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364년 전 제주도에서 드라마와 같은 만남이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인으로 이미 귀화했던 박연(벨테브레이)과, 난파된 배에서 표류하다가 제주도에 닿은 하멜 일행이 조우한 것입니다. 이미 조선인 아내와 아이까지 두었던 박연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조선법으로는 도저히 돌아갈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고향사람을 만난 박연과 하멜은 '옷깃을 적실 때까지 울었다"고 합니다.

이미 조선사람이 다 된 박연에 비해 하멜은 운신의 폭이 좁았습니다. 30여 명의 동료들이 함께 했으니 의견을 맞출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 풍습에 익숙해진 박연은 정식으로 무과(과거)를 통과해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박연은 조선에 새로운 화포제작법을 가르쳐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멜은 달랐습니다. 일행 중 일부가 마침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사신에게 '돌아가게 해다라'는 시위까지 벌였습니다. 네덜란드인이 조선에 있다는 사실을 만약 청나라 조정이 안다면 어찌 되는 것입니까. 북벌을 계획하던 효종 임금의 야심이 들통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조선은 청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어 입단속을 시키는 가 하면 하멜 일행에게 유배형을 내렸습니다. 이후 7년간 전남 강진에서 유배를 당했던 하멜일행은 결국 탈출하고 맙니다. 조선땅을 밟은 지 무려 13년여만의 일입니다. 하멜은 그 13년 여 동안 받지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하멜표류기입니다. 반면 조선에 정착한 박연은 조선판 히딩크의 역할을 해낸 뒤 아이까지 낳았습니다. 그러나 박연의 후손이 어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126회, '조선판 히딩크 박연이 하멜을 만났을 때'입니다.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크리스찬)이냐?(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야!(耶) 야!(耶)”
 1653년(효종 4년) 8월6일 <효종실록>은 흥미로운 대화 내용을 생생한 필치로 전한다. 제주도 해역을 항해하다가 난파돼 표착한 서양인들을 심문하고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이다. 이 서양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헨드릭 하멜이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이 왜어(일본어)를 할 줄 아는 제주도 현지인의 통역으로 이 낯선 서양인들과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아마 제주목사도 이미 크리스찬의 존재를 알았던 모양인지, “너희가 서양의 크리스찬이냐”고 묻자 하멜 일행이 “야!(耶·예스)”라 답한 것이다.
 하멜 일행은 손짓발짓까지 동원해서 “우리는 일본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로 가고 싶다”고 고집했다. 그랬다. 하멜 일행을 태웠다가 난파한 스페르웨르호는 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로 가던 중이었다. <효종실록>은 배 안에는 목향(木香) 94포, 용뇌 4항, 녹비 2만 7000이 실려있었다”고 했다. 당시 조선 화폐로 30만냥에 달하는 엄청난 물품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 구멍이 뚫리는 바람에 선원 64명 가운데 단 36명만 살아남아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다.(1653년 8월 15~16일)

 

<하멜보고서>에 기록된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 일행의 만남. 옷깃이 다 젖을 정도로 울었다고 한다.|국립제주박물관

 

 ■운명적인 만남
 그런데 <실록>에 기록된 하멜 일행의 심문 보고서 말미에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이 있다.
 “이전에 조선에 온 남만인(南蠻人) 가운데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보고는 ‘과연 남만인이 맞다’고 확인시켰다. 서양인들은 대개 화포를 잘 다뤘기 때문에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서양인들 가운데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효종실록>)
 짧은 <실록>의 내용은 조선인으로 귀화한 박연(네덜란드명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과 헨드릭 하멜의 운명적인 만남을 묘사한 것이다. <실록>은 둘의 만남을 무미건조한 필치로 전했지만 <하멜 표류기>를 보면 아주 자세하게 나온다.  
 “1653년 10월 29일, 제주목사 옆에 붉은 수염 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목사가 ‘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우리는 ‘홀란드(네덜란드) 사람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목사는 ‘이 사람은 조선사람이니 너희가 잘못 봤다’며 껄껄 웃었다.”
 박연은 조정을 대신해서 제주도에 파견돼 하멜 일행을 제대로 심문하러 온 것이다. 오랜 만에 만난 고향 사람들인데 얼마나 기뻤을까. 윤행임의 <석재고>는 박연, 즉 벨테브레이는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 사람인 것을 알고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고 전했다.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 ‘남만인’으로만 알고 있던 박연이 아란타(네덜란드) 사람이라는 것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고 한다.(<석재고>)

 

 ■“옷깃이 젖을 때까지 울었다”
 <하멜표류기>를 보면 박연, 즉 벨테브레이 역시 조선에서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 박연은 하멜 일행에게 “처음에 일본 땅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하소연했다.
 “조선 왕은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 못할 바에는 기대하지 마라’는 대답만 되풀이 했습니다. 왕은 ‘이 나라(조선)에 표착한 외국인은 결코 본국으로 보내지 않는게 조선의 국법’이라 했어요.”
 그러면서 박연은 “그밖의 다른 점에서는 대접이 훌륭하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받는다”고 전했다. 그랬다. 조선 조정을 대표해서 파견된 박연은 하멜 일행을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오랜 만에 고향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풀었지만 박연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만큼 명실상부한 조선인이 된 것이다.
 “벨테브레이가 조선 표착 후 26년이 지났지만 모국어를 너무 잊어서 처음엔 의사 소통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매우 놀랐다.”(<하멜표류기>)
 박연, 즉 벨테브레이와 하멜 일행은 결국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다. 벨테브레이는 귀화한 조선인 박연으로 살았지만, 하멜 일행은 향수병을 이기지 못한채 탈출하는 길을 택한다.
 조선땅에 발을 들인 두 네덜란드인의 삶은 이렇게 바뀌고 만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 명나라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포르투갈 흑인용병을 그린 작품. 몸집이 너무 커서 수레에 탔다고 한다.

 

 ■마리이와 흑인용병, 그리고 주앙 멘데스
 사실 두 사람보다 먼저 조선땅을 밟은 서양인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인물은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하는 마리이(馬里伊)라는 사람이다. 국적불명의 마리이는 1582년 1월1일 요동 사람인 조원록 등과 함께 표류하다가 조선땅에 닿았다. 하지만 조선은 마리이 일행을 중국으로 가는 사신 편에 돌려보냈다. 마리이는 포르투갈어인 마링예이루(Marinheiro)의 첫 두 음절을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군 가운데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것이다. 즉 1598년 명나라 지원군 장사 팽신고는 선조 임금에게 파랑국(포르투갈) 군인들을 소개했다.
 “명나라 군이 4만7000여 명이었다.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난중잡록> 3)
 이 포르투갈 흑인용병들의 존재는 적진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하지만 명나라군은 이 흑인 용병들의 재주를 제대로 쓰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르투갈 용병이 물러난 지 8년 후인 1604년(선조 37년) 한 사람의 서양인이 조선땅을 밟는다.
 그가 바로 포르투갈(보동가류·寶東家流) 출신인 주앙 멘데스(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였다. 조선시대 국경일지인 <등록유초>와 <연려실기록>을 종합하면 멘데스의 나이는 당시 34살이었고, 무역상이었다.
 “지완면제수는 보동가류(포르투갈) 출신인데, 본국을 떠난지 거의 15년이 됐다. 중국인들과 일본으로 무역을 하려고 가다가 왜적에게 약탈당한 뒤 함께 왜선을 탔다가 태풍을 만나 조선에 표착했다. 지완면제수가 거느리고 온 한 명은 흑인 노예(黑體國人)인데, 이른바 해귀(海鬼)이다.”
 멘데스는 중국인 16명과 일본인 남녀 32명, 흑인 1명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된 뒤 4개월동안 조선 땅에 억류됐다. 그는 관례에 따라 청나라로 떠나는 외교사절(윤경립) 편에 다른 중국인들과 함께 송환됐다. 이 인연으로 경남 통영시와 포르투갈 대사관은 2006년 통영 산양읍 삼덕항에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하멜이 탄 스페르베르호으 난파 삽도. 64명 가운데 36명만이 살아남았다.

 

 ■식수를 구하려 왔던 벨테브레
 그로부터 23년 후인 1627년(인조 5년) 조선땅을 밟은 이가 바로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였다.
 그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홀란디아 호 선원으로 일하다가 1627년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꿔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제주도 인근에서 표착했다.(5월12일)
 그는 동료인 드리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터스 베르바스트 등 2명과 함께 식수를 구하려 상륙했다가 그만 제주도 관헌에게 붙잡혔다. 그들은 동래왜관으로 이송됐다. 아마도 일본 나가사키로 가려는 그들의 뜻을 존중했던 것일까. 아니면 왜선으로 착각해서 “왜선이 표착하면 왜관으로 보낸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왜관은 벨테브레이 일행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했다.
 “(벨테브레이를 포함한) 남만인 3명을 왜관에 들여보냈지만 왜관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부산에 4~5년 머물렀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이송됐다.”(<접왜사목초록>)
 벨테브레이 일행이 일본행을 거절당했다면 선조 때의 마리이(1582년·국적불명) 및 주앙 멘데스(지완면제수·1604년) 일행처럼 청나라로 송환됐어야 옳았다. 원래 조선의 해양정책은 쇄국이었다. 19세기 프랑스인 선교사 샤를 달레(1829~1878)의 회고담을 보라.
 “조선과 이웃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는 거의 없다. 법률이 규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국인과의 어떤 관계든지 사형을 받을 만한 범죄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어선이 평안도 연안에 와서 해삼을 잡고 황해도 영안에 청어를 잡는 것은 허가된다. 그러나 절대 뭍에 오르지 말 것과 바다 가운데서 조선 사람들과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한다. 위반하면 배는 몰수되고, 선원은 투옥된다.”(<한국천주교회사>)
 다만 조난자들에게는 ‘먼 곳에 사는 나라나 백성들을 살피고 어루만진다’는 인도주의 원칙을 적용했다. 예컨대 “1797년 서양배가 출현하자 정조 임금은 ‘그들이 원하는대로 순풍을 기다려 빨리 떠나보내도록 하라”(<증정교린지>)고 했다.

하멜의 전남 병영 유배생활을 그린 삽화. 전라병사가 누구냐에 따라 대우는 천양지차였다. 

 

 ■‘조선은 식인의 나라’ vs 네덜란드인은 개처럼 오줌 눈다
 하지만 벨테브레이 일행은 조선땅을 떠나지 못했다. 물론 그의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벨테브레이는 조선을 식인의 나라로 알고 있었다. 효종임금의 사위인 정재륜이 쓴 <공사견문록>을 보라.
 “박연은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조선 군사들이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준비했다. 배안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모두 이 불을 보고 하늘이 사무치도록 통곡했다. ‘저 횃불로 자신들을 구워먹으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면 조선에서 바라본 네덜란드 사람들은 어땠을까. 훗날의 실학자 이덕무의 시선을 보라.
 “아란타(阿蘭陀) 사람은 깊은 눈과 긴 코에 수염과 머리는 모두 붉다. 발은 한 자 두 치나 된다. 항상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것이 마치 개와 같다. 서양의 야소교(耶蘇敎)를 믿는다. 그들은 대포를 설치하는데 이 포를 한번 쏘면 석성(石城)도 부술 수 있는, 홍이포는 그들이 제작한 포이다. 그들은 해마다 6~7월이면 선박에다 각국의 진기한 물건과 특이한 화물을 싣고 나가사키(長崎)에 와서 정박하면서 서로 물건을 팔고 산다.”(<청장관전서> ‘편서잡고 4’)
 발이 360㎜가 넘는 것은 둘째치고 개처럼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눈다는 대목에서는 실소가 터져나온다. 네덜란드나 조선이나 각자의 눈으로 바라본 색다른 시선이니 뭐라 할 수 없다.

 

 ■두 명은 병자호란 때 전사하고…
 어쨌든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정착해서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산 연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남만국 혹은 아란타(포르투갈 어로 올란다), 혹은 얼굴과 수염이 붉다해서 홍이(紅夷)·홍모(紅毛)라 일컬어진 네덜란드 사람들의 기술 때문은 아닌가. 윤행임의 <석재고>는 “박연(벨테브레이)이 병서에 능했고 홍이포 제작기술을 전했는데 그 기술이 뛰어났다”고 전했다.
 성해응의 <연경재 전집>은 “남만인들은 기술이 좋고 역법과 의술에 정통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조정은 네덜란드인들을 기술전문집단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조선 조정의 명을 받은 벨테브레이 일행은 서울로 올라와 훈련도감 군사로 편입된다. 그들은 투항한 일본인과 표류한 중국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의 장수가 됐다.
 “박연은 조선 글자를 몰랐다. 그 나라(네덜란드) 방언으로 박연이라 했다. 어떻게 쓰는지 정확하지 않은 데다 음도 달라서 성과 이름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우리나라 속음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공사견문록>)
 벨테브레이는 몸집이 컸고 살이 쪘으며 눈은 파랬다. 그는 조선여자와 결혼해서 아들과 딸까지 두었다.
 일행 중 두 사람 즉 하이스베르츠와 베르바스트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전사하고 만다. 결국 벨테브레만이 조선인 박연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마침 북벌정책을 구체화한다. 따라서 화포제작에 재능을 보인 박연은 나름 혁혁한 공을 세운다. 박연은 아예 조선의 무과에 응시해서 당당하게 급제한 뒤 정식무관으로 활동한다.(1648년) 박연은 급기야 홍이포라는 화포의 제도를 조선에 소개했다. 
 “1652년(효종 3년) 박연은 나라를 위해 재능을 떨쳤고, 드디어 홍이포 제도를 전했다. 기이한 일이다.”(<석재고>)

전남 강진 병영마을의 독특한 담쌓기 모습. 하멜 일행의 영향을 받은 듯한 빗살무늬 형식의 담쌓기가 이색적이다.

 ■제주목사 이원진의 후대
 조선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박연이 역시 불시에 표류한 하멜 일행을 만난 것은 이 즈음(1653년)이었다.
 박연이 조선에 정착한 지 무려 26년 만의 일이었다. 그토록 오랜만에 고국사람을 만났으니 옷깃에 눈물을 적시고 펑펑 울었던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땅에 닿아 ‘멘붕’에 빠졌던 하멜 역시 “훌륭한 통역자를 만나 우리의 불행한 처지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하멜표류기>)고 전했다.
 하멜 일행은 이듬해인 1654년 7월까지 인조반정 후 광해군이 지내다가 죽은(1641년) 유배지에서 보낸다. <하멜표류기>는 이 대목에서 ‘지금 국왕(효종)의 아저씨(광해군으로 추정)가 왕위를 찬탈하려다가 갇혀 죽은 곳’이라 썼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난파선에서 건진 물건들을 하멜 일행에게 되돌려주었고 겨울 겹옷과 바지 신발 등을 제공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를 자주 밖으로 내보내주었고, 그 앞에서 네덜란드 말과 조선 말을 써보도록 했다. 덕분에 조선말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됐다. 가끔씩 작은 잔치를 베풀어주었다.”(<하멜표류기>)
 그랬던 이원진이 그 해(1653년) 12월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고초가 심해졌다. 떠나는 이원진은 하멜 일행에게 “서울 조정에 올라가면 송환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연(벨테브레)의 휘하로 들어간 하멜
 하지만 새로운 목사가 부임하고 대우가 박해지자 하멜 일행 가운데 6명이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들켜 무산됐다. 탈출을 기도한 6명은 25대씩의 곤장을 맞고 한 달 동안이나 누워있었다.
 이후 사실상 죄수의 신세로 갇혀있던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다. 일행 중 1명(파울 얀 쿨스)이 압송 도중 사망한다. 서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효종 임금을 만났다. 하멜 등은 “풍랑으로 배를 잃었으니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효종은 난색을 표했다.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을 내보내는 것은 국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당신들은 여생을 조선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이 네덜란드인들을 활용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하멜 일행 가운데는 대포 기술자가 10명 정도, 천문 이해자가 1명, 창틀 기술자가 2명, 조총 기술자가 1명 포함돼있었으니까.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됐다. 그들을 감독하는 조장은 박연이었다.

박연과 하멜 일행은 화포와 조총제작술을 주특기로 삼았다. 특히 홍이포는 네덜란드에서 명나라로 전래된 엄청난 화력의 대포였다.|육군박물관 

 

 ■“코를 귀 뒤로 돌려 물 마신다”
 그들은 달마다 70말의 쌀과 옷, 총은 물론 호패까지 지급받았다. 바야흐로 조선인의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저자에는 하멜 일행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다. 관리들은 앞다퉈 그들을 초청, 연회를 베풀었다. 그들의 검술과 춤을 보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특히 여인들과 아이들의 호기심은 대단했다.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 음료를 마실 때는 코를 귀의 뒤로 돌리고 마신다든가, 금발이라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새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소문 때문이었다.”(<하멜표류기>)
 하멜 일행은 “처음 한동안은 구경꾼들 때문에 시끄러워서 숙소에서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고 푸념했다. 서양인들의 코가 얼마나 컸으면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수를 마신다고 했을까.

 

 ■청나라 사신을 붙잡고 늘어지다 
 그런데 1655년 3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사달이 벌어졌다. 하멜 일행 가운데 수석 조타수인 헨드릭 얀츠 등 2명이 청나라 사신이 지나가던 길목을 가로막은 것이다.
 두 사람은 청나라 사신의 말고삐를 잡고 조선옷을 벗은 다음 그 안에 있는 네덜란드 옷을 보여주었다. 큰 소동이 벌어졌다. 네덜란드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청 사신은 “밤에 사신의 숙소로 오라”고 한 뒤 박연을 숙소로 불렀다. <하멜표류기>는 이 때 “자초지종을 들은 박연이 곧바로 효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고 썼다.
 “조선왕(효종)은 즉시 회의를 열고 청나라 사신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기로 했다. 불행한 두 친구는 서울로 호송돼 죽었다. 자연사인지 고문으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당시의 <효종실록> 1655년 4월25일자는 아주 담백한 필치로 이 일을 기록했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남북산(南北山·얀츠를 지칭하는 듯)이 하소연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청했다. 청나라 사신이 깜짝 놀라 조선조정을 시켜 잡아두게 하고 기다리게 했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했다. 청나라 사신은 끝내 묻지 않았다.”

하멜보고서가 수록된 동인도 회사 공문서, 하멜이 보고서를 작성한 이유는 13년간 받지못한 임금을 청구하기 위함이었

 

 ■청나라를 무서워했던 까닭
 아마도 하멜 표류기의 언급대로 조선 조정이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듬뿍 주어 불문에 붙이게 했을 가능성이 짙은 대목이다. 어쨌든 조선으로서는 하멜 일행을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같은 일이 벌어질 경우 수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무장(武裝)을 의심하고 있었다. 게다가 효종은 북벌을 계획하고 있었다. 박연과 하멜 일행 덕분에 홍이포와 조총 제작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됐다.
 “남만인이 표착해온 덕에 새로운 체제의 조총을 얻게 됐다. 제작이 무척 정교해서 훈련도감에 명해서 그것을 모방해서 만들도록 한 것이다.”(<효종실록>)
 만약 하멜 일행이 청나라로 송환돼 조선에서 한 일을 발설한다면 문책받을 게 뻔했다. 그랬으니 하멜 일행을 서울에 남겨둘 수 없었던 것이다. <하멜표류기>를 보면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의 처형을 논의하는 회의까지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같은 사실을 눈치 챈 하멜 등이 회의를 주재한 인평대군(효종의 아우)에게 달려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단다. 그들을 측은하게 여긴 인평대군과, 대군의 청을 들은 임금(효종)이 유배형으로 마무리지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도적인 차원에서 결정된 유배형이라고 할까. <하멜표류기>는 “벨테브레이(박연)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바로 이때였고, 그 이후에는 그를 보지도, 그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고 썼다.

 

 ■전라병사에 따라 달라진 대우
 1656년 3월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된 하멜일행은 1663년 3월까지 약 7년간 살았다.
 일설에 따르면 하멜 일행 가운데는 조선인 여자를 취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구한말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 가운데는 남원 지방에서 서양인을 빼닮은 조선인을 본 적이 있는데 그 사람이 혹시 하멜의 자손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다는 것이다.
 하멜 일행의 운명은 그들을 감시감독한 전라병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졌다.
 어떤 병사는 지독한 부역을 강요해서 몸이 거의 벌거숭이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먹을 것이 없어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구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전라병사는 스페르웨르호의 무역품인 사슴가죽을 되돌려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이 비용으로 겨울옷과 필수품을 장만하기도 했다. 또 어떤 병사는 서울을 제외한 먼거리 여행도 허용해주었다. 심지어는 부산 동래 여행도 허용했고, 여행기간도 15~20일이나 됐다.    

 

 ■13년 만의 탈출
 당시 하멜 일행을 괴롭힌 것은 조선을 강타한 기근이었다. 이에따른 식량 부족 등으로 하멜 일행은 순천 남원 좌수영에 3개 집단으로 분산 수용됐다. 하멜 일행은 결국 탈출을 감행했다. 친하게 지낸 조선인에게 ‘먼 섬에서 면화를 구입할테니 배 한 척만 사달라’고 간청했다. 주저하는 배주인에게 두배 값을 지불해서 배를 구입했다.
 1666년(현종 7년) 9월4일 밤 전라 좌수영에 있던 하멜 일행 5명과 순천에 있던 3명 등 8명이 탈출했다.
 “우리는 쌀과 물, 물병과 냄비 등을 지고 성벽을 넘었다. 해안을 벗어나 작은 섬으로 가서 물을 채우고 돛을 올렸다. 5일 아침 지나가던 어부가 우리를 불렀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하멜표류기>)
 그로부터 3일 뒤인 8일 아침 배가 일본 규슈의 고토섬에 정박했다. 식사를 만드는 동안 두 개의 칼을 찬 6명의 뱃사람이 하멜 일행에 다가왔다. 우리는 준비했던 네덜란드 깃발을 꺼내 외쳤다.
 “홀란드(네덜란드)! 나가사키!”
 이로써 1653년 8월16일부터 1666년 9월14일까지 13년 28일 이어진 하멜의 조선체류는 13년 28일로 끝났다.
 하멜 일행은 나가사키에 있던 동인도 회사에 인계됐고,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조선에 남아있던 8명(36명 중 16명이 살아있었다) 역시 훗날 본국으로 송환됐다.

<하멜표류기> 프랑스어판. <하멜표류기>는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하멜표류기의 탄생
 고국에 돌아간 하멜은 조선에서의 억류기간 도중 받지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보고서를 썼다.
 이것이 바로 ‘하멜보고서’다.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이 하멜의 보고서를 근거로 <하멜표류기>가 출판됐다. 이 책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가 빼어난 문필가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에서의 표류이야기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끈 것이다. 물론 부정적인 내용도 많다.
 “조선사람들은 매우 도둑질을 잘하며 속이거나 거짓말도 잘한다. 신뢰할 수 없다. 동시에 너무 단순해서 쉽게 속는다. 조선사람들은 유약한 민족이며 강직함이나 용기가 없다. 호전적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긴다.”
 그렇지만 나름 정확한 시선으로 조선 사회를 바라본 측면도 많다.
 “청나라 황제가 자신보다 높다고 인정하지만 조선국왕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양친 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자녀도 노비가 된다, 조선 법은 매우 엄격하다. 왕에게 반역을 하면 당사자는 물론 모든 가족과 친지를 몰살시킨다.…”
 “부자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기생들과 여러 암자에 자주 들른다.…지체 높은 사람들이나 귀조들은 자녀의 교육에 신경을 쓴다. 제때 자녀들의 읽기와 쓰기를 지도할 스승을 붙여준다.”

 

 ■하멜과 박연의 운명
 1630년 네덜란드 호린험에서 태어난 하멜이 조선에 표착한 것은 23살 때의 일이었다.
 하멜의 동생도 동인도회사 직원이었고 아버지와 삼촌은 독일과 네덜란드에서 항구를 건설하는 기술자였다. 천신만고 끝에 조선을 탈출한 하멜은 다시 한 번 동방으로 항해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 후 동인도회사 회계사로 일하다가 1692년 독신으로 사망했다.
 그렇다면 하멜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박연의 그 후는 어땠을까.
 네덜란드 북부지방인 드 라이프 출신인 박연, 즉 벨테브레이는 하멜보다 35년 연상이었다. 박연이 고향을 떠날 때 부인과 자식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훗날 조선 정착의 길을 택한 박연은 조선인 여자와 1남1녀를 두었다. 그러나 박연 사후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했다.(<공사견문록>)
 어쨌든 병서에 재주가 있고, 대포를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던 박연이 당시 북벌을 계획하던 조선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만약 하멜 일행도 조선 땅에 정착할 마음이 있었다면 귀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멜 일행의 숫자는 워낙 많았다. 36명이 의견을 통일하기란 쉽지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일부 인원이 탈출 사건까지 저지르는 바람에 조선땅에서는 더구나 쓰임받기 어려웠을테고….
 어느 날 갑자기 조선땅에 닿은 박연과 하멜…. 상반된 길을 걸었지만 은둔의 땅 조선에 끼친 영향은 적지않다.
 하멜은 유럽에 조선의 존재를 알렸고, 박연은 이역만리 조선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첫번째 서양인이 아닌가.

 

 ■박연의 후손은 어찌됐을까.
 최근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에 하멜기념관이 공식개관됐다.
 이 때에 맞춰 하멜 일행이 7년간 머물렀던 전남 강진군이 강진청자 10점을 기증했다고 한다. 지금도 강진군에는 네덜란드식 돌담이 남아있을 정도로 하멜의 자취가 남아있다.
 이렇게 하멜을 기억하는 움직임이 이어지는데 박연은 어떤가. 조선여인과 1남1녀를 두었다면 분명 후손이 살아있었을 텐데…. 어찌 된 일인가. 지난 1991년에는 네덜란드의 벨테브레이 후손(헹크 벨테브레이)이 찾아와 ‘한국쪽 후손’을 찾은 일이 있었다. 네덜란드 라이프시에는 600여명의 벨테브레 후손들이 주로 어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렇다면 조선 쪽 박연의 후손들은 어찌 되었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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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