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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당 태종이 메뚜기를 꿀꺽 삼킨 이유는

 “옛날 당 태종은 황충(蝗蟲·메뚜기 혹은 풀무치)를 삼킨 일이 있다. 아무리 어질고 의로운 군주라 해도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황충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는가. 그것은 결국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있었으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었다.”(<영조실록> 1765년 6월 3일조)
 1765~68년 사이 전국에 황충 떼를 비롯한 해충이 기세를 부리고, 가뭄까지 겹치자 영조 임금이 깊은 시름에 잠겼다.
 영조는 ‘당 태종의 고사’를 예로 들면서 “과인이 태종처럼 할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토로했다. 영조가 언급한 ‘당태종의 고사’란 무엇인가.
 당 태종의 치도를 논한 <정관정요(貞觀政要)> ‘무농(務農)’에 나와있는 일화를 일컫는다. 

스페인령 카나라이 제도에 날라든 메뚜기 떼. 1억 마리의 메뚜기가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넘어왔단다. 오자 비상 경계령을 발동했다.  

  ■메뚜기를 삼킨 당 태종

 당 태종의 이른바 정관지치(貞觀之治)가 돋보였던 628년(정관 2년) 가뭄과 함께 메뚜기 떼(황충)가 당나라 수도 장안을 뒤덮었다.
 가뭄에 황충떼가 곡식을 사정없이 훑어버리고 있었다. 설상가상이란 말이 딱 맞았다. 백성들은 가뭄의 와중에 그나마 맺힌 곡식을 갉아먹고 있는 황충떼를 보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시름에 빠진 태종이 황급히 들에 나가 그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안타까운 나머지 황충 떼를 향해 외쳤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간다. 너희가 먹어대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백성에게 허물이 있다면 나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너희가 신령스럽다면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 백성에게는 해가 없도록 해라.”
 그러면서 태종은 돌발행동을 벌였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황충 두 마리를 잡아 삼키려 한 것이다. 좌우의 대신들이 화들짝 놀라 황급히 태종을 말렸다.
 “폐하. 제발 삼키지 마소서. 병이 될까 걱정됩니다.”
 태종은 “황충의 재해가 짐에게 옮겨지기를 바라는데 어찌 병을 피하겠느냐”고 하면서 꿀꺽 삼키고(呑蝗) 말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황충의 재해(災害)가 뚝 끊긴 것이다.
 영조는 당 태종의 고사를 떠올리면서 “그 것(황충을 삼키는 일)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라며 부러워 한 것이다.    
 “당 태종은 그 정성 덕분에 효험을 봤다지만 과인이 부덕하고 노쇠한 탓인지 가뭄과 해충이 이어지는구나.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아! 어찌하여 이 벌레는 내 살을 빨아먹지 않고 백성의 곡식을 먹는가.”
 1768년(영조 44년), 당시 74살인 영조가 내뱉은 한탄이다. 영조는 “벌레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정성이 없는 한 사람(영조 자신)이 초래한 것”이라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각 지방의 책임자(유수·도신·수령)들은 임금의 부덕함을 논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해충을 막아줄 것을 신신당부한다.

 

  ■황충 떼의 습격
 얼마나 황충의 피해가 엄청났으면 천하의 주인이라는 황제가 그것을 삼키면서까지 박멸운동을 벌였을까.
 “남쪽 하늘에 검은 구름처럼 지평선 위에 걸쳤더니 이윽고 부채꼴로 퍼지면서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밤처럼 깜깜해지고 메뚜기들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그들이 내려앉은 곳은 졸지에 잎사귀를 볼 수 없는 황무지로 돌변했다. 아낙들은 모두 손을 높이 쳐들고 하늘에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올렸고, 남정네들은 밭에 불을 지르고 장대를 휘두르며 메뚜기 떼와 싸웠다.”
 펄벅의 <대지>에 등장하는 황충(풀무치) 떼의 습격 장면이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 아닌가. 1447년(세종 29년), 세종 임금이 황충의 재앙을 언급하면서 중국의 예를 들고 있다.
 “옛날 중국 위나라 산동 땅에 황충이 있었는데 이를 소홀히 여겨 박멸하지 않았다. 그러자 기근이 들어 굶주림에 지친 사람들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다. 또 중국 진(秦)나라에 황충이 날아들자 초목이 다 사라지고, 소와 말이 서로 털을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황충이 더욱 번져 창궐하게 되면 백성들이 흩어져 떠돌아다니니 나라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이다.”
 황충이 창궐하면 수확할 곡식이 사라지고 굶주림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진다니….
 꼭 중국의 예만 들출 필요는 없다.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황충의 피해가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황충의 습격으로 곡식이 상하고, 백성이 굶주렸으며 도적 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삼국사기> ‘열전·김유신’은 “패강(예성강 지역)에 황충 떼가 생겨 꿈지럭거리며 들판을 덮어 백성들이 두려워 했다”고 기록했다. 이 때 산꼭대기에 올라 향을 사르며 기도한 후에야 비바람이 불어 황충 떼가 다 죽었다는 것이다.
 백제 무령왕 때인 521년 가을에는 황충 떼가 곡식을 온통 갉아먹자 백성 900호가 신라로 도망가기도 했다.(<삼국사기> ‘백제본기·무령왕조’)

최근 전남 해남에 메뚜기떼가 출몰했다고 한다. 왕조시대엔 메뚜기(황충) 떼가 습격하면  ‘임금의 부덕’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굶어죽은 시체가 도랑을 메우고
 조선시대에도 황충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1473년(성종 4년) 동지사 홍응은 황충 떼의 무서움을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황충이 모(苗)를 먹어치우는 것이 매우 빠릅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논밭을 먹어치웠습니다.”(<성종실록>)
 이밖에도 황충의 폐해로 인한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생생한 필치로 고발한 실록기사가 넘쳐난다.
 “1468년, 경상도에 황충이 일었는데 그 모양이 매미 같고, 또는 모기와 같기도 했다. 떼를 지어 날아와 들을 덮고 벼이삭을 빨아 먹어 모두 말라죽게 만든다. 벼이삭이 까맣게 됐는데 연해 지방이 더욱 심했다.”(<세조실록>)
 “1470년, 황해도 전역에 황충이 청·황·흑색의 삼색 황충이 곡식을 마구 훼손시켰다.”(<성종실록>)
 “1402년, 황충이 순을 잘라먹는 바람에 이삭이 전혀 패지않은 고을이 39곳이나 됐고, 잎사귀를 잘라먹은 고을이 28곳이었다”(<태종실록>)
 “1432년, 함길도에 황충이 창궐했다. 백성들이 농사철을 잃어 모두 구휼미에 의존해 살고 있다.”(<세종실록>)
 “1532년, 연이은 흉년으로 굶어죽은 시체가 도랑과 골짜기를 메우고 있는데…. 여기에 황충까지 들판에 가득하여 냇물이 말라붙고 농사를 다 망치게 되었다.”(<중종실록>)

심사정(1707~69)의 ‘꽃과 나비·풀벌레 화첩’(화접초충화첩)에 나타난 메뚜기. 평소엔 친근한 메뚜기지만 떼로 몰려올 경우 큰 환란이 되었다. 당 태종은 메뚜기 떼가 출몰하자 ‘백성을 괴롭히느니,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먹으라’면서 살아있는 메뚜기를 삼켰다.  

 ■황무지로 변한 들판
 1547년(명종 2년)의 실록을 보면 굶주린 백성들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8월 황충이 들에 가득했는데, 머리는 붉고 몸은 흰색이었습니다. 8~9일 동안 곡식은 물론 온갖 풀을 다 갉아먹어 황충이 지나간 자리는 삽시간에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비바람이 내려 황충들이 모두 죽었는데, 들판의 물이 황충의 시체로 온통 붉을 색으로 변할 정도였습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이 풀과 겨로 허리를 채우고 얼굴이 누렇게 떴으니….”
 심지어 임금이 백성들에게 권농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짓는 동적전이 황충 떼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도 있었다.
 1522년(종중 17년) 때의 일인데, 영사 정광필이 “매우 민망한 일”이라며 보고한다.
 “(동대문 밖 전농동에 있는) 동적전(東籍田·임금이 친히 경작하는 논)에 황충 떼가 습격해서 곡식의 뿌리와 잎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모맥(牟麥·밀과 보리)이 없어져 버려 종묘의 제사에 쓸 곡식이 없어졌습니다.”
 정광필의 보고대로 매우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황충의 창궐 때문에 종묘 제사에 쓸 양식마저 사라져 버렸다니 얼마나 면목없는 일인가.    
 1719년(숙종 45년) 평안도에는 크기가 두 번 잠을 잔 누에만한 황충 떼 때문에 백성들이 극심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익어가는 보리와 밀, 그리고 자라는 기장과 피, 그리고 볏모(稻苗) 등을 다 먹어치워 평안도 전체가 초목이 없는 황무지로 변했다. 백성들은 모여서 울부짖고 있었다.”

 

 ■백성의 ‘밥그릇’이 비면
 사태가 이렇게 심각하니 군주가 가만 있을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순자> ‘왕제(王制)’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했다.
 순자가 말한 물(水)은 백성, 즉 민심을 말하고, 배(舟)는 군주를 일컫는다. 그러니까 민심을 잃은 군주는 언제든 민심에 의해 뒤집힌다는 무시무시한 뜻이다.
 민심을 달래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 즉 ‘밥’이었다. 만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의 말을 인용해보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다.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세종실록> 1419년)
 그랬으니 백성이 굶주린다는 것은 곧 군주의 책임이니 백성을 굶주리게 만든 군주는 용서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책의 끝판왕
 중국사를 들춰보면 황충을 삼킨 당 태종과 견줄 수 있는 ‘자책의 끝판왕’이 여럿 있다.
 재변을 군주, 즉 자신의 부덕과 관련짓는 지도자들이다. 그 비조(鼻祖)는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 인물인 상나라 창업주 탕왕(成湯)이다.
 <십팔사략> <제왕세기> <사문유취(事文類聚)> 등 문헌에 나오는 탕왕의 일화를 검토해보자.
 기원전 1600년 전 무렵 탕왕이 하나라 마지막 군주 걸왕을 정벌한 뒤 상나라를 창업했다. 그러나 곧 고비를 맞았다. 7년 간의 지루한 가뭄이 이어진 것이다.
 이에 나라의 장래를 두고 점을 치는 태사(太史)가 “사람을 희생양으로 제단에 바치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탕왕은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고 자청한 뒤 목욕재계하고 모발과 손톱을 자른 뒤 소박한 수레에 백마를 탔다. 그는 자신의 몸을 흰띠풀(白茅)로 싸서 희생의 모양을 갖추고 상림(桑林·뽕나무밭)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탕왕은 이 때 ‘6가지의 일(六事)’로 자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정사를 펼치는 데 절제가 없어 문란해진 것입니까.(政不節) 백성이 직업을 잃어 곤궁에 빠졌습니까.(民失職歟) 궁궐이 너무 화려합니까.(宮室崇歟). 궁궐 여인들의 청탁에 빠졌습니까.(女謁盛歟) 뇌물이 성해서 정도를 해치고 있습니까.(苞저行歟) 아니면 아첨하는 무리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하고 있습니까.(讒夫倡歟)”
 탕왕이 간절한 자책의 기도를 올리자 금방 천 리에 구름이 몰려들어 배를 뿌린 덕에 수 천 리의 땅을 적셨다.
 이 고사가 바로 상나라 탕왕이 재변을 맞아 상림에서 스스로 6가지를 자책했다고 해서 ‘상림육책(桑林六責)’이라 하기도 하고, 그냥 ‘육사(六事)의 자책’라고도 한다.
 또 있다. 송나라 태종이다. <송감(宋鑑·송나라 사서)>에 나오는 이야기다.
 송 태종(재위 977~997) 때 황충 떼가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자 태종은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곧 짐(태종)의 책임이라고 자책하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면서….
 “짐이 내 몸을 태워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고자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몸을 태우려 하자 하늘이 응답했다. 곧 비가 내리고 황충의 떼가 즉시 죽은 것이다.

 

 ■상나라 탕왕의 6가지 자책
 후세의 군주들은 탕왕과 당태종, 송태종의 고사를 교훈으로 삼아 그들을 닮으려 애썼다.
 당 태종을 본받아야 하는데, 너무 노쇠해서 아마도 따라 하기 힘들 것 같다고 자책한 영조 임금처럼….
 조선의 중종 때인 1511년(중종 6년) 시강관 구자신은 송 태종의 일화를 전하면서 “임금이 몸과 마음을 닦고 공경하고 삼간다면 하늘도 감읍할 것”이라고 임금의 공구수성을 촉구했다.
 1522년(중종 17년) 황충을 비롯, 우박과 한발이 기승을 부리자 중종은 대역죄와 강상죄의 중죄를 제외한 대사면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황충의 내습 등 재변이 끊이지 않자 시강관 강현은 상나라 탕왕의 ‘육사’를 예로 들면서 임금의 반성을 촉구했다.
 “가뜩이나 가뭄 때문에 곡식이 말라 비틀어졌는데, 밭두둑과 길바닥까지 황충 떼가 뒤덮었습니다. 농사를 망치게 되면 어쩝니까.”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충 떼의 출현 등 재변이 일어나면 군주의 반성을 촉구하기 일쑤였다.
 예컨대 1527년(중종 22년) 극심한 가뭄에다 황충까지 습격하고, 눈과 우박까지 계절을 어기면서 쏟아졌다. 홍문관(임금의 자문기관)이 나서 중종 임금을 다그쳤다.
 “아! 임금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늘이요, 하늘이 사랑하는 것은 임금입니다. 잦은 괴변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늘을 두려워해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총명을 넓히고, 그동안의 과실을 거울삼아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소서. 정실인사를 삼가시고, 스스로 반성하여 집을 다스리고 나라를 미덥게 하소서. 그러면 천지가 제자리를 지키고 음양이 화합할 것입니다.”(<중종실록>)
 심지어 조선의 2대왕인 정종은 황충 떼의 출현을 선위의 이유로 내세우기도 했다.
 1400년(정종 2년) 정종은 동생이자 왕세자였던 이방원에게 임금의 위를 내주는 이른바 선위교서를 내주고 물러났다. 그 교서의 내용을 보라.
 “나라를 다스린지 3년이 됐지만 하늘 뜻이 허락치 않고 민심이 믿지 않아 황충과 가뭄이 귀신의 재앙으로 변하고 있다. 이에 왕위를….”

 

 ■‘화와 복은 사람이 부릅니다.’
 효종은 1650년(효종 1년) 황충 피해가 극에 달하자 “모든 책임은 나에게 있다”며 “기탄없는 직언으로 과인을 꾸짖어 달라”는 내용의 교지를 내리기도 했다. 
 1492년(성종 23년) 성종은 지방 수령으로 부임하는 사람들을 인견하고 다음과 같이 신신당부한다.
 “수령이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면 다스린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 경우 ‘황충 떼도 그 지방에 출몰하지 않고 호랑이가 강을 건넌다’는 고사가 있다. 그대들은 가서 잘 다스려라.”
 성종이 인용한 고사는 무엇인가. 후한(기원후 25~220) 때 노공이라는 사람이 중모(中牟)의 수령이 되어 덕(德)으로 다스리자 황충 떼가 감히 그 지방에 날아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호랑이 도하’ 건은 역시 후한 때 유곤이라는 사람이 홍농의 태수가 되어 인(仁)으로 다스리자 호랑이가 새끼를 데리고 강을 건너갔다는 내용이다.
 결국 덕(德)과 인(仁)의 정치를 하면 황충 떼와 같은 재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천하의 폭군이라는 연산군도 예외는 아니었다.
 1497년 예조참판 김제신이 “요사이 천변(天變)이 괴상한데, 이럴 때는 임금의 반성이 필요하다”면서 임금의 공구수성(恐懼修省·몹시 두려워하며 반성함)을 촉구했다.
 “화(禍)와 복(福)은 문(門)으로 들어오지 않고 사람이 부르는 겁니다. <서경>은 ‘오로지 덕이 하늘을 감동시킨다’고 했습니다. 옛날 송나라 진종이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궁궐 신축을 중지하자 습격하던 황충 떼가 바다로 몰려가 죽는 바람에 해안 수백리에 황충의 시체가 쌓였다는 고사가 있습니다. 바라건대 헛된 겉치레를 물리치시고, 참된 덕을 행하시면….”(<연산군일기>
 연산군은 김제신의 충언에 감탄사를 연발하고는 “그냥 듣고 넘길 말이 아니다. 아뢴 내용을 한 통으로 정서(淨書)해서 올리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어떤가. 폭군인 줄만 알았던 연산군의 ‘반전 매력’이 아닌가.
 올해들어 갖가지 재변이 일어나고 있다. 세월호 침몰 등 갖가지 참사가 줄을 잇는 가하면 땅이 꺼지고, 운석이 떨어지고, 황충의 떼(풀무치)가 출몰하고….
 새삼 3600년 전 상나라 탕왕의 ‘육사의 자책’과, 메뚜기를 삼킨 당태종의 이른바 ‘탄황(呑蝗)’의 고사가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인가.(끝)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