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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임진왜란 중 항복한 일본인은 1만명이었다

일본인 출신으로 귀화한 인물 가운데는 사야가(沙也加·김충선)이 첫손가락으로 꼽힌다.
사야가는 1592년 4월15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왜군 제2진의 선봉을 맡아 부산포에 상륙했다가 곧바로 부하들과 함께 귀순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모하당 문집>을 보면 단순한 항복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출정 전부터 “의롭지 못한 전쟁에 나섰지만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요순삼대(요순시대와 하상주 3대를 일컬음. 예의가 넘치는 태평성대를 의미함)의 유풍을 사모해서 동방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귀화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사야가는 특히 “난 힘이 없어 항복한 게 아니다”라고 애써 강조한다.

동래부사 순절도에서 보이는 왜군들. 가토 기요마사군의 선봉에 선 일본인 사야가는 부산포에 닿자마자 귀화했다고 한다.

“아직 한번도 싸우지 않았으니 어찌 (조선의) 강압에 못이겨 화(和)를 청한 것이겠느냐”면서 “예의의 나라인 조선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뿐”이라고 힘써 말했다.
“지금 귀화하려는 뜻은 분명합니다.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힘이 모자라서도 아닙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조선 조정은 그런 사야가를 가상하게 여겨 자헌대부(정 2품)를 제수했다. 그러면서 김해 김씨의 성를 내리고, 충성스럽고 착하다는 뜻의 ‘충선(忠善)’이란 이름을 내렸다.

김충선의 본관은 임금이 하사한 성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하기도 하고, 집성촌(대구 달성군 우록리)의 이름을 따 ‘우록 김씨’라고도 한다.
김충선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고, 조총과 화포를 다뤘으며, 화약제조법을 전수했다. 또 이괄의 난(1624년)과 병자호란(1636년) 때도 공을 세웠다. 김충선이 임진왜란·이괄의 난(갑자년)·병자호란 등에서 모두 공을 세웠다고 해서 ‘임갑병 3난의 공신’이라는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1만명에 달한 투항왜병

여기서 한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이가 2~3만명(일본측 자료)에서 10만~40만명(조선측 자료)에 달한다.
그렇다면 일본인은 어떨까. 조선에 귀화했거나, 혹은 항복한 일본인은 사야가 즉 김충선 말고는 없었을까. 있다. 1597년(선조 30년) 5월18일 도원수 권율은 죽도와 부산의 적진에 밀파한 간첩들의 보고를 정리하여 조정에 알린 내용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왜인들의 시름이 큽니다. 항왜(항복한 일본인)의 수가 이미 1만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이 일본의 용병술을 다 털어놓았을테니 심히 걱정된다고 수근거립니다.”
이 기사를 보면 “지금 경상우병사가 거느린 항왜만 해도 1000명에 달한다”고 했다. 또 1595년(선조 28년)의 보고서를 보면 “북쪽 변방에 이주시킨 항왜의 숫자가 5000~6000명에 이른다”고 했다.

1593년 1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킬 때를 그린 평양성전투도. 왜군이 평양성 함구문을 통해 도망가는 모습이다.

<실록>에 등장하는 항왜(귀화 혹은 항복한 일본인)의 수는 42건에 600명에 달한다. 기록된 숫자가 이 정도니 실로 엄청난 수의 왜인이 갖가지 이유로 항복하거나 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선조실록> 등을 살펴보면 심상치않은 이름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즉 사고소우, 연노고, 산여문, 요질기, 훤도목병위, 평구로, 요시지로, 조사랑, 노고여문, 사백구, 세이소…. 딱 봐도 일본인들이다. 또 김귀순(金歸順), 김향의(金向義), 이귀명(李歸命) 등은 귀순하고(귀순), 의를 좇았으며(향의), 천명에 귀의했다(귀명)는 뜻에서 조선 조정이 하사한 이름임이 분명했다.

■'처음엔 다 죽여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왜인들은 왜 투항했을까.
전쟁이 나자마자 귀화의 길을 택한 김충선 같은 특수한 예를 제외하면 초기에는 항왜가 없었다.
왜군이 전쟁발발(4월13일) 20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으로 질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나고 명나라가 참전함에 따라 전쟁이 장기전의 양상을 띄게 된다. 항왜의 기록은 1593년(선조 26년) 5월22일 처음으로 등장한다.
왜적 중에 100여명이 명나라군에게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나라군은 항복하는 왜병들을 다 받아주고 심지어는 상급까지 내렸다. 선조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왜적에게 명나라군이 상까지 내린다니 있을 수 없다”고 무척 못마땅하게 여긴다.

1597년 12월~98년 1월 사이에 벌어진 울산성 전투. 이때 항왜 여여문은 왜인 복장으로 적진에 들어가 형세도를 그려오는 등의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무엇보다 항복한 왜병들이 조선땅을 가로질러 명나라로 압송될 경우 평양 서쪽의 지리를 꿰뚫게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포로들 가운데 다시 일본으로 도망가는 자가 있다면 조선 지리의 허실이 다 드러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선조의 걱정이었다.
따라서 선조는 비변사에 “항복한 왜군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나라 파병군에게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비변사는 “참으시라”고 제지한다.
“전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 왜적들은 만세의 후라도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이고, 저들의 살점을 베어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들은 ‘조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으냐’고 힐난하고 있습니다.”(<선조실록>)

■달라진 항왜 정책

무슨 말인가. 당시 중국군은 “오랑캐가 아침에 쳐들어왔다 해도 저녁에 항복하기만 하면 다 받아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군에게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속 좁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킨 왜적에게 품은 적개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선조 27년) 8월 선조가 내린 명령을 보면 ‘항왜 대책’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울산왜성에 포위된 왜군이 물을 길러 나오는 모습을 그린 기록화. 여여문은 성밑으로 들어가 물을 긷는 이들 왜인을 유인하는 역할도 했다.|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우리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용기백배하여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이는 옳지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 한명이라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처음에 항복한 왜병을 요동으로 보냈던 조선 조정은 차츰 경상·함경·강원·충청·황해의 바닷가와 외딴 섬으로 보냈다. 또 시간이 흐르자 제주나 진도 등지의 수군 및 각 진에 나눠 이주시켰다. 이른바 ‘항왜’의 관리도 골치아팠음을 알리는 기사가 있다.
“1594년(선조 27년) 6월 비변사가 아뢰었다. 투항한 왜적을 경상도 내륙지방에 한 고을당 7~8인 혹은 15~16인씩 두었는데 골치아파답니다. 매우 후하게 대접해서 하루 세 끼를 먹여주는데도 왜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뜻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저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어….”(<선조실록>)

 

■왜 투항했을까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조선조정에 투항했을까.
1594년(선조 27년) 4월17일 접대도감 이덕형의 언급이 의미심장하다.
“왜적들의 한끼 식사가 작은 종지 하나의 밥이 전부인데, 그나마 절반이 껍질째였습니다. 일은 고달프고 배가 고파 항복하려는 자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선조실록>)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왜군이 장기주둔에 따른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1595년(선조 28년) 4월19일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이렇게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 수비)를 괴로워하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선조실록>)    

경남 함양 황석산성. 항왜 사백구는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하여 왜군 4명을 참살했고 결국 성이 함락되자 김해부사 백사림의 가족들을 피신시켰다.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들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다. 즉 1597년(선조 30년) 조선은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다. 왜장 가운데는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포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그 평가가 맞는듯 하다.
“사역이 너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하여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빼어 도망쳐 왔습니다. 우리(5명) 외에도 귀순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계속 유인하면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형세는 자연히 고단해질 것입니다.

이들은 특히 “요즘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른다”고 알렸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즉 “1596년 7월 이순신 진영에 왜인이 5명 항복했는데, 투항이유가 ‘장수가 너무 포악했고, 그 역도 과중했기 때문(將倭性惡 役且煩重)”이라 했다.     

 

■"항왜들이 조선인보다 더 용감하다"

항복한 왜인들을 후대한 조선조정의 ‘항왜 정책’도 한몫 단단히 했다. 조선조정은 투항하는 왜적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다.
처음엔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병들이란 교활하여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을 먹일 식량 또한 여의치 않다”는 의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은 매우 긍정적으로 항왜를 바라보았고, 무엇보다 선조 임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단적인 예로 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승정원에 “왜병의 항복을 적극 유치하라”면서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줘라”는 명을 내린다.

명나라 제독 마귀의 초상. 마귀는 왜군으로 변장하여 왜군과 싸운 항왜 여여문을 죽이고 말았다. 당시 여여문은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었는데, 마귀가 왜군인줄 착각하고 여여문을 죽였다. 그러나 마귀가 공을 가로채려 했는지도 모른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항왜를 유인하는 일은 손해될 게 없다. 다방면으로 환대하고 상을 주어 투항을 유도하라. 그 중에 검술을 할 줄 알거나 병기를 잘 만들거나 하는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 비변사에 일러라.”(<선조실록>)
심지어 선조는 “(항왜 유치를 반대한 신료들에게) 자네들 말처럼 항왜가 적과 내응하여 끌어들였느냐. 어디 말들좀 해보라”고 다그쳤다.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대접해준다고 불평해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들을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 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는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선조실록> 1597년 8월)    
선조는 “항왜처럼 용감하게 싸우는 자 있으면 나와보라”고 질타하고 있다.

 

■항왜의 으뜸은 누구?

그렇다면 선조의 말마따나 ‘제 몸 돌보지 않고 싸운 항왜들’은 과연 누구인가. 
실록(선조실록)에 등장하는 이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바로 여여문(呂汝文)일 것이다.
사실 여여문이 어떤 경로로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595년(선조 28년) 6월19일 <선조실록>을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과인이 항왜(降倭·항복한 왜인)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고 전날에 전교하였는데 실행하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듣건대,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아선 안 된다.”
그런데 훈련도감은 선조의 특명에 따라 “여여문은 집중치료를 통해 회복됐지만 주상의 하교대로 특별히 더 후대하겠다”고 보고했다. 심상치않은 기사임을 알 수 있다. 그저 왜적 가운데 항복한 자일뿐인데 왜 선조임금이 나서서 “후대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도 모자라 “그 자의 병에 차도가 있는지 알아보라”고까지 했을까. 훈련도감은 왜 고분고분 선조의 명을 받들어 여여문의 건강상태까지 다시 체크했을까.

왜장 가토 기요마사의 초장. 포악한 성정으로 악명을 떨친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에서 유독 항왜가 많았다.

 

■"저를 전쟁터로 보내주세요."

여여문이 조선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슨 역할이었을까. <선조실록>에 여여문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즉 훈련도감이 이른바 아동대(兒童隊)를 선발하여 검술을 익히게 하고 사수를 양성하게 하는데, 그 책임자를 여여문에게 맡겼다.
“(여여문이 훈련시킨) 아동대 인원들을 어제 모아놓고 시험을 치렀는데 50여명 중 합격자가 19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음식을 상급으로 주었습니다. 여여문에게 아동대를 전적으로 맡겨….”
이뿐이 아니었다. 조선은 여여문으로부터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울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여여문이 일러준 왜군의 전법은 매우 상세했다.(<선조실록> 1596년 2월17일)
“왜군은 깃대를 진 군사는 양쪽으로 에워싸고 나아가 좌우의 복병과 함께 적의 후미를 포위합니다. 싸우면서 흩어질 때 많은 복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조총과 창검으로 각각 하나의 부대를 삼아 숲속에 흩어져 매복하기를 마치 새와 짐승이 은복하듯 합니다.”
특히 여여문의 말대로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는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에서 입증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이 말려 단 12척의 전선만 남긴채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제가 현장으로 내려가서 산성을 다시 쌓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1597년 1월4일 <선조실록>)

■뼛속까지 조선인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다. 여여문은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 사람들 하는 것을 보면 한갓 계획만 세우고 의논만 많지만 실행은 적습니다. 날짜만 기다린다면….”
‘항왜’ 여여문이 ‘우리 조선’ 운운하면서 계책을 논하고, 조선군의 약점을 설파했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부끄럽다”는 반성이었다.
“그가 말한 대로 시행하라.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기도 하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5월17일 여여문은 적진에 정탐꾼으로 밀파되어 왜군의 정세를 상세히 보고하는 임무를 맡는다.
즉 명나라군 총사령관(경리) 양호가 귀순왜인 여여문을 적진에 보내 초탐했다. 여여문은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갈아입고 적진에 잠입했다. 여여문은 울산, 즉 성황당·도산·태화강 등 3곳의 적병숫자를 파악해서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다.

항왜 여여문의 적정탐지 보고서를 극찬하고 상급을 내린 명나라 경리 양호를 위한 공덕비.|국립진주박물관 제공

■억울한 죽음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은 10냥을 내려주었다. 물론 여여문의 형세도 대로 작전을 짰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다.

여여문은 전투가 벌어지자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이때 명나라 마귀 제독이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았다. 실수였는지, 공을 가로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조실록>은 1598년(선조 31년)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의 4수급을 마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많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여문 말고도 소운대(小云大)라는 항왜 역시 아군을 위해 공을 세웠고, 왜적을 여러 명 유인했다”고 기록했다.
여여문이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년)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항왜 여여문의 공적을 일거한 뒤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는 주청을 올린다.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가상한 일입니다.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의리 지킨 사백구 

여여문만 있는게 아니었다. 1597년(선조 30년) 9월8일자 <선조실록>을 보면 사백구라는 항복한 왜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공적이 눈물겹다.
즉 항왜에 지극히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선조 임금에게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금년(1597년) 3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사백구라는 왜인이 투항했는데, 지성으로 왜병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상급을 내려야 합니다.”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자. 김응서는 항복한 왜인 사백구에게 줄 상급이 없어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보냈다. 마침 일본군이 경상도 함양의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이때 김해부사 백사림도 출전했는데, 사백구 또한 전장에 나섰다. 사백구의 활약은 남달랐다.

조총으로 왜병을 4명이나 쏘아죽였다. 하지만 황석산성은 함락되었고, 살이 쪄서 거동이 불편했던 백사림은 꼼짝없이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이때 사백구가 왜병 흉내를 내어 백사림 가족을 성밖으로 탈출시켰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숨어들어갔다. 백사림은 사백구가 자신의 위치를 왜적에게 알려 공을 세우려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사백구는 의리를 지켰다. 성안으로 들어가 왜병들에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서 쌀 한말과 간장, 무우, 옷가지 등을 구해왔다. 백사림은 사백구가 배신할 까 두려워 몸을 잠시 피해있었다.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발을 구르고 ‘어디 갔느냐’고 불러댔다. 백사림이 겨우 몸을 드러내자 사백구는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가 왔느냐”고 반가워했다. 백사림 가족은 사백구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사백구는 부사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백사림이 밥을 다 먹은 뒤에야 수저를 들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린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무식한 오랑캐 무리의 지성이 사백구와 같으니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상급을 내려 위로하소서. 그리고 사백구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조선 사람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소서.”(<선조실록>)

김충선(사야가)의 <모하당 문집>. 김충선은 동방예의지국인 조선에서 살려고 귀화했다는 뜻을 밝혔다. 

 

■준사, 사고여무, 요질기, 손시로, 연시로…  

여여문과 사백구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서 한몫 단단히 한 준사(俊沙)라는 항왜도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이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는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타고 있었다.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 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지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다. 준사가 지목한 마다시는 왜장인 구루시마 마치후사(來島通總)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597년(선조 30년) 11월 벌어진 정진 전투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이 컸다.
전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즉 일본군 1만명이 전라도 운봉에서 경상도 함양으로 들어와 진격한다는 소식에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반격전에는 명나라군 수십명과 전 현감 이정의 군대, 그리고 항왜들이 합세했다. 아군은 이때 왜군의 포위에 말렸지만 항왜의 맹활약으로 사지를 겨우 탈출했다. 당시 권율 도원수의 장계는 이 전투에서 활약한 항왜들의 이름과 벼슬명, 공적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왜적 70명을 죽였습니다. 검첨지(정3품 무관) 사고여무는 왜적의 목을 두 급, 동지(종 2품) 요질기와 첨지 사야가(훗날 김충선)와 염지는 각 한 급씩을 베었습니다. 항왜 손시로는 탄환을 맞고 중상을 입었으며, 항왜 연시로는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왜기와 창, 칼, 조총 등을 노획했고, 우리나라 포로 100여명을 빼앗았습니다.”
사고여무, 요질기, 사야가, 염지, 손시로, 연시로 등 항왜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투에 임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들에게 첨지와 동지 같은 고위직의 벼슬을 내렸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1597년(선조 30년) 남원성 전투에도 ‘남원 주변의 부녀자는 물론 항왜들까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다 전사했다.(<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9월21일 경상도 상주에서 낙동강으로 들어가던 왜병의 후미를 공격한 조선군 중에는 산록고, 사고소 등 항왜가 15명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1597년(선조 30년) 2월 김응서의 가덕도 싸움과. 1598년(선조 31년) 10월 사천 싸움에서도 항왜들의 활약상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첨지 기오비기와 동지 사기소 등은 1598년 4월 거창의 왜인 17명을 유인한 공로로 두둑한 상급을 받았다.
항왜들은 여여문이 보여줬듯 적정탐지에 결정적인 역할도 했다.

1595년(선조 28년) 항복한 조사랑과 노고여문은 “관백(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군사들을 조선에 출병시키려 하지만 서로 미루고 심지어는 자중지란까지 일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특히 “일본군 중 대마도주가 주둔하고 있는 제포와 죽도·동래 등의 군영이 허술한 것 같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울산왜성전투.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에워쌓다.

■가토 기요마사 암살작전

항왜 가운데는 적장 가토 기요마사의 암살계획을 구체적으로 모의한 사실이 <선조실록>에 등장한다.
1595년(선조 28년) 2월29일 경상좌병사 고언백이 병사들과 무술을 겨루고 있을 때 항왜 주질지와 학사이가 쫓아왔다. 두사람이 은밀하게 고한 내용은 놀라운 것이었다.
“우린 본국(일본)을 등졌으니 우린 이미 조선시람입니다. 조선인으로 밥도 먹고 옷도 입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적의 괴수(가토 기요마사)를 베어야 합니다.”
두 사람의 암살계획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청정(가토)은 다른 장수와 만날 때 거느리는 군사가 10여인에 불과합니다. 매번 단기필마로 와서 술을 마시고 돌아갑니다. 사냥할 때도 마찬가집니다. 이때 일본인 중 내응하고 있는 자와 살해를 도모한다면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입니다. 사또(고언백)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고언백이 이들의 말을 믿지 않자 더욱 치밀한 계획까지 일러주었다.
“사또가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항복한 구질기의 종형(고로비)가 청정(가토)의 가장 가까운 군관으로 있습니다. 고로비 또한 조선 진영으로 귀순하려 합니다. 그 사람과 내응하면 성사될 겁니다.”
하지만 이 가토 암살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명나라와 왜와의 강화 계획이 틀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고언백은 왜군진영의 내응자인 고로비에게 “강화교섭을 위해 명나라 사신이 내려올 것이니 (가토의 암살계획은) 없었던 일로 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그러나 고로비는 “일본이 명나라와 강화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크게 화를 냈다. 고언백은 혹여 고로비가 경거망동하여 가토 기요마사 암살계획을 실행할까봐 전전긍긍 했다. 화해분위기를 망칠까봐 두려워 한 것이다.(<선조실록> 1595년 3월24일)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

조선에 귀화하거나 항복한 일본인들은 전투와 정탐 외에도 기술전수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선은 항왜들에게 총검을 주조하고 염초를 굽는 방법을 배웠다. 조총의 사격술과 검술도 익혔다. “항복한 왜인을 죽여봐야 무슨 이익이냐. 염초 굽는 법을 배우는 편이 낫다”는 선조의 언급(1593년)이 이를 뒷받침한다. 선조는 “왜적이라 하여 그 기술을 싫어하고 익히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적국의 기술이 곧 우리의 기술이다”라 강조했다.(1594년 7월) 이렇게 적극적인 ‘항왜 유치 정책’이 주효했던 것일까.
1597년(선조 30년) 1월 “김응서 휘화의 항왜 중 조총 기술자가 많으니 상경시켜 배우자”는 건의에 선조는 자신있게 밝힌다.
“이제 조선에도 조총을 잘 만드는 자가 많다. 상경시킬 필요가 없다.”
항왜 가운데는 김충선 뿐 아니라 김귀순, 김향의, 이귀명처럼 조선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이들도 있었다. 여여문이나 사백구 처럼 그나마 실록에 이름자를 남긴 이들은 다행이다. 그러나 1만명에 달한다는 항왜들의 자취는 찾을 수 없다. 뒤늦게 나마 그들을 위한 진혼곡을 불러본다. 경향신문 논설위원 

(이 기사는 ‘한문종의 <조선전기 향화·수직 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을 주로 참고했습니다.)

 

<참고자료>
한문종, ‘임진왜란시의 항왜장 김충선과 모하당문집’, <한일관계사연구> 제24호, 한일관계사학회, 2006
         <조선전시 향화·수직 왜인 연구>, 국학자료원, 2001 
         ‘임진란 시기 항왜의 투항 배경과 역할’, <인문과학연구> 제36권 36호, 강원대 인문과학연구소, 2013
제장명, ‘임진왜란 시기 항왜의 유치와 활용’, <역사와 세계> 제32권, 효원사학회, 2007
이장희, ‘임란시 투항왜병에 대하여’, <한국사연구> 제6권 6호, 한국사학회, 19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