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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의 역사

조선의 '요지경' 병역면제 수법

 “근자에 병역에 해당된 자들 가운데 선현의 자손이라고 거짓말을 고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안(安)씨는 모두 안유(安裕·안향)의 후손이라 하고, 한(韓)씨는 모두 기자(箕子)의 후손이라 합니다.”
 1682년(숙종 8년) 지사 김석주가 “큰 일 났다”면서 “상당수가 병역기피를 위해 거짓으로 선현의 후손을 칭하고 있다”고 상언했다.
 무슨 말인가. 조선시대 때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하는 나이는 16~60세였다. 이들은 1년에 2~6개월씩 교대하는 방식으로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병역면제의 헤택을 받는 ‘신의 자식들’이 있었다.  

 완문(完文). 1830년 충훈부가 신우태에게 발급한 문서. 공신 신숙주의 후손인 신우태의 잡역을 면제하는 내용이다.|국립중앙박물관

■3학사의 후손에게 병역면제혜택을 줘라
 예컨대 1681년, 안유(안향)의 먼 후손이 병역면제의 혜택을 달라고 상소문을 올렸다.
 이에 병조가 “문제의 후손이라는 자는 그 집안의 대를 잇는 자가 아니니 병역혜택을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을 읽은 숙종 임금은 “유학자들을 숭상하고 사도(斯道), 즉 유학의 도리를 소중히 여긴다는 취지로 이 안유의 후손에게 병역면제 혜택을 줘라”고 특별명령을 내린다. 숙종은 주자학을 도입한 안유를 국가유공자로 여겨 그 후손에게 대대로 병역면제 혜택을 준 것이다. 비단 안유의 후손 뿐이 아니었다.
 숙종은 같은 해(1681년) 병자호란 때(1636~37) 척화를 주장하다가 죽임을 당한 오달제·윤집·홍익한 등 3학사의 후손들에게도 병역면제의 지시를 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가 ‘척화를 주장한 자들을 인질로 보내라’ 해서 삼학사를 부득이 보냈다. 인조 임금은 그들이 반드시 죽을 줄 알았기에 술을 내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반드시 그대들의 부모와 처자는 과인이 거둬두겠다’고 하셨다.”
 말하자면 3학사의 후손들을 거두라는 것은 인조의 유시였다는 것. 그러나 “이후 3학사 집안의 자제들이 모두 요절하고 가문이 몰락해서 빈궁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려운 상황에 빠진 3학사의 후손들에게 병역면제와 같은 갖가지 혜택을 주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숙종은 이외에도 1644년 오랑캐(청나라)의 명나라 정벌에 어쩔 수 없이 참전했지만 명나라군을 향해 포를 쏘지 않았던 이사룡에게도 같은 혜택을 주었다. 그의 공로를 보라.
 “이사룡은 포에 탄환을 넣지 않은 채 헛방을 쏘면서 ‘비록 우리가 죽는다 해도 어찌 중국인들에게 포를 쏘겠느냐’고 했다. 결국 그러다 청나라군에게 발각돼 피살됐다.”(<숙종실록>)

1860(철종 11) 예조에서 공재동 등에게 발급한 내용. 공재동 등 공씨들은 공자의 후손이기 때문에 잡역을 면제하라는 내용이다.

 ■기자, 안향, 문익점, 경순왕, 왕건의 후손까지…
 그러나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혜택의 폭이 커지면서 너도나도 유공자 가문의 후예임을 내세우는 등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난 것 같다.
 앞서 인용한 김석주의 상언이 바로 그 부작용이 만만치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숙종은 결국 “기자의 후손 가운데는 선우씨만, 그리고 안유의 후손 가운데는 직접 제사를 받들고 무덤을 지키는 자들만 병역에서 제외시키라”는 명을 내리기에 이른다. 하지만 병역기피의 유혹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1710년(숙종 36년) 기사를 보면 상황이 더 나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승지 이제가 올린 상언이다.
 “기자(箕子)와 문성공 안유는 물론 문익점의 자손까지 대대로 병역을 면제한 규정을 빙자해서 그 후손들이 갖가지 계책으로 부역을 면하려 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라 경순왕의 자손은 병조의 하급관리와 짜고 임금이 내린 문서를 입수, 지방 사령들을 속여 병역을 면제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기자는 누구인가. 유학의 성인으로 알려진 기자는 은(상)의 왕족이었다. 나라가 망하자 주나라 무왕에게 치도의 9가지 도리인 홍범구주를 전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조선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세웠는데, 한(韓)씨와 선우(鮮于)씨가 그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손들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서 필사적으로 병역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목화씨를 몰래 들여온 문익점의 후손은 물론 경순왕의 자손까지도 “우리도 유공자”라며 손을 들고 나섰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숙종은 그저 ‘단단히 타일러 경계를 삼도록 하라’는 명만 내릴 뿐이었다.
 고려 임금의 혈통인 왕씨들도 혜택을 받았다. 1660년(현종 1년) 왕흡 등 왕씨 12명이 “원래 고려 왕조의 후손인 왕씨들에게는 병역 등 부역의 의무는 없었다”고 진언했다.
 “저희 왕씨들이 고려 태조를 비롯 7명의 고려왕을 모시는 숭의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조종조부터 저희는 병역의 의무란 없었사온데 세월이 흘러 법령이 해이해지고….”
 그러자 현종 임금은 “예전의 관례대로 왕씨의 병역은 면제시키는게 좋을 것 같다”고 허락해주었다.

 

 ■귀화인은 3대까지
 그렇다면 귀화자들의 병역은 어떻게 해결됐을까. 
 성종은 1487년 귀화자 병역혜택의 범위를 다음과 같이 정한다.
 “귀화한 왜인, 야인(두만강 이북에 살던 종족)의 경우 증손자부터 병역을 감당하게 하라.”
 귀화해서 곧바로 정착해서 살아갈 방도가 없으니 최소한 3대(손자대)까지는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쪽으로 정리된 것이다.
 1493년(성종 24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
 개성에 사는 명귀석이 상소를 올렸는데, 상소의 골자가 흥미로웠다.
 즉 명귀석의 고조 할아버지인 명옥진은 귀화인이었다. 그런데 고조할아버지의 신분은 놀라웠다. 원나라 말 대하국(大夏國·1362~1371)의 황제(재위 1362~1366)를 자칭했던 인물이었으니까.
 대하국(쓰촨성·四川省을 기반으로 선 소국)은 1371년 명나라에 의해 멸망됐다. 명나라는 대하국의 2대 황제인 명승(재위 1366~1371)과 그의 어머니인 팽씨를 포로로 잡은 뒤 “조선에서 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명 황제는 조선에 “명씨의 후손을 군인(軍)으로도 만들지 말고, 백성(民)으로도 만들지 말라”는 조칙을 내린다. 그 때가 고려 공민왕 때인 1372년의 일이었다. 왕조가 바뀌었지만 명나라를 섬겼던 조선도 이 조칙에 따라 명씨의 후손들을 병역에서 제외시켰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21년 만인 1493년 어쩐 일인지 명씨의 후손인 명귀석이 병역에 포함돼 꼼짝없이 군대에 끌려가게 생긴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다”며 상소를 올린 것이다.
 “명황제의 조칙에 의하면 우리 집안은 조선의 군인도, 백성도 아니니 병역을 감당할 이유가 없사옵니다.”.
 이 명귀석의 상소를 둘러싸고 조정은 작은 논쟁을 벌였다. 그 결과 명귀석이 이겼다. 명나라 황제의 칙서가 있다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대하국 황제의 후예는?
 그로부터 162년이 지난 1655년(효종 6년), 또 문제가 생긴다. 명씨의 후손들이 또 한 번 상소문을 올린 것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로 급히 피란을 갔다가 그만 명나라 황제의 조칙문서와 명씨의 시조인 명옥진(대하 황제)의 초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어 꼼짝없이 병역을 치르게 됐습니다. 종전처럼 면제시켜 주소서.”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조정은 논의 끝에 “인정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우선 명씨 일가가 바로 293년 전 명 태조 주원장의 명령으로 조선에 의탁한 대하국 황제의 후손임은 인정됐다. 하지만 병역만큼은 더는 면제해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명씨가 그 간 조선에 무슨 공덕을 쌓았는가. 다만 명 황제의 조칙에 따라 병역을 정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제 귀화한지 300년이나 지났으니…. 백성들과 똑같이 정역을 정하라.”       
 명씨로서는 통탄할 노릇이다. 잃어버릴 게 따로 있지, 대대로 간직해온 가보(병역면제 서류)를 잃어버린 대가가 너무 컸던 것이다. 

1404(태종 4) 개국·정사·좌명공신 등 3공신들이 모여 태종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작성한 회맹문이다. 공신의 후예도 5~9대까지 군부의 핵심이자 꽃보직이라 할 수 있는 충의위에 속하도록 혜택을 주었다. |국립중앙박물관
■결국 불평등이 문제다
 면제의 폭은 넓었다.
 1610년(광해군 2년)에는 자기 아버지와 새어머니는 물론 선조비(의인왕후)와 선조 임금의 상에도 3~6년간씩 모두 15년간이나 상복을 입은 익산사람 정팽수에게 병역면제의 특전을 내렸다.
 대표적인 충효의 모범사례라는 것이다.
 이밖에도 지체장애인과 현직 관료, 그리고 학생(성균관 유생, 사학 유생, 향교생도)과 2품 이상의 전직 관료 등은 병역 면제 혜택을 받았다.
 또한 7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한 명, 90세 이상의 부모를 모신 경우는 아들 모두를 면제시키는 등의 규정도 있었다. 국가 유공자의 자손은 3대까지 병역면제의 혜택을 받았다. 도첩(승려자격증)을 받은 스님(僧)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류의 병역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피의 방법을 찾느라 혈안이 됐다.
 “백성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병역의 의무’을 모면하려 합니다. 그러니 10호 가운데 겨우 1~2명 만이 병역을 담당하고 나머지는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빠졌습니다.”
 1636년 8월 20일 대사간 윤황이 병역의 고통을 고한 내용이다.
 그는 그러면서 “백성들이 마치 구덩이 속에 파묻혀 죽는 것처럼 여긴다”고 한탄한다.
 “심지어 군대에 가지 않으려고 중이 되는 양민들이 10명 중 7~8명에 이릅니다.”
 그의 이어지는 상소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
 “전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만일 이 도적을 막아내지 못하면 나라는 망하고 말 것이다. 경대부(고위관리)는 물론 백성(사서인·士庶人)들도 가문을 지키기 못하고 몸을 보전할 수 없다. 똑같이 죽고 망할 뿐이다.’라고….”
 그런데 윤황의 상소 이후 딱 4개월 만인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한다. 윤황의 피를 토하는 상소는 결국 병란의 예고탄이 된 셈이다.
 이쯤해서 1659년(효종 10년) 병조참지 유계와. 1798년(정조 22년) 비변사의 상소는 입을 맞춘듯 공자의 쓴소리를 인용한다.
 “지금 놀기만 하고 게으른 자가 10명 가운데 8~9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간신히 남아 있는 선량한 백성에게만 유독 병역을 부담시키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평등하면 가난하지 않고, 화합하면 부족함을 걱정하지 않으며 편안하면 나라가 위태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지금 병역의 불평등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유계의 상소)
 “시골에서 빈둥거리며 병역을 회피하는 자들이 갖가지 속임수를 쓰고 있습니다. 공자님은 ‘불평등한 것이 걱정일 뿐 적은 것을 걱정해서는 안된다.’고 했습니다.”(비변사의 상소) (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