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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남한산성은 결코 함락당하지 않았다

 

남한산성하면 우리들의 뇌리에 치욕의 산성으로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조선 인조가 오랑캐 나라인 청 태종(太宗)의 대군에 밀려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 무릎을 꿇고 항복한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들의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심지어 무너진 산성의 석축 벽이라도 보수할라치면 “뭐가 자랑이라고 아까운 세금을 들여 보수하느냐”면서 거세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한산성에서 45일간이나 항전하던 인조가 왜 삼전도(三田渡)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했을까 한번쯤 곰곰 되씹어볼 필요가 있다.

 

남한산성에서 발굴딘 한성백제 시기의 장란형 항아리.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도읍인 위례성(풍납토성)의 배후에서 백제를 수호하는 진산이자 성산의 역할을 했다. 

■비상시에 대비한 요새
남한산성은 경기 광주·하남·성남 및 서울 송파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위치를 보면 얼마나 요처인지를 알 수 있다. 북쪽으로는 한강이남 지역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길목이고, 한강유역 점령을 위해서는 반드시 선점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남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수운을 장악하는 위치이기도 하다.
주봉인 청량산은 해발 497m. 원래 삼국시대에는 백제 땅이었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주장성(晝長城)으로 일컬어졌다.
그 후 임진왜란을 겪어 선조임금이 평안북도 의주까지 피란 가는 치욕을 당하자 전쟁 후 조선 조정은 쳐들어오는 외적으로부터 방위하기 위해 남한산성을 다시 쌓기로 했던 것이다. 인조임금은 1624년부터 2년 반 동안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했다.
성내에 임금이 유사시 거처할 궁궐인 행궁(行宮)을 만들었고, 선조(先祖)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宗廟), 나라의 상징인 사직(社稷) 등을 옮길 수 있도록 했다. 국가 비상시에 대비하게 했던 것이다.
산성의 규모는 총길이 11.755㎞이고 성벽의 높이는 3∼7m 정도이며 본성의 내부면적은 총 64만2천여 평에 달한다. 봉암성과 한봉성 등 두 곳의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설로는 네 곳의 장대(將臺)와 4대문(大門), 다섯 곳의 옹성(甕城), 두 곳의 돈대(墩臺), 29여 곳의 포루(砲壘), 16곳의 암문(暗門)이 마련돼 있다. 80여 곳의 우물과 45곳의 연못이 있어 물도 풍부했다.
그리고 조선시대 행궁과 함께 광주부의 읍치를 산성 안으로 옮겨 유사시 명실상부한 보장처(保障處)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 34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성을 축조하는 데 한 가지 오류가 숨어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성이 활과 검을 주무기로 한 전근대적인 전쟁개념을 바탕에 두고 축성됐고, 화포를 쏘는 포루는 연기와 불꽃이 일어난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설치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남한산성에서 확인된 백제 유구.

■전쟁의 참화
인조실록(인조 9년·1631년)기록을 보자.
“인조가 이르기를 ‘남한산성에는 한 곳의 포루가 없으니 이것이 결점이다’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포루는 성을 지키는데 가장 방해가 됩니다. 포를 쏘게 되면 연기와 불꽃으로 사방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했다.”
산성이 완성된 지 10여년 만인 1636년 병자호란을 겪었다. 인조는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으로 거처를 옮겨 10만 침략군과 대치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화포라는 공성무기의 위력을 새삼 절감한다. 검단산에서 쏜 포탄이 2㎞나 날아가 행궁의 기둥을 맞추고 성안 건물을 무너뜨린 것이다.
‘남한지’의 내용(인조 24년 1월23일자).
“적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 맞은 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했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 하고 작은 것도 거위 알만 하고 능히 수 십 리를 날 수 있으며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기와집을 세 겹이나 꿰뚫어 땅 속에 한자 남짓이나 박혔고, 또 성가퀴(城堞·몸을 숨기고 적을 쏘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를 맞추어 동성 한 귀가 거의 파괴되었고, 군관과 사복의 관원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인조는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46일간이나 버틴다. 그러나 성안에는 군사 1만 3천명이 겨우 50일 정도 지

2007년 발굴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대형기와. 무게 19킬로그램의 대형기와 350점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이곳에서 284평의 건물터가 확인됐다. |토지박물관 제공

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다.
성 밖에는 청나라 군이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하기를 일삼았다. 아이들은 추운 길바닥에 버려졌다.
특히 병자년의 추위는 혹독했다. 노숙(露宿)한 군사들 역시 추위와 굶주림에 기진하여 병들고 얼어 죽는 자가 늘어났다. 인조는 결국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의 입장에 따라 항복을 결심하고 ‘성밖으로 걸어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한다.
어쨌든 이 항복의 사실을 기록하고 청나라의 황제를 칭송하는 비를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삼전도비(三田渡碑·서울 송파구 송파동·사적 101호)이다. 이래서 남한산성이 굴욕의 역사 현장으로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임금이시여, 백성을 버리시나이까.”
하기야 기록을 보면 그야말로 목불인견이다.
“상(인조)이 ‘세 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三拜九叩頭)를 행했다.”
때는 바야흐로 1637년 1월30일이었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치욕적인 날이다.
인조는 입고 있던 용포(龍袍)를 벗고 청의(靑衣)로 갈아 입었다. ‘청의’는 신분이 낮은 사람‘을 뜻한다. 5호16국의 하나인 한나라 황제에 오른 유총(劉聰·?~318)이 진(晋) 회제(287~313)에게 청의를 입히고 술잔을 돌리게 했다는 이른바 ‘청의행주(靑衣行酒)’의 고사에서 유래됐다.
이어 백마를 타고 남한산성의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와 삼전도에서 무릎을 끓었다. 그러니까 신하인 주제에 임금을 상징하는 용포를 입을 수 없었고, 죄를 지은 주제에 정문으로 나올 수 없다는 청나라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물론 백마는 항복을 뜻하는 것이었다. 항복조인식이 끝난 뒤 술자리가 벌어졌을 때 또다른 굴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조가 술잔을 돌린 뒤 술상을 물리려 했는데, 청나라 인 두 사람이 두 마리의 개를 끌고 들어왔다. 그러자 청태종은 상에 차려진 고기를 베어 개에게 던져 주었다. 마치 항복한 조선(개)에게 은전(고기)을 베푸는, 그런 꼴이 아니던가.
이런 치욕의 의식을 끝내고 송파진을 통해 한강을 건널 때였다. 배가 딱 두 척만 남아 있었다. 임금이 배를 타려 하자 소동이 일어났다. 대신들이 서로 배를 타려고 다툰 것이다. 심지어 인조 임금의 어의를 잡아 당기기까지 했다. 임금이고 뭐고 그저 저만 살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사로잡힌 백성들은 임금이 강을 건너는 것을 보고는 울부짖었다.
“임금이시어, 임금이시어. 어찌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吾君 吾君 捨我以去乎)” 

난공불락의 남한산성. 청나라는 결코 남한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절대 남한산성을 수축하지 마라”
이 지경이었으니 어느 누가 기억하고 싶은 역사이며, 장소이겠는가.
하지만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 있다. 1637년 1월 28일, 청나라가 조선에 내민 12개 조항의 항복조건 가운데 미묘한 내용이다.
“용골대가 청 태종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명나라와 국교를 끊고, 그들의 연호를 버려라.~ 또 있다. 성벽(城壁)을 수리하거나 신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바로 이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의 성을 보수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특별히 강화의 조건에 넣어 강조한 것이다.
물론 조선측은 이 조건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이 합의 내용의 이행을 감시할 사절을 해마다 보낸다.
조선이 성을 새로 쌓았는지, 기존의 성을 개축하는지 끊임없이 감시하고 참견한 것이다.   
예컨대 전쟁이 끝난 지 2년 8개월이 지난 1639년(인조 17년), 조선을 방문한 청나라 칙사 마부달의 행보를 보자.
마부달 등은 삼전도비를 보고는 사냥을 핑계로 남한산성에 들어가 성첩(城堞·성 위에 쌓은 담장)을 살펴본 뒤 앙앙불락했다. 병자호란 뒤 조선은 왜적을 막는다는 구실로 남한산성을 보수했기 때문이었다. 이 보수사실을 청나라 사신이 현장답사 후 알아차린 것이다.
“도대체 이 무슨 짓인가. 당초 양국 간의 합의를 보면 남한산성과 해도(강화도)를 다시 수축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오늘 산성을 두루 살펴보니 산성 안에 네 곳이나 곡식을 쌓아 두었고 성기(城基)를 물려 쌓고 포루(砲樓)도 개설했구나. 너희 나라가 어떤 간계(奸計)를 가지고 있기에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그러면서 청 사신은 “빨리 허물지 않으면 청나라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조선 각 도의 성(城)들을 살펴볼 것”이라고 협박했다.  
조선은 화가 난 청 사신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 양국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왜구 방비 때문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주나 부산과 같은 변방의 성은 괜찮다. 다만 남한산성만은 안된다.
“대국의 명을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다만 헐어버리는 것도 수축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우니…. 새로 설치한 포루(砲樓)만 헐도록 해주시면….” 
남한산성을 둘러싼 갈등은 계속됐다.
1년 뒤인 1640년(인조 18년), 청나라는 조선에 칙서를 보내 또 남한산성 수축문제를 거론했다.
“지금 또 한번 지시를 어기고 남한산성과 평양성을 마음대로 수축했다니 이 무슨 심사인가. 다시 전쟁의 실마리를 일으키려고 하는가.”

삼전도비 옆에 새겨놓은 인조의 항복장면.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겪었다.

■청야전술의 전통
그럴 만도 했다. 고조선·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청야술은 유명했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조선으로서는 병력과 주민들을 보호하면서 적군의 보급로를 도모하는 산성 위주의 전술이 효과적이라고 본 것이다. 이 산성전술은 정묘호란 때 약간의 효과를 보았다. 당시 후금이 평안도의 산성을 공략하느라 어느 정도 애를 먹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때는 달랐다. 최강의 기마군이라는 평을 듣는 청나라의 팔기군(八旗軍)은 조선의 청야술을 피해 속전속결 전략을 폈다.
6000명의 선봉부대는 곧바로 한양을 직공했다. 대신 일부 병력들은 조선병력을 산성에 묶어두는 전략을 폈다. 대로변에서 30~40리 떨어진 산성은 청군의 한양직공 전략에 속수무책이었다. 청의 선봉은 압록강 도하 불과 6일 만에 한양 도성에 근접했다. 서울~신의주 간 거리가 500㎞ 쯤 되니까 하루 80㎞ 이상씩 말을 달려온 것이다. 그러나 인조 임금이 급히 피한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한없이 밀리기만 했던 조선이었지만 무려 45일을 남한산성에서 버텼다. 그러니 청나라군으로서는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강화조약의 중요한 조건 하나가 “절대 성을 새로 쌓거나 기존 성이라도 보수하지 말라”고 강조한 것이다.

 

■남한산성의 정신
사실 남한산성은 백제가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정한 후 성산(聖山)의 개념과 진산(鎭山)의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지난 2003년 이곳 행궁 터에서 초기 한성백제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 한성백제와 남한산성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흥미로운 단서다.
즉 없어진 남한산성의 행궁(行宮)을 복원하기 위해 그 터를 연차적으로 발굴 조사하는 과정에서 AD 2∼3세기 대의 백제토기 편들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삼전도비문. 청나라는 '인조는 남한산성 밖으로 나와 항복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난공불락의 남한산성을 두려워했음이 틀림없다.

 

구덩이 유구(竪穴遺構) 8기와 불을 피웠던 화덕터(爐址) 2기, 그리고 주거지와 같은 생활시설의 유실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 유물산포지가 확인된 것이다.
출토된 토기의 종류를 보면 완·배·호·옹·발·시루·뚜껑 등 다양했으나 모두 파편으로 수습되었다.
결국 이 유구와 유물들은 남한산성이 한성백제 도성, 즉 풍납토성의 최후 배후에 있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시사하는 단서다.
통일신라 때는 주장성으로 일컬어졌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步)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난 2007년 행궁터에서 의미심장한 발굴이 벌어졌다,
여기서 크기 64cm, 두께 4.7cm에 무게가 19kg에 달하는 초대형 기와가 350장이나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대단한 일이다. 기와 한 장의 무게가 20kg에 육박한다면? 대체 건물규모가 어땠기에 그 무거운 기와를 감당할 수 있었을까. 발굴된 건물지의 규모(53.5mX17.5m)가 무려 284평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통일신라가 주장성을 쌓은 시기는 삼국통일 후 당과의 투쟁기에 접어들던 때였다. 주장성을 쌓은 672년은 당 병력 4만 명이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침략의 야욕을 나타냈던 민감한 시기였다. 주장성은 바로 신라 북쪽을 지키는 방어거점이었던 것이다.
다만 통일신라가 이 성을 오래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조 이후에는 주장성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성의 해발고도가 500m나 되고 성의 규모가 워낙 크기 때문에 당나라의 침략 위험이 사라진 뒤에는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한산성을 보는 다른 시각
병자호란이 끝난지 380여년 지난 지금 다시 남한산성을 생각해본다.
물론 ‘명나라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나라를 망친 인조의 죄는 가벼이 볼 수 없다.
다 쓰러져가는 명나라에 매달리느라 떠오르는 신흥강국 청나라를 오랑캐라 무시했던 대가는 필설로 다할 수 없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패배, 그리고 그 치욕적인 삼전도의 굴욕…. 이 모든 것은 오롯이 못난 임금 인조와, 명나라를 위해 ‘닥치고 충성’을 외쳤던 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려야 한다.
그러나 그나마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남한산성이 결코 청나라군에 의해 함락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인조는 어찌됐든 남한산성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산성에서 ‘제 발로’ 걸어 나와 삼전도로 가서 항복했던 것이다.
인조는 호란이 끝난 지 2년 뒤 다소 놀라운 조치를 취한다.
직산(稷山)에 있던 백제 시조 온조대왕의 사당(祠堂)을 남한산성으로 옮겨 모셨다.
이유가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온조왕이 인조의 꿈에 나타나 남한산성을 공격하는 청군을 물리치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이다. 그 때문에 인조가 사당을 옮긴 것이다. 그런 다음 예조판서 김상헌을 온조왕 사당으로 보내 제사를 지냈다.
지금 남한산성 내에 있는 숭렬전(崇烈殿)이 바로 그 사당이다. 일시적으로 나라가 유린당하는 치욕을 당했지만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조의 의지였다.
그것이 바로 조선의 정체성이었고 뿌리였던 것이다. 놀랍게도 인조임금은 그 정체성을 백제에서 찾아, 백제시조를 모시는 사당을 바로 남한산성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역사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조는 조선의 정체성을 백제 온조왕에게서 찾은 것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