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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인간 욕망의 상징, '엘 도라도'는 분명 존재했다

‘엘 도라도(El Dorado)’는 요즘에 와서는 ‘황금의 나라’ 혹은 ‘이상향’, ‘낙원’을 의미한다. 하지만 원래는 ‘황금빛이 나는 사람(족장)’을 일컬었으며, 후에 그 족장이 사는 지역 혹은 황금이 넘치는 도시로 각색됐다.

이 ‘엘 도라도’의 원뜻인 ‘황금빛이 나는 족장’은 과연 누구일까.

국립중앙박물관(관장 배기동)이 28일까지 콜롬비아 황금박물관과 함께 열고 있는 ‘황금문명 엘도라도-신비의 보물을 찾아서’ 특별전은 바로 ‘황금을 찾아 헤매고, 황금을 위해 싸우고, 황금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별전은 16세기 이후 ‘엘 도라도’로 알려진 콜롬비아의 황금박물관이 소장한 황금유물 322점을 소개했다. 스페인 정복자들이 ‘엘 도라도’를 찾아 아마존과 안데스산맥을 넘었던 정복자들의 여정과, 이들에게 목숨을 잃고 삶의 터전마저 빼앗긴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녹였다. 

1969년 콜롬비아 파스카 동굴에서 농부들이 발견한 황금 뗏목.   무이스카족의 ‘엘 도라도’ 전설이 사실임을 입증해주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전설의 엘 도라도 족장

“안데스 산맥 너머에 황금으로 온몸을 치장한 사람과 황금으로 만든 도시가 있다는군.”

16세기 중남미를 정복한 스페인 정복자들 사이에서 매력적인 소문이 돌았다. 콜롬비아 보코타 부근의 고원 지역에 살던 무이스카족의 관습이 전설처럼 퍼졌던 것이다. 

실제로 이 부족의 새로운 족장은 온몸에 금가루를 바르고 금과 에메랄드를 가득 실은 뗏목을 타고 과타비타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가 즉위식을 치렀다. 족장은 그곳에서 몸에 칠한 금가루를 씻어내고 배에 실은 금은보화를 호수에 던져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스페인 정복자들에게는 이 무이스카족 관습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전설처럼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는 황금빛이 나는 사람(족장)을 ‘엘 도라도(El Dorado)’라 일컬었다. ‘엘 도라도’는 나중에는 아예 그 족장이 사는 지역 혹은 황금이 넘치는 도시로 각색되었다.

엘 도라도의 전설을 안고 있는 콜롬비아 과타비타 호수


■과타비타 호수의 비밀

스페인 정복자들은 일확천금의 희망을 걸고 전설의 호수를 찾아 나섰다. 

급기야 1536년 스페인 행정관인 곤잘로 히메네스 데 케사다는 500명의 군인과 85마리의 말, 여러 명의 신부를 이끌고 콜롬비아 고원지대에 살고 있던 무이스카 원주민 마을에 도착했다. 케사다 원정대는 마을을 약탈하고 부족민들을 고문해서 급기야 과타비타 호수의 위치를 찾았다. 과타비타 호수는 해발 2700m에 있는 사화산(死火山)의 화구 호수다.

그러나 호수 속에 잠겨있다는 황금을 찾을 길이 없었으므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44년 뒤인 1580년 보고타 출신의 스페인 사람 후안 지네스 드 세풀베다는 8000명의 원주민을 동원해서 아예 호수물을 빼내기 시작했다. 수심이 20m가량 낮아지자 과연 에메랄드와 황금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환호성도 잠시…. 호숫물을 빼내기 위해 마련한 배수로가 무너지면서 수위가 다시 높아졌다. 일확천금의 꿈이 다시 무너졌다.

황금가루를 족장의 몸에 바르는 모습의 16세기 판화.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후에도 스페인 정복자들은 황금의 땅으로 알려진 ‘엘 도라도’를 찾으려 했지만 죄다 실패했다. “엘 도라도가 어디인지 빨리 정확한 위치를 대라”고 원주민들을 닦달하고, 심지어는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원주민들이 죽어나갔다. 황금이 잠겨있을 것으로 짐작된 과타비타 호수는 물론이고, 무이스카족의 영역에 있던 숱한 호수들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예컨대 1886년 콜롬비아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과타비타 호수는 ‘황금찾기’ 광풍의 희생양이 됐다. 1898년에는 아예 ‘과타비타 호수 개발회사’를 설립하여 호숫물을 완전히 빼내는 초강수를 두었다.


■불타버린 엘 도라도의 전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햇볕에 노출된 호수바닥에서 진흙과 뒤엉켜 단단하게 굳어버린 황금 장신구 몇 개만 겨우 찾아냈다. 1911년 호수는 완전히 메말라 버렸다. 그 과정에서 뭇 사람들을 혹하게 한 발굴도 있었다. 과타비타는 아니지만 역시 무이스카족의 영역인 시에차 호수의 바닥이 심한 가뭄으로 노출됐는데, 거기서 전설의 황금뗏목이 확인된 것이다. 

뗏목의 중심엔 주인공이 서 있었고, 주인공을 둘러싼 인물들이 표현되어 있다. 유럽인들은 “드디어 ‘엘 도라도’의 실체가 발견됐다”고 환호했다. 그러나 이 뗏목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에 팔린 뗏목이 독일 브레멘 항구에 도착한 뒤 창고에 화재가 나서 잿더미로 변했다.

1965년 콜롬비아 정부는 과타비타 호수를 자연공원으로 지정하면서 호수를 대상으로 한 모든 채굴을 금했다.

이로써 16세기 이후 400년 가까이 ‘황금 도시’를 찾으려 헤맸던 인간의 탐험은 부질없는 헛짓으로 끝난 것 같았다.

콜롬비아 북부 시에라네바다데산타마르타에 살던 타이로나족이 만든 박쥐인간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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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낸 ‘엘 도라도’

그러나 1969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남쪽 파스카 시의 농부 3명이 잃어버린 개를 찾으러 헤매다가 험준한 바위 밑에 조성된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그 안에서 엄청난 유물이 확인된다. 금가루로 치장하고 뗏목에 올라탄 족장을 표현한 황금 공예품이었다. 뗏목은 길이 19.5㎝, 너비 10.1㎝, 높이 10.2㎝에 순도 80% 이상의 금으로 제작됐다. 연대는 무이스카 문화 후기에 해당하는 1200∼15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뗏목 가운데 인물은 족장으로 추정되며 머리장식과 귀고리. 코걸이를 착용한 채 여러 사제들에 둘러싸여 있다. 무이스카 족의 새 족장 즉위식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해석됐다.


■여객기 좌석을 타고 온 황금유물들

이번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는 이 황금뗏목은 출품되지는 않았다. 

이 유물은 콜롬비아에서도 국보 중 국보로 여겨 해외전시는 언감생심이고 전시실 밖도 벗어난 적이 없다. 

유물출품을 위해 콜롬비아 황금박물관을 다녀온 오세은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황금뗏목은 진열장을 여는 열쇠구멍 조차 없이 완전 밀봉시킨채 전시하고 있었다”고 소개했다. “콜롬비아인들은 이렇게 ‘엘 도라도’ 상징 유물을 끔찍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번 한국전시에 콜롬비아 황금박물관 사상 가장 많은 유물을 출품했다. 이미 영국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등 49개국에서 200회 이상 순회전시된 바 있지만 대부분 100~150점 사이에 그쳤다는 것이다. “2020년으로 예정된 한국 문화재의 콜롬비아 전시 때 많은 유물을 보내달라”는 것이 콜롬비아 황금박물관 측의 조건이었다.   

이번 한국전시에는 스페인 정복기 이전의 황금공예품과 토기, 석기 가운데 322점을 출품했다. 그중 200여 점은 황금유물이고, 나머지가 토기와 석기들이다. 바로 그 황금의 땅 ‘엘 도라도’에서 날아온 유물이기에 공수작전도 남달랐다. 석기나 토기 등은 물론 화물칸을 이용했다. 그러나 황금유물 200여 점은 여객기 좌석을 따로 예약해서 고이 운반해 왔다. 

오세은 학예사는 “전시된 황금유물은 보면 볼수록 ‘엘 도라도’ 본고장의 아우라가 느껴진다”고 밝혔다. ‘엘 도라도’, 즉 무이스카의 황금유물이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는 재물이 아니라 신에게 바쳐 자연과 더불어 사는 영혼의 도구로 여겼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