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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박애주의자' 묵자는 왜 독가스를 발명했을까.

중국이 최근 발사한 양자위성에 모쯔, 즉 묵자(墨子)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묵자는 바로 겸애론을 주장한 춘추전국시대 사상가입니다. 좀 뜬금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국은 왜 인공위성 이름에 공자·노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 철학·사상가의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런데 이유가 있었습니다. 묵자는 철학·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불세출의 과학자이면서 무기개발자이기도 했습니다. 묵자는 기하학·역학·광학·수학에서 뛰어난 이론을 전개했으며, 그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무기를 여럿 개발했습니다.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전쟁에 사용한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묵자가 누구입니까.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고 외쳤던 겸애론자 아닙니까. 평화와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독가스를 만들고, 그 외에 다른 신형무기까지 개발했다니요. 과연 묵자는 이중인격자일까요.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팟캐스트 98회가 그 이유를 설명해줍니다. ‘박애주의자 묵자는 왜 독가스를 발명했을까’ 입니다.

얼마 전 중국은 세계 최초로 자체 개발한 양자위성 발사에 성공했다. 양자 위성이란 무엇인가.
지상에서 레이저를 통해 위성으로 보낸 양자 정보를 다른 지상 기지국으로 보내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위성이다.

양자정보는 무작위로 생성되고 한번만 읽을 수 있으므로 송신자와 수신자 외에는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복제와 감청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차세대 통신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그런데 중국이 쏘아올린 이 양자위성에게 붙여준 이름이 이채롭다. ‘모쓰’, 즉 ‘묵자(墨子)’이다.

박애주의자 묵자. 묵자는 침략전쟁을 혐오했으며. 침략을 막기위한 수성전략을 세우느라 동분서주했다. 묵자는 그런 차원에서 다양한 방어용 군사무기를 개발했다.

■인공위성 이름이 묵자인 까닭
묵자가 누구인가. 춘추시대 말~전국시대 초를 풍미한 제자백가 가운데 묵가를 이끌었던 철학가이자 사상가로 알려진 인물이다.

묵자라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바로 겸애설이다. 겸애설은 ‘나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는 것이니 결국 ‘서로 사랑하라’는 사상이다.

신분이나 귀천을 차별하지 않고 천하 사람들 모두 더불어 사랑할 것을 설파했던 평화 박애주의자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의아스럽다. 왜 중국은 양자위성의 이름을 ‘묵자’로 정한 것일까.

공자·노자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한 위대한 사상가와 인공위성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아닐까. 이번 프로젝트를 주도한 판젠웨이(潘建偉) 중국 과학기술대 교수가 그 질문에 대답한다.

“묵자는 중국의 과학자이다. 과학 선현의 이름을 딴 것은 존경의 의미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 문화에 대한 자신감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과문한 필자로서는 더욱 궁금증이 생겼다. 아니 묵자가 무슨 과학자였단 말인가.

■독가스 사용의 비조
호기심에 이런 저런 자료를 찾아본 필자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기록이 있었다. 영국 과학사가인 로버트 템플의 언급이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이 겨자 등을 태운 독가스를 연합군에게 사용했다. 그러나 독가스를 사용한 화학전의 역사는 적어도 기원전 4세기까지 올라간다. 다름아닌 철학가이자 사회개혁가였던 묵자를 창시자로 하는 묵가였다. <묵자>를 보면 포위한 적의 도시에 풀무로 독가스를 뿜어넣은 내용이 기록돼있다. 독일군의 참호용 겨자가스보다 2300년 앞선 것이었다. 중국인들은 소가죽으로 만든 풀무를 화로에 연결시킨 뒤 말린 겨자알갱이나 그밖에 유독식물을 불에 태웠다.”   

묵자가 개발한 군사무기를 복원한 상상도.|박재범이 옮긴 <묵자>, 홍익출판사, 1999년에서

필자는 집의 서고에 꽂혀있던 <묵자>를 서둘러 꺼내 보았다. 과연 그런 내용이 있었다. 즉 묵자는 제자인 금활리(禽滑釐)가 “성을 공격할 때 땅굴을 파서 성안을 침투하는 적군은 어떻게 막아야 하느냐”고 묻자 여러 대응전략을 고주알미주알 알려주는 와중에 한가지 팁을 전수해준다.

“적군이 파는 굴과 아군이 파는 굴이 만날 즈음이라면 이렇게 하라. 예리한 도끼를 장착한 두레박으로 토층에 강한 충격을 가해라. 흙이 부서져서 아군과 적군의 굴이 통하게 되면 겨와 똥 같은 더러운 것을 적군의 굴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그 위에 쑥과 풀을 7~8다발로 묶어 연기와 불이 위로 뿜어져 나오지 않게 하고 풀무를 설치한 뒤 적군을 향해 연기를 불어 넣는다.”(<묵자> ‘비혈’ ‘비성문’ 등)

이런 내용도 있다.
“굴 안쪽 입구에 아궁이를 만들어라. 쑥과 풀 7~8다발을 굴에 넣고 급히 풀무질을 하여 적에게 연기를 뿜는다.…풀무는 소가죽으로 만든다. 지렛대를 이용하여 풀무질한다. 타는 목탄에 석탄까지 넣어 부뚜막에 가득차게 해서 연기가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한다.…”독가스를 이용한 화학전의 비조가 다름아닌 묵자라니….

<묵자>를 자세히 읽어보면 묵자가 세계 최초로 화학전을 창안하고 시도한 인물이라는 로버트 템플의 주장이 왜곡·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쑥과 독풀, 그리고 겨와 똥의 지독한 연기와 냄새로 적군을 격퇴시켰다는 분명한 기록이 있으니까….

더 읽어보자 묵자는 사상가 및 철학가이기도 했지만 군사무기를 여럿 발명하고, 기하학과 광학·역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과학자였을 알게됐다.

■묵자는 전과자?
그렇다면 묵자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춘추전국시대 유가와 함께 양대 학파를 형성하고 있었다. 묵자의 가르침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명성 또한 공자 만큼이나 드높았다. 사실 묵자의 생애와 활동를 전한 전기나 사료는 남아있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는 ‘맹자순경열전’에 딱 24자로 묵자를 소개했다.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동거마. 묵자를 비롯한 묵가는 전차 제작의 달인이었다.|진시황병마용박물관 소장

“묵적(墨翟·묵자의 이름)은 송나라 대부로서 수성(守成)과 방어의 전술에 능했으며, 비용을 절약할 것을 주장했다. 어떤 사람은 묵적을 공자와 동시대 인물이라 했고, 어떤 사람은 공자보다 뒤에 살았던 사람이라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기나 사료가 없어 수수께끼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성이 정말 묵(墨) 씨였는지도 이견이 있다. 어떤 이는 묵자가 죄를 짓고 묵형(墨刑·이마에 전과자임을 알리려고 새긴 문신형)을 당한 인물이어서 ‘묵’이라 했다는 설도 제기됐으니 말이다.

묵자를 연구한 량지차오(梁啓超)에 따르면 묵자는 기원전 494~468 년 사이에 태어나 기원전 420~376년 사이 생을 마쳤다. 시기로 보면 공자 이후 맹자 이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사기> 나 <한서>는 송나라 대부라 했다. 그러나 <여씨춘추>는 “그가 노나라에 머물며 사각(史角)의 후예에게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다. 묵자의 출신 성분과 관련해서도 설이 분분하다.

<묵자>에 따르면 동시대인들이 묵자의 행동을 ‘천인들이 하는 짓(賤人之所爲)“라 했고, 묵자 스스로도 천인을 자처했다. 그렇다면 묵자는 생산직이었던 중하위 계급의 기술자이거나 노동자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묵자>라는 책은 어떻게 저술되었을까. 이 책은 묵자와 묵자의 제자들인 묵가가 시공을 초월해서 가공·정리·창작한 책이다. 아마도 기원전 5세기~기원전 3세기까지 200년에 걸쳐 서술된 것을 보인다. 이 <묵가>라는 책이 전한 것은 동진의 도교 이론가인 갈홍(283~363) 덕분이다.

갈홍은 <신선전>에서 묵자를 도교의 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덕분에 <묵자>는 온갖 전란 속에서도 다행히 53편이 남아 후대에 전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은 겨자가스를 태운 독가스전으로 연합군을 괴롭혔다. 그러나 쑥이나 겨자 등을 태운 가스전의 비조는 기원전 5~4세기 무렵의 인물인 묵자였다.|로버트 템플의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까치글방, 2009

■묵자는 무기기술자이자 군사전략가
그런데 묵자는 사마천이 평가했듯이 수성과 방어전략에 능한 사람, 즉 유능한 군사전략가였다.
역사상 최초로 독가스를 개발한 이로 꼽힐만큼 신무기 제작에 능했으니 말이다. 특히 성을 지키는 데 필요한 기구들을 만드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하기야 ‘병기는 나라의 발톱’이라 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침략전쟁에서 성을 보전하고, 나라를 지키려면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특히 고대의 글라이더(滑翔機)인 목연(木鳶)을 만든 적도 있고, 전쟁 때 필요한 수레도 직접 제작하는 등 축성과 방어무기의 제조술에도 깊이 있게 연구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환희기’를 보면 나무연을 만든 묵자를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무리 중 한사람’으로 꼽고 있다.  

“열하(熱河·중국 하북성 북부의 강)에서 날마다 온갖 해괴한 놀이와 잡스러운 연극이 펼쳐지고 있었다.…예전부터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환술(幻術)이 성행했다. 하나라 때 유루(술사의 이름)는 용을 길들여 공갑(하나라 임금)을 섬겼고, 주나라 목왕 때는 언사(사람을 쏙 빼닮은 인형을 만든 술사의 이름)라는 자가 있었다. 묵적은 비록 군자였지만 목연을 날리는데 능했다.… 모두 이런 술법으로 사람을 놀렸으며….”

■묵자가 개발한 신무기
묵자가 개발한 가장 훌륭한 수성무기는 바로 연노차(連弩車·차에 장착된 연발식 화살 발사 장치)였다. 묵자의 제자인 금활리는 연노차를 이렇게 소개한다.

“여러 개의 쇠뇌를 단 수레(연노차)로 흙을 높이 쌓고 성을 공격하는 적에 대비한다. 여러 쇠뇌의 살통은 150근의 구리로 만든다. 줄을 잡아당길 때는 도드래로 조인다.  화살의 길이는 10자이고, 줄을 화살 끝에 주살처럼 매어놓고 도르래로 말아 거둬들인다. 쇠뇌로 무수히 쏘아대야 하므로 화살은 1인당 60개씩 배당하고 작은 화살은 수없이 쏠 수 있어야 한다. 10명이 이 쇠뇌 수래를 조작하여 적을 막는 것이다.”(<묵자> ‘비고임’)

무슨 말이냐. 연노차는 흙을 높이 쌓아 올린 뒤 성을 공격하는 적군을 물리치는 반격무기다. 10명이 조종하고 한번에 60개의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다. 연노차는 기계의 힘으로 많은 인력을 대체할 수 있고 사정거리가 멀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줄을 화살에 매달아 한번 쏜 화살을 도드래로 회수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줄을 매단 화살를 쏜 다음 도르래를 말아 쏜 화살을 거둬들인다? 중국과학기술사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영국의 조세 니덤은 이를 두고 “크랭크 핸들과 릴의 원형이 바로 묵자가 제작한 연노차에 있다”고 기술했다. 로버트 템플 역시 연노차가 릴 발명의 원동력이 됐다고 했다.

“묵가의 병기 중 연노(연발식 석궁)이라는 게 있다. 이것은 수많은 투창을 적에게 발사하는 기계다. 초기의 대포다. 창은 값이 비싸서 함부로 버릴 수 없었다. 그들은 창에 끈을 달아 릴 식의 감는 기계로 회수하여 다시 사용했다. 그러나 적의 몸에 꽂힌 창은 그대로 방치했다. 이 군용 병기가 가장 평화로운 릴 발명의 실마리가 됐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다.”

명나라 때 간행된 <묵자>. 묵자는 약육강식의 전쟁이 판치던 춘추시대말 전국시대 초 ‘서로 사랑하라’를 외치던 박애주의자였다. 다만 침략전쟁에는 물불을 가리지않고 막았다.  

■초음파 탐지기도 묵자의 작품
또하나 묵자가 발명한 무기 가운데 깜짝 놀랄만한 것이 있다. 지금의 수중 초음파 탐지기라 할 수 있는 앵청(罌聽)이다. 어떤 무기냐. 제자인 금활리가 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침투하는 적군을 어찌 막을 것이냐고 묻자 묵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성벽 바로 밑까지 5보마다 우물을 파고 약 40말 정도가 들어가는 큰 독을 넣는다. 그 독을 얇고 부드러운 가죽끈으로 단단히 싼 다음 우물 속에 넣어둔다. 그런 다음 귀가 밝은 사람이 독 안에 들어가 엎드려 듣게 한다. 그러면 적이 파는 굴의 위치를 감지할 수 있다.”(<묵자> ‘비혈’)

이것이야말로 근대해상정찰기구인 성납(聲納·수중 초음파탐지기)의 원리와 비슷하지 않은가. 따라서 묵자는 측성학(測聲學)의 선구자로 꼽힌다.

■돌리면서 쏘는 다연발 발사기
묵자가 발명한 무기 중 전사기(轉射機)도 있다. 전사기는 돌리면서 많은 화살을 쏠 수 있도록 만든 무기다. 20보마다 한 대의 전사기를 놓고 활을 잘 쏘는 병사로 하여금 조종을 담당하게 한다. 조수 한사람은 옆에서 돕도록 한다.(<묵자> ‘비성문’)

묵자는 또 성이 수비에 필요한 무기인 자거(藉車)라는 무기도 만들었다. 20보마다 자거를 한대씩 두고 땅굴로 들어오는  적군의 경우 자거 대수를 늘릴 수 있다. 그런데 전사기와 자거는 칼이나 연소통이나 분화기에 해당하는 탄화통 등의 무기를 발사한다.(<묵자> ‘비제’)

자거나 전사기는 적군이 사다리로 공격해올 때나 수공, 혹은 흙을 쌓아 성으로 올라오는 토대공 및 인해전술로 침략할 때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무기다. 특히 자거와 전사기의 동력은 탄력을 이용했다.

묵자 시대 사람들은 가죽끈이나 대나무, 금속 스프링을 이용할 줄 알았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있다. 즉 1988년 허난성(河南省) 신양(信陽) 지구의 춘추시대 고분에서 110점의 금속스프링 기구를 발굴했다. 나선형이었던 이 기구들은 오늘날의 금속스프링과 차이가 없었다. 

미국 하버드 대의 섭산(葉山) 교수는 자거와 같은 무기를 복원한 뒤 “자거가 같은 시기의 서양 석궁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났다”고 판단했다. 이밖에도 묵자는 거답(渠答), 측와(測瓦) 등 수많은 병기의 제작과 사용방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렇게 묵자를 중심으로 개발한 무기는 후대의 방어무기로 전승됐다.

중국은 최근 쏘아올린 양자위성에 모쓰, 즉 묵자의 이름을 붙였다. 과학자이자 군사무기개발자인 묵자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한 묵자
그런데 묵자의 무기 가운데는 지렛대의 원리를 사용한 것들이 많았다.
그랬다. 묵자는 군사무기 뿐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묵자와 지렛대라? <묵자> ‘경하’ ‘경설하’에 지렛대의 원리가 설명돼있다.

“지렛대는 무게를 받아도 어느 한쪽으로 휘지 않는다.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負而不撓 說在勝)

“두레박의 수평 통나무에 중량을 가해도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은 나무의 맨 꼭대기 끝에 묶은 무거운 물건이 중량을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負 衡木加衆言 而不撓 極勝重也 右校交繩 無加焉 而撓 極不勝重也)”

■유클리드보다 앞선 원의 정의
그 뿐이 아니다. 묵자의 수학·역학·기하학·광학 실력은 탄성을 자아낸다.(<묵자> ‘경상’)

“원은 한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것이다.(원 一中同長也)”

“사각형이란 변과 각이 사방에 두른 것이다.(方 柱隅四護也)”

“직선은 세 점을 공유한다.(直 參也)” 

이 중 원의 정의는 유클리드 <원론>에 나오는 원의 정의와 흡사하다. 유클리드가 누구인가. 기원전 300년 무렵에 살았던 그리스 기하학의 아버지다. 유클리드보다 앞선 시기에 살았던 묵자가 비슷한 수준의 기하학에 관한 논리적인 기본명제를 설명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역학은 또 어떤가. 묵자는 힘을 이렇게 정의했다.
“힘이란 물체를 움직이게 되는 원인이 된다.(力 刑之所以奮也)”(<묵자> ‘경상’)
그러면서 “힘은 무거운 것을 말하는데, 아래에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것은 힘의 작용이다.(力 重之謂 下擧重奮也)”(<묵자> ‘경설상’)라 했다. 여기서 무거운 것은 가속도 운동을 가리키는데 어찌보면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과 같다.

묵자의 탄성이론도 대단하다.
“균등하다는 것은 머리카락이 균등하게 힘을 받는다는 것이다, 가볍거나 무거워서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것은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볍거나 무거워서 머리카락이 끊어지는 것은 균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균등한 경우엔 끊어지지 않는다.(均 髮均懸 輕重而髮絶 不均也 均 其絶也莫絶)”(<묵자> ‘경설하’)

■바늘구멍 사진기 원리 찾아낸 묵자
광학분야에서도 묵자는 탁월한 원리를 발견했다. 특히 묵자는 빛의 직진원리를 많은 실험을 통해 찾아냈다.
특히 <묵자>를 보면 그림자와 바늘구멍을 통해 생기는 상, 평면거울·오목거울·볼록거울 등의 실험결과와 이론을 설명한 것이 8조나 된다.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과학이론은 바로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다.(<묵자> ‘경하’)
“그림자가 거꾸로 되는 것은 빛이 한 점에서 교차되고 그림자가 길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점에 있다.(景到 在午有端與影長 說在端)”

“그림자는 빛이 사람을 비출 때 생기는데 화살을 쐈을 때와 같이 직진한다. 아래로부터 나온 빛은 사람을 향해 높아지고 위로부터 나온 빛은 사람을 향해 낮아진다. 발이 아래의 빛을 가리므로 발의 그림자는 위에 생기고 머리는 위의 빛을 가리므로 머리의 그림자는 아래에 생긴다. 원근이 있어도 빛이 모이는 점이 있어 그 때문에 거꾸로 선 상이 안쪽에 생긴다.”

묵자는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를 이토록 완벽하게 설명해놓았다. 암실을 만들어 하나의 구멍을 뚫은 뒤 암실 밖에 한 사람이 구멍을 향해 선다면 암실 벽에 거꾸로 된 사람의 상이 생긴다.

빛이 작은 구멍을 통과할 때는 화살처럼 직진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늘구멍 사진기의 원리를 발견한 것이 기원전 350년 무렵이다.

그러니 묵자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50~150년 더 빨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랬으니 현대 중국의 물리학자인 천린쟈오(錢臨照)는 “이렇게 조리있고 완전한 기술은 비록 수백자이지만 2000년 전에 이룩한 세계적으로 위대한 광학이론”이라 평가했다.

중국 전통의 성벽구조. 묵자는 적의 공성작전에 대비하는 방어전략 수립에 매진했다.

■혹평과 찬사를 동시에
그렇다면 궁금증이 생긴다. 모두에 밝혔듯 “서로 사랑하라”면서 겸애설을 주장한 묵자는 왜 빼어난 과학이론으로 바탕으로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개발했을까.

사실 묵자는 사람과 사람 간의 반목과 다툼은 겸애의 부족에서 출발한다고 여겼다. 따라서 반목과 갈등, 전쟁을 없애려면 자기 몸을 사랑하듯 남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유가의 인애(仁愛)와 사뭇 달랐다. 유가의 인애는 가족애, 즉 혈연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묵자의 겸애는 보편적 사랑이다.

즉 “사람은 나이가 많고 적음과, 신분이 높고 낮음의 구별없이 모두 하늘의 신하”라 했다. 묵자는 특히 노예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여겼다.

“여자 노예(獲)도 사람이고, 남자 노예(臧)도 사람이다. 여자 노예와 남자 노예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나 개나 다 사랑하라’는 묵자의 겸애사상은 유가의 십자포화 공격을 받았다. 맹자는 겸애론을 두고는 매서운 혹평을 가했다.

“남의 아버지까지 사랑하는 묵가의 겸애는 아비가 없고 왕도 없는(無父無君)의 학문이다. 짐승의 사랑이다.”(<맹자> ‘등문공 하’)  

그랬던 맹자도 평화를 위한 묵자의 동분서주를 이렇게 긍정평가했다.
“묵자는 머리 끝부터 발꿈치까지 다 닳아 없어지더라도 천하를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한다.(摩頂放踵 利天下 爲之)”(<맹자> ‘진심상’)

■묵자는 이중인격자인가
그렇다면 묵자는 이중인격자인가. 아니다. 묵자는 겸애주의자, 즉 평화주의자였다. 묵자 사상의 핵심은 바로 싸우지 않고(非戰), 공격하지도 않는다(非攻)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침략전쟁을 철저하게 부정한 것이다.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나라와 나라, 귀족과 귀족 사이에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던 약육강식의 시대였다.

묵자는 바로 이런 전쟁은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모두 고통만을 안기고, 무엇보다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요즘의 왕은 영토를 늘리려고 침략전쟁을 벌인다. 죄없는 백성이 희생된다. 이것은 겸애를 바라는 하늘의 의지를 거스르는 중대 죄악이다.”

그렇게 반대해도 침략해오는 데는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묵자는 침략전쟁을 막기 위한 방어에 심혈을 기울였다. 가만보면 묵자가 발명한 무기들은 모두 성을 지키는 방어용 무기였던 것이다.

■묵자가 방어용 무기개발에 나선 이유
맹자가 ‘엄지척’ 찬사를 보냈듯 묵자는 전쟁을 막는 일이라면 천리를 마다않고 달려갔다. 오죽했으면 장자까지도 칭찬릴레이에 나섰겠는가. 

“묵자는 참으로 천하의 호인이다. 찾으려 해도 얻기 어려운 사람이다. 묵가의 제자들도 그랬다. ‘모두 거친 옷을 입고 나막신이나 짚신을 신고서 밤낮 쉬지 않고 분투하지 않으면 우 임금의 도리가 아니며 묵자가 될 수도 없다’고….”(<장자>)

묵자가 약소국인 송나라를 침략하려는 강대국(초나라)의 움직임을 미리 알고 열흘 낮밤으로 달려가 전쟁을 막았다는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된다.

즉 묵자의 동시대 인물 중이 공수반이라는 무기개발자가 있었다. 공수반은 초나라를 위해 배를 만들어 월나라를 패퇴시킨 인물이었다. 그런 공수반은 이번에는 운제(雲梯)라는 신무기를 만들어 송나라를 침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운제는 수레에 높이 올라가는 사다리를 붙여 성을 공격하는 당시로서는 신무기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묵자는 부리나케 송나라로 달려가 공수반을 만났다. 묵자와 공수반, 그리고 초나라 혜왕 간 주고받은 숨막히는 외교전을 보라. 묵자는 공수반에게 “과연 송나라가 무슨 죄가 있냐”고 물었다.

“죄없는 송나라를 강대국인 초나라가 공격하는 것은 어질지 않습니다. 초나라는 땅이 남아돌고 백성의 수가 적습니다. 그나마 부족한 백성들을 죽이고 남아도는 땅을 빼앗는다는 것은 불의가 아닙니까.”

공수반은 묵자의 말에 설득 당했지만 “이미 전쟁을 선포했으니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한다. 묵자는 이번에는 초나라 임금(혜왕)에게 찾아갔다. 하지만 초 혜왕은 “좋은 말씀이지만 이미 공수반이 좋은 무기를 만들었으니 이 무기로 송나라를 빼앗아야겠다”고 고집한다.

공수반과 초 혜왕이 묵자를 이 핑계 저 핑계로 따돌리며 시간을 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묵자는 공수반을 다시 만나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허리띠를 끌러 성의 모양을 만들고, 나무 조각으로 성을 방어하는 장치를 설치했다. 이를테면 전쟁 시뮬레이션으로 공수반과 맞선 것이다. “한번 쳐들어와보시오.”

■시뮬레이션으로 전쟁을 막은 묵자
공수반은 여러차례 성을 공격하는 기계로 공격했지만 번번이 묵자의 수비에 막혀 실패했다. 모든 기계를 다 써먹었지만 묵자의 수비를 뚫지 못했다. 공수반은 결국 굴복했다. 공수반은 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 선생님을 막아낼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만 말하지 않겠습니다.”
묵자 역시 이렇게 대꾸했다. “나도 당신이 날 막아낼 방법을 알고 있지만 나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초 혜왕이 두 사람의 대화가 무슨 뜻인지 묻자 묵자가 대답했다.
“공수반의 말은 저(묵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죽이면 송나라를 구원할 사람이 없어지니 공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400명이 넘는 제자가 있으니 저를 죽여도 송나라를 정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제서야 초 혜왕은 “송나라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그 유명란 구공구거(九攻九拒)이다. 묵자야말로 지금 태어났다면 전자게임의 달인으로 거듭났을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묵자는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려 했을 때도 제나라 왕을 찾아가 설득함으로써 전쟁을 막아냈다. 또 노나라가 정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묵자는 노·송·제·위·초·월나라 등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백성들의 고통을 덜고자 했던 것이다.
이제야 중국 양자위성에 묵자, 혹은 모쓰의 이름을 붙였는 지 알 것 같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참고자료>
박문현, <묵자읽기>, 세창미디어, 2014
박문현, ‘묵가의 군사사상’, <통일전략> 제10권 제1호, 한국통일전략학회, 2010
묵적, <묵자>, 박재범 옮김, 홍익출판사, 1999
로버트 템플,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 과학세대 옮김, 까치글방,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