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는 27만년 전의 세계로 되돌아가겠습니다.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선사시대의 이야기입니다. 해마다 5월이면 이곳에서 구석기축제가 열립니다. 올해는 5월3일부터 7일까지 열린답니다. 27만년전 구석기 시대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이고, 선사박물관에서 다채로운 행사가 마련되어 있으니 한번 참여해보시기 바랍니다.

궁금증이 생기실 겁니다. 왜 하필 27만 년 전 세계냐. 그걸 어떻게 아느냐. 뭐 이런 질문들을 하실 겁니다. 사실 한탄강 임진강은 화산활동이 빚어낸 강들입니다. 용암이 흘러 두 강을 만들었고, 고인류는 문명의 젖줄인 강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살았습니다. 

1977년 이곳에서 수상쩍은 돌멩이 하나가 확인되면서 이곳이 구석기 시대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이 돌멩이는 구석기 시대의 맥가이버칼이었습니다. 전문용어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라 하지요. 세계적인 구석기학자가 방문해서 출토된 돌멩이와, 이 돌멩이가 나온 토층을 분석한 결과 27만년전 쯤의 것이라 판정했습니다. 이후 이 지역에서 이와같은 돌멩이, 즉 주먹도끼가 상당수 확인되었습니다. 그렇다면 27만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과연 지금 우리들의 조상일까요. 이곳은 왜 구석기인들의 터전이 되었을까요. 또 한가지 이곳에서 27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자 일본 열도 또한 구석기 붐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붐은 파국을 불렀습니다. 구석기 유적조작사건이 일어나 일본고고학계가 쑥대밭이 된 것입니다. 과연 일본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128회는 '전곡 구석기 유적과 후지무라 조작사건'입니다.

 

“이 돌 좀 이상한 것 같은데….”
1977년 4월 어느 날 여자 친구와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던 미 공군 기후예보대 소속 그렉 보웬 병사가 이상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자연석 같기도 하지만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있는 차돌이었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것이 심상치 않은 차돌임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시 김원룡 서울대 박물관장에게 이 차돌을 보냈다. 그랬다. 보웬이 주운 이 차돌은 세계고고학계를 놀라게 한 이른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였던 것이다.  

구석기인이 출몰했다? 해마다 연천 전곡에서 열리는 구석기 축제에서는 27만 년 전 구석기인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당시의 생활상을 재연한다.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이다.

 

약 150만 년 전 아프리카 직립원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장구한 전기 구석기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구석기 시대란 무엇인가.

인류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250만 년 전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1만 년 전까지를 일컫는 기간을 말한다.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2백50만년~10만 년 전)·중기(10만년~4만 년 전)·후기(4만년~1만 년 전)로 나눈다.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해도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이런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의 정설이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지금의 맥가이버 칼과 같은 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최첨단 도구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단순히 찍개문화만이 있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모비우스의 가설’이라 한다.

그런데 한반도 전곡리에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됨으로써 이 모비우스의 가설은 전면 수정된 것이다.

 

1978년 이같은 사실이 보고되자 세계 구석기 학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국내 언론도 난리를 떨었다. 당시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현장에 뛰어와 발굴단에 격려금을 주었다.

 

대통령 지시로 직접 발굴조사 지원비까지 내려 보낸 것이다. 발굴단은 그 돈으로 현장에 컨테이너를 제작, 발굴조사 사무실로 이용했다.

1977년 4월 미공군 예후대 소속 병사였던 그렉 보웬이 한탄강 유원지에 놀러왔다가 아슐리안형 주먹도끼를 발견해 서울대 박물관에 보고했다. 보웬은 그 후 전곡리를 방문, 당시의 상황을 회고했다.|연합뉴스 

■세계적인 구석기학자의 판정
학계는 전곡리에 대한 본격 발굴조사에 돌입했다.

김원룡 교수를 발굴단장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등 6개 기관 합동으로 학술발굴조사를 벌였다.

이선근 정신문화연구원장, 최순우 국립박물관장, 최영희 국사편찬위원장, 김정기 국립문화재연구소장, 김원룡 서울대 박물관장, 황수영 동국대 교수, 김철준 서울대 교수, 정영화 영남대 교수, 김봉균 서울대 지질학과 교수, 윤무병 충남대 교수 등 당대 내로라하는 관련학자들 20여 명이 총출동했다.

문제는 연대측정이었다. 이 유적의 연대가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는 20만~30만 년 전이라는 걸 믿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들 사이에 백가쟁명의 논쟁이 쉴 사이 없이 이뤄졌다. 공동 발굴 참가 대학박물관의 교수들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한 이른바 전문가들이었다.

 

그런데 같은 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각자의 주장이 엇갈렸으니….

전곡리 논쟁의 경우 가장 핵심은 전기냐 후기냐로 압축됐는데, 20만~30만 년 전과 4만~5만 년 전의 주장으로 엇갈렸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수 십 만 년이 왔다 갔다 하는 연대관의 천양지차라 자칫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소지가 다분했다. 결론이 나지 않자 세계적인 권위자의 판정을 기대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초청한 이가 미국 버틀리대의 세계적인 구석기학자인 존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였다. 클라크 교수는 1982년 8월 국립문화재연구소 초청으로 전곡리를 방문했다.

영국 출신인 클라크는 케임브리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37년부터 24년간 아프리카 잠비아의 로우즈리빙스 박물관장을 지낸 뒤 61년부터 미 버클리 대 교수로 있었다.

특히 81년 이디오피아 아와시 계곡에서 자신이 발견한 가장 오래된 인류 화석을 ‘400만 년 전의 인류화석’이라고 발표한 구석기 고고학의 최고권위자였다.

그가 화석인골편을 발견했을 때 라디오를 켜놓고 있었는데, 그 때 흘러나온 팝송의 제목을 따서 ‘루시종’으로 명명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82년 전곡리를 방문한 존 데스몬드 클라크 교수가 김원룡 당시 서울대교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클라크 교수는 전곡리의 연대를 27만년전으로 판정했다. 

■27만 년의 세계  
그런데 클라크 교수는 전곡리 주먹도끼 등을 관찰한 후 “이 주먹도끼는 전기 구석기 시대 가운데서도 전기인 27만~26만년 전일 가능성이 많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반면 공주 석장리 유적은 “후기 구석기(약 4만 년 전)에 해당될 가능성이 높다”는 소감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게 되니 석장리를 발굴한 전문가들이 크게 반발했다.


국내에서는 해묵은 논쟁이 재연됐지만, 전곡리 유적은 세계적인 전문가의 판정에 따라 ‘27만~26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클라크의 방한을 계기로 영국에서 발간되고 있는 세계 고고학지도에 남북한을 통틀어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전곡리 유적인 전곡리 유적은 최초 발견으로부터 20년을 넘기는 동안 10여 차례에 걸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지난 2001년에는 정밀가공으로 좌우대칭의 완벽한 타원형을 이루고, 두께도 얇은 주먹도끼가 4점이나 확인됐어요. 이 도끼들은 30만~20만 년 전 아슐리안 형태의 전형적인 석기들이었습니다."(배기동 한양대교수)

 

1977년 처음 발견된 주먹도끼보다 훨씬 정교하며 지금까지 동아시아에서 나온 아슐리안 형태의 석기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이다.

특히 이 지역 24만평 전체에서 구석기 유물이 고루 출토되고 있다는 점은 이곳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집단 주거지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일본의 지질학자인 단하라 토루(일본 교토 피션트랙사)는 전곡리 현무암 지대와 화산재를 정밀조사한 결과 50만 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후 한탄강과 임진강 유역의 현무암대지에서는 발굴 때마다 주먹도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전곡 선사박물관의 이한용 관장이  구석기를 만드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선사박물관 제공

■서울대의 명예회복
전곡리 주먹도끼 발견은 웃지 못할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우선 서울대가 자존심을 회복했다는 것이 첫번째 화제거리였다. 사실 해방 이후 남한지역에서 최초로 발굴된 구석기유적은 64년 연세대박물관이 실시한 공주 석장리 유적발굴이다.

이 유적은 62년 모아와 샘플이라는 두 외국인 유학생에 의해 눈에 띄었다. 두 연구자는 연세대박물관에 연구실을 얻어 우리나라 선사시대를 연구하고 있었는데, 대학원생들과 답사여행을 다니면서 이 유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니 사실 서울대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1961년 김원룡에 의해 고고인류학과가 개설됐으나 아직 1회 졸업생을 배출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정식학과가 개설된 서울대가 고고학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구석기 유적발굴을 정식학과도 없는 연세대에 빼앗긴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 석장리 발굴 때문에 ‘구석기 발굴=연세대’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그렇게 쓰라린 상황을 겪은지 무려 16년이 지났을 때 그렉 보웬이라는 미군 병사가 서울대에 엄청난 기화(奇貨)를 선사한 것이다.

구석기축제에 참여하면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 있다.

■초조한 일본학계
또 하나, 전곡리 발견이 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지 22년이 지난 2000년 11월 초, 일본열도가 충격에 빠지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 마이니치 신문(每日新聞)이 보도한 이른바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이다.

신문은 미야기현(宮城縣) 쓰기다테초(築館町) 가미타카모리(上高森) 유적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藤村新一)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몰래카메라를 폭로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후지무라가 발굴한 구석기 유적이 몽땅 조작이었음이 들통 나고 말았다.

이로써 잇단 발굴을 통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는 구석기 유적 노이로제에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연출한 이면에는 바로 한국의 구석기 유적발굴이 있었다. 즉 한반도에서 27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 나왔는데….

 

일본학자들은 전곡리와 같은 전기 구석기문화가 열도에서 없을 리가 없다는 초조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 때부터 구석기 유적 찾기에 혈안이 됐고, 그 와중에 후지무라 조작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후지무라는 2004년 1월 아사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몇 차례 새 유적을 발굴한 뒤에는 주변 사람들이나 언론에서 ‘더 옛날 것은 없느냐’는 주문이 쇄도해서 점차 정신적인 압박이 고조돼 20만 년, 30만 년 전의 것을 만들어냈다”고 털어놓았다.

 

한반도 중부지방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 연대가 전기 구석기까지 올라가자, 일본학계가 얼마나 초조감을 드러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후지무라 조작사건의 발발
후지무라는 1981년 일본 미야기현(宮城縣) 자자리기(座散亂木) 유적에서 약 4만 년 전의 구석기를 발굴했다. 이것은 일본 최초의 구석기 유적이 되었다.

 

당연히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발굴자인 후지무라는 당시 도호쿠(東北) 구석기문화연구소 부이사장이었다.

 

그 후 20만 년 전~40만 년 전~50만 년 전~70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 발굴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렇게 되자 그는 일본에서 ‘신의 손’으로 알려질 정도로 구석기 유적 발굴을 주도해왔다.

이러한 구석기의 발굴은 일본 구석기가 중국과 한국의 역사에 뒤질 수 없다는 그릇된 사관에 젖은 일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

 

일본국민들 역시 세계 역사상 일본의 우월성을 내세울 수 있었기에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영광이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후지무라의 자작극으로 드러난 것이다.

후지무라가 구석기를 심는 장면. 이 사건으로 이본의 구석기 연대는

7만년전으로 하향됐다.

후지무라는 훗날 “원시인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환청·환각이었는데 날조사건이 드러난 뒤 의사의 진찰을 받고서야 처음으로 병인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결국 일본고고학회는 2003년 5월 후지무라가 관여했던 구석기 유적 162곳 모두가 날조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후지무라에 의해 70만 년 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역사는 한순간에 7만 년 전(가네도리 유적)으로 뚝 떨어졌다.

 

더욱 큰 문제는 국가적인 신인도를 완전히 잃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해도 쉽사리 자신의 의견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할까.

 

전곡리 구석기 유적의 발굴은 일본 스스로 무덤을 파는 자작극을 연출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또한 일본 교과서 왜곡의 근간에 흐르고 있는 우월주의적 황국사관이 낳은 결과라는 것도 증명하고 있다.

사실 지난 80년대에도 일본의 구석기 학자들 가운데는 후지무라의 잇단 발굴성과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런 오래된 유적이 일본열도에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전문가들이었다.

 

그러나 군국주의가 창궐하는 학계분위기에서 ‘아니다’라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으므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만약 마이니치 신문의 유적조작 폭로가 없었다면 일본의 잇단 구석기 발굴소식은 영원한 진실로 믿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이렇듯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고고학계에서 ‘백주대낮’에 자행된 것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은 책상머리에서는 얼마나 많은 왜곡과 조작이 자행되고 있을까.

37년 전 전곡리에서 우연히 발견된 주먹도끼 한 점은 이렇게 숱한 이야깃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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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이기환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