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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오늘

1982년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무력점령

ㆍ끝나지 않은 ‘영토분쟁’

아르헨티나군이 마젤란 해협에서 500㎞ 떨어진 포클랜드(아르헨티나어로는 말비나스) 제도를 무력점령했다. 1833년 영국의 자치식민지가 된 이후 끈질기게 영유권을 주장해온 아르헨티나의 공격이었다. 하지만 갈티에리 아르헨티나 대통령의 의도는 영유권 확보뿐이 아니었다.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에 따른 민심이반과 치솟는 인플레이션 등 아르헨티나 국내 위기를 전쟁으로 풀어보려는 술수였다. 1만3000여㎞ 떨어진 곳에 있는 “영국이 도대체 어쩔 것이냐”는 계산도 숨어있었다.

영국 내에서도 “거기가 우리 땅 맞냐”고 반신반의했던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영국을 이끈 이는 ‘철의 여인’ 대처 총리였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영국민을 단합시키고 즉각적인 군사작전을 펼쳤다. 

4월26일 영국은 대규모 기동부대와 첨단 무기를 동원했고, 무력점령 74일 만인 6월14일 전쟁을 일방적인 승리로 끝냈다. 국내 위기를 전쟁으로 풀려 했던 갈티에리는 대통령직에서 실각했지만, 대처 총리는 이듬해 재집권에 성공한다.

힘이 없으면 1만3000㎞나 떨어진 나라의 지배와 반격을 받을 수밖에 없고, 결국 항복하고야 만다는 사실. 독도를 품에 안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눈에 포클랜드 전쟁이 27년이 지난 지금에도 밟히는 이유다. 

전쟁은 끝났지만 영국·아르헨티나는 ‘총성없는 전쟁’을 계속한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때의 일. 아르헨티나·벨기에의 개막전이 열린 날이 바로 아르헨티나가 항복문서에 조인한 그 날이었다. (전쟁에서) 이긴 줄만 알았던 아르헨티나 축구팀은 패전 소식을 알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4년 뒤 멕시코 월드컵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만난다. 마라도나의 그 유명한 ‘신의 손’ 핸들링 골로 영국에 설욕한다. 마치 ‘감자주먹을 먹인 것 같은’ 더러운 승리였지만 아무렴 어떠리. 어떻든 복수는 한 것이니까.

반면 영국의 입장에서는 아주 김새는 패배였으니…. 양국간 축구전쟁은 계속 되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16강전에서는 역시 아르헨티나의 승부차기 승. 2002년 한·일 월드컵 때는 데이비드 베컴의 페널티킥 골로 영국의 승리. 아르헨티나는 비록 ‘총싸움’에서는 졌지만, ‘공싸움’에서는 2승1패의 우위를 보이고 있다. 공싸움’을 벌일 때마다 국내 여론은 ‘포클랜드 전쟁을 기억하라’며 투혼을 지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