자 공장장이 백방으로 방법을 찾았다. 그 때 어떤 스님에게서 이상한 말을 전해들었다. 즉 충남 공주 땅에서 쇠를 거둘 때 어떤 가난한 과부 집에 ‘쇠를 내어달라’고 독촉하자 과부는 아이를 내주면서 ‘우린 가난하니 이 아이라도 데려다 쇳물에 부어 종을 만들라’고 했다는 것이다. 쇠를 모으던 사람도 이 말이 하도 끔찍스럽고 기가 막혀 ‘그만 두라’고 하고 돌아왔는데, 과부가 화를 내며 ‘만약 이 아이를 데려가지 않으면 아무리 별 수단을 다 써도 종을 만들 수 없을 것’이라 했단다.”

공장장이 이 말을 듣고는 “즉시 공주에 가서 과부의 아이를 데려다 쇠와 같이 끓이니 쇠조각이 잘 붙어서 훌륭한 종이 되었고 종소리도 우렁차게 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는 어미를 원망해서 종소리가 날 때마다 ‘어미일내~ 어미일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전설 뿐이지 실제로 그럴 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별거곤> 잡지의 내용도 “조선조 세조 13년(1467년) 보신각종을 제작했을 때의 전설”이라고 했을 뿐, 771년(혜공왕 7년) 완성됐다는 성덕대왕 신종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주파수 스펙트럼과 고유주파수.(김석현 강원대교수 발표문에서)

■제사에 쓰인 사람들

물론 어떤 국가적인 공사를 벌일 때나 혹은 군주 혹은 귀족의 장례 때 사람을 제사지내는 일은 고대사회에서는 종종 있어왔다,

하늘의 재앙에서 정결한 육신을 바쳐 공동체의 안녕과 구원을 도모하고자 한 것은 일상사였다. 부여는 “사람을 죽여 100여 명까지 순장시켰다.”<삼국지> ‘위서·동이전’>)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갑골문에는 “백인을 희생양으로 바칠까요?”하는 내용도 보인다. 

중국 은(상)나라 후기(기원전 1300~1046) 273년 동안 최소한 1만4197명이 사람제사 혹은 순장으로 희생된 것으로 집계된다. 1976년 은(상)말기 도읍인 인쉬(殷墟·은허)에서 발견된 191기의 제사구덩이에서는 무려 1178명의 희생자가 쏟아져 나왔다. 이곳에서는 여성과 어린아이들의 유골도 있었다. 서양에서도 기원전 97년 로마 원로원은 사람 제사를 법률로 금지한 바 있다. 또 1487년 멕시코 아즈텍 테노츠티틀란 보수공사 과정에서 나흘간 죄수와 노역자 8만400명이 학살된 기록도 있다. 이것은 보수한 건축물의 안정을 위해 자행된 이벤트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 제사와 순장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반인간적인 행위라는 지탄을 받을 만 하다. 하지만 당대에는 보편적인 풍습이었다. 심지어 고려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최충헌(1149~1219)의 집이나 조선 성종 25년(1494년) 왕자·옹주의 집을 지을 때도 어린아이를 주초석 밑에 묻었다는 온갖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소문에 불과했다.


■천인공노할 유아살인   

8세기 중후반 때 신라에서는 이런 사람제사나 인신공양은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다. 

성덕대왕 신종의 제작은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그런 공식적인 국가사업에 아이를 제물로 바친다? 

천인공노할 유아살인으로 지탄받았을 것이다. 또한 순장제도는 이미 502년(신라 지증왕 3년)에 폐지됐다. 게다가 불교를 국교를 받아들였고, 원광법사의 ‘살생유택’ 정신이 이어졌을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종소리는 불음(佛音)이 아닌가. 불음을 위해 사람의 생목숨을 희생한다는 것은 불교의 근간을 뒤흔드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과학적인 측면에서도 말이 안된다.












성덕대왕 신종, 즉 에밀레 종의 신비는 특유의 맥놀이 현상 덕분에 만들어졌다. 에밀레종은 종을 치면 여음이 2.9초 동안 이어지다가 숨이 끊어진 듯 사라진 뒤 다시 9.1초간격(타종 시점부터) 반복된다. 그 때문에 어린아이가 애잔하게 울다가 숨이 끊어진 뒤 다시 되살아나 울부짖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김석현 교수의 발표문에서)

<삼국유사> ‘탑상조’에 따르면 경덕왕(742~765)이 부왕인 성덕왕(702~737)의 명복을 빌려고 황동 12만근을 내려 제작한 종이다.  

그러나 이 종은 경덕왕대에 완성하지 못했고 경덕왕의 아들인 혜공왕 7년(771년)까지 제작이 지연됐다. 그런데 이 12만근을 녹이기 위해 필요한 도가니는 480개 이른다. 그런데 종 제작을 위해서는 한꺼번에 끓여 단시간 내에 동시에 부어야 응고되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사람 몸에서 배출되는 인 성분이 쇳물 속에 남아있는 산소 때문에 생길 수 있는 기포를 없애주는 역할, 즉 탈산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아이의 육신에서 추출될 수 있는 극미량의 인으로 12만근의 황동이 들어간 18.9t짜리 큰 종을 감당할 수 없다.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에 새겨진 비밀코드 

그렇다면 대체 왜 성덕대왕 신종에 어린아이의 전설이 녹아들어갔을까. 억측일 수 있지만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펴볼 수도 있겠다,

다름아닌 이 종을 완성한 혜공왕을 염두에 두어보자는 것이다. 즉 성덕대왕 신종에 새겨진 명문을 보자는 것이다.

“태후의 은덕이 백성을 감화시키고 마음은 부자의 효성을 권면했네. 아침엔 원구(임금의 외숙)의 지혜를, 저녁엔 충신의 보필을 받았네. 이에 경덕왕의 유훈을 돌아보아 숙원(에밀레 종)을 만들었네.”

성덕대왕 신종은 경덕왕이 아버지(성덕왕)을 기리려고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결국 아들인 혜공왕 7년(771년)에 가서야 완성된다. 명문에 등장하는 태후가 누구인가. 바로 만월부인이다. 명문에는 또 혜공왕의 원구(임금의 외숙·태후의 동생)이 등장한다.  

이 명문과 함께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등장한 혜공왕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혜공왕(765~780)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성소수자라 할 수 있다.

<삼국유사>를 보면 혜공왕의 아버지 경덕왕은 아들을 얻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경덕왕은 표훈대사를 만나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이 없다”면서 “대사께서 상제(上帝)에게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청하기 원한다”고 부탁했다. 

그러나 상제를 만나고 돌아온 표훈은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곤란하다’는 말만 들었다”고 경문왕에게 일러주었다. 경문왕은 다시 표훈대사에게 “원컨대 딸을 바꿔 아들로 해달라”고 간청했다. 표훈이 경덕왕의 말을 다시 전하자 상제는 ‘딸을 아들로 바꿀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로울 것’이라 했다. 표훈대사로부터 그 말을 전해들은 경덕왕은 “나라가 위태롭더라도 아들을 얻어 왕위를 잇는다면 족하다”고 고집을 피웠다.

혜공왕의 어머니는 바로 만월부인(태후)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본래 딸이었는데, 바뀌어 태어난 이가 바로 혜공왕이다.

일제강점기 대중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27일자에 ‘보신각 종’을 소개하면서 종 제작에 갓난아기를 넣었다는 ‘믿지못할’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때 죽은 갓난아이가 어미를 원망하면서 ‘에미일네, 에미일네’ 하고 울었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자료 


■여자놀이를 즐긴 혜공왕

8살의 어린 아이에 왕위를 이은 혜공왕은 “첫돌 때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늘 여자놀이를 하고 자랐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며 (미남자들인)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했다”(<삼국유사>)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혜공왕 즉위 기사를 보면 의미심장한 대목이 보인다.

바로 어머니(만월태후)의 섭정이다. “765년 6월 혜공왕이 왕위에 올랐고 어머니는 만월부인인데, 왕이 즉위할 때 나이가 8살이었으므로 태후가 섭정했다”고 했다.(‘신라본기·경덕왕조’) 나이가 어려 즉위한 아들 대신 어머니(만월부인)가 섭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월부인의 섭정으로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았다”는 <삼국유사>의 기사가 의미심장하다.

“혜공왕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태후가 조정에 나섰지만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상제의 말을 전한 표훈대사의 예언이 맞았다”면서 “신라에서는 더이상 성인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어린 임금을 공포에 떨게 한 반란 

<삼국유사>는 혜공왕 즉위부터 심상치않은 천재지변이 잇달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765년(혜공왕 원년) 강주(경남 진주) 관청의 동쪽 땅이 점점 가라앉자 못을 이뤘고, 홀연히 잉어 대여섯 마리가 서로 계속하여 점점 커지더니 못도 따라서 커졌다. 767년(혜공왕 3년)에 이르러서는 또한 머리가 항아리만 하고 꼬리가 3자나 되는 천구성(유성의 일종)이 소리를 내며 동루(東樓)의 남쪽에 떨어졌고…호랑이가 궁성 안에 들어왔고, 각간 대공의 집 배나무 위에 참새가 셀 수 없이 많이 모였고…. 병법에 따르면 ‘(이런 변괴가 있으면) 천하에 커다란 병란이 일어난다’고 했다.”

마침내 768년(혜공왕 4년) 일갈찬 대공과 아우 대렴이 반란을 일으켜 33일간이나 왕궁을 에워싸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때의 반란은 왕도와 각 지방의 96각간이 뒤엉켜 싸우는 대혼란의 양상으로 벌어졌다. 이 반란은 가까스로 진압됐지만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반란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770년(혜공왕 6년) 8월에는 김유신의 후손 김융의 난이 일어났고, 두 개의 태양이 떴다는 기록까지 나왔다. 775년(헤공왕 11년) 6~8월엔 이찬 김은거와 이찬 염상의 반란이 이어졌다. 결국 혜공왕은 780년(혜공왕 16년) 2월 일어난 이찬 김지정의 반란으로 치명타를 입었다. 김지정이 이끄는 반란군은 두 달 동안이나 궁궐을 포위했고, 혜공왕과 왕비는 결국 반란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원인을 혜공왕에게 돌렸다. “왕 늘 비단주머니를 차고 다녔고, 미소년들로 구성된 도류(道流)를 희롱하며 놀았기 때문에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피살됐다”고 한 것이다. 


성덕왕릉.  일명 에밀레종이라 일컬어지는 성덕대왕 신종은 아들인 경덕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위해 황동 12만근을 내려 제작하려 했지만 경덕왕의 아들대인 혜공왕 7년(771년)에 이르러 겨우 완성됐다.  

■태후(만월부인)의 섭정으로 어지러워진 나라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 역사서의 행간과,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에 숨겨진 코드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어머니(만월부인)의 섭정이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혼란에 빠진 진짜 이유를 “(혜공)왕이 너무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올라 태후(만월부인)이 섭정을 했는데, 정사가 잘 다스려지지 않아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했다.

어린 혜공왕 대신 정사를 주무른 태후의 책임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혜공왕의 아버지인 경덕왕은 순전히 아들을 낳기 위해 본부인인 왕비를 내쫓아 사량부인으로 삼고, 만월부인을 들여왔다. 만월부인은 궁궐로 들어온지 무려 15년만에 꿈에 그리던 아들(혜공왕)을 낳았다.

그랬으니 얼마나 아들을 향한 집착이 심했을 것인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을 버무려 해석해보면 어떨까.

남편이 죽고 8살 어린 아들인 혜공왕이 즉위하자 어머니 만월부인(태후)은 친정오빠인 원구와 함께 국정을 농단했을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의 명문을 보면 유독 태후의 공덕과 원구(임금 외삼촌)의 도움이 강조되어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태후의 음덕은 평평한 땅과 같다” “위대하여라. 우리 태후이시여!”와 같은 이야기와 ‘아침에는 원구(친정오라비)의 도움으로 국정을 처리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에미 탓이야!’ 어머니를 원망했을 혜공왕  

그 사이 혜공왕은 기센 어머니의 등쌀에 꼼짝하지 못했을 것이다. 

고립무원이 된 어린 혜공왕은 더욱 우유부단해지고 삶의 의욕을 잃어갔을 것이다. 어머니의 집착과 억압 속에서 성장한 이 소심한 아이는 여자를 자신을 구속하는, 아니 두려운 존재로까지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어머니와 외삼촌의 등쌀에 기를 펴지못한 혜공왕은 결국 잇단 반란에 가슴 졸이지 않았을까.

특히 768년 대공·대렴 형제의 반란과 96각간의 거병으로 33일간이나 왕성이 포위되었을 때의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혜공왕은 재위 16년만에 김지정의 난으로 23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만다. 물론 어머니(만월부인)와 외삼촌 역시 죽임을 당했다. 그렇다면 비참한 죽음을 앞둔 헤공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혹시 외삼촌과 함께 국정을 농단한 어머니(만월태후)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에미탓이야”하고…. 혹시 혜공왕와 태후(만월부인)의 죽음을 목도한 신라인들은 바로 심약한 혜공왕을 연민의 정으로 여기며 ‘에미 탓이야’ ‘에미 탓이야’하고 동조해주지 않았을까. 


■에밀레 종소리의 비밀

물론 순전히 몇가지 기록과 명문 내용을 토대로 펴본 상상의 나래일뿐이다. 

성덕대왕 신종을 둘러싼 해괴한 전설이 지금 이 순간도 그럴 듯하게 여겨진 까닭이 있다.

바로 마치 ‘아이가 우는 듯한’ 종소리다. 그렇다면 왜 성덕대왕 신종에서 그 신묘한 어린아이의 소리가 나온다는 것인가.

과학자들의 음향 조사 결과 성덕대왕 신종의 주파수 스펙트럼을 분석하면 1000㎐ 범위 내에서 50여개의 고유주파수가 확인된다. 그중 성덕대왕 신종의 기본음은 168㎐이고, 여음(餘音)은 64㎐의 고유주파수를 갖고 있다.

김석현 강원대 교수(메카트로닉스 전공)가 최근 국립경주박물관이 개최한 ‘성덕대왕 신종의 전시환경’ 학술 심포지엄에서 그동안의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 연구결과를 총정리했다.

김교수는 종을 치면 여음(64㎐)이 2.9초 동안 이어지다가 숨이 끊어진 듯 없어지는 듯 했다가 9.1초 간격(타종 시점부터)으로 기본음 소리(168㎐)가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그 때문에 어린아이 울음 같은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다. 또하나 경쾌한 성덕대왕 종소리의 비결도 소개했다. 야구나 테니스 라켓으로 공을 때릴 때 가장 경쾌한 소리가 나오는 지점을 스위트 스팟(sweet spot)이라 하는데, 성덕대왕 신종의 경우 바로 그 스위트 스팟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스위트 스팟을 계산해보면 성덕대왕 신종의 타격중심 오차는 단 0.3%에 불과하므로 오차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덕분에 성덕대왕 신종이 그야말로 ‘천상의 소리’를 빚어냈다는 것이다.

김석현 교수의 말마따나 지금도 종을 만들 때는 외관과 종의 두께 등 1200여 년 전의 성덕대왕 신종을 기본모델로 제작한다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성덕대왕 신종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렇게 때로 한낱 가짜뉴스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때로 팩트가 가미된 전설과 역사의 영역으로 설명되고 있다. 에밀리종을 계기로 8살 어린나이에 임금이 된 혜공왕이 어머니의 섭정에 휘둘려 제대로 힘을 펴지 못하다가 전국을 뒤흔든 반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어절 줄 모르다가 끝내 24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한 사연을 읽어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의미있는 공부라 할 수 있다. 경향신문 선임기자


<참고자료>

성낙주, <에밀레종의 비밀>, 푸른역사, 2008

김석현, ‘성덕대왕 종소리’, 성덕대왕 신종의 전시 환경 학술 심포지엄 발표문, 국립경주박물관, 2018  

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