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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평강공주 '통곡의 바위' 아시나요.

 “이것 좀 보십시요.”
 아차산 구리 둘레길과 온달샘으로 가던 길, 김민수 문화유산 해설사가 이상스럽게 생긴 바위를 가리켰다.
 두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의 두터운 바위….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나신(裸身)의 여성이 엎드린채 뭔가를 부여잡고 있는 또 다른 바위….
 “저 바위는 화살을 맞고 죽은 온달 장군의 ‘주먹바위’라 합니다. 이 바위는 남편의 전사소식을 들은 평강공주가 급한 나머지 옷도 입지 않은채 달려와 온달장군의 투구를 부여잡고 엎드린채 울부짖는 ‘통곡바위’라 합니다.”(김민수씨)

나신의 평강공주가 온달장군의 투구를 잡고 울었다는 통곡바위.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어우러진 곳이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한 온달장군의 시신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박민규 기자

 


 두 사람의 혼인은 고구려를 떠들썩거리게 할 정도로 유명했으니 더 언급할 필요는 없겠다. 우여곡절 끝에 가난한 온달 장군을 찾아온 평강 공주는 남편의 내조에 힘쓴다. 궁에서 가져온 금팔찌를 팔아 밭과 집과 노비, 소와 말과 그릇을 사서 살림을 차렸다. 고구려의 대표장군으로 거듭난 온달은 후주의 무제가 쳐들어오자 선봉장이 되어 무찔렀다. 평강왕은 그제서야 온달을 ‘자랑스런 사위’로 대우했다. 온달 장군은 영양왕 즉위년 신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선봉을 자청한다.(590년)
 “이미 신라가 한강 이북의 땅을 떼어가(553년) 군·현으로 삼았으니 백성들이 통분하고 있습니다. 저에게 군사를 내주시면 반드시 수복시키겠나이다.”
 그러나 운이 좋지 않았다. 아차성에서 신라군과 접전을 벌였으나 그만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말았다. 한을 품으며 죽어간 온달 장군의 관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평강공주가 달려와 남편의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죽고 사는 것이 정해졌으니 아아! 돌아갑시다.”(<삼국사기> ‘온달전’)
 그제서야 온달 장군의 관이 움직였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의 애틋한 사랑이 이곳 아차산에까지 그 전설의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사회에디터