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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조선 외교관 피살사건의 전모

 일본을 방문한 조선사절단 가운데 ‘계미사행단’이 있다.
 계미년인 1763년(영조 39년)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사절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계미사행단은 사절단장(정사)인 조엄(1719~1777)이 대마도에 들러 고구마 종자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고구마는 대표적인 구황작물이다. 좋지않은 기상조건에서도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들의 배를 채울 신기한 작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조엄이 이끈 계미사행의 으뜸인 공이 고구마 최초도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계미사행단의 일본방문은 우여곡절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으니…. 무엇보다 사절단의 일원이었던 조선외교관이 일본인에게 피살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외교관 살인사건의 내막을 한번 풀어보자. 

 1763년 에도 막부를 방문한 계미사행단의 행렬도. 조선통신사의 규모는 5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사신단이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한다.

■공식방문 중 피살된 외교관
 사행단이 일본방문을 마치고 귀국길 오사카에 머물던 1764년 4월7일 새벽, 사행단의 숙소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이 놀라 달려갔다. 사절단의 일원인 최천종이 목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최천종은 손으로 목을 매만지며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비교적 분명하게 사건 당시를 전했다.
 “보고서를 쓰고 막 잠들려 하는데….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서 놀라 깨보니 어떤 시람이 가슴을 타고 앉아 칼날로 목을 찔렀습니다. 그래서 급히 소리치며 서둘러 칼날을 뽑고 잡으려 했는데…. 그 자가 창을 밀치고 허둥지둥 달아났는데…. 불빛에 비친 그 자는 분명 왜인이었습다.”
 최천종의 숨막히는 증언을 들은 사람들이 주변을 살펴보았다. 흉기가 보였다. 짧은 자루에 창날이 달려있고 마치 창포검(칼 혹은 창으로 사용하는 도검) 같았다. 날 밑에 ‘어영(魚永)’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고, 날자루와 날집은 모두 칠하지 않은 나무로 만들어졌다. 일본칼이 분명했다. 칼은 목편 숨통 근처를 찔렀다. 치명상이었다. 
 “난 이번 길에 왜인과 다퉜거나 원망을 맺을 꼬투리가 없는데, 왜인이 왜 날 죽이려 했는지 알 수가 없소이다. 내가 나랏일로 죽거나 사신의 직무를 다하다가 죽는다면 한이 없겠지만 공연히 왜인에게 찔려 죽게 되니 너무나 원통합니다.”
 최천종은 결국 고비를 넘기지 못한채 아침 무렵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최천종은 “약을 먹을 때 술을 타게 되면 기(氣)가 쉽게 돈다”는 주변의 권유에도 “조선은 지금 금주령을 내렸는데, 어찌 내가 술을 마시겠냐”고 거절했단다.
 아무튼 생각할수록 중대한 사건이었다. 외교사절이 공식방문 중에 피살됐으니 외교분쟁으로 비화할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래조도>. 계미사행단의 환영열기를 그렸다.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이 핑계 저 핑계 대는 일본
 그러나 일본은 처음부터 사건 해결에 미온적이었다. 검시에 재검시까지 약속해놓고 이 핑계 저핑계 대면서 차일피일했다. 장례를 치러야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일본인의 칼에 맞은 것이 분명하니 저들의 재검을 기다릴 필요없이 염습(시체를 씻긴 다음, 옷을 입히고 묶는 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교활한 왜인들이 ‘염습을 했으니 재검할 필요가 없다’는 등의 핑계를 댈 수도 있지 않은가.”(조엄의 <해사일기>)
 조엄은 “움직일 수 없는 살인인데, 이 핑계 저핑계 대고 있으니 아무리 무식한 오랑캐라 해도 너무 하지 않느냐”고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부사 이인배는 “너무 분해서 등창이 나려 한다”고 했고, 종사관 김상익은 “일본인들은 뱀처럼 악독한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일본측은 “우리가 해결할테니 일정대로 귀국하라”고 권유했다. 일본측은 더욱이 사건현장에서 범죄 때 사용한 칼날과 사건 당시 입직한 왜인들의 명단을 적어가면서 조선측 인사들의 출입을 엄중히 막았다.  
 “최천종 피살 이후 대마도 사람의 짓이 분명한데, 모른체 하고 떠날 것을 권유했다. 조선-일본 교류 역사에 전례없는 일이다. 그러나 정사인 조엄은 정색하고 소리높여 쐐기를 박았다. ‘내 뜻이 결정됐으니 동요하지 마라. 오사카에서 한 발도 움직일 수 없다.”(<해사일기>)
 오사카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사절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무슨 변고가 생길 지 몰라 밤을 지세웠고, 바람소리에 장막이라도 움직이면 자객이 침입한게 아니냐고 부들부들 떨었다. 성대중 같은 이는 오사카에 머물던 한달동안 “너무 두려워 병풍으로 사방을 에워싸고 그 안에서 잠을 자면서, 밥 때가 돼서야 잠깐 나오는 일을 반복했다”고 한다.(성대중의 <청성잡기>)

 

 ■단독범행으로 서둘러 마무리한 사건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사건발생 열흘만인 4월17일, 범인 스즈키 덴죠(鈴木傳藏)가 검거됐다.
 범행 직후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범인은 온천 놀이에 따라간다는 핑계를 대고 길을 지나다가 나졸의 눈에 띄어 붙잡혔다고 한다.
 그런데 덴죠는 곤장을 한 대 치기도 전에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최천종이 거울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저를 의심했습니다. 최천종은 ‘일본인들은 도둑질을 잘 한다’고 욕했고, 저는 ‘되레 조선인이 도둑질을 할 한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러자 최천종이 벌칵 화를 내면서 말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앙심을 품고 그만….”
 일본 측은 스즈키 덴죠의 자백에 따라 스즈키의 단독범행으로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 자백이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더 이상의 조사도 벌이지 않았다. 
 어쨌든 스즈키는 ‘참수형’의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조선측은 사형집행 현장을 참관하겠다고 주장했고, 일본측은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조선측으로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조선측은 즉각 서신을 보냈다.
 “스즈키 덴죠는 양국간 외교문제가 걸려있는 죄인입니다. 반드시 양국 관계자가 집행장면을 참관하는 게 맞습니다. 참관하지 못하면 우리(조선사절)가 어찌 귀국해서 보고할 수 있겠소.”     
 조선측은 이런 천신만고의 과정 끝에 5월2일 집행된 ‘참수형’ 장면을 참관할 수 있었다. 사실 사건의 정확한 진상은 아무도 모른다. 일본 정부가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범인 스즈키가 자백한대로 최천종이 말다툼을 벌인 스즈키를 말채찍으로 때렸다고 치자.
 그런 소동이 벌어졌는데 아무도 몰랐을까. 조엄은 귀국 후 영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그같은 의구심을 드러내고 있다.  

계미사행단이 귀국 직전 한달간이나 머물러야 했던 오사카. 일본인에 의해 조선 외교관이 피살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릉송백의 치욕을 잊지마라"
 이 계미사행은 외교관 살인사건이라는 미증유의 외교분쟁 말고도 갖가지 좋지않은 이야깃거리를 양산했다.
 사실 영조 임금은 일본으로 떠나는 사행단을 직접 불러 신신당부했다.
 “여러분, ‘이릉송백(二陵松柏)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릉송백’이라는 글귀를 외우는 순간 영조는 목이 메고 눈물을 머금은 듯 했다. 그러면서 친히 ‘호왕호래(好往好來)’, 즉 ‘잘 다녀오라’는 네 글자를 직접 써서 사신들에게 나눠주었다.(조엄의 <해사일기>)
 영조는 또, 사신들에게 “그대들의 시 짓는 능력을 보고 싶으니 차례로 제출하라”고 주문했다.(원중거의 <승사록>)
 영조는 잊지말라고 한 ‘이릉송백’의 고사는 무엇인가.
 ‘이릉’이란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해 도굴된 선릉(성종)과 정릉(중종)을 뜻한다. 이 도굴 때문에 두 왕의 유골이 훼손되었다.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임진왜란 직후 사절로 일본을 방문한 윤안성(1542~1615)은 회한에 가득찬 시를 지었다고 한다,
 “금일의 교린을 나는 모르겠구나. 어디 한강에 가서 강가에서 보라. 이릉의 송백은 가지가 자라지 않는 것을….(今日交隣我不知 試到漢江江上望 二陵松柏不生)”
 영조는 곧 ‘150년 전의 치욕’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이었다. 영조는 또 시(詩)를 통해 조선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에게 한껏 과시하라고 주문했다.
 “‘정주(程朱·정자와 주자의 성리학)의 존재를 모르는 오랑캐(일본인)들에게 충신독경(忠信篤敬)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사신단의 서기로 참여한 원중거가 다음과 같은 각오를 다졌다.
 “예의의 나라인 조선 사신인만큼 관복을 단정하게 하고 행동과 위엄있는 법칙을 잃지 않겠습니다. ‘정주’가 아니면 말하지 않고, 경서(經書)가 아니면 인용하지 않겠습니다.”(<승사록>)

 

 ■18세기 한류의 현장
 사행단은 임금의 신신당부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1년이나 이어진 사행 내내 결벽증에 걸렸다고 할만큼 경건했고, 깨끗했다. 통신사 일행은 일본 현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절단이 큰 마을에 도착하면 인산인해를 이뤘다. 시를 가져와 필담을 나누려는 자, 사절단을 구경하러 온 자 등 수백명이 몰려들었다.”
 18세기 한류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조선사신들의 글을 받기 위해 ‘새치기’하는 자들도 나왔다. 사절단은 그 자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부끄러워하는 덕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덕으로 나가는 기본입니다.”
 일본인들이 건네는 선물도 일절 받지 않았다. 원중거의 회고를 보면 “(하도 선물을 받지않으니) 몇몇 일본인이 벼루 두 개씩 선물하면서 ‘이는 손님을 위한 정이니 받아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러나 원중거는 또다기 정중하게 거절했다.
 “군자는 사람을 덕으로 아낍니다. 우리가 돌아갈 때 짐이 깨끗하면 여러분들의 마음 또한 깨끗하지 않겠습니까.’”(<승사록>)

 

 ■굴욕당한 조선사절단
 그러나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조선을 깔보려는 속셈을 노골화 했기 때문이다. 사행단이 두 개의 판자 문짝인 상근관(箱根關)을 넘을 때 말에서 내려 걷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옛 관례보다 한 문씩 더 물러나 말에서 내리게 한 것이었다. 더구나 사행단이 내린 땅은 진창이었다. 신발이 젖고 옷이 더러워졌다. 수행원들이 사절단의 담뱃대를 들어주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두고 볼 수 없었다. 사행단은 ‘전명연(傳命宴)’에서 폭발하고 만다. 사행단이 막부의 관백(關白)’, 즉 ‘막부의 최고지도자에게 무릎을 꿇고 4번이나 절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일본의 각 태수들도 관백을 맞을 때 두 번 절하는데 유독 조선 통신사만 4번이나 절을 올린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에는 조선 국왕에게 황제폐하로 불렀던 자들이었는데…. 남옥은 당시의 치욕을 부고 온몸을 부들부들 떤다.(<일관기>)
 “이른바 위제(僞帝·가짜 황제)라는 자가 있는 데도 머리를 자르고 문신을 한 추장(관백)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치욕스러움을 어찌 말하랴.”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본
 변함없는 일본의 역사왜곡도 사행단을 열받게 했다. 
 “사행단을 방문한 시방언(柴邦彦)이라는 자가 180구로 된 오언고시와 율시 절구를 바쳤다. 그런데 그가 인용한 두 나라의 역사가 ‘극히 놀랍고도 망령된 것’이어서 보낸 그대로 봉해서 돌려주었다.”(남옥의 <일관기>, 원중거의 <승사록>)
 얼마나 ‘놀랍고 망령된’ 역사왜곡이었던지 시문의 문답행사와 필담이 중단되는 심각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조선측은 아예 시방언이라는 자가 보낸 시를 다시 밀봉해서 되돌려주었다니…. 무슨 내용인가. 일본은 당시 중국 진시황 때의 방사 서불(徐市)의 일본도래설과, 임나일본부설의 기초가 된 진구(신공) 황후의 삼한정벌 등을 사실(史實)로 왜곡하고 있었다. 조선으로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역사왜곡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골백번 세월이 바뀐다 해도 상대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일본과 일본인이 아닌가.
 계미사행 당시 제술관으로 수행한 남옥은 일본의 무례를 경험하고는 “얼마나 원통한지 곧장 머리카락이 갓을 뚫고 나오려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요즘의 일본인과 일본의 외교를 보더라도 250년 전 남옥의 심정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경향신문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