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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안종범 김영한 수첩도 사초다

 

“어젯밤 천둥·벼락을 동반한 폭우가 내렸는데도 그냥 넘어가십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나면 군주가 반성해야 하는데….”(이종성)

 

“아냐. 난 듣지 못했어. 아마 내가 잠든 사이에 (천둥번개가) 친 모양이지. 근데 유신(이종성)은 소리를 들었는가.”(영조)

 

지금으로 치면 6급 공무원(이종성)의 질타에 최고 지도자(영조)가 쩔쩔매며 변명한다.

고 김영한 청와대 정무수석의 업무수첩.

1728년 10월 3일자 <승정원일기>의 한 대목이다.

 

어느날 살인사건을 심리하는 엄중한 자리에서 신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갔다. 그러자 영의정 이광좌가 ‘버럭’한다.

 

“아니 대소변이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당하관들까지 줄줄이 나가버리다니 이런 법도가 어디 있습니까.”

 

영조는 “그래 너무 동시에 많이 나가버려서 나도 이상하게 생각했어”라고 맞장구친다.(1727년 10월 3일) 대통령비서실격인 승정원의 주서(7품) 2명이 임금와 신하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했다.

 

화장실 가는 것까지 질타했으니 말이다.

공식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 888책 5400만자이고, 궁중일기인 <승정원일기>는 2345책 2억4300만자에 이른다.

 

임금과 신하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이중 교차 감시망에 민낯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조선의 중흥군주인 정조는 세손 시절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사도세자)의 비행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의 초본(사초)를 없애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결국 영조의 허락을 얻어 일기를 없애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실록>은 “세손의 부탁으로 사도세자 관련 일기를 세초했다”고 기록했다. 어쩔 수 없이 사초는 씻어버렸지만, “역사적인 사실을 없앴다”는 기록만큼은 남겨둔 것이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업무지시를 사적인 공간인 관저에서, 그것도 전화통화로 했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경우는 어떨까.

 

대체 얼마만큼의 공식기록물이 남아있을까 걱정이 된다. 게다가 탄핵 과정에서 남아있던 기록물이 무단반출 혹은 폐기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월호 사건이나 위안부 협상과 관련딘 민감한 기록물은 대체 어찌되었는가.

 

지금 안종범·김영한 전 수석의 수첩과 정호성 전 비서관의 휴대전화 녹음파일은 그나마 기적적으로 건진 이 시대의 ‘사초’라 할 수 있다.

 

이 사초 덕분에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법적·도덕적·역사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됐다.  

 

새삼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역사뿐”이라는 왕조시대의 금언을 되새기는 순간이다.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