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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화장실에서 건진 인류의 역사

이번 주는 화장실에 얽힌 역사를 이야기를 하렵니다.
무슨 화장실에 역사가 있겠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아닙니다. 있습니다. 왜냐면 화장실 역시 인간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인간의 틈에서 살지 않는다면 화장실이라는 공간이 필요없었겠지요. 사람 틈에 끼어있지 않으면 굳이 화장실에서 용변을 볼 필요가 없었을겁니다. 그래서 일찍이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화장실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라 했습니다.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곳(화장실)은 분명 혼자서도 첫날 밤을 치른 사람처럼 행복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곳, ~당신이 그 어느 것도 몸에 지니지 않는 한갓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겸손의 장소~ 그 곳은 인간이 휴식을 취하는 곳, 하지만 부드럽게,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감행하는, 그런 장소.” 뭐 이렇게 말입니다. 지난 2003년 익산 왕궁리에서는 잘 갖춰진 1300년 전에 지은 백제시대 공중화장실 유적이 발견됐습니다. 일본 땅에서도 백제인 신라인의 체취가 묻은 화장실 유적이 또 확인됐습니다. 또하나 중국의 화장실은 왜 그렇게 더럽다는 인상을 주고 있을까요. 오죽했으면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화장실 혁명’을 외치고 있을까요. 사람이 모여 살면서 공동체를 이룰 때부터 역사를 만든 화장실 이야기.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가 전해드립니다.

 

 

“그냥 지하창고겠죠.”
2003년 4월부터 익산 왕궁리유적을 발굴하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은 아주 큰 규모의 구덩이를 찾아냈다. 길이가 10.8m나 되고 폭 1.7~1.8m에, 잔존깊이가 3.1m나 되는 대형 지하구덩이였다.
구덩이에서 기와와 토기, 짚신, 나무자재와 나무막대를 비롯해 밤껍질이나 콩류, 참외씨 등이 나왔다. 무엇보다 수분이 가득 포함된 유기물이 두껍게 쌓여있었다. 이런 경우 과일이나 곡물, 물을 저장하는 지하창고로 판단하는 게 보통이었다. 조사단도 마찬가지였다. 도드래를 연결하여 유기물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유기물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백제시대 공동화장실 복원도, 익산 왕궁리 유적 서북쪽 공방근처에 있었다. 5칸-3칸-2칸짜리 화장실 3개동이 있었다.|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지독한 악취의 정체는
“아무리 저장한 곡식과 과일 등이 썩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냄새가 나지는 않거든요. 시궁창에서 나는 그런 악취였으니까요. 코를 쥐고 조사를 마쳤는데, 그 때까지 알지 못했죠.”(전용호 당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사)
또 하나, 출토된 6개의 나무막대가 좀 이상했다. 조사단은 명문목간이 아닐까 하고 면밀하게 살펴보았으나 글자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윗부분을 좀 둥글게 만든 이 나무막대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 해 12월, 유적의 발굴성과를 정리하는 자문위원회가 열렸다. 주의깊게 조사단의 브리핑을 듣고 있던 이홍종 교수(고려대)가 한마디 던졌다.
“이거 화장실 유구일 수도 있어요.”
조사단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해석이었다. 그 때까지 국내유적에서 화장실 유구를 발굴했다는 보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교수는 조사단에게 “유기물 토양의 샘플을 한번 분석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1월 고려대 기생충학 교실과 열대풍토병 연구소의 분석결과는 놀라웠다. 유기물 토양에서 편충과 간흡충, 회충은 물론 종 감별이 어려운 장내 기생 흡충류의 충란이 다량 발견된 것이다. 편충과 회충은 오염된 채소를 먹었을 때 감염되는 기생충이다. 간흡층과 감별이 불분명한 장내 기생흡충류는 민물고기를 생식하면 걸릴 수 있는 기생충이다. 이로 미루어 이곳은 분명 국내에서 처음 찾아낸 화장실 유적이었다. 추가발굴 끝에 첫번째 화장실과 동서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된 제2, 제3의 화장실이 잇달아 확인됐다. 이곳은 7세기 백제의 공동화장실이었던 것이다.(전용호, 2010)(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6)

 

2칸, 3칸 5칸 짜리가 차례로 설치된 백제공중화장실을 복원한 그림. 신분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화장실을 달리 썼을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2칸 짜리는 고관대작용, 혹은 여성전용 화장실일 수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고관대작용? 여성전용?
이 왕궁리 유적은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세운 왕궁이다.
10세기 쯤 편찬된 <관세음험기>에는 “백제 무강왕(무왕)이 지모밀지(지금의 익산)로 천도해 사찰을 경영했는데, 그 때가 정관 13년(639)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익산천도설을 뒷받침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천도라기보다는 무왕이 세운 별도, 즉 요즘 말하는 행정수도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천도에 따른 신 수도였든, 아니면 수도(부여)를 보완했던 별도(행정수도)였든, 이곳은 7세기 초 백제의 심장부였음은 분명하다.
확인된 화장실들은 궁성의 서북쪽, 즉 공방(工房)의 아래쪽에 있었다. 화장실의 방향(서북쪽)이 중요하다. 예로부터 동쪽과 남쪽은 앞, 광명과 봄, 탄생 등 긍정적인 의미를, 북쪽과 서쪽은 뒤, 어둠, 겨울, 죽음 등 부정적인 뜻을 지닌다. 조선시대에서도 수도 한양의 서쪽과 북쪽엔 감옥과 처형장 등 죽음과 형벌을 뜻하는 기관을 배치했다. 즉 한양의 서쪽에 있던 ‘고태골’은 처형장이었다. ‘골로 간다’, ‘골로 보낸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서대문형무소와 소년원·화장터 등도 모두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정재서, 2004) 그래서 화장실은 예전에는 뒷간이라 했다. ‘뒤에 있는 방’이라는 뜻이었다. 7세기 백제사람들도 이같은 방위의 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백제 화장실의 구조는 매우 재미있었다. 첫번째로 발견된 대형화장실의 규모는 5칸이었다. 즉 5명이 한번에 용변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두번째 화장실은 3칸짜리였고, 세번째 화장실은 2칸짜리였다. 2칸짜리가 가장 위쪽에서 있었고, 그 아래로 3칸-5칸짜리가 배치됐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공동화장실도 신분에 따라, 혹은 성별에 따라 구분된 것일까. 여러가지 상상해볼 수 있다.
가장 위쪽에 있는 2칸 화장실은 공방의 지체높은 인물이 볼일을 봤던 곳일 수도 있다. 또 신분에 따라 3칸-5칸 순으로 가는 것이고…. 혹은 달리 볼 수도 있는데, 2칸이나 3칸짜리는 여성 전용 화장실로 사용했을 수도 있다.   

5칸짜리 화장실의 내부 모습. 나무자재로 틀을 만들었고, 벽면은 지하수가 스며들지 않게 황갈색 점토로 두껍게 발라놓았다. 일종의 코팅작업이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무왕의 개인변기?
어떻든 악취를 풍기는 유기물이 가득한 5칸짜리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던 화장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3개의 화장실은 동-서 방향으로 1도~5.5도 정도 경사진 지형에 놓여 있었다. 또 3개의 화장실 모두 사선모양(S)으로 배수로와 연결돼 있었다. 또 화장실의 벽면에 20㎝ 두께로 황갈색의 점토를 두껍게 발라놓았다. 오물이 지하수로 침투되지 않도록 일종의 ‘코팅’ 처리를 한 것이다.
지하수 오염을 막기 위한 아주 세심한 보건의식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화장실 입구로 통하는 수로는 확인되지 않았다. 물로 뒷처리를 하는 전형적인 수세식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화장실 유구로 판명됨에 따라 수수께끼 같던 나무막대의 용도도 파악됐다. 이 나무막대는 지금의 화장지, 즉 뒤처리용이었던 것이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에는 이 뒤처리용 막대가 필수였다. 
또 하나 인근 배수로에서 확인된 이른바 ‘변기형 토기’ 2개체분도 주목을 끌었다. 요즘의 요강일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 ‘매화틀’과 같은 ‘휴대용 혹은 이동식 변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 ‘매화틀’은 국왕의 전용 변기였다. 조선의 국왕은 나무틀(매화틀)에 천을 감고, 한 가운데 구멍을 뚫어 대변을 보았다. 구멍 바로 아래에는 매화 그릇을 두었다. 국왕의 주치의인 전의감은 똥 냄새를 맡고, 심지어는 맛까지 보면서 국왕의 건강 상태를 체크했다. 그렇다면 왕궁리에서 확인된 변기형 토기 2개체분은 혹 무왕과 왕비의 매화틀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선화공주가 무왕의 왕비라고 하지 않던가. 물론 억측일 수도 있지만 유물과 유구를 통한 상상력은 고고학만의 매력이 아닐까.  

백제 공중화장실에 확인된 뒷처리용 나무막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제공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신라 화장실
돌이켜보면 국내에서 화장실 유적의 확인은 ‘만시지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미 백제와 신라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7~8세기 화장실 유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694~710년 사이 일왕이 머물렀던 나라현(奈良縣) 후지와라교(藤原京)에서 확인된 화장실 유적을 살펴보자. 그곳에서 발견된 목간을 보면 ‘신라사람 모리를 빨리 소환하라(召志良木人毛利)’는 내용이 나와있다. 또 ‘백제수인(百濟受人)’이라는 명문목간도 확인됐다. ‘백제수인’은 각종 피혁제품의 생산을 맡은 백제시대 관직이었다. 일본학자들은 “도래계(3세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혹은 신라계) 사람들의 관청이나 그에 딸린 화장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8세기 초(720~730) 유적인 후쿠오카시 고로간(鴻려館)에서도 화장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이곳은 신라를 비롯한 외국사신들이 묵었던 국립영빈관의 자리가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발굴자는 “백제사람들은 여러가지 생활문화를 가져왔으며, 이 가운데는 배설방법도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고로간의 뒷간이 도래계, 즉 백제인의 유적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털어놓은 것이다.

 

■칸막이는 원래 없었다.
왜 ‘지저분한’ 화장실의 역사를 꺼내냐고? 하지만 이 말을 기억하시라.
“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가 한 말이다. 인간(人間)은 문자 그대로 ‘사람(人)사이(間)’이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화장실이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화장실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위고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화장실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동양에서 화장실의 유래는 뿌리깊다. 이미 서주시대 주나라 궁궐에는 똥·오줌을 물에 흘려보내는 ‘정언(井언)’이 있었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수세식’ 화장실인 셈이다. 또 <좌전>의 기록을 보면 “노나라 성공 10년(기원전 580), 진후(晋侯)가 뒷간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주나라 뒷간은 밑에 매우 깊은 독을 묻었는데, 급한 복통이 일어난 진후가 잘못해서 빠져죽었다는 것이다. 후한시대(23~220) 사전인 <설문해자>와 <석명(釋名> 등은 화장실을 ‘측(厠), 혼(혼), 청(청), 잡(雜)’ 등으로 일컬었다. 모두 뒷공간에 있는 더러운 곳이라는 뜻이다. 특히 <석명>에 나오는 ‘잡(雜)’이라는 용어가 흥미롭다.
“사람들이 섞여서 화장실에 있는 사람이 하나 뿐이 아니다.(厠 雜也 言人雜厠在上非一也)”
원래 화장실에는 칸막이가 없으며, 여러 사람이 뒤섞여서 용변을 본다는 뜻이다. 중국에는 아직까지 이런 공중화장실이 남아 있다. 백제의 공동화장실도 그렇지 않았을까. 하기야 동양 뿐이 아니었다. 후한시대와 같은 시기인 서양의 로마시대에도 벌건 대낮 광활한 광장에 구멍만 송송 뚫어놓은 공중화장실을 세웠다. 로마의 라르고 아르젠티나 광장에는 좌석이 100개나 되는 화장실이 있었다.
‘혼(혼)’이라는 단어도 주목거리이다. 말 그대로 ‘돼지우리(혼)’에 붙어있는 화장실이라는  뜻이다. <한서>에 “화장실에서 돼지의 무리가 뛰어나왔다.(厠中豕群出)”는 내용이 있다. 이 기사에는 “화장실에서 돼지를 먹였다(厠養축혼也)”는 주석이 달려있다. 최근까지 제주도의 여염집 화장실에서 키운 똥돼지를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간다.(김광언, 2002) 

인근배수로에서 확인된 변기형 토기. 조선시대 국왕이 사용했던 매화틀과 비슷한 모양이다. 혹 무왕이 사용했던 이동식 변기가 아니었을까

 

화장실에서 연꽃이 핀다면?
우리의 역사서 <삼국유사>에도 화장실 이야기가 등장한다.
“혜공왕 2년(767), 대궐 북쪽 화장실에서 두 줄기 연(蓮)이 났다.(宮北厠청中二莖蓮生)”
<삼국유사>는 ‘화장실에서 연꽃이 피는 것’을 ‘천하가 어지러워질 징조’라 해석했다. 이 때문에 혜공왕이 “대사면령을 내리고 목욕재계를 한 뒤에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의미는 다르지만 요즘에 통용되는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핀다면…’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겠다.  
이미 백제시대에 나름 격식을 갖춘 공동화장실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인간의 배설물을 처리하는 문제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낙네들이 방망이로 옷을 빨고 있었다. (청계천)바닥에는 똥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물을 길어다가 집에서 쓴다.~ 위생관념이 이 정도인 서울시민이 생존해 있는 사실도 놀랍다.”(1888년, W.R. 칼스)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지저분한 서울의 거리를 이렇듯 한심하다는 듯 묘사했다. 하기야 실학자 박제가(1750~1805)마저 위생관념이 엉망인 서울의 풍경을 고발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오줌을 날마다 뜰이나 거리에 내다버리므로 우물물이 모두 짜게 되고 냇다리의 석축가에 똥이 더덕더덕 말라붙어서 큰 장마가 아니면 씻겨지지 않는 형편이다.”(<북학의>)
하지만 너무 창피해 할 일은 아니다. 조선 땅만 유독 지저분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앞서 밝혔듯이 배설은 우리 뿐 아니라 인류가 처리해야 했던 가장 골치 아픈 난제였으니까.   


■부처님도 하나님도 발벗고 나선 화장실 문제
오죽했으면 부처님과 하나님까지 발벗고 나섰을까.
“문을 세번 두드릴 것, 땅에 독을 묻고 눌 것, 냄새가 나지 않도록 뚜껑을 닫을 것, 벽이나 널에 문질러 바르지 말 것, 돌이나 숯덩이, 나뭇잎으로 닦지 말고 반드시 주목(나무막대)을 쓸 것….”
석가모니(기원전 563~483) 시대의 일이니까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이야기이다. 불교사원 주변이 똥·오줌밭으로 변하자 석가모니가 뒷간을 만든 뒤 반드시 지켜야 할 에티켓을 일러주었다. 부처님 뿐이랴.
<구약성서> ‘신명기’ 23장 1~14장을 보자.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 그 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을 거룩히 하라.”
하나님은 당시 전쟁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결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무데서나 배설하지 말고 군대의 진 밖에 제대로 된 화장실을 만들어 깔끔하게 처리하라는 것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으리라. 진중 아무 곳에 똥·오줌을 누고 방치하게 되면 자칫 전염병이 창궐할 수 있었기에…. 그럴 경우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게 될테니….

 

■화장실의 역사=인간의 역사
하지만 부처님과 하나님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았다. 씨족과 부족, 나아가 도시의 형성과 국가의 탄생, 급속한 산업화 등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구밀도가 걷잡을 수 없을만큼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원활한 물공급과 제대로 된 하수도 시설, 그리고 시민들의 의식변화 등 3박자를 갖출 수 없는 한 배설물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기원후 2세기 동안 로마의 인구는 1000~1500만에 이르렀다. 당시 규정상 셋집에는 상하수도 시설을 갖출 수 없었다. 사람들은 야밤에 분뇨와 쓰레기를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65~128)는 “밤마다 남의 집 창 밑을 어슬렁 거리고 싶으면 유언장을 먼저 써놓는 편이 낫다”고 조롱했다.  

19세기 중반 영국 템스강의 오염을 고발한 풍자그림. 물의 신인 넵투누스가 왼손에 대변을 치우는 스시랑을 들고 온몸에 오물을 뒤집어 쓴채 강물 위로 솟아오르고 있다. |들녘 제공

중세 유럽에서 비가 오는 날이면 갈 위에 퍼진 동물과 인간의 분뇨가 뒤섞여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사람들은 굽이 높은 나무 신을 신었다. 이것이 훗날 패션의 상징인 ‘하이힐’로 발전했다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중세시대 분뇨를 처리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해자와 하수구, 도랑에 쏟아버리거나 구덩이에 갖다버리는 것이었다.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도 악취가 풍겼다. 성 전체를 통틀어 수세식 시설을 한 화장실은 한 곳도 없었다. 국왕의 접견이 몇시간에 걸쳐 이뤄졌기 때문에 지체높은 여성들은 선 채로 풍성한 스커트를 보호막 삼아 생리욕구를 해결했다. 신사들은 기둥, 벽감, 커튼, 테피스트리 뒤에서 소변을 봤다. 1789년 알렉산드르 투르농은 “물은 배설물로 더럽혀졌고, 대기는 오염됐다”며 “거의 숨도 쉬지 못할 정도”라고 고발했다. 장 자크 루소(1712~1778)는 “악취 때문에 살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다니엘 푸러, 2006)
“여름철이면 어디에 앉아도 소변냄새가 났다. 게다가 사방에 대변이 깔려 있었다.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파리가 ‘원형의 변소’라는 오명을 얻었을까. 영국도 별 차이가 없었다. 1855년 7월 영국 템스강을 유람하던 마이클 페러데이의 목격담이 <타임스>에 실렸다.
“강물 전체가 뿌옇고 희미한 갈색을 띠고 있었다. 더러운 강물에서 나는 악취는 끔찍했다. 이제 템스강 전체가 악취를 풍기는 배설물 그 자체였다.”
그러고 보면 7세기 초반 백제사람들은 제법 선진적인 뒷간, 아니 화장실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극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희곡 <발(Baal)>에서 이랬단다.
“~그곳은 분명 혼자서도 첫날밤을 치른 사람처럼 행복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곳, ~당신이 그 어느 것도 몸에 지니지 않는 한갓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겸손의 장소~ 그곳은 인간이 휴식을 취하는 곳, 하지만 부드럽게,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감행하는, 그런 장소.”
백제 공동화장실이 발견된 곳은 공방의 근처였다. 왕궁을 설계·시공하고, 각종 공예품을 제작했던 장인들이 근무했던…. 그렇다면 백제의 장인들은 바로 이 화장실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하면서 백제의 찬란한 예술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브레히트의 말처럼…. 아니 “인간의 역사가 화장실의 역사”라는 위고의 말처럼….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전용호, <익산 왕궁리유적의 화장실에 대한 일고찰>, ‘백제학보 2호’, 백제학회, 2010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궁리 발굴중간보고 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학술연구총서 39집’, 2006
김광언, <동아시아의 뒷간>, 민속원, 2002
다니엘 푸러, <화장실의 작은 역사>, 선우미정 옮김, 들녘, 2006
이화영, <우리나라 전통건축의 화장실에 관한 연구>, 한양대 석사논문, 2009
정재서, <이야기 동양신화>, 황금부엉이, 2004
야콥 블루메, <화장실의 역사>, 박정미 역, 이룸,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