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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 캐스트-흔적의 역사

크리스마스 선물, 7000년전 고래사냥의 시원이 된 반구대 암각화

“저기 무슨 그림일까.” 지금으로부터 48년전인 1970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24일, 문명대 교수가 이끄는 동국대 박물관 조사단이 울산 울주군 언양읍 일대의 불교유적을 조사하고 있었다. 조사단은 특히 천전리와 대곡리 일대의 계곡에서 원효대사가 양지의 도움을 받아 <초장관심론>과 <안신사심론> 등을 저술했다는 반고사터를 찾고 있었다. 반고사터로 추정되는 반구대 마을에는 절터는 물론 정몽주의 유배를 기념하는 사당터도 있었다. 1965년 건설된 사연댐 때문에 마을 대부분은 물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강가의 절벽엔 조선의 선비들이 시회(詩會)를 열고 그 기념으로 새긴 한시와, ‘나 여기 다녀갔소’를 알린 사람의 낙서, 그리고 학과 같은 그림들이 남아있었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존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입체화한 반구대 암각화 실측도. 모두 353점의  그림이 확인됐다.

■흑판 같은 수직절벽에 새겨진 그림

그러나 조사단은 답사의 목적이었던 절터를 찾지못해 실망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을 어른들을 찾아 탐문조사를 계속해나갔다.

그때 한학에도 나름 일가견이 있던 최경환이라는 마을노인이 희망을 던져주었다.

“저 물길을 따라 (1㎞ 쯤) 올라가면 탑거리라는 곳이 있었지. 그곳에 탑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지 아마….”

조사단은 최노인을 앞세워 계곡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탑거리 바로 못미치는 곳에서 최경환 노인은 바위를 겨냥했다.

“저기 바위에도 학같은 그림이 있는데 무슨 그림인지 도통 알 수 없어요.”

최노인이 지목한 곳은 네모 반듯한 흑판 같은 수직절벽이었다. 절벽은 강가에 바로 붙어있었다. 조사단은 원래 목적인 탑거리를 조사하고 난 뒤 다시 문제의 잘벽 아래로 내려와 암벽을 살펴보았다. 바위를 뜯어보던 일행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구대 암각화의 인물도. 성기를 노출한 인물상(왼쪽)과 마치 감전된 듯, 접신한 듯  사지를 좍 편 인물상이 보인다.

■화랑들의 명소에 새겨진 비련의 사연

대체 이 그림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끼로 뒤덮힌 바위면에는 마름모꼴과 소용돌이 무늬가 보였다. 

또한 그 위로 여기저기 글씨가 새겨져 있었는데 유독 ‘랑(郞)’자가 많아 보였다. 문첨랑, 영랑, 법민랑…. 화랑 이름이 분명했다. 법민랑이 누구인가. 삼국을 통일한 김법민, 즉 문무왕의 화랑시절 이름이 아닌가. 이곳은 화랑들이 즐겨 찾던 명소이자 수련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두 문장이 흥미로웠다.

“을사년(525년)에 갈문왕이 놀러 와서 처음으로 골짜기를 보았다. 오래된 골짜기인데도 이름이 없었다. 좋은 돌을 얻어 글을 짓고 계곡을 ‘서석곡’이라 하고 글자를 새기게 했다. 함께 온 벗은 누이인, 아름다운 덕을 지닌 밝고 신묘한 ‘어사추여랑님’이다.”

“정사년(537년)에 갈문왕이 죽었다. 그 비 지소부인이 갈문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여 기미년 7월3일, 갈문왕과 누이가 함께 보았던 서석을 보러 계곡에 왔다. 무즉지태왕비 부걸지비(법흥왕비)와 사부지왕자(갈문왕의 아들)가 함께 왔다.”

고래를 잡는 듯한 형상의 그림. BBC는 2004년 고래잡이 역사의 시원을 암구대 암각화에서 찾았다.  |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 대원사, 2004에서

명문 내용은 예사롭지 않다. 등장인물을 살펴보면 갈문왕은 법흥왕의 동생이다. 그런데 누이인 어사추여랑과 연인관계였다. 둘은 537년 천전리 계곡을 찾아 사랑을 약속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갈문왕은 어사추여랑과 백년가약을 맺지 못한다. 갈문왕은 형님의 딸(법흥왕의 딸)이자 조카인 지소부인과 혼인한다. 그런데 갈문왕은 왕위를 잇지못한채 537년 죽고 만다. 갈문왕의 부인은 죽은 남편을 기리며 생전에 남편이 어사추여랑과 천전리 계곡을 찾아와 새겨놓은 명문을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

신라시대 명문이 눈에 도드라지기는 했지만 암벽에 새겨진 선사시대 기하학 문양과 각종 동물상 등 또한 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기하학 문양은 마름모꼴무늬·굽은무늬·둥근무늬·우렁무늬·십자무늬·삼각무늬 등이 홑이나 겹으로, 혹은 상·하·좌·우 연속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기하학적 문양은 대개 직선보다 곡선이 많고 상징성을 띠는 것이 많다. 

새겨진 동물 가운데는 사슴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종 동물과 물고기·새 등이 있었다. 특히 상부에는 도안화한 얼굴의 인물과 태양을 나타낸 듯한 둥근 문양의 좌우로 4마리의 사슴이 뛰어가는 모습을 새겨놓았다. 곡식이삭이나 풀뿌리·꽃봉오리를 나타낸 한 문양도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고래그림이 가장 많다. 하늘로 치솟는 고래 떼들이 보이고, 고래잡이 배가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형상처럼 보인다

상부 왼편 끝에 보이는 인두수신상(人頭獸身像)도 있는데, 이 동물상은 부드러운 얼굴을 한 사람의 머리와 사슴을 닮은 몸체가 결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선사인이 믿고 숭배하던 신수(神獸)의 하나로 생각된다. 윗부분 왼편에는 상어를 나타낸 듯 꼿꼿한 지느러미가 여러 개 있는 물고기 2마리와 주둥이와 비늘까지 표현된 물고기 1마리, 붕어 모양의 물고기 1마리가 각기 새겨져 있다.

이 천전지 각석은 가장 먼저 발견된 한국의 암각화라는 점에서 그 학술적인 가치가 대단했다. 천전리 각석은 국보 147호로 지정됐다. 

크리스마스에 발견된 한국의 첫번째 선사 암각화를 두고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산타크로스가 전해준 선물’이라 입을 모았다.

마치 하늘 위로 둥실 떠가는 듯한 배의 형상.|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에서. 


■크리스마스 날의 낭보

그러나 이것은 서곡에 불과했다.

천전리 암각화를 발견한 지 꼭 1년이 되던, 이번에는 크리스마스날이던 1971년 12월25일, 문명대 교수는 다시 천전리를 찾았다.

이번에는 연세대박물관 연구원이던 이융조 교수와 고려대 김정배 교수(사학과)가 동행했다. 마침 극심한 겨울가뭄으로 사연댐의 수위가 5~6m 정도 내려가 있었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낮아진 댐 수면 덕택에 이전에 조사할 수 없었던 하류 유역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사람은 지난해 조사 때 마을 사람들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반구대 아래족에 호랑이가 새겨진 절벽이 있다”는 말을 확인하고 싶었다. 세사람은 배를 빌려 타고 하류로 천천히 내려가면서 주변의 암벽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반구대 마을에서 약 800m 가량 내려왔을 때였다. 절벽이 이어진 오른쪽에 마치 대패로 깎은 듯 반반한 바위면이 눈에 들어왔다. 세사람은 누가 누구랄 것도 없이 “바로 저거야!”를 외쳤다. 맞았다. 배가 바위면 가까이 다가가자 각종 그림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발가벗고 성기를 앞으로 세운 남자가 춤을 추고 있고, 그 옆으로 떼지어 올라가는 고래와 거북, 호랑이 등의 동물이 보였다. 크리스마스에 발견됐다고 해서 ‘크리스마스의 기적’ 혹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이라 했다. 이때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됐다. 선사시대 국보 암각화가 1년 사이 우연히도 크리스마스 이브(천전리)와 크리스마스(대곡리 반구대)에 발견된 셈이다.

성기를 내놓은채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상.|임세권의 <한국의 암각화>에서

■과장된 성기를 내놓은 남자는 누구? 

반구대 암각화는 7000년전 신석기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알려져왔다. 울산대 반구대암각화유적보전연구소의 실측보고서에 따르면 새겨진 그림은 모두 353점에 이른다. 그 중 성기를 노출한 사냥꾼과 어부, 제사장 등 인물상이 16점이다.

암각화의 제일 위쪽에는 두 팔을 들어올리고 다리를 약간 굽혀 춤추는 모습을 한 인물이 보인다. 그런데 이 인물의 성기는 크게 과장되게 표현됐다. 이 인물 뿐 아니라 바위에 새겨진 인물 대부분은 춤추는 모습에 성기를 과장한 경우가 많다. 

왼쪽 맨 아래에는 팔과 다리를 수평으로 벌린 인물상이 있다. 이 인물은 두 팔과 다리가 거의 일직선으로 되어있고, 5개씩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과장해서 표현했다. 전문가들은 “인간과 신을 연결해주는 특별한 능력을 갖는 제사장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 손·발가락을 쫙 편 인물상은 마치 벼락을 맞은 듯 보이는데, 신들린 상태, 즉 접신의 경지에 접어든 샤먼(무당) 같기도 하다. 긴 성기를 앞세우고 선 채로 긴 나팔을 불고 있는 인물도 인상적이다. 사람의 얼굴만을 묘사한 그림이 두 개나 된다. 하나는 얼굴의 윤곽선이 역이등변 삼각형과 흡사하고 눈이나 코, 입 등도 거의 직선으로 표현됐다. 특히 이마 부분이 잘려있다. 가면을 표현한 것 같다. 혹자는 이를 두고 ‘탈’의 원형이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그림 중에는 호랑이 14점을 포함한 육지동물이 105점이 보인다. 

대곡리 암각화에서 보이는 가면형상의 얼굴상. 

■임신한 고래, 작살맞은 고래, 고래잡이 배

그러나 반구대 암각화의 ‘알파와 오메가’는 바로 48점에 달하는 고래그림이다. 고래 그림 중에는 새끼를 밴 것 같은 고래가 보인다. 혹자는 새끼를 업고 있는 고래라고 하고, 혹자는 고래에 기생하는 물고기라고 한다. 전체 길이가 80㎝에 달하는 고래도 있다. 이 고래는 흰긴 수염고래로 추정된다. 암각화를 그리는 집단에서도 이런 큰 고래는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작살을 맞은 불행한 고래도 선명하게 보인다. 배 그림도 4곳이나 보인다. 가운데 암각화 군의 맨 위쪽에 있는 배가 가장 선명하며 길이가 19㎝에 이른다.

이 배 그림은 모든 그림을 아래에 두고 하늘에 오르듯 경쾌한 모습으로 둥실 떠 있다. 중심 바위 면에 두 척의 배가 더 있다. 고래 떼 사이에 한 척이 있고, 그보다 가늘에 처리된 또다른 배가 보인다. 이 배의 길이는 18.5㎝이며, 배에 탄 인원만 20명 가량 된다. 전문가들 은 고래잡이 배나 제사를 행하는 배, 혹은 영혼을 싣고 하늘로 가는 샤머니즘의 상징물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한다.

중심 바위 서쪽 면에 떨어진 배는 확실히 고래잡이 배로 보인다. 배 밑에 고래의 꼬리가 묘사되어 있어 물 속의 고래를 공격하는 고래잡이배로 해석된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잡이 모습은 전세계 학계에 충격파를 던졌다. 

2004년 BBC 인터넷판은 “반구대 암각화엔 배 위에서 작살과 낚싯줄을 사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서 “이것이야말로 고래사냥의 시원이라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 고래그림을 그린 사미족이 고래잡이의 시원이라는 기존 학설을 뒤엎었던 것이다. 

대곡리 암각화 실측도. 임신한 고래와 작살 맞은 고래 형상이 그려져있다.

   

■물고문에 녹아내리고 떨어지는 진흙바위

그러나 47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홀연히 출현한 반구대 암각화는 위기에 빠져있다.

1965년 사연댐이 건설되면서 암각화가 침수와 노출을 반복하면서 암각화가 훼손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기 때 사연댐 최대높이는 66,4m에 육박하는 63.2m에 달한다. 이때는 반구대 암각화 가장 위부분(해발 55.2m)까지 물에 잠긴다. 사연댐의 상시 담수로 말미암은 수위도 60m에 이른다. 반구대 암각화의 80% 가량은 해마다 3~4개월 동안의 노출과 8~9개월 동안의 수몰을 반복해왔다. 최근에는 물에 잠기는 회수가 뜸해졌다지만 2014년과 2016년에도 한 달 이상씩 물에 잠겼다. 

암각화가 새겨진 바위는 진흙이 굳어져 변성화한 이암(泥岩)으로 구성돼있다. 기본적으로 진흙 성분이다보니 물에 취약하다. 반복적으로 물에 젖으면 암석이 녹게되고 급격한 풍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암벽표면이 계속적으로 탈락되었고, 암면의 전체에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표면이 닳아서 암각의 깊이가 얕아지고 있다. 무문별한 탁본도 훼손을 가속시켰다. 

관광객 증가에 따라 주변환경도 급속히 훼손 오염됐다. 그 때문에 암각화는 급격히 망가지고 있다. 새겨진 그림들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건너편 전망대의 망원경으로도 고래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곡천을 직접 건너가 눈앞에서 봐도 마찬가지다. 

옛 탁본이나 사진을 들이대고 비교해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다. 반구대 암각화를 반복되는 물고문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현재 60m인 사연댐의 수위를 52m 가량으로 낮춰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울산 시민들은 식수공급에 타격을 입는다면서 대안으로 청도 운문댐의 사용을 주장했다. 하지만 운문댐을 식수로 사용해온 대구시가 ‘무슨 소리냐’고 반대했다. 대구시는 낙동강취수원을 상류지역인 구미산업단지 위쪽으로 옮기는 것을 전제로 운문댐의 울산시 분담 사용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 방안은 구미시의 반대에 직면했다. 취수원이 구미 쪽으로 옮길 경우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되고, 그렇게 되면 토지운용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이렇게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제대로 된 회생방안을 찾지 못해왔다.

반구대 암각화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천전리에서 확인된 암각화(국보 제147호) 부분. 세로 3m, 가로 10m 바위에 신석기~신라 말기까지의 문양과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장석호의  <천전리 각석 시측조사보고서> 2003에서 수록된 도면. 

■7000년의 선물, 50년만에 망가뜨리나

최근들어 이낙연 국무총리 주도로 반구대 암각화 살리기 방안이 새롭게 나왔다. 해당 지자체와 관계기관이 모여 첫번째로 도출한 원칙은 반구대 암각화와 그 주변에 인위적인 구조물의 설치없이 사연댐의 수위를 낮춰 보존하겠다는 것과, 그를 위해 청도 운문댐의 물을 울산에 공급하는 방안을 세운 것이다. 무엇보다 유적 보존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수위조절안을 채택했다는 것도 평가해줄만하다. 그러나 두번째인 운문댐의 울산 분담 공급 방안이 해결되려면 각 지자체의 이해관계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갈 길이 먼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의 훼손은 전형적인 인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7000년 이상 잘 보존된 선사인들의 체취가 불과 50여 년 만에 망가뜨리는 못난 후손이 될 것인가. 경향신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