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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래자 思來者

축구는 왜 ‘안녕! 단일팀’을 선언했는가

남북한 축구 대결사에서 명장면 하나가 있다. 1978년 12월20일 태국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공동우승을 차지한 남북한 주장인 김호곤과 김종민 선수가 1위 시상대에서 어깨동무한 사건이다.

그라운드에서는 으르렁댔지만 시상대에서는 한민족임을 과시한 가슴뭉클한 장면으로 기억됐다. 하지만 그 장면은 ‘연출’이었다.

비좁은 1위 시상대 위에 오르려고 남북 선수들이 서로 밀치는 촌극을 빚었고, 급기야 김호곤 주장이 시상대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겨우 자리를 다잡은 김호곤 선수가 “남의 눈도 있으니 잘해보자”고 속삭이고, 이를 김광민 선수가 받아들이면서 ‘어깨동무 사진’(사진)을 연출할 수 있었다.

이는 남북한 축구가 벌인 치열한 신경전의 단편에 불과하다. 1960년대엔 북한이 한국을 압도했다.

예컨대 북한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을 앞두고 치른 각종 경기에서 30승1패를 거두자 한국은 공포심을 느꼈다.

결국 한국은 ‘북한이 무서워’ 월드컵 지역예선 참가를 포기했다. 아닌게아니라 북한은 월드컵 8강에 오르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기세등등한 북한은 월드컵 직후인 1966년 8월3일 “북남이 함께 스태미너를 과시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단일팀 구성을 제안했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도 한심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한과의 대결을 피하려고 1·2차 예선 리그에서 두차례나 ‘고의’로 의심되는 패배를 당했다. 그러나 북한은 4위에 머물고 말았다.

그렇게 공포의 대상은 아니었는데 지레 겁먹고 괜한 생난리를 떤 것이었다. 1983년 한국에서 프로축구가 개막되고 국제경험에서 앞서 나가자 남북한 축구 수준은 오히려 역전되었다.

그래도 축구는 일제강점기부터 경·평 정기전의 경험이 있고, 남북한에서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였으므로 짜릿한 대결의 장이자 감동적인 화합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에서 단체전 우승을 차지한 탁구의 바통을 이어받아 그해 포르투갈 세계청소년 대회 8강 진출의 위업을 쌓은 것도 바로 축구 단일팀이었다.

그런데 최근 대한축구협회는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남북단일팀을 구성할 의향이 있느냐’는 대한체육회의 질의에 ‘난색’을 표명했다. 단일팀 역사의 상징종목이 ‘변심’한 이유가 뭘까.

우선 남북간 전력차이가 크다는 점을 꼽는다. 현재의 전력으로도 우승후보로 꼽히는데, 굳이 북한 선수들이 합류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우승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병역특혜의 파이가 줄어든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 없다. 청소년대회는 물론 심지어 월드컵에도 없는 ‘병역특례의 티켓’이 아시안게임(우승)이나 올림픽(동메달 이상)에 걸려있다.

무엇보다 시일이 너무 촉박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다른 종목과 달리 아시안게임 참가 축구선수들은 절대다수가 프로팀에 소속되어 있다. 국제축구연맹 규정상 국제대회 개막 2주전에야 대표팀에 합류할 수 있다. 제대로 된 합숙훈련도 할 수 없도 조직력을 다질 시간도 절대 부족하다.

단일팀의 맏형격인 축구의 ‘변심 속내’를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물론 ‘남북 화합의 대의가 먼저지 병역혜택이 그렇게도 중요하냐’고 윽박지를 수 있다. 하지만 평창 동계올림픽 단일팀 논란에서 봤듯이 개인의 삶 역시 중요한 가치로 존중되는 시대가 아닌가. 완연한 남북한 화해무드가 조성되었다.

굳이 보여주기식 이벤트로 단일팀을 구성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원하는 종목으로만 구성해도 단일팀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경향신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