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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의 눈

4등은 없다. 그대는 세계 4강이다.

이규혁·남수일·김해남·유인호·이종섭(이상 역도), 최윤칠·이창훈(이상 마라톤), 이상균·원봉욱(이상 레슬링)….

1948년 런던 올림픽부터 64년 도쿄 올림픽까지 뛰었던 선수들이다. 이 분들에게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한 선수들이다. 그 뿐이 아니다. 동계올림픽까지 통틀어 73개 세부종목 선수들이 올림픽 4위 리스트에 올라있다.

이 가운데 평안도 영변 출신이었던 김해남 선수의 경우는 성적에 관한 한 특히 한스러웠다 할 수 있다. 1950~60년대를 주름잡은 역도스타였던 김해남은 헬싱키(52년)~도쿄(64년)까지 무려 4회 연속으로 올림픽에 출전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던 임정화 선수. 그러나 당시 은메달을 땄던 터키 선수의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최근 확인됐다. 이에따라 임정화 선수가 동메달리스트로 승격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해남의 성적은 늘 애간장을 녹이는 4-5-4-6위였다.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던 역도선수 이규혁(밴텀급)과 남수일(페더급) 역시 4위를 기록했다. 그렇지만 이 순간 두 선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이집트 선수와 같은 무게(385㎏)을 들어올려 계체량 끝에 1.92㎏ 가벼웠던 덕택에 동메달을 차지한 김성집 선수(미들급)만 스포츠 역사에 남을 따름이다.

올해 4월 개봉한 영화 <4등>은 재능은 있지만 늘 4등만 하는 수영 꿈나무(준호)를 다루고 있다. 엄마는 아들 준호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4등? 너 때문에 죽겠다! 진짜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너 꾸리꾸리하게 살꺼야? 인생을?” “자기야. 난 준호가 맞는 것(체벌)보다 4등 하는게 더 무서워.”

비단 영화 이야기 만이 아니다. 리우올림픽 남자양궁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우진 선수는 “숫자 4자를 싫어해서 화살에도 4자는 쓰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메달을 따지 못하고 4위에 머무를 것 같다는 악몽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력으로 따지면 3등과 4등, 한 끗 차이인데 대우는 그야말로 천양지차다. 시상대에 오르지 못하고 동메달이라도 딸 수 없는 아픔은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올림픽 시상대에 서는 꿈을 꾸면서 달려온 4년의 세월이 아닌가. 다시 4년을 기다려야 하는 그 막막함과 절망감이란….

우리 선수들로 좁히면 좌절의 이유가 더 널려있다. 연금점수를 보라. 세계선수권이나 아시안게임 4위는 에누리없이 0점이다. 그나마 올림픽 4위(8점)~5위(4점)~6위(2점)까지는 연금점수를 부여한다. 그러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는 한방에 40점이다.

연금점수가 기본 20점은 넘어야 월 30만원씩의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올림픽 4위를 두 번 한다 해도 16점에 불과하므로 연금대상자에서 탈락한다. 반면 동메달리스트는 한방에 월 52만5000원씩(40점)을 평생 받을 수 있다.


한국 남자 선수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은 더하다. 올림픽 3위까지 주어지는 병역혜택을 단 1등수 차이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남자들이 느끼는 병역의 무게가 얼마나 큰 가. 끔찍한 기분이 한가지 더 있다.

4~5등 선수도 도핑테스트를 위한 소변검사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메달도 따지 못했는데 잘 나오지도 않는 소변을 받아야 하는 그 참담한 심경을 누가 알아주는가.

4번 올림픽에 출전해서 4-5-4-6위를 차지한 역도선수 김해남이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당당 6위’를 차지했다는 기사. 올림픽 메달이 귀했던 당시엔 6위라도 아쉽지만 칭찬받을만한 성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부에서는 전교 4등은 물론이고 반 4등이라도 잘하는 축에 속한다. 경우에 따라 원하는 대학의, 원하는 학과에도 진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포츠는 어떤가. 그 어렵다는 세계 4강에 두 번 씩이나 오르고도 메달도, 연금도, 병역혜택도 받을 수 없다.

그러니 영화 <4등>의 엄마처럼 ‘맞는 아들보다 꾸리꾸리한 4등 인생을 사는 아들이 더 무섭다’고 절규할 수밖에 없고, 차라리 꼴찌가 낫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다.

과연 그럴까. 얼마전 2008 베이징·2012 런던올림픽에서 나란히 4위를 차지했던 여자역도 선수 임정화(30)·장미란(33)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해당대회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이 금지약물복용 사례가 적발됨에 따라 두 선수가 동메달리스트로 승격될 것이라는 보도였다. 아직 메달승계절차가 남아있지만, 랑겐한처럼 ‘최선을 다한 4등’을 운명처럼 받아들인 선수들에게 떨어진 뜻밖의 과실이다.

장미란 선수와 통화 했더니 4등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일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싶고…. 시원섭섭했죠.”

그래도 장미란 선수의 경우는 좀 낫다. 이미 올림픽 금(2008 베이징)·은(2004 아테네)의 경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임정화 선수는 어떤가. 8년 전 베이징에서 동메달리스트와 같은 무게(196㎏)을 들고도 체중 500g 차이로 4위에 머물렀으니까…. 그 아쉬움에 지금껏 은퇴하지 않았다.

“4등인데 도핑검사까지 받아야 했으니…. 기분은 썩 좋지 않았죠. 그래도 8년 만에 동메달을 받는다니 기쁘지만 다른 선수의 약물 복용 때문이니 씁쓸한 느낌도 들어요.” 부모님 또한 얼마나 기뻤을까 해서 물었더니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엄청 좋아하셨죠. 근데 메달을 박탈당한 외국선수(터키) 걱정하더라구요. 그 친구는 불쌍해서 어쩌니…하고.”
임정화 선수나 부모님 모두 어쩌면 그리 심성이 고운지 모르겠다. 거듭되는 인터뷰 요청을 “부담스럽다”고 꺼려했다. 그러나 임정화 선수는 그리 멋쩍어할 필요가 없다. 행운이라는 것도 열심히 최선을 다한 자에게 생기는 법이니까….

이쯤에서 한번 묻고 싶다. 4등은 과연 저주받은 등수인가. 2014 소치 동계 올림픽 직후 뉴욕타임스가 ‘Fourth(4등)’의 제목으로 4위 선수들을 릴레이 인터뷰했다. 이 중 루지 남자 개인에서 0.56초 차로 동메달을 놓친 안디 랑겐한의 멘트가 인상적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4등을 해야 하잖아요. 그게 바로 나입니다.(Somebody has to be fourth, and that’s me)” 

2002년 월드컵 때 한국축구는 4위에 머물렀지만 모두들 ‘월드컵 4강의 신화’라 상찬했다. 내로라하는 세계의 강자들 틈바구니에서 4강에 올랐으니 얼마나 위대한 업적인가.

그래, 가만 생각해보면 ‘올림픽 4등’에게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다른 이름이 있다. ‘세계 4강’이다. 그대들은 4등이 아니라 ‘세계 4강’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3등과 4등, 너무 차이를 둔다. 복싱, 태권도처럼 공동 동메달을 부여하면 어떨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